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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보씨(興甫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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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0
채만식
1939년 10월 1일 최재서(崔載瑞)를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여 인문사에서 발행된 『인문평론』일제시대의 문학잡지의 수록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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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 甫 氏[흥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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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짝 손에다는 오리쓰메를 한 개, 다른 한편짝 손에다는 두 홉들이 정종을 한 병…… 이렇게 이야기 허두를 내고 보면 첩경 중산모자에, 깃에는 가화를 꽂은 모닝 혹은 프록코트에 기름진 얼굴이 불콰아하여 입에는 이쑤시개를 물고 방금 어떤 공식 축하연으로부터 돌아오고 계신, 모모한 공직자 영감이나 또는 동네의 유지명망가씨 한 분을 소개하는 줄로 선뜻 짐작을 하기가 십상이겠지만, 실상인즉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저 ××심상소학교의 소사(小使) 현서방의 거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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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이 아침에 ‘후로꼬또’를 입고 나오시길래 아마 어디 예식에 참례를 하시나보다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점심 후에 잠깐 나가셨다가 이내 돌아오시면서 그 길에 받아 가지고 오신 오리쓰메와 정종을, 술은 본디 일 모금도 못하시는 어른이라 마개도 뽑지 않은 채 벤또는 반찬서껀 서너 저깔이나 뜨시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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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리 오부소. 핸소방우 자바라 좃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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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면서 내주신 그 오리쓰메와 그 정종이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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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같이 하얗고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일등 정백미의, 알 굵고 보드라운 밥도 밥이려니와 반찬이라기보다도 아이들이 군입으로 좋아하게 생긴 고소한 반찬들이 귀물스러워 현서방은 우선 먼저 딸년 순동이가 생각이 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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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학교에서 나가 석양 무렵에 집의 일각대문 안을 헴 밭은기침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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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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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 들어설라치면 기침 소리 부르는 소리보다 먼저 발자죽 소리가 아버지의 돌아옴을 알아듣고서 벌써 그 알량스런 다리로 잘름잘름 대문간까지 뛰어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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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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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매달리는 그 병신 딸년, 불쌍하고도 사랑스런 딸년 순동이던 것입니다. 여느 제 시간에 돌아가는 것도 그대도록 반가와하거든 황차 때 아닌 시각에 손에는 맛있고 귀한 음식을 들고 짐짓 아무 소리도 없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글쎄 얼마나 반가와하며 얼마나 좋아할 것인고! 얼마나 맛나게 먹을 것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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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일이 다행하느라고 우편국에다가 급히 갖다 부치라는 공문 하나가 생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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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육거리와 재동이 얼마 상거가 아니니, 우편국에 가서 공문을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집엘 들르면 될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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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어버이의 마음이 자식에게 고르지 않은 법이 없어, 아들놈 순석이도 뒤미처 생각이 났고, 또 은근히는(노상 그 가마보꼬를 좋아하는) 마누라도 생각이 났고 하기는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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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딸년 순동이가 아니고 단지 아들놈 순석이나 마누라만을 위하자는 노릇이라면, 더우기 오늘이 스무하루 월급이겠다 천천히 이따가 월급봉투나 받아가지고 향용 퇴근(!)하는 저녁나절에 돌아갔을 것이지 구태라 이렇게 바쁜 틈을 내어가면서까지 길품을 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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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어버이의 마음이 자식에게 고르다는 것도 결국 정도의 차이는 면하기 어려운 것인 것 같습니다. 한날 한시에 한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손가락도 길고 짧고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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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지 그리하여 남이 먹다가 물린 음식이니 가난은 하지만 끔찍한 정성과 사랑이 담겨진 한 납대기의 벤또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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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 오리쓰메를 한편짝 손에다가 들고 다른 한편짝 손에다가는 정종병을 들고 시방 현서방은 분주히 운현궁 앞 넓은 길을 재동 네거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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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도 스무하루니 바람은 훈훈함을 지나쳐 검정 고꾸라로 된 양복(!)이 저으기 더울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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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이름조차 오월의 하늘…… 한껏 맑고 푸르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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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문앞 뜰과 담장 안으로는 잔디야 솔포기야 버들이야. 모두 새삼스러운 듯 눈이 부시게 연푸른 새잎들이 피어나서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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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걸음이요 또 매일같이 오면서 가면서 보아난 풍물이지만, 무심한 중에도 마음이 끌려 하도 좋게 푸르른 고궁의 초록(初綠)에로 현서방은 어느덧 눈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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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보내고 마침 여름을 맞이하려는 첫 녹음은 여승 이십 안팎의 젊음과 같이도 싱싱하여 보고 지나는 현서방은 오랜 옛날에 언뜻 지나치고 만 그 젊은 시절이 아렴풋이 가슴 속에서 소생이 되는 성싶기도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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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을 그대로 위로 올려 떠, 티끌 없이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은 하마 내가 시방 젊던 그날이거니 하고, 흰머리가 희끗희끗 사십이 훨씬 넘은 나를 잠깐 잊어버릴 만큼 더 한층 가슴이 설레는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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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라고 현서방은 그만 어느 겨를에 이 좋은 일기를 가져다 저편이 대단히 폐로와할 만큼 유린을 하고 말았읍니다. 사십 몇 년을 햇볕과 비바람에 찌들어 기미가 끼고 거무튀튀 그은 바탕인데 조는 듯 뜬둥만둥 답답한 두 눈, 위아랫 노랑수염도 내시가 아닌 표적으로 마지못해 시늉 뿐이고, 입도 그다지 푸짐하진 못하고 코도 그저 오랜 주린 빈대 형용이어서 말하자면 섭섭한 편이고, 이렇듯 각 방면으로 미흡함을 홀로 제라서 대신하여 단연코 분풀이를 한 듯이 위대하게(즉 不具스럽게) 큰 두개의 귀, 그리고 속일 수 없는 흰머리…… 이러한 창연히 고색 질린 기상을 해가지고 오월의 하늘과 초록을 우러러 가슴에 청춘을 느끼다니, 그들로 앉아서 당하기에는 자못 무시를 당할 불평이 없지 못할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하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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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가루가 희뜩번득 시꺼먼 고꾸라 양복은 그나마 호주머니에다간 무엇을 그다지도 넣어쌓는지 불룩한 것이 요새날 쇠×알처럼 추욱 쳐졌고, 설마 그 무게에 몸이 앞으로 숙었을 리는 없겠지만 허리는 꾸부정 다리도 꾸부정 국방색 운동화 뒤축을 지축지축 끌면서 걸어가고 있는 태도태려니와, 그 발뒤꿈치에서는 부연 먼지가 쌍으로 완연히 연막을 치는 비행기 이상인데야 오월의 맑은 햇살은 그만 여지없이 유린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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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발 뒤축을 끄는 걸음걸이는 현서방 스스로도 매우 좋지 못한 버릇인 줄은 잘 알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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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신발이 다른 데는 멀쩡하면서 뒤축이 몽땅몽땅 해어지니 경제적으로도 여간한 손이 아니요, 또 내가 생각을 해도 그렇듯 뒤축을 찍찍 끌면서 걷는 걸음 맵시란 그다지 점잖다 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사람이 체모에 차마 안된 일이요, 길을 지나다가는 가끔 남한테 “저런 정칠 녀석!” 하고 욕을 먹되, 괜히 먼지를 퍼 일군 허물이 있으니 할말이 없고…… 뭐 이루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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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는단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남은커녕 그의 아낙 강씨부인부터가 남편을 공박을 하는 마당일 것 같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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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고 신발 뒤축, 지축지축 끌믄서 걸음 걷는 꼬락서니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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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으례껏 시작을 해가지고 이내 눈 코 입 수염 귀 허리 다리 배꼽 등속에까지 주욱 퍼져나가곤 한다는데야 그만하면 다 알 조가 아니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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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그것이 좋지 못한 버릇임을 충분히 알고 있는 만큼 늘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역시 타고난 팔자 소간인지는 몰라도) 철이 든 이후로 무릇 삼십 년의 부단한 명심과 노력이로되 종시 교정은 되어지질 않고 주의를 해야 주의하는 그때뿐이지 딴 생각을 하면서 걷다간 어찌어찌 정신이 들어서 볼라치면 이건 영락없이 또 제 버릇을 고스란히 갖다 내고 있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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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다를까 시방도 현서방의 두 개의 발 뒤축에서는 길바닥을 끄는 족족(오래 가물던 끝이라 마침 좋게 바싹 말랐겠다, 바람은 솔솔 불어 오겠다) 소담스런 먼지가 쌍으로 풀씬풀씬 피어올라, 일대 기물다운 장관을 이루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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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별안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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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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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바퀴에서 꽥 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퍼뜩 돌려다보니, 곳은 바야흐로 재동파출소의 정통 앞인데 김순사가 싱그레 웃으면서 내다보고 앉았는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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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헤…… 난 또 누구시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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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오리쓰메 든 손이 모자를 벗으려고 올라가다가 못하고, 이어 다시 정종병을 든 손이 올라가다가 그 역시 못하고, 그러곤 그대로 꾸벅 고개와 허리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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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헙쇼? 