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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15년(十五年) 이면사(裏面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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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3월~
김동인
1934년 3월 31일~4월 6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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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文壇[문단] 十五年[십오년] 裏面史[이면사]
2
〈創造[창조]〉 孕胎[잉태] (余[여]를 主人公[주인공]으로 삼고)
 
 
 

1. 緖言[서언]

 
4
여기 쓰려 하는 바는 여가 문필에 종사하기 비롯한 1918부터 오늘날까지의 문단의 이면사인 동시에 또한 조선 문화사의 이면의 일단이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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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여를 주인공으로 한 문단의 변천사라 하였지만 또 물론 여의 자서전이 아니다. 문단의 변천사라 하였지만 또한 순전히 문단의 변천사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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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애호가들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알고자 하는 바인 문인들의 왕래며 그 갈등이며 또한 1918년(1918년이라는 해는 기미사건 전의 해로서 그때부터 지금까지라 하면 즉 ‘전기’부터 ‘후기’라 하는 특수한 시기를 말함이다.)부터 오늘날까지의 일부 청년들의 왕래며 조선의 문화를 말하는 신문 잡지의 출생의 이면사 등을 아울러 말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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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구석에서 소설이나 쓰고 방탕한 유흥이나 하여 그 전생을 보낸 여로서는 물론 견문도 부족하고 졸필인 혐도 없지 않으나, 여가 본 한계에서는 아직껏 1918년부터 오늘까지의 변천사를 쓴 사람이 없었으므로, 졸필임을 탓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탓하지 않고 이에 붓을 잡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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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 종사하는 업이 문필이매 다른 일의 변천에 대하여는 직접으로는 아는 바도 없고 따라서 쓸 수도 없지만 문화사업 중의 가장 귀한 한 가지인 문예의 변천사를 쓰노라면 자연히 간접으로 다른 데도 언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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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아래 쓰는 바에 한 가지 미리 말씀하여 둘 것은 어떠한 사람에게 대하여서는 가명을 사용한다 하는 점이다. 그 본명으로 쓸지라도 그것을 기탄치 않는 사람에게 대하여는 본명을 쓰기를 꺼리지 않으나 어떤 인사 중에는 명예상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도 본명이 발표되는 것을 꺼리는 이가 있으니까 그런 이에게 대하여는 부득불 가명으로써 미봉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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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아래 쓰는 것은 무슨 정확한 문헌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의견이며 이야기를 듣고 쓰는 것도 아니요, 전연 여의 기억에 의지하여서뿐 쓰는 것이며 만약 사실과 틀리는 점이 있으면 용서하여 주심을 바라며, 좀더 호의가 계신 분은 그 틀린 점을 여에게 일필로 통지하여 주시면 甚幸[심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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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일 ― 이런 일에 감히 붓을 잡으려는 여의 용기 ― 오히려 만용에 스스로 놀라면서, 여는 여기 여의 勇筆[용필]을 휘두르려 한다. 그때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이라도 무슨 참고거리가 될까 하여….
 
 
 

