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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흑기의 우리 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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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2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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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의 우리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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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명제자(命題者)는 좀더 구체적인 성질의 것을 요하였을 것이나, 그것은 아직 시기가 아니라고 봄으로, 그러지 않아도 이런 의미에서 쓰다가 중지한 「한국문단 측면사」의 그 어느 시기의 계속으로 미루기도 하고 여기서는 다만 내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온 사실을 중심으로 그 소위 문단의 암흑시대를 대체적으로 말해 보는 데 그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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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를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일본이 진주만 기습의 오산이 있기 전까지는 그토록 문단은 악조건의 환경에만은 놓여 있지 않았다.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문단은 그저 성장일로로 걷고 있었다. 더욱이 그 직전의 4, 5년 간에 있어서는 자못 그 활기가 전례에 없이 은성거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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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들이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하는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므로 다른 그 어느 부문보다 이 부문에 대한 탄압이 그리 혹심하지는 않았던 데 있었다고 봄이 정당한 평가가 아닐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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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들의 출판에 대한 정책이 그랬거니와, 잡지나 단행본 같은 것은 허가제가 아니요, 검열제이기 때문에 누구나 잡지를 발행할 의사가 있으면 그 잡지의 제호와 아울러 원고를 검열 당국에 제출해서 검열만 받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혹 그 원고 가운데 어떤 부분은 온당치 못하다는 이유로 삭제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면으로 그들의 식민지정책에 항거하는 그러한 종류의 글이 아닌, 말하자면 정치적인 그런 논문이 아닌 순수한 문학 예술의 이론이거나 작품류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그 검열이 관대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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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차츰 발전이 되어 내려오던 문단은 이때에 이르러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등 이 세 신문의 학예면의 꾸준한 활약과,《조선문단》(이학인 속간),《신인문학》(노자영 주재),《삼천리문학》(김동환 주재),《조선문학》(지봉문 편집),《비판》(송봉우 편집),《사해공론》(평화당 발행),《중앙》(중앙일보사 발행), 《조광》(조선일보사 발행), 《신동아》(동아일보사 발행), 《동광》(주요한 주재), 《제일선》(《개벽》정간 처분 후의 그 후신-개벽사 발행), 《신가정》(조선일보사 발행), 《신여성》(개벽사 발행), 《여성》(조선일보사 발행), 《삼천리》(김동환 편집), 《문장》(이○○ 주재), 《인문평론》(최재서 주재), 《신세기》(곽행서 주재)등 잡지가 그 생명은 비록 길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혹은 탄압, 혹은 자멸로) 그것이 명멸하며 계속하며 내려오는 동안, 그동안의 문단의 성장이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수한 작품을 들고 나오는 신인이 끊임없이 해마다 뒤를 이었다. 오늘 현역 중견급의 대부분이 모두 이 어간에 배출되었던 작가로, 지금 우리 문학의 재산의 일부로 지목되는 작품이 또한 거의 이들 중견급의 어간의 작품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단의 작품 수준이 일반적으로 해방 전만 못하다는 것은 이 어간의 작품을 표준하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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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품의 수준을 높이며 성장일로로만 걷고 있던 문단은 1939년도 저물어 가는 12월 8일에 이르러 일본이 진주만을 쳐들어가는 총소리와 같이 일조에 풍상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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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 그들은 총소리를 내어놓고 보니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한 반항정신이 무서웠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은 조선 사람의 민족주의 사상을 깡들어 그 두뇌에서 불식시켜 버리고 일본정신을 주입시키므로 전쟁에 협력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조선민족에게 대한 그 정책의 전부이었다. 