김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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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놈의 걸음걸이가 그 따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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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헤…… 건데 이 저녁때면 해가 들어서 차차 어려우시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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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말이 서로 숭허물이 없을 만큼 현서방과 김순사는 사이가 무관합니다. 원, 한편이 소학교의 일개 고쓰까이요 한 편은 적어도 판임관 대우의 조선총독부 도순사(朝鮮總督府 道巡査)인 경찰관인데 지체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숭허물이 없는 건 무엇이며 무관하다께 될 말이냐고 흑이 분개를 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변 지체는 지체요 상하의 구별이야 있다지만 그래도 인정은 일반일 경우가 더러는 없는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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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종시 말이 괘씸하다면 어디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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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김순사와는 집이 문앞 실골목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문이 마주 난 이웃간이어서 재작년 봄 김순사가 이사를 해오자 다리야 병신일값에 같은 다섯 살 박이 동갑이라 현서방의 딸 순동이가 우선 김순사의 딸 정자와 사귀어 동무가 되었고, 그것이 반 년이 되어 양편집 아낙끼리 교제가 생겼고, 다시 그 연줄로 현서방과 김순사가 면분이 두터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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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지나간(금년) 삼월에는 김순사의 그 딸 정자를 현서방네 학교인 ××심상소학교에 입학을 시키는데 일곱 살 여덟 살짜리 애기들한테도 소위 입학난이라고 하는 얄궂은 수난이 있어, 정자도 아마 어려운 것을 현서방이 크게 서둘렀었고, 그 덕에 무사히 입학이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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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로 말하면 제 외사춘의 딸인데, 그러니 다른 아이들은 열 명을 제쳐놓고라도 이 애 하나만은 그여코 뽑히게 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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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교장이나 수석 훈도는 물론이요, 마침 얼굴 아는 계원이 있어서 부청까지 쫓아다니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외사촌은 아니라도 이웃사촌이라니 아무려나 사촌은 사촌이겠다, 한즉 현서방도 노상 거짓 부렁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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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러나 거짓부렁을 했건 무얼 했건 사랑하는 딸이(걱정 끝에) 무사히 입학이 되었으니 김순사네는 어쨌든 현서방이 고맙고, 고마우니 더욱 전보다 친근해질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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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한 고쓰까이와 어떤 순사가 서로 좀 숭허물이 없고(물론 지체는 지체대로 다른 채) 무관히 지낸다고 하기로서니 과히 망발은 아닐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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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구려? 오늘……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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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사는 현서방의 손에 든 정종병을 건너다보던 눈에 뜻있이 눈웃음을 드리우고 한마디 근지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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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깍 침을 삼킨대서야 너무 근천스런 말이고, 김순사도 술을 즐겨하는 호한의 한 사람인지라 가령 현서방의 그 가난한 술병 그놈에다가 차마 눈총을 들이지야 않았겠지만 아무려나 술을 본즉 주객다운 흥이 일지 않을 수가 없고, 인 흥은 표정이 되어 얼굴에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고 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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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둔하다고는 하지만 일찌기 소시적에는 적지 않이 주도(酒道)에 종사를 한 적이 있는만큼 그 방면의 인정의 기미쯤 못 알아챌 현서방은 아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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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입쇼! 저야 먹기나 허나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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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술병을 슬쩍 쳐들어 보이면서 눈을 찌긋 입은 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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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김주삽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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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은근히 충동이를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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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나!…… 괜히 근무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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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사는 말로는 다 이렇게 엄숙해도, 같이서 히죽히죽 웃음은 유혹이 반가운 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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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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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쓰메야 어디 격인가!…… 저놈에다가 척 고마리기를 한 근 사서 들구가설랑 마누라더러 바글바글 지지래서 놓구서 한잔 츠윽 석양 배루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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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연방 운치를 돕습니다. 물론 현서방더러 그렇게 하라는 한 사람의 ‘꾼’으로서의 취미로운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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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그러나 감히 생심도 못할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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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 이거 가지구 올라가서 댁에 두어두께시니 네? 김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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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여! 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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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그러심다!…… 이따가 잠깐 저녁진지 잡수러 올라오세서 네? 김주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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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내가 고긴 한 근 사지…… 사서 저녁 먹을 때 지져놓구 부르께시니 건너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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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현서방에게 있어서 대단히 흥그로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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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오온 번연히 안 먹는 줄 아시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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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나? 못 먹지!…… 먹군 싶어두 딱장때 마누라가 무서서…… 그러지 말구 이따가 부르거든 건너와아! 내 다아 마누라한테 발명은 해주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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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헤 헤…… 전 머…… 그리구 아무턴지 이건 시방 댁으루 올려다둡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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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홉들이의 정종 한 병이 실상 현서방은 처치가 매우 곤란했던 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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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이 일낀 생각하시구서(또 현서방이 술을 노오 먹진 않아도 좋아하는 줄은 아시고서) 고마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비록 조그마한 술 한 병이라곤 하지만 매우 소중하다 안할 수가 없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일변 술이라고 하면 김순사의 농담마따나 마누라 강씨부인이 무서워서 차마 먹진 못할망정 보기만 해도 가지기만 해도 반갑고 재미있고 흥겹고 하여 좋습니다. 해서 이놈을 시방 오리쓰메로 더불어 아무려나 소중스럽게 집으로 가지고 가기는 가던 것이나 그러나 딱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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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술이란 명색 것이면 우선 꼴만 보여도 술 그것에 대한 반감으로, 남편이 저걸 아무때고 먹을 테여니 하는 불안으로, 그래 시방치에다가 미래치까지 미리서 끌어당겨다가는(두 모금을 한꺼번에) 벼락을 한바탕 내떨고라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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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냄새도 못 맡고 단지 귀하고 고마이 생긴 술이라서, 술이란 이름 하나가 흥그로와서, 그놈을 집으로 가지고 간 죄로다가 그 엄한 벌역을 치르다니 일변 생각을 해야 할 문제이었읍니다. 그러니 그러면 또 교장선생님께서 생각을 하시고 주신, 그러고 무엇이 되었던 음식은 음식인걸, 함부로 거기 어디 개천에다가 집어 내던져버리든지 한대서야 교장선생님께 대한 도리도 아니요, 더우기나 하느님이 무서울 노릇이라 그것만은 차마 못할 짓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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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즉 그저 관무사 민무사(官無事民無事)하자면 누구 조금 안면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서 생색을 내는 체 인심을 쓰는 채 선뜻 내주는 게 가장 상책일 판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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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참이라 마침 김순사를 만나(실상 이야기의 진행중에는 깜박 잊었고 다만 김순사를 존경하는 정으로) 그와 같이 처치를 하고 나서 뒤미처 생각을 하니, 과연 일은 두루두루 썩 잘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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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그리하여 한시름을 놓은 안심과 겸하여 이웃의 도리로써 모처럼 김순사를 한때나마 즐겁게 해 드릴 수가 있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해서 몸은 거뜬거뜬(불행히도 거기에 정신을 파느라고 신발 뒤축을 또 다시 끌면서) 재동 네거리를 왼편으로 안동 육거리를 향해 총총히 가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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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걸음을 빨리 걸어, 파출소 앞에서 김순사와 수작을 하느라고 잠깐 충그린 시간을 벌충하자 함인데, 그러나 도리어 길품을 또다시 미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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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서 계집아이가 두 놈, 등에는 란도셀을 멘 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이리 밀치락 저리 밀치락 연방 해망을 부리면서 재재거리고 까불고 이리로 오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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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가 다 삼학년에 다니는 ××학교의 아이들이었읍니다.
 
