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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기(統一期)의 신라(新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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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3
최남선
1
統一期[통일기]의 新羅[신라]
2
─ 現[현] 朝鮮[조선] 國土[국토][급] 文化[문화]의 嬰兒期[영아기]
 
3
[목][차]
 
4
統一新羅[통일신라]의 外交[외교] 關係[관계]
5
政敎[정교]의 弛緩[이완]
6
貿易的[무역적] 制海[제해], 張保皐[장보고]
7
憲康王[헌강왕]의 盛代[성대], 文藝[문예]의 蔚興[울흥], 鄕歌[향가] 三代目[삼대목]·崔致遠[최치원]
8
流賊[유적]의 蜂起[봉기], 弓裔[궁예]·甄萱[견훤]
9
王建[왕건]의 高句麗[고구려] 復興運動[부흥운동]
10
統一新羅期[통일신라기]의 文化[문화]
11
佛敎[불교]의 古神道[고신도] 攝收[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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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間[민간] 雜俗[잡속]의 成立[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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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調[시조]와 雜歌[잡가]·風水說[풍수설]·道詵[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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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新羅[통일신라]의 外交[외교] 關係[관계]
 
15
太宗王[태종왕]으로부터 惠恭王[혜공왕]까지 八代[팔대] 一二七[일이칠]년간을 新羅人[신라인]은 中代[중대]라 하고, 그 以前[이전]을 上代[상대]라 하며, 그 以後[이후]를 下代[하대]라 하였는데, 中代[중대]는 新羅[신라]의 全盛時期[전성시기]요 온갖 方面[방면]으로 국민의 意氣[의기]가 한껏 昻騰[앙등]하였던 時期[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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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時期[시기]의 特色[특색]은 三國[삼국] 統一[통일]로써 外面的[외면적]의 일이 一段落[일단락]을 告[고]하였으며, 어떻게 新羅[신라]다운 內容[내용]을 만들까 하여 이러쿵저러쿵 애를 씀에 있었으니, 그리하여 內修粧[내수장]에 바쁜만큼 外交[외교] 方面[방면]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唐[당]나라에 대한 관계는 惰力的[타력적]으로 繼續[계속]하는 一邊[일변]에, 다른 外國[외국]에 대하여는 도리어 잊어버리려 하고, 또 할 수 있으면 물리치려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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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日本[일본]에 대하여는 自來[자래]로 流寇[유구] 其他[기타]의 관계로 好感[호감]이 있지 아니한데, 가까이는 百濟[백제] 攻伐[공벌]의 際[제]에 百濟[백제]의 뒤를 보아 주기도 하고, 또 百濟[백제]의 亡民[망민]이 많이 日本[일본]으로 들어가서 新羅[신라]에 대하여 不利[불리]한 企劃[기획]을 많이 하기도 하며, 또 日本[일본] 自身[자신]도 統一新羅[통일신라]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情[정]을 품고 여러 가지 防備[방비]를 對岸[대안]에 베풀기도 하므로 겸두겸두 新羅[신라]의 日本[일본]에 대한 感情[감정]은 자못 좋지 못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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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神文王代[신문왕대]와 聖德[성덕] 初年[초년]까지도 피차 使節[사절]의 交換[교환]이 있었지마는, 聖德王[성덕왕] 中年[중년]에 兩國[양국] 衝突[충돌]이 있자 이 뒤부터는 日本[일본]으로서 使臣[사신]이 뻔하게 왔지마는 한참 동안 接見[접견]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惠恭王[혜공왕] 때에 이르러 잠시 國交[국교]를 回復[회복]하여, 金庾信[김유신]의 玄孫[현손]이요 學識[학식]으로 들린 金巖[김암]과 元曉[원효]의 孫[손], 薛聰[설총]의 子[자] 薛仲業[설중업] 같은 이가 使節中[사절중] 섞여 가서 厚待[후대]받은 일이 있기도 하나, 이 뒤에는 兩國[양국]의 交聘[교빙]이 아주 끊기고, 서로 武備[무비]를 닦기에만 汲汲[급급]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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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敎[정교]의 弛緩[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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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통일] 以後[이후] 백여 년을 지내서 國民[국민]이 점점 安逸[안일]에 익고, 政治[정치]·經濟[경제] 兩方[양방]으로 中央集權[중앙집권]이 行[행]하여 政權[정권]에 대한 慾望[욕망]이 刺戟[자극]되고, 또 王族[왕족]이 繁衍[번연]하여 각기 地步[지보]를 다투게 되매, 惠恭王[혜공왕] 以後[이후]로는 政權[정권]의 爭奪[쟁탈]이 激烈[격렬]히 行있[행]하여, 九代[구대][육]○년간에 다섯 번 王位[왕위] 爭奪[쟁탈]이 있었읍니다. 