게다가 민족적인 사상이 고질처럼 두뇌에 사무친 족속은 특히 문화족속이라고 하여 이 문화족속을 위선 황민화시키라는 것이 그들이 전력을 다하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승산 없는 전쟁에 숨이 가빠 오게 되자, 그 열도는 더했다. 정신뿐이 아니라, 형식조차도 일본 사람이 돼야 한다는 정책 밑에 언어 말살은 물론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갈아야 한다고 소위 창씨를 강요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니, 이런 탄압 속에 문학이니 예술이니가 있을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 협력을 아니 한다는 이유로 조선, 동아의 양대 신문엔 드디어 창씨 마감인 1943년 8월 15일 부로 폐간명령을 내리고, 뒤이어 잡지의 정리로 들어갔다. 자진하여 폐간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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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행을 계속하고 있는 《문장》《인문평론》《신세기》 이 세 잡지의 책임자를 호출하여 이 셋 가운데서 어느 것이든 하나만을 존속시키게 하고 두 잡지는 서로 상의하여 자진 폐간하도록 하라고 재차 명령이 있음에 《문장》은 자진 폐간에 응하였으나, 《인문평론》과 《신세기》는 그 어느 편에서나 양보를 하지 아니하고 계속 간행을 고집하다가 《신세기》는 드디어 강제폐간이 되고 그대로 존속을 하게 된《인문평론》은 《국민문학》으로 개제를 함과 동시에 그 시책에 응하여 일문반(日文半)의 편집으로 협력하는 기관이 아니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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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잡지를 살리는 데만 있었던 욕심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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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녹기연맹(황민운동기관) 기관지《녹기》(본시 일문으로 일인 津田剛[진전강] 주재)와 같이 창작란도 일어를 주로, 그것도 어느 면에 있어서나 전쟁에 협력을 하는 그 소위 국민문학이 아니어서는 안 되는 작품만이 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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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단은 은연중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 일문에 호응을 하는 작가군과 붓대를 꺾어 버리는 작가군이 그것이다. 이들은 서로 이방인시하고 경계하였다. 이제까지 못 하는 이야기가 없이 마음문을 터놓고 불평불만을 서로 토로하므로, 우울한 심정을 풀어 오던 끼리끼리의 사이는 이렇게 일조에 간격이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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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간격이 생기고부터 문단은 완전한 암흑세계로 화하여 버렸다. 아직은 중간적 위치에서 붓대는 꺾지 않고 있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이런 정세에 있어 그 붓끝이 쏟아놓는 글이 문학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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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대를 꺾은 작가는 주목 때문에 서울에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어떠한 구실을 마련해 가지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나 지식분자가 서울서 시골로 내려오면 그 주목이 한층 더하였다. 시달리다 못해서 다시 짐을 꾸려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본시 서울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이 시골로 내려갔던 사람이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 이제라도 어떻게 배겨날 수가 있을 것인가. 갈 데가 없으니 운명에나 몸을 맡겨 보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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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있어서 근로정신을 고취한 농민물 같은 것이, 전연 이 방면에는 붓을 대지 않던 몇몇 작가에게서 제작이 되었다. 내 자신 것으로 말하더라도 「시골 노파」「묘예」「불로초」같은 것이 그것으로, 글을 아니 쓰게는 못 되고, 그렇다고 뜻에 없는 붓대는 놀릴 수가 없고 해서 근로정신으로 협력을 가장하자는 데서 이런 작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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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에 역사소설과 야담류가 나오게 된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의미에서 양심상 전쟁에 협력하는 글은 차마 쓸 수가 없고 해서 전쟁물이라 빙자하고 집필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한 예로 김동인 씨의 「백마강」같은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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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국이 이들을 참으로 전쟁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일문으로 쓰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그 신(信), 불신(不信)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혹 오십보 백보의 차이는 가지고 있었을는지 모르나 도대체 그들은 조선 사람으로서 문화인이라면 진심으로 이 협력을 하는 부류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는 이들 문인으로 하여금 전쟁에 대한 인식을 깊이기 위하여 또 하루라도 지원병훈련소에 입영을 하여 군대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문인보국회에서는 문단인 전원에 일일입영장을 떨렀다. 