82
두 놈은 거진 바싹 당해서야 비로소 현서방을 알아보고는 까르르 웃으면서 한 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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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부교장!”
 
84
하고, 한 놈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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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장 경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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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사나이들처럼 조그마한 손을 쳐들어 다박머리 귀 위에다가 딱 붙입니다.
 
87
현서방도 얼른(엉성한) 기착자세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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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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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술병을 모자 챙에다 올려다 댑니다. 그러고는 한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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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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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스럽게 웃습니다.
 
92
소개가 늦었거니와 현서방은 ××학교에서 ‘현서방’이요, 소사요, 고쓰까이요, 또 한 가지 ‘부교장’이라는 직함(!)이 있읍니다.
 
93
어떤 회사엘 오래 다닌 소사에게는 어느 겨를에 ‘부사장’이라는 별명이 생깁니다. 또 어떤 경찰서엘 오래 다닌 소사에게는 어느 겨를에 ‘서장대리’라는 별명이 생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학교의 오래된 소사에게는 저절로 ‘부교장’이라는 별명이 생깁니다.
 
94
현서방은 올에 꼬박 열아홉 해째 ××학교의 소사입니다.
 
95
그동안에 교장이 여섯 번 갈렸고 교사(校舍)는 세 번을 고쳐 지었고 십 년 적엔 십년 속근의 표창을 받았고 십오 년 적엔 십오 년 속근의 표창을 받았고 인제 명년이면 이십 년 속근의 표창을 다시 받을 차례입니다.
 
96
그런만큼 학교의 역사 속에 들어서는 아주 횅합니다. 아무 해 연분에는 아무 교장이 새로 부임을 했고, 아무 해 연분에는 아무 교장이 아무 곳으로 전근을 했고를 비롯하여 교원들의 진퇴며 졸업생의 수효하며 교사를 고쳐 짓던 것이며 운동회를 하던 것이며 그밖에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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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두 개의 귀로 더불어 기억력이 퍽도 위대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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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기억력은 그와 같이 과거의 일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더욱 현재에 유효하여, 아이들을 삼학년부터 그 위로는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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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척 만나면 조금도 주저없이 오 너 몇 학년 무슨 조의 아무개…… 라고 알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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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뿐인가요. 그애네 집 동네까지도 대강은 다 알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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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시방 이 두 아이만 하더라도 둘이 다 삼학년 송조(松組)인데 하나는 눈 큰 놈이 윤순애, 또 하나 얼굴 갸름한 놈이 최복희, 그리고 집은 바로 원꼴 휘문학교 앞이요, 같은 이웃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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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횅하니 알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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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로만 친다면 부교장커녕, 아주 교장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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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낡은 소사를 가르쳐 부사장이니 서장대리이니 부교장이니 하고 부름은 영원히 그러한 지위엘 오르지 못할 운명인 한낱 하인에게 대한 상전네 식구의 동정과 하시가 한데 섞인 일종의 짓궂은 농칭(弄稱)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현서방에 한하연 그러고 ××학교의 아이들 가운데 다대수의 소년 소녀들에 한하연 그렇듯이 미묘하고도 까달스러운 의미로서 ‘부교장’이라고 불리고 부르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그 어린아이들이 사(邪)없이 단순한 동심으로부터 우러나는 하나의 애칭(愛稱)이던 것입니다. 하되 오로지 그것은 현서방이 끔찍이도 아이들을 귀여하는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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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방은 허허허허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허리를 흔들고 두 아이는 자지러지게 까알깔 웃으면서 양편으로 하나씩 현서방의 너벅다리를 안고 매달리고…… 하다가 고놈들이 빠꼼히 올려다보면서 벙글벙글 웃는 얼굴을 그 유순하디유순한 눈으로 깨웃이 내려다보던 현서방은 문득 생각이 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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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들 삼학년 송조(松組)는 벌써 아까아까 두시에 파했는데, 그런데 시방 네시가 거진 되었는데 이 애들은 여태 이렇게 길로 다니면서 놀고……. 그건 참 야단입니다.
 
107
“근데…… 근데 느이들……”
 
108
현서방은 조금 걱정스럽게, 그러느라고 허리를 꾸부려 바싹 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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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이들 집인 안 가구서, 어디 갔다 오니?”
 
110
“노올러……”
 
111
눈 큰 놈, 순애가 먼저 대답을 하고, 그 뒤를 받아 복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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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집에……”
 
113
“동무 집엘? 노올러?”
 
114
“응”
 
115
“응”
 
116
둘이는 함께 고개를 연방 끄덕거립니다.
 
117
“헤에잉! 그래선 못써어!”
 
118
“왜?”
 
119
“왜?”
 
120
“왜?…… 으응…… 동무허군 학교서 놀구…… 그리구 학교 파하거든 얼른 집으루 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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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찍 파헌걸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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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옥자가 즈이 집에 놀러가자구 해서 간걸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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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잉! 그래두 못쓰지!…… 아 집이서 어머니서껀 아버지서껀 할머니서껀 기대리시문 어떡허나?…… 아, 우리 순애가 오늘은 웬일인고? 아 우리 복희가 어째 여태 오질 않는고? 자행거에 다쳤나? 선생님께 꾸지람 듣구 벌을 쓰나? 하시문서 걱정허시문 어떡허나?…… 저거 봐요? 저, 커다란 빠스가 다니구 자동차가 디립다 몰려오구 자행거가 훡훡 댕기구, 마차가 댕기구, 안 그래? 다치문 어떡허나? 길루 댕기문서 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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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그래두 여긴 일 없다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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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가 발로 길바닥을 가리키면서 고개를 내두르니까, 복희는 또……
 
126
“그럼! 여긴 사람만 댕기는 길인깐 자동차두 갱구두 못 온다누!…… 그런깐 여기루만 댕기문 안 다친다구 선생님이 그러섰다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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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 어허 기특헌지구!……”
 
128
현서방은 두 아이의 다박머리를 쓸어주자는데 오리쓰메와 정종병을 양편 손에다가 갈라 들어놔서 할 수 없이 손등이 손바닥 대리를 봅니다.
 
129
“……벌써 그런 걸 다 알구! 어허 기특헌지구!”
 
130
“기특헌지구가 뭐유? 부교장.”
 
131
“부교장 벤또 어디서 났수?”
 
132
“응? 응!…… 으응! 기특헌지구 그 말은 착허구 똑똑허다 그 말이구……”
 
133
“술두 있어요!”
 
134
“응, 이거 다아 교장선생님이 저어기 예식에 갔다 오세서 주신 거야!”
 
135
“부교장 먹으라구?”
 
136
“부교장 술 먹우?”
 
137
“술? …… 으응……술은 안 먹어!”
 
138
“술이 쓰우?”
 
139
“응, 아주 쓰구 나뿐 거야!”
 
140
“근데 왜 가지구 가우?”
 
141
“으응, 이거…… 저어 누구 가져다 줄 영으루……”
 
142
“그래두 벤또는 맛이 있지? 부교장.”
 
143
“퍽 맛이 있어, 얘…… 맛이 있지? 부교장.”
 
144
“응, 맛이 있구말구!…… 복흰 여태 벤또 못 먹어봤나?”
 
145
“응!”
 
146
“순앤 먹어보구우?”
 
147
“응……그때그때 아버지허구 시굴…… 저어 할아버지 시굴 가문서…… 찻속으서……”
 
148
“으응…… 그래애! 이건 그리구 찻속으서 사먹는 벤또보담 더 맛이 있는 벤또야!…… 좀 먹어볼련? 먹구푸냐 주까?”
 
