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래도 이때나 저때나 하고 골라 보는 눈에 光海主[광해주]의 신임을 받아서 북방을 鎭定[진정]하고 앉아 있는 平安監司[평안감사] 朴曄[박엽]이라는 이가 꽤 잘나게 보였읍니다.
3
그런데 光海主[광해주] 시절에 北人[북인]이라는 정당이 권세를 잡았다가, 자기 분열 작용으로 大北[대북] ․ 小北[소북]의 둘로 나뉘매, 한참 동안 납작하였던 西人[서인]이라는 정당이 이 틈을 타서, 大北[대북] 小北[소북]할 것없이 北人[북인]들을 죄다 내몰고, 仁祖[인조]라는 어른을 내어 모시고 새 정권을 세우는 통에, 光海主[광해주]란 양반이 불쌍한 희생이 되어 쫓겨나시고, 그 신임을 받아서 신정권의 異分子[이분자]로 인정되는 모든 사람을 집어치울새, 맨 먼저 칼을 받은 이가 大兵[대병]을 가지고 위력이 일방에 떨치는 平安監司[평안감사] 朴曄[박엽]일밖에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서울서 光海主[광해주]가 江華[강화]로 쫓겨나가실 때에는, 朴曄[박엽]의 머리가 이미 大同江[대동강] 모래밭에 뒹굴게 되었읍니다.
4
이 朴曄[박엽]이란 이의 실제 인격은 얼마나 하였든지 모르지마는, 원채 잘나기도 하였고, 불쌍하게 죽은 것이 일반의 동정을 사기도 하여, 민중의 그를 추모하는 마음이 날로 깊은 동시에, 마침내 丁卯虜亂[정묘노란]이니 丙子胡亂[병자호란]이니 하는 기막히는 일을 당할수록, 朴曄[박엽]이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민중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그림자를 갈수록 커다랗게 확대해 간 양하여, 朴曄[박엽]은 어느 틈에인지 이인이 되고 신명이 되고 또 그의 없어진 것이 淸太祖[청태조]의 제국 건설을 가능케 한 것쯤으로 생각하게까지 되었읍니다. 미상불 이야기에 있는 朴曄[박엽]은 조선사상에 드물게 보는 일대 영웅이었읍니다. 이를테면,
5
朴曄[박엽]은 본래 將略[장약]이 있고, 천문·지리로부터 陰陽術數之學[음양술수지학]에까지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光海主[광해주]의 동서로서 平安監司[평안감사]를 해 가지고 一○[일○]년 동안 갈리지를 아니하여 위엄이 관서에 행하니, 북방의 되놈이 두려워하여 감히 변방 가까이 들어오지를 못하였다.
6
하루는 部下人[부하인]을 불러서 주효를 장만하여 내어 주어 가로되,
7
「이것을 가지고 中和[중화]의 駒峴[구현] 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으면, 필시 건장한 마부 두 사람이 지나갈 것이니, 네가 나의 말로써 전갈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나라로 내왕한 지 시방 몇 달에 다른 사람이 다 모르지마는 나는 다 알고 있느니라, 돌아다니다가 수고스러울 듯하기에 이렇게 주효를 보내는 것이니, 한번 잔뜩 먹어 취하여 속히 돌아감이 가하니라고 하여라」
8
하거늘, 부하인이 駒峴下[구현하]에 가서 기다리고 있은즉, 과연 그런 사람 둘이 지나므로 하라는 대로 말을 전하니, 二[이]인이 서로 보고 안색이 핼쓱하여 가로되
9
「저희들이 이렇게 내왕하온들 어찌 감히 장군을 만홀히 여기오리까. 장군은 과연 신인이시니, 장군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다시 들어올 마음을 먹지 않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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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 주식을 받아 먹고 가니, 이 두 사람은 龍骨大[용골대]와 馬夫人[마부인]로서, 가만히 우리 나라에 와서 허실을 탐지하고 다닌 것이며, 혹은 말하기를 조선인의 모양으로 承政院[승정원]에 使令[사령]을 다녔건마는, 사람들이 다 모르고 朴曄[박엽]이만 알았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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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曄[박엽]이 하루는 수청든 嬖妓(폐기)더러 일러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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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저녁에 나를 따라서 어디 가서 壯觀[장관]의 구경을 한 번 하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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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밤이 되매, 曄[엽]이 스스로 靑騾(청라)를 끌어내서 鞍裝[안장]을 지우고, 그 기생을 앞에 놓고 綿紬(면주) 온 疋(필)로 그 허리를 묶어서 자기 신상에 단단히 잡아 매고, 눈을 꼭 감고 있으라 하고서, 그만 채찍을 쳐 가매, 귓가에 다만 바람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17
한 곳에 이르러서는 기생으로 하여금 눈을 뜨라 하므로, 기생이 눈을 뜨고 정신을 수습하여 보니, 허허벌판에 장막이 하늘에 닿아 있고, 燈燭[등촉]이 휘황하거늘, 曄[엽]이 기생더러 겁내지 말고 보고 있으라 하는지라, 기생이 벌벌 떨면서 장막중 좌판 밑에 엎드려 있은즉, 曄[엽]이 우뚝하게 혼자 앉아 있는데, 조금 있다가 꽹과리를 꽹꽹 두드리고 오랑캐의 인마가 천 명인지 만 명인지 모르게 풍우 지쳐 들어오더니, 그 중의 대장이 말을 내려 칼을 짚고, 장막으로 들어와서 가로되,
22
「오늘은 가히 검술을 시험하여 승부를 결단하리라」
25
하고 칼을 짚고 마루에서 내려와서 오랑캐의 장수로 더불어 벌판 가운데 마주앉아서 검으로 서로 치고 찌르고 하는 듯하더니, 금세 양인이 화해서 白虹[백홍]이 되어서 공중으로 솟아 올라가더니만, 공중에서 후다닥 제꺽 하는 소리가 한참 나다가, 이윽고 胡將[호장]이 땅에 떨어져 넘어지고, 曄[엽]이 공중으로 내려와서 胡將[호장]의 가슴을 가로타고 물어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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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다시는 감히 맞서지를 못하리이다」