여기에 거역하면 신변이 위험하다. 이에 거의 전원이 참가하다 싶은 대열을 지어 가지고 일일의 입영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휴식 도중에서 인솔자는 미리 이런 계획을 세워 두었던 모양으로 일장의 훈시를 베풀었다. ―조선 사람의 나갈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그 길이란 일본 사람이 되는 길이니, 만일 이 길로 가지 아니하고 딴 길로 가게 된다면 일본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종로 네거리에 기관총 한 대만 비쳐 놓으면 알아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방침인 것으로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알려 드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상이 나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아마 불일 내로 검거가 있을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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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그런 검거선풍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늘 그런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이라 이제 그런 소리를 직접 듣고 나니 검거선풍은 예측만이 아니요, 반드시 앞으로 있을 것이란 것을 알게 되고 문인들 사이에서는 그 해당자 가운데 자기도 들 것인가, 자기가 종래에 가져오던 태도를 분석해 보는 등 불안한 공포 속에서 며칠을 지나 오던 중 드디어 검거선풍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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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의 검거선풍은 딴 사건으로서의 선풍이었으나, 이 사건은 다만 검거의 구실이요, 그 실에 있어서는 기일 전의 그 검거설의 구체화라고 문단은 도가니 속처럼 절절 끓었다. 이 선풍의 제일 선두로 휩쓸려든 것이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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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황민운동에 가담한 작가를 밉게 본 어떤 문인이 이모 작가에게 투서를 하였는데 그 투서 속에 나도 모 작가를 욕한 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또 천황폐하에게 불경을 하는 것이 되는 문구가 들어있어, 이 투서인은 나를 아는 사람으로 되어 있으므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나를 붙들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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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다 그러한 말로 모 작가를 욕한 기억이 없었다. 누가 그런 투서를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럼 너와 가장 가까운 문인이 누구누구이냐고 따지어 묻기에 친한 몇 사람만을 지적하였다가는 또 그 사람들이 붙들려 들어와 욕을 볼 것 같아서 대개 문단인이라면 같은 정도로 다 친한 사이라고 한 40여 명 열기(列記)를 해 놓았더니 담당 취조자인 濟賀[제하] 주임은 자기의 임의로 그 40여 명 가운데서 취사선택을 하여 한 10명 정도를 위선 붙들어 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 선풍은 이들이 붙들리는 선풍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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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비석이 가장 지독한 고생을 하였다. 일이란 참으로 묘하게 되는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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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정비석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 40여 명의 열기에서 그의 이름은 써 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내가 거기서 빼어 놓게 된 것이 도리어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내 집을 수색하고 친지로 부터 받은 편지를 전부 걷어간 그 속에서 정비석의 편지도 있음을 발견하고 그도 나와 친한 사이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 편지가 또 말썽을 일으키게 되려니까, 고향은 용천(龍川)양시로 내려가서 무사히 내려왔다는 인사장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발신국인 양시 우편국의 일부인이 찍혀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투서는 정비석의 장난으로, 그가 투서를 하고는 그것이 발견되면 자기는 서울에 그 당시 없었다는 변명자료를 삼기 위하여 서울에 있으면서 양시로 내려간 것처럼 그런 편지를 양시 주소로 나에게 보낸 것이라고 경찰부에서는 단정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40여 명 열기 속에서 뺀 것도 그에게 투서의 의심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빼어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나도 공모의 한 사람으로, 만일을 위한 변명자료를 삼기 위하여 일부러 내 이름을 그 투서 속에 집어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버쩍 생겼다. 