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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 나체(裸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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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3월
채만식
1
연분홍 裸體[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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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도 없고 독도 없는 이야기다. 다만 사람으로서 그럴 듯한 이야기다.
3
때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9월 초승, 장소는 경성시내 소격동(昭格洞), 인물은 주인공으로 당시에 ××고등보통학교 5년급(年級)에 다니는권○달 군과 같은 방에 있는 P군 그리고 권군의 아버지, 이웃집 주인, 그리고 모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에 학적을 두었다는 연분홍 나체미인 ─ 이가 중심인물이다.
 
 
4
P군은 어젯밤에 친구의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새벽 다섯시에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5
아직 문을 열어놓지 아니하였을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대문이 훤하게 열리고 방에는 응당 잠을 자고 있을 권군이 보이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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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자지 아니하였으면 방안이 그렇지 아니할 터인데 모기장이 쳐져 있고 덮었다가 걷어친 홑이불이 있고 더구나 권군의 교복과 모자가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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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변소에나 갔나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하숙 주인이 무슨 일에 놀랐는지 얼굴에 황당한 빛을 띠고 안으로부터 나오며 “어데 갔다 인제 오시요? 야단났소.”하고 장히 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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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은 제육감이 움직였던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울적하여진다.
 
9
“네? 야단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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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가 잽혀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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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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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잽혀갔어…… 종로경찰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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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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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옆엣집에 뛰어들어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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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P군의 머리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것은 밤마다 연분홍 모기장 속에서 옷을 활씬 벗고 잠을 자는 이웃집 처녀의 연분홍 나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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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은 급한 마음에 사건의 내용을 주인에게 물어보았으나 주인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고 다만 이웃집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나고 야단이 일어나더니 들창으로 넘어다보니까 ○달군이 순사에게 꼭꼭 묶이어 가더라는 것 밖에는 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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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쯤으로야 P군의 예상만도 못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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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은 바로 뛰어나가서 안 일어나는 우편국원을 두드려 깨워 권군의 아버지에게로 지급전보를 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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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미수 ㅡ 이것은 학생의 신분으로 용이치 아니한 범죄이며 따라서 P군 독단으로 조처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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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의 강간미수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라고 하면, 혈기 방장한 청춘이요 병신이나 골샌님이 아닌 이상 첩경 면치 못하고 덫에 걸리게 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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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러한 경로로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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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세시에 권군은 오줌이 마려워서 잠이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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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머리를 휘어잡고 눈을 비비면서 툇마루에 나서 변소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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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 다시 올라서면서 ‘오늘도?’ 하고 생각한 권군은 아랫집(아랫집은 권군이 있는 방에서 동이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바싹 다붙어 있기 때문에 툇마루에 서면 그 집의 방안이 내려다보였다)의 열어젖힌 들창문으로 해서 그 방안을 굽어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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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망사 모기장 속에서 은은한 전등불을 받아 어렴풋이 연분홍으로 질린 오동보동한 나체 처녀가 곤히 잠을 자는(P군과 권군의 소위) 연분홍 나체가 역시 권군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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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있게 처진 두 어깨에 도독히 달린 매초롬한 팔, 오리알같이 불룩 나온 두 젖가슴을 고운 곡선으로 그려 내려가다가 갑자기 확 퍼진 엉덩이, 흐뭇하게 굵은 두 너벅다리, 차츰 가늘어지다가 동그란 무릎 고패를 살폿 넘어 통통히 알이 밴 종아리, 조그만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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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2학기 개학을 앞둔 14일 동안에 벌써 사오 차(次)나 보는 광경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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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인가는 잠을 자는 P군을 일부러 잡아일으켜 가지고 둘이서 구경하며 ‘연분홍 나체’라는 이름까지 지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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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연분홍 나체를 바라보고만 서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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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무한한 유혹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꾀었다. 아니 청춘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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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실낱 하나도 걸치지 아니한 여(女)의 나체, 게다가 은근한 분홍의 불빛, 숨을 쉴 때마다 볼록볼록하는 토실토실한 조그마한 가슴, 옴질옴질하는 아랫배 그리고…… 마침 빈대가 물었던지 어찌했던지 나체의 주인공은 뻗었던 팔을 싹 잡아당겨 이마 위에 걸치고 입맛을 얌얌하였다. 혹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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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은 ‘에라’하는 생각으로 두 집 사이에 있는 판장 울타리에 손을 대고 올라섰다. 두 집 사이의 간격은 겨우 두 자 밖에는 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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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장에 올라앉으며 바로 들창문으로 해서 사풋 방안에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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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고 권군은 잠깐 숨을 돌리다가 가만히 모기장을 떠들고 연분홍 나체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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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옆에서 보니까 저 멀리 볼 때보다도 더구나 고운 살결이었었다. 흰떡으로 빚어서 만들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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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은 팔을 들어 나체의 가슴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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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안으니까 나체는 지남철에 끌리는 쇠처럼 담쏙 끌어안기면서 눈을 반짝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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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두 눈에는 처음에 의심, 다음에 놀라움, 그 다음에 공포 ─ 이 순서로 (그 시간은 다만 백분지 일 초 동안에) 변화가 생기며 으쓱 몸을 사리더니 그이 입에서는 “어머니 ─”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떨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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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의 놀라움도 그 이상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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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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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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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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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아버지 ─”
 