2. 〈創造[창조]〉 孕胎[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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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윌슨이 강화회의 때문에 佛國[불국]으로 건너간다 어쩐다 야단하는 1918년말의 어떤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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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동경] 本鄕區[본향구] 眞砂町[진사정] 어떤 하숙의 한 방 ― 화로를 끼고 마주 앉은 사람은 당시 一高[일고]의 寮[요]에 있는 朱耀翰[주요한]과 여였다. 카페 파올리스타에 발매하는 커피시럽의 병을 곁에 놓고 연하여 물에 풀어 마시면서 둘이서는 트럼프를 하고 있었다. 여는 그때 트럼프라는 것을 외국 소설에서나 혹은 영화에서 볼 뿐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장난꾸러기의 모임인 一高[일고] 요에 있는 주 군은 색시같이 얌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요에 있기 때문에 트럼프를 배우고 여에게 와서 ‘투텐짹’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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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두시, 한시, 두시, 세시 ― 진한 커피를 많이 먹기 때문에 졸음을 잃어 버린 두 사람은 연하여 ‘투텐짹’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새벽 네시쯤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트럼프에도 싫증이 생겨 그것을 밀어 놓고 이야기 차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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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즐기는 요한이며 문학을 즐기는 여였다. 둘의 사이에 이야기가 나오면 물론 문학에 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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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仁[동인]이, 문예 잡지를 하나 해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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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요한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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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이런 말을 하는 요한의 입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직껏 샌님으로 길러난 여는 무슨 잡지사를 하나 경영한다면 적어도 10만 원의 기본금은 예산하던 것이었다. 일개 서생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여는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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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란? 돈이 어디 그리 많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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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많아야 쓸데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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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明治學院[명치학원] 중학부에 적을 두었을 때에 그 학교의 교보인 〈白金學報[백금학보]〉를 담당하여 편집하기 때문에 요한은 거기에 대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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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 원이면 창간호를 낼 수가 있다. 만약 요행히 창간호의 성적이 좋으면 창간호를 판 돈으로 제2호를 낼 수가 있다. 불행히 많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제2호부터는 한 백 원씩만 가졌으면 유지해 나갈 수가 있다. 그다지 많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이 요한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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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이, 창간호 비용만 내게, 제2호는 어떻게든 또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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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워서 트럼프를 하다가 갑자기 튀어져 나온 잡지 간행 문제 ― 두 사람은, 밤을 새기 때문에 모두 코가 메어서, 콧소리를 하면서 이런 의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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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歌人[가인] 川路柳紅[천로유홍]의 문하에서 川路[천로] 씨의 총애를 일신에 모으고 있던 요한은 벌써 시에 대하여서는 얼마만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京都[경도] 조선 유학생회에서 간행하는 〈學友[학우]〉라는 잡지에도 ‘습작’이라는 제목으로 수편의 시를 기고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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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로 말하자면, 그런 明治[명치]학원 시대에 클래스회에서 발행하는 회람 잡지에 소설 한 편과 수필 한 편을 써 본 것뿐, 아직껏 여의 글이 활자화하여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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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川幡畵學校[천번화학교]에 적을 두고, 藤島[등도] 씨의 문하에 미학에 대한 상식을 구하러 다니던 여는 남에게 지지 않는 예술욕과 소설에 대한 웬만한 자신까지는 가졌었지만 1918년 가을에 당시 유일의 조선 안의 언론 기관이던 〈매일신보〉에 소설 한 편을 투고를 하였다가 무참히 沒書[몰서]를 당하고 東京[동경] 유학생의 기관 잡지이던 〈學之光[학지광]〉에도 무슨 글을 기고를 했다가 몰서를 당한 ― 두 개의 쓴 경험을 가졌는지라 속으로 분하고 울울하기가 짝이 없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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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之光[학지광]〉이라 하는 잡지는, 문예를 학대하기로 유명한 잡지로서 소설이라든가 문예에 관한 논설이면 반드시 말미에 6호 활자로 ― 그것도 절반 이상은 삭감을 하여 게재하여 주던 잡지라 거기서 몰서를 당하였다고 그다지 창피한 일도 아니며 〈매일신보〉 역시 유일의 언론 기관이더니만치 투고가 산적하는지라, 웬만한 무명인의 글은 보지도 않고(보아야 알아보지도 못할 테지만) 쓰레기통에 집어넣던 시대라 몰서당한 것이 당연하지만 여의 자존심은 여간 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때에, 요한의 입에서 “우리의 손으로 잡지를 하자. 그것도 몇 만 원의 금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1,2백 원이면 넉넉하다” 하는 말이 나오매 여의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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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 원이면 창간호는 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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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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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 2백 원을 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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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약속은 성립되었다. 그 뒤에는 집필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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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제로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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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잡지며 그런 것에 아주 무지하던 여는, 동인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요한은 동인제라는 데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요한의 동인제 해설도 정확한 해석이 아니었다. 요한도 동인제라 하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몇 사람이 힘을 아울려서 하는 것이 동인제라 이러한 막연한 해석을 내렸다. 여는 그것이 또한 그럴듯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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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문제는 누구누구를 동인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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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요한과 여의 지위를 말하자면 요한은 明治[명치]학원 시대부터 출판에 관계를 하여 출판에는 얼마만치 지식이 있었으나 東京[동경] 유학생간에는 너무도 무명하였다. 一高[일고] 입학 시험에 조선 사람으로서 처음 패스하였다 하는 명예로운 일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일부에 알리웠지만 중학시대부터 그때에 이르기까지 꼭 기숙사 생활만 하고 유학생끼리의 교제를 피하여 온(요한이 재학중 교제한 사람은 韓弻濟[한필제] 군과 여 두 사람뿐으로 기억한다) 요한은 교우가 없었다. 그런지라 동인 문제에 들어서는 요한은 그만 잠잠하여 버렸다. 이번에는 여가 득의양양히 몇 사람의 동인을 추천하였다.
 