이러한 의심을 사게 된 데다가 그 투서의 일부인 또한 서대문우편국 것이 찍혀 있어서 투서인은 서대문 구내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정비석과 나 또한 서대문 구내에 살았던 것이다. 의심을 받을 대로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이때에 욕을 착실히 보았거니와 정비석은 그 소위 비행기 고문까지 받다가 한쪽 팔이 어깻쭉지에서 물러나게 되는 등 지독한 고생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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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검거선풍은 내가 그 주인공으로 모델이 되어 어떤 작가의 붓끝에서 뒤이어 곧 창작화 되었다. 「靜かな嵐」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 작품이 주인공 고영목은 나의 이름 ‘계용묵’이라는 한자음을 비슷하게 따다가 이 사건에 실감을 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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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구러 문단은 뒤끓었다. 안○남에게는 구주탄광으로 징용장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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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행회가 열린다. 내일은 또 누구에게 징용장이 떨어져 장행회가 열리는지 모른다. 한편 김동인 씨가 헌병대에 검거되었다. 문학이고 무엇이고 없었다. 그 하루를 무사히 지내기에 교묘한 처신법은 없을까하는 것이 누구나가 품게 된 불안이요 공포였다. 어떻게 하루를 무사히 지내고 나면 기어코 밤은 또 밝아서 그 하루의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김동인 씨의 검거가 더욱이 그런 생각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검거의 이유가 우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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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내가 그 현장을 목격하였거니와 석인해와 둘이서 삼천리사로 박계주 씨를 찾아갔었는데 우리가 들어서자 곧 우리 뒤를 따라 김동인 씨가 들어오며 무두무미(無頭無尾)로 좌중을 향하여 한다는 소리가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 하는 거야.” 하는 한마디를 불쑥 남기고 전화통을 들더니 “중국영사관까지 알아보아서도 걸 못 구해서.” 하고 자기의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이것이 말썽이었다. 후자는 물론 말썽이 될 것도 없는 것이고 전자가 말썽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듣기에도 임전보국단이 왜 그리 무력하느냐는 말로 들었거니와, 김동인 자신도 그런 의미로 한 말인데 그 자리에 와 앉았던 헌병대 형사는 임전보국단이라는 존재는 대체 무슨 필요로 있는 것이냐 하는 말로 해석을 하고 반전론자로 취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즉석에서 헌병대로 연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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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잘것없는 이야기 한 마디가 검거의 이유가 되는 것을 볼 때 그맛 정도의 이야기라면 우리도 어느 좌석에서나 일상 하고 지나는 이야기다. 입이 없다면 모르지만 이만한 이야기는 아니 하고 지나는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야기마다가 검거 대상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검거도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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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혹 누구를 만나더라도 피차에 인사말까지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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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세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때에 있어 한 가지 특기할 것은 한글 출판물이라면 날개가 돋친 듯이 팔리던 사실이다. 아니 이것은 이러한 정세에 처하게 되므로 민족의 영원한 앞날을 위하여 언어말살 정책에 대한 무언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입으로는 우리말을 자손에게 전할 수가 없이 되었으니 글로라도 보관을 하였다가 후일 전하자는 것이었다. 보려고 사는 책이 아니라 쌓아 두려고 사는 책이었다. 그 출판물의 종류가 여하한 것임을 불문하고 우리의 글이었으면 샀다. 역사물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욱이 만주나 이런 외지에 나가 있는 동포로부터의 주문이 더 극성스러웠다. 