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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품에 안겨서 「추월색(秋月色)」을 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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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전후하여 가정과 사숙에서 소학을 배울 때 여름 한철이면 운문을 읽으며 오언절구를 짓느라고 애를 썼다. 즉경(卽景)의 제목을 가지고 오로지 경물을 묘사할 적당한 문자를 고르기에만 골몰하였으니 시적 감흥이라는 것보다는 식자(植字)에 여념이 없었던 셈이다. 오늘의 문학에 그다지 도움된 바 못되나 그러나 표현의 선택이라는 것을 배웠다면 이 시절의 끼친 공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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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남짓해서 신소설 추월색을 읽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야기의 멋을 알고 문학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처음인 듯하다. 추운 시절이면 머리맡에 병풍을 둘러치고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추월색을 번갈아 가며 되풀이하여 읽었다. 건넌방 벽장 속에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가인기우(佳人奇遇) 등속의 가지가지 소설책도 많았건만 그 속에서 왜 하필 추월색이 그다지도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병풍에는 무슨 화풍인지 석류, 탁목조 등의 풍경 아닌 그림이 폭마다 새로워서 그 신선한 감각이 웬일인지 추월색의 이야기와 어울려서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낭만적 동경을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 정임과 영창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동경 상야공원’ 이었으나 웬일인지 그 상야공원이 마음속에서는 서울로만 자꾸 짐작되었다. 어렸을 때에 본 어렴풋한 서울의 기억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데 휩쓸려서 멋대로의 꿈을 빚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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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때에 가친의 뒤를 따라 일가는 서울로 옮겨 왔다. 약관 전에 고향을 떠난 가친은 서울서 수학한 후, 이어 조그만 사관(仕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 등을 번안 저술하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수백 리의 길을 가마 속에서 흔들린 것이다. 25, 6년 전의 서울 ─ 지금으로부터 돌아보면 순전히 이끼 낀 전설 속의 거리로밖에는 기억되지 않는다. 푸른 한강을 조그만 귀웅배로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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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서 찬미가를 부르던 엉크런 양녀의 얼굴이 유난히도 인상적이었다. 저녁때이면 원각사 근처에서 부는 날라리소리가 그 부는 이국적 환영을 싣고 찬란하게 흘러왔다. 모든 객관을 옳게 받아들일 능력이 없고 다만 경이의 눈만을 굴리게 된 어린 마음에 모든 것이 이상한 것으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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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네 살 때의 어렴풋한 기억에다 낙향한 후 어머니에게서 가지가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마음속에 아름다운 꿈의 보금자리가 잡히게 되었으며 그 꿈의 보금자리에 추월색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와서 말할 수 없는 낭만적 동경을 싹트게 한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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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과 영창의 애끊는 이야기는 서울 안에 얼마든지 흩어져 있을 것이요, 그 이야기의 배경되는 가을 달빛에 비취인 ‘상야공원’ 의 풍경 또한 서울의 구석구석에 있으려니 생각되었다. 참으로 추월색이야말로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고 어린 감성에 낭만의 꿈을 부어준 문학의 첫 스승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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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후 열네 살 때에 수학하러 서울로 다시 왔을 때에는 이런 어린 때의 동경의 꿈은 조각조각 부서져 버리고 점차 산문정신에 눈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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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결코 가을 달빛에 비취인 ‘상야공원’ 이 아니었으며, 정임과 영창의 기구한 이야기 또한 길바닥에 흔하게 떨어진 이야기도 아니며 그다지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었다. 