149
두 아이는, 먹고 싶기는 한 눈치이면서도 얼른 대답은 않습니다. 그러느라고 저희끼리 서로 바라다보다간, 현서방을 올려다보곤 하면서 배식배식 웃기만 합니다.
 
150
“그래…… 좀 먹어봐, 응?…… 반찬만 죄꼼 먹어봐, 응?……”
 
151
현서방은 술병을 길바닥에다 내려놓고서 오리쓰메를 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152
“어머니가 욕허게?…… 길이서 뭣 먹었다구……”
 
153
“울어머니두! 길이서 먹으문 거지래!”
 
154
“어, 참!……아! 참……”
 
155
현서방은 비로소 크게 깨우치고는 연방 감동입니다.
 
156
“……아 그렇구말구!…… 아, 내가 깜박 고만 잊었지!…… 그래 그래! 길이서 뭘 먹으문 못쓰구말구! 건 거지나 그리는 거야! 허허허허……”
 
157
그러나 현서방은 딱하고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르겠읍니다. 두 아이는 말은 그렇게 해도 종시 그 맛이 있다는 벤또를 좀 먹어보았으면 하는, 여전히 호기스러운 얼굴입니다.
 
158
그러한 얼굴을 보고서야 그대로 차마 돌아설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 애들 말마따나 이 번잡한 길바닥에서 벤또반찬 나부랑이를 꺼내서 움줄움줄 먹인대서야, 생판 남의 집 귀한 애기들을 거지새끼 구실을 시키는 노릇이고…… 또 그 짓을 하고 섰는 나도 체면이 아니요……
 
159
차라리 오리쓰메를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는 복희한테 반찬 넣은 것만이라도 저의 집으로 가지고 가라고 들려주어 보내는 게 그래도 낫기는 나을 편인데, 숫엣것이 아니요, 저깔을 댔던 것이 되어 그 역시 저의 부모가 불쾌하게 생각할 게 빠안한 일이니 또한 난처하고…… 결단코 딸 순동이를 가져다 주쟀던 것이라서 조금치라도 아까운 생각이 들거나 하던 것은 아닙니다.
 
160
시방 현서방은 참으로 아이들을 오히려 만나지 않았더니만도 못하다고, 말이 나지 않았더니만도 못하다고, 어찌 할 바를 몰라 뒤통수로 손이 올라가다가 문득 사방을 둘러봅니다.
 
161
마침 가까이 과자 가게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슬픈 일로는 현서방의 수중에는 단 동전 한푼도 지닌 게 없읍니다. ─언제라야 돈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었을까마는─
 
162
오냐 내가 인제…… 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따가 월급을 타거들랑 마누라한테 가져다주기 전에 돈을 이십 전만 가만히 떼어서 잘 두었다가 인제 내일이고 모레고 맛있는 과자를 하나 앞에 십전어치씩만 사서 주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 이런 결심을 단단히 하고서 현서방은 안 돌려 뇌는 발길을 겨우 돌려놓습니다.
 
163
“잘들 가거라아, 응?”
 
164
현서방은 몇 걸음 걷다가 도로 돌려다보면서 다시금 신칙입니다.
 
165
“응…부교장 꿉빠아이!”
 
166
“꿉빠아이, 부교장.”
 
167
“오오 꿉빠아이! 인전 딴데 놀러가지 말구우?”
 
168
“으응!”
 
169
“인전 딴데루 놀러 안 가께에?”
 
170
“오옳지…… 그리구 길 건너갈 제는 자동차나 빠스나 자행거나 마차나 오나 안 오나 잘 보구서 건너가구우?
 
171
“으응!”
 
172
“부교장두 잘 보구 건너가우우?
 
173
“아아무렴! 허허허허!”
 
 
174
골목 안으로 들어서서, 집 문앞에까지 당도한 현서방은 집엘 먼저 들를까 김순사네를 먼저 다녀나올까 잠깐 망설입니다.
 
175
묻지 않아도 집으로 먼저 들어가서, 한 시각이라도 빨리 순동이 이하 모든 애물(愛物)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176
그러나 한편 손에 든 술병이 절로 쳐들려 보이면서 그놈이 마새스럽습니다.
 
177
물론 인제 바로, 김순사네를 가져다 줄 참이니까 애매고, 조금도 꺼릴 것은 없읍니다.
 
178
그렇지만 마누라야 어디 그러한 곡절을 미리서 알고 있나요, 위선 들고 들어가는 술병을 보기가 무섭게, 발명을 들을 여부도 없이, 이 마귀에게 날벼락부터 단박 한바탕 내리칠 건데요.
 
179
현서방은 더 망설이지 않고, 김순사네의 지쳐 둔 대문을 삐그덕 안중문에서는 밭은기침을 헴…… 그리고 나서야
 
180
“봉자가 있나아?”
 
181
하면서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182
앞뒷문을 활짝 열어젖힌 안방 웃목께로, 아빠빠를 입은 몸뚱이를 자못 얌전스럽진 못하게 포즈하고 누워서 낮잠이 들었던 김순사네 아낙은, 그래도 잠귀 하나는 밝아, 푸스스 일어나면서 한손으로는 크막한 쪽을 다스리면서 또 한손으로는 무명씨 박힌 왼편 눈의 눈곱을 비비면서, 무성한 두 다리를 쿵쿵거리고 마룻전으로 나옵니다. 그동안에 하마(河馬)의 유전같은 하품을 건강하게 두어 번 토한 것은 물론이구요.
 
183
“안녕허심까?”
 
184
“왔수?…… 깜박 끄만 잠이 들었이!”
 
185
“저어, 이거…… 헤……”
 
186
현서방은 정종병만 내미는데, 어찌하자고 저편에서는 오리쓰메마저 받으려고 손을 둘다 내뻗칩니다.
 
187
사랑양반이 더러 이렇게 오리쓰메에 술병을 양편손에 갈라들고 돌아 온 적이 있곤 해서. 분명 그것인데, 오늘은 그러자 현서방이 마침 파출소 앞을 지나는 것을
 
188
“아, 여보게 참…… 이걸 좀, 이왕이니 우리 집에 올려다 둬주게!”
 
189
하고 심부름을 시킨 줄로만 당당히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190
현서방은 그러한 저편의 속상까지 짐작을 하고서 일을 당하자니, 딱 그만 질색을 할 노릇입니다.
 
191
질색이라니, 시방 어엿하게
 
192
“심부름하느라구, 수구했구랴!”
 
193
하면서 둘을 다 받아들이자고 양손을 벌리고 나서는데야, 이건 당장 큰일 났지요.
 
194
아니올시다, 그것만 드리고, 이건 안 드릴 거랍니다 하면서 오리쓰메를 든 손일라컨 뒤로 잡아당길 용기는 도저히 낼 수가 없는 현서방인 동시에, 또한 처지이겠다 해서 꼼짝 못하고서 두 가지를 다 뺏기곤 돌아서자, 그만 펄씬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을 지경입니다.
 
195
일껀 정성스럽게, 딸 순동이를 먹이자고, 먹으면서 좋아하는 양을 보자고 허위단심 손에 들고 올라왔던 것을 달칵 그만 뺏겼으니, 아까 길에서 만난 그 아이들의 경우와도 달라, 아깝고 섭섭한 것이거니와, 인제 그네들한테 애꿎이 욕을 한바탕 먹어 두었으니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196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서너 번이나 뜨시다가 내주신 거니 시방이라고 펴본다치면 먹다가 물린 표적이 단박에 드러날 터…… 하더라도, 김순사네 아낙이야 우선 당장은 남편이 아마 몇 저깔 뜨다가 말았나 보다고 심상히 여기겠지만, 오래지 않아 김순사가 집엘 올라오면 그제는 음식의 내력이, 즉 현서방이 부주를 한 것이 밝혀질 터…
 
197
하고 보면, 영락없이
 
198
“아니, 난 또, 당신이 자시다가 올려보냈다구!……”
 
199
“뭐? 먹던 거야?…… 온, 저런 망헐 녀석이 있나!…… 게, 날더러 제 주둥이를 댔던 벤또 찌스러기를 먹으라구 가져다 주더람? 에잇 고현 녀석 같으니로고!”
 