29
曄[엽]이 웃고 일어나서, 같이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오라 하여 서로 마시고, 胡將[호장]이 먼저 일어나 하직을 고하매, 胡騎[호기]들이 아까처럼 저희 장수를 휩싸고 풍우같이 몰아 가더니, 두어 마장을 채 가지 못하여 一聲砲響[일성포향]에 허다한 오랑캐 군사가 사람· 말 할 것없이 다 하늘로 쏠려 올라가서, 烟燄(연염)이 하늘을 덮고 다만 胡將[호장] 한 사람이 남아서 다시 와서
31
한대, 曄[엽]이 고개를 끄덕여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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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하여 기생을 불러내어 靑騾[청라]를 타고 올 때처럼 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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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개 金[금]나라 汗[한]이의 아비, 곧 淸太祖[청태조] 노라치(魯花赤)의 군사를 調練[조련]하는 곳이요, 胡將[호장]이 곧 노라치인데, 이 때에 다년 훈련한 數萬騎[수만기]가 일시에 죄다 타 죽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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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이야기도 있읍니다. 과연 이럴 수가 있다 하면 나폴레옹의 슈르메스터와 歐洲[구주] 대전의 마타하리도 朴曄[박엽]의 앞에서는 수족을 놀리지 못할 것이며, 아메리카의 블랙체임버와 소비에트 연방의 G·P·U 도 朴曄[박엽]이 세상에 있으면 얼른 폐업을 해야 할밖에 없다 할 것입니다. 朴曄[박엽]은 높은 벼슬과 樞要[추요]한 지위에 있던 이이니까 물론 숨은 사람이 아니지요마는, 그 그런 줄을 그의 생전에는 잘 모른 점에서 또 그 신통한 재주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점에서는, 또한 한 隠君子[은군자]라고 볼 만도 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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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계해] 三[삼]월에 仁祖大王[인조대왕]이 들어서시니, 朴曄[박엽]이 혼자 燭下[촉하]에서 칼을 만지면서 한숨을 쉬더니, 창외에 기침 소리가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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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네 생각에는 어찌해야 하겠느냐?」
45
「소인에게 상중하 三策[삼책]이 있사오니, 그 중에서 골라 쓰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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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道[사도]께서 군사를 일으켜 반하여서 북으로 金人[금인]을 결탁하시면 臨津江[임진강] 이북이 조정의 것이 아닐 것이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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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급히 三[삼]만병을 내어서 소인이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오면 승패의 수를 알 수 없으리니 이것이 中策[중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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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道[사도]께서 대대로 국록을 잡수신 신하시라, 순히 나라의 명을 받으심이니 이것이 하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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曄[엽]이 잠자코 한참 있다가 한숨지어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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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면 소인은 이로 부터 하직을 여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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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 사람이 그만 부지거처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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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중의 의사로 말하면, 한 번 朴曄[박엽]으로 하여금 북방 오랑캐를 저항하게 하여 보았더면 하는 嗟嘆(차탄)이 그이를 이러한 모양들로 이야기의 세계에 모셔 두게 되는 중에 丁卯年[정묘년]·丙子年[병자년]의 두 번 난리가 거푸거푸 일어나서, 그대로 현실상의 적막을 느끼는 민중이 더욱 이야기의 영웅을 만들어 내기에 솜씨를 보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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