환멸이 있고 산문이 있을 뿐이었다. 하기는 그때부터 현실을 알게 되고 리얼리즘을 배우게 되었는지 모른다.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을 때 처음 읽기 시작하고 또 통독한 것이 우연인지 어쩐지 다 제쳐놓고 하필 체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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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5년 전 조선 신문학의 초창기였던 만큼 일반으로 문학열이 지극히 높았던 모양이다. 학교 기숙사 안에서도 전반적으로 문학의 기풍이 넘쳐서 자나깨나 문학이 아니면 날을 지우기 어려우리만큼한 기세였다. 학교의 학과에도 시달리는 형편이면서도 누구나 수삼 권의 문학서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모여만 들면 문학담에 열중하였다. 사(舍) 안에는 학교만 나가면 반드시 훈도가 되어야 할 필정의 의무를 띠인 사범과생이 거의 전수였고, 그들의 목표는 이미 고정된 것이었건만 문학열은 오히려 그들의 독차지인 감이 있었다. 우연히 한 개인의 문학에 능숙한 교유(敎諭)의 지도와 영향을 받았던 탓도 있었겠지만 더 많이 당시의 그러한 필지적 조세(潮勢)에 놓였던 것이 사실이고 루소의 「에밀」을 탐독을 한 것은 오히려 교육적 관심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허다한 노문학서(露文學書)의 섭렵, 각국 번역시의 애독은 비교적 높은 문학적 관심 없이는 못할 노릇이다. 때마침 동경문단(東京文壇)에서는 시가 전성이어서 신조사판(新潮社版)이었던지 ‘하이네’ ‘괴테’ ‘휘트먼’ 을 비롯하여 ‘트라우벨’ ‘카펜터’ 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시인을 망라하다시피 하여 출판한 수진시집(袖珍詩集)이 유행하여 왔었으니 그 수많은 시집들은 애독서 중에서의 가장 큰 부문이었다. 조금 특수한 부문으로는 ‘에머슨’ 과 ‘니체’ 를 거의 전공하다시피 하는 이도 있었다. 소설로는 ‘하디’ 와 ‘졸라’ 등 영불(英佛)의 문학도 읽히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노문학의 열을 따를 수는 없었다. ‘뿌쉬낀’ ‘고골리’를 비롯하여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이 가장 많이 읽히어서 「부활」이나 「그 전날 밤」 등의 이야기쯤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서 사내(舍內)에서는 거의 통속적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섭렵의 범위가 넓어서 기숙사는 참으로 세계문학의 한 조그만 문고였고 감상의 정도로 하여도 다만 제목만 쫓으매 수박 겉만 핥는 정도가 아니오, 음미의 정도가 상당히 깊어서 거개 소인(素人)의 경지를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진귀한 현상이었다. 지금에 문필로 성가(成家)한 분은 불행히 총중에 한 사람도 없기는 하나 특수한 편으로는 그 후 동경 모 서사(書肆)에서 장편소설을 출판한 이도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은 대개 관북인이어서 관북과 문학 ─ 특히 노문학과의 그 무슨 유연관계나 있는 듯이 보이게 하였다. 당시 문단적으로는 관북인으로 파인(巴人)이 시인으로서 등장하였고 서해(曙海)의 이름이 아직 눈에 띠이지 않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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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지내게 된 까닭에 문학적으로 자연 미숙한 감이 없지 않았다. 처음으로 알뜰히 독파한 소설로는 소년 소설 「쿠오레」였다. 구로이와(黑岩淚香) 번안의 「레 미제라블」에서는 파란중첩한 이야기의 굴곡에 정신을 못 차렸고, 하이네시에서는 서정에 취하였고, 그의 번역자인 이쿠다(生田春月)에게서 감상주의를 배웠다. 문학잡지로서 도움이 된 것은 역시 신조사 간행이었던가의 월간지 문장구락부(文章俱樂部)였다. 처음 습작은 시여서 기숙사에서 지낸 몇 해 동안 조그만 노트에 습작시가 가득 찼었다. 사(舍)의 앞과 옆에는 수풀과 클로버의 풀밭이 있어서 늦봄부터 첫여름까지에는 거기에 나가 시집을 들고 눕기도 하고 새까만 버찌를 따서 입술을 물들이고 하였다. 때마침 거리에는 가극단이 와서 「레 미제라블」의 몇 막을 무대로 보이고 연구극단에서는 톨스토이의 「산 송장」 등을 상연하여 문학심을 더한층 화려하게 불질렀다. 어떻든 주위의 자극이 너무도 세었던 까닭에 16, 7세 경에는 세계문학의 윤곽이 웬만큼 머리 속에 잡혔고 세계 문호들의 인명록이 대충 적혔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숙학(夙學)이 도리어 화된 듯도 하다. 섣불리 윤곽을 짐작하게 되고 명작들의 경개(梗槪)를 기억한 까닭에 소성(小成)에 안심하고 그 후 오래도록 많은 고전을 다시 완미숙독(玩味熟讀)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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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의 작품을 거의 다 통독한 것이 고등 3, 4년급 때, 16, 7세 경이었으니 무슨 멋으로 그맘때 하필 체홉을 그렇게 즐겨 했는지 모른다. 미묘한 작품의 향기나 색조까지를 알았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도 개머루 먹듯 하였을 거이나 어떻든 끔찍이도 좋아하여 검은 표지의 그의 작품집과 그의 초상화를 몹시도 아껴 하였다. 