200
하고, 꽤씸히 생각을 할 테니 욕은 둘째로, 잘못하다가는 볼기를 넓죽 맞게 될 터……
 
201
현서방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딱해 죽겠고 기가 막혀 죽겠고 합니다.
 
202
가난한 오리쓰메 한 납대기가 어찌하자고 천신이 돌아와 가지고는, 아까 길에서부터 끝끝내 이렇게 곤경과 슬픔을 주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203
“순동엄만 어디 나가구 없구……”
 
204
남 가뜩이나 후회까지 나라고(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친절이지만) 돌아서서 나가는 현서방의 등 뒤에다 대고, 한단 소립니다.
 
205
“……순동이 혼자 있나 보던데, 좀 들여다보구서, 또 내려가구랴?”
 
206
“네에네, 들여마봅죠!”
 
207
“육장 이렇게 심부름을 해서, 미안해 어떡허우!”
 
208
“오온, 별말씀을 다아 허심다!…… 저어 참, 봉자 애긴 벌써 나왔읍죠?”
 
209
“응, 아까 오정 전에 파허구 나와서, 아마 저 밖으서 노는지이……”
 
 
210
신발 소리만 듣고도,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줄을 아는 순동인데, 말소리가 빠안히 들리는 두 집 사이겠다. 벌써 몰랐을 리가 없읍니다.
 
211
현서방이 김순사네 대문을 뒤로 지치면서 나설 때에는 순동이가 일각 대문을 열어젖히면서, 한편치가 무릎에서 으그라붙은 다리를 잘름거리기가 답답하여, 외다리로 깡총깡총 뛰어나오고 있을 때입니다.
 
212
부녀는 한꺼번에
 
213
“순동아!”
 
214
“아버지!”
 
215
현서방은 딸을 불끈 안아올려 볼을 비비면서
 
216
“내 이따가 벤또 사다 주지이!”
 
217
하다가 목이 멥니다.
 
218
그 원망스런 오리쓰메로 하여, 마음을 부지를 못하게 안타깝다 못해 졸지에 그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219
과연, 원풀이가 됨직하고, 그래 속이 시원하여, 금새로 현서방의 얼굴에서는 어둔 그림자가 걷히고 명랑한 웃음이 가득 퍼집니다. 목이 멘 것은, 그러므로 슬픔이 아니라 감격이었읍니다.
 
220
순동은 그러나 웬 영문인지를 모릅니다. 별안간 벤또라니? 혹시 과자라도 한다면 몰라도……
 
221
또, 그뿐만 아니라 벤또라면 아버지랑, 제 오래비가 학교에서 먹을 점심으로, 생철 벤또 그릇에다가 밥과 콩자반 나부랑이를 담아가지고 가곤 하는, 그런 벤또밖엔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어리뚱합니다.
 
222
“벤또? 벤또 사다 주?”
 
223
“응…… 이따가 사다 주께에!”
 
224
“으응! 벤또 팔기두 허우?”
 
225
“아무렴!”
 
226
“어디서?”
 
227
“저어, 정거장으서두 팔구……”
 
228
“으응!…… 건 맛이 있수?”
 
229
“아무렴! 맛이 참 좋단다!”
 
230
“응!…… 아이 먹구퍼! 하하!”
 
231
단지 어리광인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도 하도 많음직하게 생긴 얼굴입니다.
 
232
홀쭉하니 긴 하장에 해쓱한 바탕인데 눈이 기형적으로 크고, 목은 가느다란 게 길기만 하고, 앞으로 옥은 좁다란 어깨 하며, 선병질(腺病質) 일시 완연합니다.
 
233
응당, 간유랄지 칼슘 제제를 먹였어야 할 것이지만, 또 넉넉치 못하다곤 해도 고만 것을 대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무지하여 모르는 탓으로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에, 아이가 마치 뽑아논 콩나물 생기듯 생겨 가지고 육장 입만 궁금해합니다.
 
234
게다가 또, 다리 하나가 병신이어서, 올해 벌써 일곱 살이로되 학교는커녕 활발스럽게 나다니면서 일광을 쬐고 뛰놀고 하지를 못하고서, 밤이나 낮이나 집안에만 들박혀 있곤 하여 가뜩이나 발육이 좋지를 못합니다.
 
235
현서방은 하기야, 병신이나따나(오히려 병신이기 때문에 더욱 장래가 가엾고 하여) 학교엘 들여보내서, 장차에는 ‘고쓰까이보다도 더한 짓을 해가면서라도 끝까지 공부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껏은, 그만해도 철이 더얼 나서 그런지, 남이 숭을 보고
 
236
아이들이 놀리고 한다고, 학교란 말만 내도 생질색을 하며 마다고 하는데야 억지로 어떻게 하는 도리가 없읍니다.
 
237
순동이가 그렇게 쫓아나오는 뒤를 바둑이도 따라나온 것을, 현서방은 순동이와 벤또에만 정신이 팔려서 깜박 모르고 있었읍니다.
 
238
흰 바탕에 검은 점이 박힌, 테리야 종자의 바둑강아진데, 요놈이 현서방의 순동이 다음에 가는 애물입니다.
 
239
바둑이는, 연신 반갑다고 밑에서 꼬리를 치고 해도 몰라주니까, 샘이 자꾸만 나서 현서방의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자고 듭니다.
 
240
그제서야 현서방은 알아차리고
 
241
“오오! 우리 바둑이가 나온 걸 몰랐구나!”
 
242
하면서 안았던 순동이를 내려놓고 바둑이의 머리를 만져 줍니다.
 
243
바둑이는 납작 땅바닥에 가 엎드려서는 두 귀를 차악 처뜨리고, 좋아라고 꼬리만 홰애홰 내두릅니다.
 
244
“자아, 들어가자! 집으루, 들……”
 
245
현서방은 순동이의 몸을 받쳐주면서 바둑이를 데리고 일각대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246
“…… 엄만 어디 갔니?”
 
247
“기도해 주러 갔다우!”
 
248
“기도?…… 또 어디서 누가 앓나?”
 
249
“응, 저어기, 누가……”
 
250
“오빤 아직 안 오구?”
 
251
“응!”
 
252
“으응! 순동이 혼자서 심심했겠네?”
 
253
“응……그래두 나비허구 바둑이허구 서이서 놀았다우! 나빈 다마 굴리구, 나허구 바둑이허군 구경허구.”
 
254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아나 듣는 듯이 검은 등에 입과 배와 아랫도리만 하얀 고양이가 한 놈, 마룻전에 오꼼 일어서서 아웅 하고 어리광 하듯 웁니다.
 
255
“오냐!…… 애기허구 잘 놀았느냐?”
 
256
현서방은 고양이를 또 등을 살살 쓸어줍니다. 요놈이 현서방의 세째가는 애물이던 것입니다.
 
257
이렇게 마침 순동이가 저 혼자서 심심하여 있고 한 참이니, 그놈 오리쓰메를 뺏기지 않고 가져다 주었더라면, 그리고 저놈 바둑이도 무어나 반찬을 한 점 집어주고, 요놈 나비도 한 점 집어주고 했더라면, 글쎄 오죽이나들 좋아하며 맛있게 먹었으련 싶어, 현서방은 다시금 미망이 생기고 마음이 언짢아집니다.
 
258
그래, 잠깐 넋을 놓고 우두커니 앉았는데, 순동이가 긴히
 
259
“아버지? 아버지?”
 
260
부르면서 팔을 흔듭니다.
 
261
“응? 왜?”
 
262
“저어, 제비가아……”
 
263
“오오 참!……”
 
264
현서방은 퍼뜩 생각이 나서, 건넌방 추녀 끝의 제비집을 올려다봅니다.
 