38
먼저 田榮澤[전영택] 군을 추천하였다. 그리고 崔承萬[최승만] 군을 추천하였다.
 
39
지금은 모르지만 당시에는 東京[동경] 유학생 간에 〈半島[반도]〉라는 잡지가 있었으니 그 잡지는 東京[동경]서 중학교를 다니는 사람과 東京[동경]서 중학교 졸업한 사람에 한하여 집필하고 구독할 권리가 있는 잡지였다. 전영택 군의 이름을 여는 그 〈반도〉에서 늘 보았으며 개인끼리도 그다지 멀지 않게 사괴고, 만나면 서로 문학론도 다투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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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만 군은 유학생 청년회에서 발행하는 〈靑年[청년]〉의 주간이었으며, 여의 생각으로는(그 생각이 불행히도 오해였지만) 문학에도 상당히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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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朴勝×[박승×] 군을 추천하였다. 박 군은 ○교 문과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문과를 전공하는 사람이 드문 유학생 계에서 소위 萬綠叢中[만록총중]의 一點紅[일점홍]이었다.(후에 알아보니 역사 전공이었다) 이만치 하여 불그스레한 겨울 해가 동천에 솟아올라서, 아마도(あまど : 雨戶[우호] ―빈지문)를 통하여 햇빛이 방안에 얼룩질 때까지 의논을 하고, 조반을 시켜서 같이 나눈 뒤에 요한은 요로 돌아가고 여는 한잠을 자려고 자리로 들어갔다.
 
42
요한이며 여는 다같이 그때 열아홉 살로 인생의 가장 원기 좋은 시대 ― 이 시대의 하룻밤을 앉아 새워 놓으니까, 아침에는 세상이 모두 핑핑 도는 것 같고, 눈이 아득아득 하였다. 돌아감에 임하여 요한이 한 술회 ― “사람이여 ― 밤에는 잠자고 일은 낮에 하라고 하는 뜻으로 시를 하나 써야겠군. 에이, 참 죽겠군.”
 
43
그러나 이날 밤이야말로 조선문학사상에 있어서 영구히 두고 기념할 귀중한 날이다. 똑똑히 기억되지 않는 그날 밤이지만 조선 신문학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 이날 밤이다.
 
44
그 날로 여는 집에 편지를 하였다. 학생의 신분에 부당한 대금이지만 소자의 출세를 위하여 2백 원을 지급히 보내어 달라고….
 
 
 

3. 田榮澤[전영택] 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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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여가 靑山學院[청산학원] 신학부 기숙사의 전 군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2,3일 뒤였다.
 
47
나이로 말하자면 여 등은 열 아홉 살, 전 군은 스물 대여섯 살, 그 시기에 있어서는 꽤 차이가 있었지만 半島中學會[반도중학회](東京[동경] 유학 조선 중학생회) 시대부터의 友人[우인]이었다. 주 군과보다도 여와 더 가까왔다.
 
48
“며칠 전에 주 군과 의논한 결과 문예 잡지를 하나 하기로 했는데 동인이 돼 주십쇼.”
 
49
본시 사교상 인사라는 것이 서툰 여는 처음부터 용건을 꺼내었다. 문예에 다대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전 군이라 이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50
여 등 3인은 거기서 머리를 모으고, 잡지의 이름을 만들기를 연구하였다.
 