좀더 철늦게 그를 공부하였던들 소득이 많았을 것을 잘 읽었던지 못 읽었던지 한번 읽은 것을 재독할 열성은 없어서 지금까지 그를 숙독할 기회를 못 얻은 것은 한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퇴직 육군사관 알렉세이 · 셀게이비치 · 무엇 · 무엇·무엇은……식으로 첫머리가 시작되는 그의 소설을 당시에는 얼마간 어설프고 지혜 없는 시고법(始稿法)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지금으로 보면 그것으로서 충분히 훌륭한 것이다. 이 정도의 당시의 문학안(文學眼)이었으니까 감상에 얼마나 조루가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에게서 리얼리즘을 배운 것은 사실일 것이다. 체홉이 리얼리즘의 대가임은 사실이며, 그의 작품이 극도로 사실주의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그의 작품같이 소설로서 풍윤한 것은 드물다. 아무리 ‘지리한 이야기’라도 소설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것이 그의 문학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하여도 훌륭한 예술일수록 그 근저(根底)에는 반드시 풍순한 낭만적 정신과 시적 기풍이 흐르고 있는 것이니 체홉의 작품이 그 당시의 것으로는 그 전형인가 한다. 그러기 때문에 체홉의 작품에 심취하는 마음과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이나, 혹은 위고의 제작(諸作)을 이해하는 마음과의 거리는 그다지 먼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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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을 읽기 전후의 한 가지의 기벽(奇癖)은 웬 까닭으로였든지 작품에서 반드시 모럴을 찾으려고 애쓰고 교훈을 집어내려고 초조하였던 것이다. 어디서 배운 버릇이었던지 모르겠으나 이 또한 문학 완미에는 큰 장해였으며 당시 문학안의 저열을 말하는 예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햄릿」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작품의 중심되는 모럴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헛되이 애썼으며, 「베니스의 상인」을 읽을 때에는 우정미를 고창하려고 한 것이 제작의 동기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였다. 체홉의 작품을 읽을 때에도 또한 그러하여서 「사랑스런 여인」에서는 사랑의 본능적 욕구라는 훈의(訓意)를 찾아내고서야 마음이 시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 자연의 많은 체홉의 작품을 옳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제작의 진가가 반드시 교훈적인 것이 아니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의 예술적 요소라는 것을 안 것은 물론 훨씬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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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과의 수험을 준비하던 마지막 학년 18세 때 준비 관계를 겸하여 영문으로 ‘셸리’의 시를 탐독하게 된 것이 다시 시에 미치게 된 시절이었다. 글자대로 미쳤던 것이니 그의 단시(短詩)를 기계적으로 모조리 암송하였던 것이다. 진짬 멋을 알고 하였던지 모르나 술에나 취한 듯이 그의 시에 함빡 취하였었다. 기괴한 것은 그 심취는 그의 문학으로부터 든 것이 아니라 그의 용모에서부터 든 것이다. ‘셸리’의 초상화에 반하고 그의 전기에 흥미를 느꼈던 까닭에 그의 문학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우스운 사실이나 그런 법도 있는가 생각된다. ‘셸리’ 에게서 열정을 배웠다면 다음에 아름다운 꿈꾸는 법을 배운 것이 ‘예이츠’ 에게서였다. 그에게 기울인 열 또한 ‘셸리’의 경우에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시들 모두를 따로 외우곤 하였다. ‘예이츠’의 꿈같이 아름다운 것은 없어 시인다운 시인으로 참으로 그는 고금독보(古今獨步)의 감이 있다. ‘예이츠’ 의 다음에 찾은 작가는 ‘싱그’ 였으니 그에게서 다시 아름다운 산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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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에서 산문으로 다시 시에서 산문으로 옮기는 동안에 문학이 자랐으며 꿈과 리얼리티가 혼합된 곳에 예술이 서게 된 듯하다. 아무리 리얼리즘을 구극(究極)하여도 그 속에는 모르는 결에 꿈이 내포되는 법이니 그것이 인간성의 필연이며 동시에 예술의 본질인지 모른다. 조선 문학에서는 추월색 이후 오랫동안 잊었던 낭만의 꿈을 빙허(憑虛)의 「지새는 안개」에서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 작품에서 받은 인상은 유심히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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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과에 들어서부터 창작기가 시작되었으나 오랫동안 혼자 궁싯거렸지 문단과의 인연을 맺을 길은 당초에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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