265
첫배를 깬 제비새끼들이 거진 날 때가 되어, 둥지 가에 붙어서는 푸르륵푸르륵 한참씩 나래치기를 익히곤 하던 참인데, 그러다가 오늘 새벽에는 한 놈이 그만 실수를 하여 토방으로 날아 떨어졌읍니다. 현서방은, 이거 큰일났다고 황급히 쫓아가서 손으로 덤쑥 쥐어다가 도로 둥지에 올려놓아 주었읍니다. 했더니, 어미가 모이를 물고 날아오더니만, 한사코 그놈을 주둥이로 떠곤질러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이상하다고 다시 집어서 올려놓아 주었으나, 그 다음에도 또 밀어 떨어뜨리고 올려놓아 주면 밀어 떨어뜨리고……
 
266
몇번을 그 승강이를 했는지 모릅니다. 제비란 짐승은, 둥지에서 사람의(손이 닿아) 냄새가 나면 그 둥지엔 두번 다시 깃들지 않고, 새끼의 몸에서도 사람의 냄새가 나면 밀어내버리고 기르지 않는 야릇한 습성이 있음을 현서방은 몰랐던 것입니다.
 
267
“그래, 어쨌니?”
 
268
현서방은 행여나 하고, 둥지의 새끼를 세면서 묻습니다.
 
269
“또 떨어뜨렸다우!”
 
270
“또?!…… 그래서?”
 
271
“솜으루 둥질 해서어…… 방으다 둬두구우”
 
272
“어허! 잘 했다!…… 그래서?”
 
273
“밥알을 준깐 안 먹겠지!”
 
274
“안 먹는다?…… 그럼 거, 배가 고파 어떡허나?”
 
275
현서방은 휘휘 둘러보다가 없으니까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야 파리를 한 마리 잡아가지고 나옵니다. 그새 순동이는 솜뭉치에 싼채 제비새끼를 안고 나와서, 부녀가 협력을 하여(마다고 버둥거리는 놈을) 억지로 입을 벌이고 파리를 넣어주니까야, 영 배가 고팠던지 어떨떨했던지, 그대로 삼키기는 삼킵니다.
 
276
현서방은 그놈에 그만 재미가 나서 이내 학교엘 다시 가보아야 할 것도 잊고서, 파리를 사냥해다가는 먹이고 먹이고 하기에 잠착하여 한참 깨가 쏟아집니다. 그러자 마침, 어미가 한 놈 날아왔다가, 제 새끼가 사람의 손에(잡혀) 있는 것을 보고는, 들이 성화가 나서 지저거려싸면서, 허둥대는 게 바로 여간이 아닙니다.
 
277
“오오! 인전 네가 샘이 나나 보구나! 자아, 옜다! 그런깐 이댐일랑 그렇게 밀어 떨어뜨리군 허지 말아요!”
 
278
현서방은 마치 사람한테 타이르듯 타이르면서 제비새끼를 도로 제 둥지에다가 올려놓아 줍니다.
 
279
그러나 웬걸!
 
280
어미는, 방금 또 한마리 날아들어온 놈과 자웅이서 협력을 하여, 얄밉살스럽게도 새끼 그놈을 죽여라고 떠밀어 내려뜨리는 것이었읍니다.
 
281
“온, 저놈의 짐승이!”
 
282
현서방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고 또한 괘씸도 했으나, 그렇다고 어떻게 하는 수가 없어, 애처롭고 일변 답답하기만 했읍니다.
 
 
283
사람이 재수가 없기로 든 날은, 별스럽게 공교한 일이 다 생기는 법인가 봅니다.
 
284
어쩌자고 글쎄, 첫 새벽에는 고놈 제비새끼가 떨어져서는 이내 마음을 답답하고 걱정스럽게 해주는 것이며, 또 분수도 없는 오리쓰메와 정종은 무엇하러 생겨가지고는 대뜸 길에서는 그 두 어린아이들로 인하여 마음 섭섭한 일을 당하게 하고, 그러고는 또 먹던 턱찌꺼기를 남을 주어, 그렇지 않아도 성미가 까달스러운 김순사네한테 욕을 먹게 하고(그러느라니) 이웃간의 좋은 의까지 상하게 해주는 것이며…… 순동이한테는 얼마나 속으로 민망하고 애처로왔으며, 그래 남대문 밖까지 벤또를 사러 나갔었으니 그 수고는 또 어떠하며……
 
285
그러나 거기까지는 오히려 약과였읍니다.
 
286
한 것이…… 그 벤또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만난 것이 하필 윤보 녀석이었으니, 천하 뿌리치는 장수가 없고, 그래 꼭 석 잔 외에는 무가내기로 따라 들어가서 마악 첫잔을 드는 판인데, 세상에 귀신이 씌워대기나 한 듯이 마침 그 앞으로 지나가던 마누라한테 그만 들키고 말았으니요. 아마도 오늘은 현서방한테 동남방(東南方)이라는 방위가 오귀삼살방 이었던가 봅니다.
 
287
현서방이 아까 그때, 다시 학교까지 내려와서 월급봉투도 찾고, 나머지 일도 대강 마치고 그러고 나서 부랴부랴 남대문 밖을 걸어나가, 이 집 저 집 알아보다가 가까스로 벤또 해 파는 집을 찾아가서 겨우 하나를 사가지고 허덕지덕 다시 안동 육거리까지 당도하기는 일곱시가 훨씬 지나섭니다.
 
288
오뉴월 긴긴 해라니, 아직 날이 저물지는 않았지만, 아침 일곱시에 조반을 먹고 오정이 지나서 납작한 생철 벤또의 얘린 밥을 명색 점심이라고 먹었고, 그러고는 여태(일곱 시간이나) 줄곧 서서만 돌아다녔으니 시장인들 오죽했겠다구요.
 
289
일찌기는 다 술잔이나 하던 솜씨겠다. 금주(禁酒)는 당했어도 여지껏 폐주(廢酒)는 안했겠다. 허출한 속에 그놈 찌르르하고 넘어 들어가는 한잔이 왜 아니 생각 간절했겠읍니까.
 
290
삼십 바로 전후까지도 현서방은 술을 꽤 하고 다녔읍니다.
 
291
하던 것을, 아낙 강씨부인이 예수교에 입교를 하면서부터는 단연 남편으로 하여금 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교인이 되는 동시에 술과 담배를 절대로 끊을 것을 요구했읍니다.(가 아니라 실상은 명령을 했지요.)
 
292
현서방으로 앉아서 그것을 당하기에는 제아무리 법령과 진배없고, 독재자의 명령이기로서니 너무도 피압박자(!) 즉 남편의, 인간성(!)과 능력을 고려치 않은 횡포한 거조이었읍니다.
 
293
현서방이 보기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락없이 삼청동 꼭대기의 당집에 가서 무당질을 하는 것과 꼭 같은 것만 같아서 도무지 징그러워 못할 노릇이었읍니다.
 
294
무당을 볼라치면, 당 구석에다가 울긋불긋 포장을 치고 당각시를 위해 앉히고서, 거기다 대고 절을 하고 빌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하는 걸로써 병이 낫고 재수가 트이고 저생길을 닦고, 한다는 것이고……
 
295
예수교는 볼라치면(당집 대신) 덜렁 큰 벽돌집 안에다가(당각시 대신) 열십자 나무토막에 발가벗고 매달린 사람을 위해놓고서(거기다가 절을 하는 대신) 끓어엎드리고(장구치면서 노래하는 대신) 풍금 치면서 ‘창가’를 하고…… 하는 걸로써 목적은 마찬가지로, 병이 낫고 재수가 트이고 천당길을 닦고…… 다만 한가지 더한 것은, 실컷 돌아다니면서 지은 죄를(회개했읍니다고 빌면) 용서를 받고, 한다는 것이고…… 이 죄와 용서라는 것 한가지만 하더라도, 현서방은 가만히 두고 보았더니, 마누라 강씨부인이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으례껏 죄를 짓고 나서 예배당으로 쫓아가서는, 울면불면 끓어옆드려서, 하느님 잘못했읍니다. 다시는 안 그럴께시니 용서해주시오 하고 죽도록 빌고, 그러고 나서는야 좋아라고 해해 웃고 돌아오고……
 
296
또 담에 가서는 또 그러고 또 그러고 또 그러고…… 바둑이한테 화풀이로 뜨건 물을 끼얹고도 예배당으로 쫓아가서는 울고 빌고 하고서 용서를 받고, 순동이더러 이 오라 주리때를 앵길 년의 기집애, 어디루 나가서 전차에나 칵 치여죽으라고 욕을 하고 때려 주고도, 예배당으로 쫓아가서는 울고 빌고 하고서 용서를 받고……
 
297
그런데 그것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죄를 짓고서 울고 빌어 용서를 받았거들랑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단 말이지, 이건 바둑이만 하더라도 한 달이면 열 번은 두고 두들겨주고서 그런족족 울고 빌고 용서를 받고, 순동이는 한 열댓 번 욕을 하고 때려주고서 역시 그런족족 울고 빌고 용서를 받고, 하니 필경 그것은 울고 빌면 얼마든지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도록, 썩 편리하게 마련이 된 것같이 현서방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입니다.
 