51
─ 文藝[문예]
52
─ 文學[문학]
53
─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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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創造[창조]
55
─ 金剛[금강]
56
─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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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冠[왕관]
 
58
무엇무엇 문예잡지에 적당한 이름 여러가지를 만들어 놓고, 어느 편을 취 할지를 생각코 또 생각한 결과, 우리는 ‘創造[창조]’를 취하기로 하였다. 어떤 의미로 보면, 宗敎味[종교미]가 있는 듯한 혐이 없지는 않으나, 이런 색안경을 벗고 보면 그 중 점잖고 의의 있고 경박치 않으며 너무 노골적도 아닌 가장 적당한 이름이라 하여 ‘창조’를 취하게 된 것이었다.
 
59
전영택 군은 또한 동인으로서 金煥[김환] 군을 추천하였다. 東洋[동양]미술학교 재적자로서 예술에 대하여 상당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이 전 군의 소개 언사였다.
 
60
전 군의 인도로서, 그 날로 靑山[청산] 어떤 私宿[사숙]에 있는 김환 군을 방문하였다.
 
61
떼, 떼, 떼, 떼, 세상에 드문 말더듬이 김환 군의 말에, 웃음을 겨우 참고 듣노라고 요한과 여는 얼마나 고심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62
“ㅈㅈㅈ 조습니다. ㅈㅈㅈㅈ 저 예술에 관해서는….”
 
63
또한 막힌 말을 속이기 위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한 번씩 두드리는 김환 군의 모양은 참으로 요절할 것이었다.
 
64
돌아오는 길에 유학생 청년회관에 들어서 최승만 군을 만나서 최 군에게도 동인 되기의 승낙을 들었다. 쾌락이 아니고 苦諾[고락]임은 저으기 우리에게 불만키는 하였지만….
 
65
박승× 군은 드디어 승낙치 않았다. 兒戱[아희]에 類[류]한 그런 일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박 군의 의향이었다.
 
 
 

4. ‘불노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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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많은 詩人[시인] 가운데 〈창조〉 창간호에 난 ‘불노리’는 가장 졸렬한 시일 것이다.
 
68
불노리라 하는 것은 4월 파일의 觀火[관화]를 일컬음이다. 열네 살부터 東京[동경] 생활을 한 요한은 관화를 본 일이 없다.
 
69
여에게서 평양 대동강의 관화는 여사여사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들은 바에 상상의 가지를 좀 가미해 쓴 것이 그것이다.
 
70
그러나 그 ‘불노리’의 시적 가치는 둘째 두고, 거기 사용된 조선어는 영구히 기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71
우리가 〈창조〉를 발간함에 임하여 무론 문예에 주력을 하였지만 조선어휘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하였다.
 
72
功[공]이 成[성]하고 업이 끝난 지금에 있어서는 요한의 글에든 여의 글에든 한문식의 문장이 꽤 많이 섞이지만 당시에 있어서는 조선말로 고칠 수만 있는 말이면 모두 조선말로 고쳐서 썼다. ‘교수를 畢[필]하고’라고 하는 말을 ‘가르침을 끝내고’라 하였다. ‘대합실’이라 하는 말을 ‘기다리는 방’이라 하였다. 명사·형용사·동사·조사에 있어서 조선말로 고칠 수만 있는 말이면 전부 조선말로 고쳐서 썼다. 조선말로 고칠 수가 없어서 부득불 한자로 쓰는 말에 대해서는 우리는 창피하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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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은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같은 말일지라도 한자로 쓰면 관대히 보고 조선말로 쓰면 천하게 본다. 소변이라 쓰면 옳게 보되 오줌이라 쓰면 더럽게 보고 음경이라 쓰면 그럴듯이 보되 ××라 쓰면 상스럽게 본다. 이러한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야비한 말을 모두 조선말로 썼다.
 
74
소설에 있어서도 그때의 선배 춘원의 문장에도 아직 구태가 많이 남아있었다. 가령 말하자면 ‘P’라 하는, 소설의 맨 마지막 한 구절에 ‘P는 남자러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비단 그 소설뿐 아니라 ‘이러라’ ‘이더라’ ‘이라’ 등 아직 채 구어화하지 못한 말이 많이 있었다.
 