44
처녀는 벌떡 일어나 임시로 모기장 자락을 걷어 위선 급한 곳만 가리면서 네댓 번째 아버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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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도 따라 일어섰으나 달아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어 망지소조 하는데 저편으로부터 중노인의 놀라운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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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왜 그러느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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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쿵쿵거리는 발자취 소리가 들리며 아버지의 정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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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왜 그래? 응?” 하며 주인이 들어오다가 권군을 보자마자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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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웬 놈이냐? 응? 이놈 웬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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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내가 자는데……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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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죽일 놈…… 이놈…… 이애 ××아, 네 가서 순사 데려오느라…… 네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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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은 꼼짝 못하고 잡힌 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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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서 권군은 순사에게 묶이어 종로경찰서로 갔다. 주인은 차마 자기 딸이 발가벗고 자는데 어찌어찌하려고 권이 뛰어들어왔다고는 못하고 도적질을 하러 들어왔다고 순사에게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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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적의 어의(語義)를 어떻게 썼는지 그것은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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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때 권군의 아버지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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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에게 사실 전말을 모두 듣고 놀라며 없는 아들을 공연히 나무라기는 하였으나 어찌하자는 도리는 나서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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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권부(權父)는 침입당한 집을 찾아가서 무수히 사과를 한 후에 다시 교섭을 하여 놓여 나오도록 하여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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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 원체 그 애들이 성가시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집이 얕은 탓으로 울안이 죄 내려뵈지요. 심지어 여편네 속옷 빨아 널은 것까지 내려다 보고 흉을 봅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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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 줄이야 압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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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구 그저 된 소리 안된 소리 귀에 담을 수 없는 소리를 마구 대구 지껄이구…… 원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더니 필경……엣 창피해!”
 
61
“글쎄 그러신 줄을 압니다. 그러나 노형께서도 자손을 귀히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물론 그놈이 죽을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러나 부모 된 마음에 자식을 생각허기는 마치 일반이 아니겠읍니까?”
 
62
피침입자측에서는 어떻게 생각을 돌리었던지 권부의 간청을 승낙하였다.
 
63
권부는 그 집 주인이 종로서로 교섭을 가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64
P군은 궁금증이 나서 문앞에 지켜섰다가 하회(下回)를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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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원, 가서 말을 해보겠다고 했지만……여의하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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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서 가서 말한다면 무사하겠지요…… 하여간 미수(未遂)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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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그런 놈이 있단 말인가……? 정 참다 못 참으면 흔해 심마찌라두 가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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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은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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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권군은 다행히 백방으로 놓여 나왔다.
 
70
“도적질을 하러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아무것도 훔치지 아니하였고, 또 학생의 신분으로 장래가 염려되니까 놓아주게 하라” 고 피해자 측에서 제의한 교섭이 매우 유력하였던 듯하다.
 
71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마지막 또 한가지 우스운 일이 있다.
 
72
권부는 아들을 시켜 그 이웃집 주인에게 잘못하였다는 사과와, 놓여 나오게 하여 주어서 고맙다는 치하를 하러 보냈다.
 
73
권군이 찾아가서 절을 넓죽하게 하니까 그 집 주인은 이마에 내천(川)자를 쓰고 잘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였다.
 
74
그러나 권군은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 죄를 지었는데두 백방의 교섭까지 해주셔서……” 하고 나오지 아니하는 말을 겨우 하였다.
 
75
그 주인은 다시 화증이 났던지 “가거라 이녀석…… 보기 싫다 가 ─” 하고 냉갈령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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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乾坤[별건곤] 1930년 3월호>
【원문】연분홍 나체(裸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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