298
‘죄는 맘대로, 그리고 몇번이고 지어도 좋다. 빌면 용서를 받을 수가 있으니까……’
 
299
그러니, 죄를 지으면 벼락을 때리시던 조선 하느님과는 달라, 그이는 어떤 하느님인지는 몰라도 퍽 인심이 후한 하느님인가 보다고, 만약에 전용해(全龍海) 같은 놈도 에수만 믿으면서 백백교를 했더라면, 죄다 용서를 받고 천당을 갈 뻔했겠다고, 현서방은 언젠가 한번은 보다보다 못해 마누라 강씨부인더러 들이댄 적도 있었읍니다.
 
300
아뭏든지 그리하여, 현서방의 알량스런 지혜를 가지고는, 그리고 마누라 강씨부인과 그 한축의 부인네들의 신앙하는 법식밖에는 보지를 못한 그로서는, 도저히 종교와 미신이 구별이 나지를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한 노릇이요, 따라서 교를 믿는다는 것은 사물스런 짓을 좋아하는 여편네들이 당집으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함으로써 위안과 장래의 행복을 꿈꾸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도 또한 당연한 노릇일 것입니다.
 
301
자연 무당놀음이 맨 살에 버러지가 기어가는 것처럼 징그러운 그는, 예수교도 징그러워 도무지 믿을 정이 들지를 않았을밖에요.
 
302
일 년 넘겨, 거진 매일같이 집안에 풍파가 생기고 하던 나머지. 필경 내외는 타협을 했읍니다.
 
303
즉, 현서방은 죽여도 예수는 못 믿겠으니 그 대신 술과 담배만 끊기로……
 
304
내력이 그러하여 현서방은 금주를 당했던 것이고, 한 것이 그럭저럭 십여 년이 하마 넘었읍니다.
 
305
그 덕에 아무려나 시방은 모주꾼을 면했고, 사십 원이 채 못되는 월급이지만 아들놈 순석은 상업학교까지 보내면서, 네 식구에 그다지 살림이 옹색하진 않고 순동이를 위하여 이 원짜리와 일 원 오십 전짜리해서 두 몫이나 든 간이보험도 잘 부어가고……
 
306
이렇게 말하자면 팔자를 고치다시피한 일을 가끔 생각할 때에는 처음 당할 제는 다 참 싫고 야속스럽고 했어도, 이게 모두 마누라의 억지 센덕인가 하면, 곰곰이 고마운 정이 솟곤 하던 것입니다.
 
307
그러나, 그와 같이 금주는 당했어도 폐주를 안했던만큼, 마누라 강씨부인이 주야장천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진 못하는 터이겠다. 마침 오늘처럼 속은 출출하고 꼭 한잔 생각이 간절한 참인데, 옛 술친구라도 무뚝 만나, 석양배 한잔을 하자고 끄는 마당에야, 이를 능히 뿌리칠 힘은 지니질 못한 현서방이었읍니다.
 
308
안동 육거리를 거쳐 조금만 더 오느라면, 왼손편짝으로 별궁 담장을 끼고 올라가는 그 골목…… 많이도 들어가지 않고 댓 걸음이면, 전당국을 못미쳐서 바른손편짝으로 낡은 생철과 판장과 거적을 가지고 흉내만 내듯이 얽어논, 그러나 비지와 막걸리가 맛이 철하일품으로 좋은 그 집……
 
309
그 집을 제발 보지 않으려고, 어쨌든지 현서방은 시방 고개를 남쪽으로 대고 잔뜩 외면을 하고서는, 길바닥을 연신 끄는 발, 뒤축과 벤또를 든 팔까지 재게 들이 놀리면서 횡허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읍니다.
 
310
세상 둘도 없이 정다운 거기를 천하 지긋지긋한 원수처럼 피해 달아나는 현서방의 마음은 바야흐로 어지러운 암투에 정히 정신이 아찔아찔 합니다.
 
311
그러자 별안간 그때입니다.
 
312
“아, 성님!”
 
313
하면서 앞을 딱 가로막는 건, 구척 장신의 키를 한참이나 치올라가서 얽둑얽둑한 상판을 보지 않아도 벌써 그, 모주에 잔뜩 찌들어 걸걸하니 녹이 슨 윤보의 더럭 반가와하는 음성임을 얼른 알아낼 수가 있읍니다.
 
314
현서방도 역시 이 다정한 의동생 윤보가 반가운 것은 물론입니다.
 
315
“아, 윤보!”
 
316
“어딜 가섰다가 이렇게?……”
 
317
“난 뭐…… 그래 자넨?”
 
318
“나야 뭐 두루춘풍이죠!”
 
319
“그래, 어린 놈서껀 댁낸 다아……”
 
320
“밥 잘 죽이죠!…… 참, 아주머닌 평안허신가요?”
 
321
“으응, 거저……”
 
322
“그리구…… 그애가, 아따 저어, 순, 순동이……”
 
323
“으응, 그년이야 머, 제 팔잔깐!……”
 
324
“쯧! 그렇죠!…… 자아 그런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325
윤보는 휘휘 둘러보더니, 앞을 서서 다짜고짜로, 문제의 그 골목을 향해 현서방의 팔을 잡아 끕니다.
 
326
“……성님, 일러루 오슈!”
 
327
“아, 여게! 난 참 ……”
 
328
“성님 사정 모르잖읍니다!…… 그렇지만 모처럼 만나서, 게, 성님이제 술 한잔 안 잡숫는대서야, 온 어디 인사유?”
 
329
더 끌지 않아도, 더 뒷걸음을 칠 기운은 현서방에게 영영 아주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330
둘이서, 시원하게(얼음에 채운 건 아니라도) 데우지 않은 막걸리를 한 주발씩 집어 들고는
 
331
“자아, 성님 드슈!”
 
332
“응, 어서 들세!”
 
333
하면서, 꼭같이 입으로 가져다 대고는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을 바로 그때입니다.
 
334
본시도 툭 솟아, 상말로 십리 갈길을 오리씩 내다봄직한 그러한 눈방울인데, 그놈이 분노로 하여 한번 더 벌컥 뒤집혔으니, 얼마쯤이나 흉맹(凶猛)스러웠을 것은 족히 짐작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현서방의 아낙 강씨부인이, 한 목사님과 두 전도부인과의 사이에 묻혀 그 앞을 지나가다가, 잠깐 사오 초 동안 발길을 멈추고 서서, 방금 천하 죄악의 마약을 마시고 있는 남편 현서방을 노리는 그 눈입니다.
 
335
눈뿐이 아니라, 시집 가는 새색시의 이불만큼은 두꺼운 위아래 입술은, 신 내린 댓가까지같이 푸르르 떨리고, 사지와 온몸도 다 떨립니다.
 
336
만약 강씨부인이 시방, 존경하는 한 목사님과 두 전도부인과를 모시고 가는 길이 아니고서 단독으로 지나는 길이었다면, 일 초의 유여도 없이 즉석에서 크게 한바탕 화룡도가 벌어졌을 것은 물론입니다.
 