75
〈창조〉를 발간함에 있어서 우리는 동인회를 열고 그런 문장을 죄 거부하여 버리고 순구어체로만 쓰기로 작정하였다. 지방 사투리 가운데서도 쓸 만한 말은 모두 추어서 사용하여 조선어를 풍부하게 하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76
“조선말로는 미문을 쓸 수가 없다.”
 
77
돌아보건대 이런 한탄을 하던 이 시대가 어제와 같거늘 지금은 특수한 학문상 술어 이외에는 조선말로 쓰지 못할 말이 없도록 되었으니 십오년이라 하는 것이 그다지 긴 세월이 아니지만 그동안의 변천을 생각하면 과연 꿈과 같다.
 
 
 

5. 〈創造[창조]〉 創刊號[창간호]

 
79
1919년 정월
 
80
창간호의 편집도 끝났다. 다행히 이백 원이란 돈도 집에서 곧 보내 주어서 먼저 振替[진체] 구좌를 마련하고 본사는 김환 군의 하숙에 두고 사무적 방면은 김환 군에서 맡기기로 하였다.
 
81
그 어떤날 새벽 아직 곤하게 자는데 하녀가 올라와서 내객을 報[보]한다.
 
82
여에게 새벽에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가 없다. 좌우간 들어오라고 하였더니 웬 사람 하나 들어와서 명함을 내어 놓는다. 보매 若松署[약송서] 형사였다. 어째서 왔느냐고 하니까 잠깐 경찰서까지 가자 한다. 영문은 모르지만 가자니 하여간 若松署[약송서]까지 갔다.
 
83
갔더니 아무 말도 없이 보호실에 집어넣고 만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높이 달린 들창으로는 함박 같은 눈이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여는 안방 시계만 꺼내어 보았다.
 
84
점심때쯤 되니까 양식 점심을 들여보낸다. 그러나 불러 내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다.
 
85
오후 한시쯤 보호실 밖에 사람의 소리가 나기에 보매 웬 조선 여자를 한 사람 또 가져다 앉힌다. 그가 조선 옷을 입었기에 조선 여자로 알았지 그는 나를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후에 알아보니,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곤경을 겪은 某[모] 양이었다.
 
86
다섯시쯤 되어서야 비로소 서장실에 불리어 올라갔다.
 
87
“김동인 씨에 틀림없지요.”
 
88
“네.”
 
89
“이제 묻는 말에 대해서 속임 없이 대답해 주십시오. 김 공을 점잖은 이로 알고 정중히 대접하는 테니.”
 
90
영문은 짐작은 갔다. 모든 유학생계에서는 벌써 수근수근 여러가지의 일이 많았다. 여도 이 회의에 우연히 한두 번은 참석한 일은 있지만 무슨 동맹을 맺든가 한 일은 아직은 없었다. 그러나 때가 그래도 때니만치 무슨 그런 혐의란 짐작은 갔다.
 
91
“물으시오. 아는껏 말할 테니.”
 
92
“김 공, 얼마 전에 본댁에서 돈 이백 원을 가져온 일이 있지요?”
 
93
“네.”
 
94
“그 돈은 무엇에 쓰려고 가져오셨소.”
 
95
돈의 용도가 명백한 이상 무론 그 날로 무사히 나오기는 하였다.
 
96
나와서 알아보니 그 날 유학생 청년회관에서는 작지 않은 사건이 생겨서 崔八鏞[최팔용], 徐椿[서춘], 金度淵[김도연] 기타 수씨가 붙들리어 갔다 한다. 〈창조〉 창간호는 같은 날 출세하였다.
 
97
京都[경도] 유학생 잡지 〈學友[학우]〉도 그와 전후하여 출세하였다.
 
 
 

6. 余[여]의 檢束[검속]

 
99
이 일이 있은 뒤부터는 이 평범하고 온공한 여의 위에 당국의 감시가 붙기 시작하였다. 그 어느날 새벽에 여를 若松署[약송서]로 끄을고 갔던 형사가 놀러오노라는 핑계로 간간이 와서는 한두 시간씩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가고 하였다.
 