서점 창고에서 먼지 속에 뒹굴던 유행가 나부랭이 같은 것도 남기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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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나는 징용이 무서워 기류계를 정회(町會)에서 빼 놓고 모 출판사에다 거처를 숨기고 불안 속에서 출판 일을 보면서 『조선전설집』이라는 것을 편집하여 경무국 도서과원을 끼고 검열을 통과시켜 내다가 출판 월여에 수만 부를 팔아 본 잊을 수 없는 사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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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의 출판물 검열 상황을 잠깐 말해 본다면 그것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였다.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의 차제의 검열이라, 그 까다로움이 물론 전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출판물 대상이 전쟁을 훼방하는 것이 아닌 한 통과시켜서 검열이 별반 책임 문제가 되지 않을 그런 성질의 것이라면, 물론 이런 것도 용지난으로 불허가 방침으로 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교제 여하에 달렸던 것이다. 이런 교재를 받는 것은 검열원의 정신의 부패를 말하는 것이었다. 원고를 검열에 넣으면 그들은 교제를 받을 생각부터 먼저 하였다. 그 교제를 받는 방법은 경우에 따라 방식이 달랐지만,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화로 그 원고의 취하 통고를 하였다. 그 통고는 교제를 하라는 암시인 것이었다. 그러면 출판사 측에서는 벌써 그 취하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 원고가 누구의 손에 걸려 있는가를 탐지해 가지고 그날 저녁으로 이 전쟁 하에서 생활필수품으로 가장 구하기 힘든 그런 종류의 것을 구해 가지고 가정방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만인 것이었다. 전시라 피차 생활이 곤궁할 것이니 그럼 취하는 아니 하기로 합니다, 고 하는 의미의 대답이 누구의 입으로서나 꼭같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 전이라고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으나 그것은 전시에 와서 더욱이 더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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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교제만 하면 십중팔구는 검열을 얻어내 올 수가 있는 것이므로 출판사에서들은 한참 한글 출판물이 날개가 돋친 판이라 어떻게 해서든지 출판을 하여 보려고 그들의 이런 부패한 정신을 이용하여 한동안 출판이 기세를 올리게 되는 기현상을 자아낸 적도 있었다. 새로이 창작 같은 것을 하지는 못해도 이미 발표했던 것을 모아서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온 창작집과 시집이 꽤 많았다. 2, 3삭 내외에 내 손으로 직접 편집이 되어 나온 창작집으로도 위선 내 것으로 『병풍에 그린 닭이』를 위시하여 채만식 씨의 『집』, 이무영 씨의 『흙의 노예』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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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한편 전쟁에 협력을 하는 일문 창작에는 그 우수작에 조선 총독상이 걸리게 됨과 동시에 작가들에게 일문을 강요하였다. 일문으로는 창작을 쓸 능력이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의 일문은 중학 졸업 정도로 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 가지고야 어디 작가 행세를 할 수 있겠느냐, 한글로 쓰면 일류급에 속하는 작가가 삼사류급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니 처신상 당장으로는 쓸 수가 없고 다시 일어 공부를 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변을 하였던 모 작가는 그런 이론은 비국민의 사상이라는 공박을 받고 전에 다른 주목만 받게 되었을 뿐, 아무런 효과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방침은 방침대로, 그대로 나아갔다. 조선 사람의 일어는 중학 졸업 정도로 충분하다는 방침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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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강요를 소설가 田中英光[전중영광]라는 일인으로부터 수차 받은 적이 있거니와, 문단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한글로서의 창작은 씨도 볼 수 없이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직 황민화의 단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 문인에게 짊어진 일이었다. 황도학회라는 것이 발기되었다. 이 기관에서 문화인은 일본 정신을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강사로는 경성제대의 교수진으로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조선 사람의 두뇌에다는 젖을 먹여서 키울 때 그 젖과 같이 일본정신을 먹여야 하겠다. 특히 부인들에게 요청하고 싶다고 부인들의 좌석편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던 그 수염이 텁수룩한 밉상스러운 일본학의 권위라던 뚱뚱보 영감쟁이가 지금도 눈앞에 선히 보인다. 그리고 손바닥과 손바닥을 합하여 읍하고 천황폐하 만만세를 황은에 감읍하는 눈물이 흘러 내리기까지 흔들 때 불러야 한다는 그 소위 ‘미소기’라는 것을 강요받으며 눈물이 흘렀나의 검사까지 받게 된 것도 문학을 하였기 때문에 겪어볼 수 있었던 우리들이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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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지〕《현대문학》통권 26호(1957. 2.)
【원문】암흑기의 우리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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