337
그러한 만큼 강씨부인은, 실로 초인의 인내력으로 그 무서운 분노를 억제하면서 이내 도로 일행을 따라 조용히 발길을 옮겨놓습니다.
 
 
338
현서방네 집입니다.
 
339
여덟시가 거진 되어와도 아직 환하니 밝습니다.
 
340
마룻전으로 순동이가 오도카니 앉았고, 바둑이는 마당에 가서 순동이를 올려다보고 마주 오꼼하니 앉았읍니다.
 
341
둘이 다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까맣게 순동이는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342
어머니가 나갔다가 늦으면 언제든지 아버지가 밥을 지으시는데, 오늘은 아버지마저 이렇게 늦으니 차차로 마음이 슬픕니다.
 
343
벤또를 사다 주시마더니, 그건새로에 늦게 오시기까지 하니, 더우기나 노엽습니다.
 
344
게다가 오빠가 옆에 버얼떡 누워설랑은 자꾸만 욕을 해싸서 마구 약이 오릅니다.
 
345
“이년아! 일곱 살이나 먹은 년이 밥 하나두 못해?”
 
346
“오빠 좀 허겠지?”
 
347
“남잔 밥 안 짓는 법야!”
 
348
“피이! 껄렁한 남자!”
 
349
“뭐가 껄렁해? 이년아!”
 
350
불끈 일어나 앉으면서 순동에게로 대고 눈을 부라리는데, 세상에 모자간에 모습이 닮기도 예사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강씨부인의 얼굴을 가져다 고대로 본을 떠놓았겠읍니까.
 
351
툭 불거진 두 눈방울에, 좁디좁은 이마에, 주먹 같은 코에, 한 근씩은 실히 됨직한 입술에……
 
352
그런 모습인데, 나이는 열여덟이라, 여드름이 더덕더덕, 그렇지만 ××상업학교 교복의 깃에는 두이자가 붙었읍니다.
 
353
한 학년을(충분히 하느라고!) 두 해씩 다녔다고 하는데, 잘하면 중등상업학교에서 상과대학까지 마칠 수가 있을 터이라고도 함입니다.
 
354
“아버진 웨 어테 안 오는 거야!”
 
355
순석은 대단히 불평스럽게 두런거리면서, 도로 벌떡 드러눕습니다.
 
356
순동은 입을 삐죽……
 
357
“아버지더러 밥 지라구?”
 
358
“그래? 으때?”
 
359
“남잔 밥 안짓는다문서?”
 
360
“아버진 마귀야!”
 
361
“왜 그래? 왜 그래? 아버지가 왜 마귀야?”
 
362
“예수 안 믿은깐 마귀지 뭐야? 이년아!”
 
363
“예수 안 믿으문 마귄가, 머…… 내, 인제 아버지헌테 일를걸!”
 
364
“안 무서 이년아!”
 
365
“때려주랄걸, 머!”
 
366
“피이! 아버지가 날 때려? 내가 기운이 으떻게 신데, 이년아!”
 
367
“기운만 시면 젤인가, 머?”
 
368
“내가 곤투(拳鬪) 으떻게 잘 허는데그래? 이년아!…… 아, 참……”
 
369
순석은 불끈, 또 일어나 앉으면서, 별안간 딴 사람같이……
 
370
“……아버지 월급 타왔디?”
 
371
“몰라 꼴라!”
 
372
“헴, 오늘이 월급날이겠다아? 헴, 곤투 그럽하나 사달래예지, 헴!”
 
373
“피이! 내가, 오빠가아버지더러 욕했다구 일러두?”
 
374
“아냐! 내 거짓뿌렁으루 위정 그래 봤어!…… 그런깐 일르지 마아?”
 
375
“몰라 몰라!”
 
376
“아냐! 정말야!…… 우리 아버지 정말 착헌 아버지야!”
 
377
갑자기, 그때입니다.
 
378
쿵 쿵 쿵, 발자죽 소리가 급하더니 느닷없이
 
379
“아이구─우!”
 
380
왜장을 치면서 지쳐 둔 일각대문을(정녕 발길로 걷어차느라고) 왈그락 따악, 이어서……
 
381
“아이구─우! 나 죽는다─아!”
 
382
두 아이가 한꺼번에 놀라, 순석은 후닥닥 쫓아나가고 순동이는 와들와들 떨면서 마루 구석으로 기어 들어가고, 바둑이는 꼬리를 잔뜩 사리고서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숨고, 나비는 안방 문턱 너머로, 두 눈이 둥그래서 내다보고 섰고, 동네가 온통 놀랐고……
 
383
“아이구─우! 나 죽는다─아!”
 
384
“어머니! 어머니!”
 
385
“아이구─우!”
 
386
어느 겨를에 다 그렇게 구비가 되었는지, 순석에게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면서 연방 왜장을 치면서 마당으로 들어서는 강씨부인은, 머리쪽은 거진거진 떨어져 내리고, 매무시는 흘러 상당한 용적의 맨살이 드러났고, 고무신은 한짝은 신고 산짝은 손에 들고…… 이렇습니다. (특히 어제부터 멘스이었고요) 부축을 해다가 마루에 뉘는 대로 나가 동그라지면서, 발꿈치와 주먹으로 마루청을 땅땅…
 
387
“아이구─우! 이 원수를 어떡헌단 말이냐─아! 으응? 이 원수를!”
 
388
근자로 새로 이사를 해온 이웃이 있다면 영락없이, 저 여편네가 시앗을 보고 시방 반 실성을 했나 보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물론, 뒤미처 곡절을 알고 나서는, 자못 어처구니가 없다고 서로 얼굴을 치어다보겠지요마는……
 
389
왜장을 끊이지 않고 기운차게 계속이 되고, 일변 순석은, 마루 구석에 가 박혀앉아서 떠는 순동을 불이 나도록 힐타합니다.
 
390
“순동아!”
 
391
“……”
 
392
“얼핏 가서, 박부인, 최부인, 섭섭어머니, 모두 오시라구 못해? 이년아!”
 
393
“……”
 
394
“아, 저년을 쫓어 가문, 당장 죽여 놀라!”
 
395
“……”
 
396
“야, 이년아, 그래두 냉큼 안 갈 테냐? 이 주리땔 앵길 년아!”
 
397
오월이라곤 하지만 정밤중은 한데 야지가 싸늘하게 찹니다.
 
398
벤또를 소중스럽게 옆에다 놓고 앉아, 일각대문에다 등을 기대고, 품에는 바둑이를 담쑥 안고, 더불어 졸다가 깨었다가 하면서 현서방은 밤을 밝히고 있읍니다.
 
399
기왕 집엘 들어가지 않을 바이면 학교에는 숙직실도 있고 하니 그리로 가서 잘 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현서방은, 나 혼자서만 편안히 잠을 자느니보다는, 이렇게 대문 밖에서 떨고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울다가는 지쳐, 혼자 꼬부리고 누워 애처로이 잠이 들었을 순동이를 생각하면서, 걱정으로 이 한밤을 새우는 편이 훨씬 더 마음은 편안하던 것입니다.
 
400
요행, 바둑이가 냄새를 맡고 나와 주어서, 품안에 안고 같이서 지내느라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모릅니다.
 
401
달은 지고 없고, 별만 새삼스럽게 하늘로 하나 가득 반짝입니다.
 
402
“때앵, 때앵.”
 
403
집에서 시계가 두시를 치는 소립니다. 시방이 춥고, 그래서 현서방은 자구만 어깨를 웅숭크립니다. 그러나 인제 두어 시간만 더 기다리면 날이 샐 테고, 날이 새면 어떻게든지 가만히 순동이를 불러내어 이 벤또를 줄 수가 있읍니다. 그 좋아할 얼굴을 생각하면서, 현서방은 빙그레 바둑이의 머리에다가 볼을 비빕니다.
 
404
밤은 모두 괴괴하고, 하늘서 별똥이 하나 길게 흐릅니다.
 
405
현서방은 어느새 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406
<人文評論[인문평론] 1939,10;집,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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