100
돈 이백 원의 용도에 대한 해명도 다 되고 감시가 붙을 까닭이 없는데, 이런 귀찮은 감시가 붙은 것은 지금껏 여의 기이하게 생각하는 배다.
 
101
그러는 동안에 춘원도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동경에 잠시 들렀다가(약) 상해로 피신을 하는 그동안에 일찍부터 춘원과 친분이 있는 전 군이 참가키를 권한 것이었다.
 
102
〈창조〉 제2호도 편집이 끝났다. 그 제2호에 실린 전 군의 「천재? 천치?」라는 단편은 여의 지금도 애독하는 소설로서 조선 소설사상 특필할 가작이다.
 
103
어떤 날 조선 유학생대회가 日比谷[일비곡] 공원 음악당에서 열리게 되었다. 여도 거기 참석을 하러 갔다. 먼저 李達[이달]이 강단에 올라섰다. 그러나 발언도 하기 전에 금지를 당하고 해산 명령을 받았다.
 
104
여기서 소충돌이 생겼다. 해산을 시키려는 경관과 해산치 않으려는 학생들 새에 작은 충돌이 생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검속 사건까지 생기게 되었따.
 
105
여는 맨 뒤에 서서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누가 와서 문득 여의 양 어깨를 붙든다. 돌아보니 순사였다.
 
106
“고찌코이!(こちこい ― 이리 와)”
 
107
두말이 없었다. 끄을려 갔다. 한 20인이 순사 10명에게 포위되어 日比谷[일비곡] 경찰서까지 끄을려 갔다. 그날 밤을 여는 평생 처음으로 경찰서 보호실에서 잤다. 뉘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조선 학생이 들여 보냈다는 담요로 몸을 싸고 千慮萬思[천려만사]로 그 밤에 여는 한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08
붙들리었던 수십 명 학생 중에 경찰서에서 밤을 잔 사람은 여와 이달 두 사람뿐이었다. 여는 어떤 까닭으로 밤까지 경찰서에서 보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여의 相[상]이 범죄자로 생겼는지 혹은 그때의 경관의 해산 명령에 반항한 어떤 학생과 여의 외양이 같이 생겨서 오해를 삼인지….
 
109
이튿날 신문에는 김동인(25), 이달(26) 양군이 불온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검속을 당했다고 뚜렷이 났다. 하숙으로 돌아오매 하숙 주인에게서는 다른 하숙을 구하여 이사하여 달라는 청구가 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창조〉 제2호는 橫濱[횡빈] 福音印刷組合[복음인쇄조합]에서 문선을 급히 하고 있었다.
 
 
 

7. 歸鄕[귀향]

 
111
1919년 3월 5일 ‘ははもどた. すくかへれ. あに(모친 위독. 急來[급래]. 兄[형])’
 
112
이런 전보를 받은 날 밤 여는 부랴부랴 一高[일고] 寮[요]의 요한을 찾았다. 그리고 내가 귀국한 뒤의 일을 부탁하였다.
 
113
물론 짐작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일본 각 신문에 김동인가 검속을 당하였다는 보도가 났으매 집에서 거짓으로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짐작은 갔다. 그러나 이런 전보를 받고 또한 그냥 씁쓸히 있을 수도 없었다.
 
114
이튿날 총총히 짐을 꾸려 가지고 여는 귀국의 길을 떠났다.
 
115
부산서 상륙하자 여는 그 엄엄한 경계에 놀랐다. 좌우로 다섯 걸음에 한 명씩 형사로 인정되는 사람이 쭉 늘어서서 있다.
 
116
여는 그 어마어마한 경계에 먼저 가슴이 선뜩하였다. 무론 아무 구애되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도 어마어마하므로 가슴이 서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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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조선일보], 1934.3.31, 4.1,3∼6)
【원문】문단(文壇) 15년(十五年) 이면사(裏面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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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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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 문단 15년 이면사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창조(創造) [출처]
 
  1934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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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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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