이러하는 동안에 國民[국민]의 元氣[원기]가 갈수록 消磨[소마]하여 人物[인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元聖王[원성왕][사]년(西[서] 七八八[칠팔팔])에는 讀書出身科[독서출신과]를 두어서 從來[종례]의 花郞道[화랑도]로 發身[발신]하는 外[외]에, 單[단]히 文學[문학]만으로써 仕路[사로]에 나감을 얻게 하니, 이것은 文學[문학]이 盛行[성행]함에서 나온 自然[자연]한 結果[결과]이지마는, 이 때문에 文弱[문약]의 風[풍]이 차차 誘導[유도]되고, 唐朝[당조] 慕仰[모앙]의 思潮[사조]도 文學[문학]을 통하여 더욱 漲進[창진]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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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변 佛敎[불교]의 流行[유행]도 갈수록 隆盛[융성]하였으나, 前[전]과 같이 護國濟民[호국제민]의 實行的[실행적] 氣魄[기백]을 볼 수 없이 되고, 다만 寺刹[사찰]의 濫設[남설]과 像設[상설]의 侈麗[치려]가 國帑[국탕] 民財[민재]를 耗損[모손]하며 僧徒[승도]의 增加[증가]가 遊食[유식] 閒民[한민]의 增加[증가]를 意味[의미]하여, 國家[국가] 經濟上[경제상] 弊端[폐단]이 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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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莊王[애장왕][칠]년(西[서][팔]○六[육])에는 詔令[조령]을 내리어 佛寺[불사]의 新創[신창]을 禁[금]하고, 또 錦繡[금수]로써 佛事[불사]를 함과 金銀[금은]으로써 器用[기용]을 만듦을 禁[금]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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貿易的[무역적] 制海[제해], 張保皐[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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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國民[국민] 精神[정신]의 弛緩[이완]과 經濟力[경제력]의 衰損[쇠손]으로 因[인]하여, 新羅[신라]의 國運[국운]은 차차 衰頹[쇠퇴]로 기울어졌읍니다. 이 期間[기간]에 있어서 鷄羣[계군]의 一鶴[일학]처럼 홀로 昻然[앙연]한 氣勢[기세]를 擧揚[거양]한 者[자]에 貿易家[무역가] 張保皐[장보고]가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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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保皐[장보고]는 일찍 唐[당]에 가서 軍中[군중] 小將[소장]이 되었다가, 海上[해상]의 商利[상리]가 唐人[당인]에게 있고 일변 新羅[신라] 沿海[연해] 人物[인물]의 掠去[약거]됨이 많음에 憤慨[분개]하여, 歸國[귀국]한 後[후]에 王[왕]에게 請[청]하여 衆[중] 萬人[만인]으로써 淸海道[청해도](今[금] 全羅南道[전라남도] 莞島[완도])에 留[유]하여 차차 海上權[해상권]을 手中[수중]으로 거두어, 唐人[당인]의 線影[선영]이 新羅[신라] 海岸[해안]에 거치게 하고, 淸海[청해]를 中心[중심]으로 하여 支那[지나]의 南海岸[남해안] 一帶[일대]와 日本[일본]의 西海岸[서해안] 一帶[일대]에 뻗친 海上[해상] 交通[교통] 및 貿易[무역]을 專管[전관]하여, 그 豪富[호부]가 비길 데 없었으며, 支那[지나]의 山東半島[산동반도]로부터 江淮之間[강회지간]에 이르기까지 到處[도처]에 그 事務所[사무소]가 있고, 그 根據地[근거지]인 登州[등주]·赤山[적산]에는 法華院[법화원]이란 寺院[사원]을 베풀어 敎化的[교화적] 連絡[연락]의 中介[중개]를 삼기까지 하여, 그 國際的[국제적] 權威[권위]와 信用[신용]이 자못컸으며, 當時[당시]의 日本[일본]이 唐[당]을 交通[교통]함에도 張氏[장씨]의 船隻[선척]과 周旋[주선]을 힘입음으로써 便利[편리]타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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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뒤에 民生[민생]이 困瘁[곤췌]해지매, 이 海上[해상] 知識[지식]이 日本[일본] 侵掠[침략]의 示唆[시사]가 되어, 新羅[신라] 末年[말년]에는 日本[일본]의 西南[서남] 諸地[제지]에서 新羅[신라] 侵掠船[침략선]의 괴로움에 이기지 못하여, 그 朝廷[조정]이 祈禱[기도]·功德[공덕] 등으로써 이 禍厄[화액]을 免[면]하고자 하게까지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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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康王[헌강왕]의 盛代[성대], 文藝[문예]의 蔚興[울흥], 鄕歌[향가] 三代目[삼대목]·崔致遠[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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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外[해외] 貿易[무역]의 隆盛[융성]과 國內[국내] 農桑[농상]의 勸勵[권려]와 또 土木[토목] 및 奢侈[사치] 禁斷[금단] 등으로 하여 國民[국민] 經濟[경제]의 狀態[상태]는 한때 恢復[회복]하여, 憲康王代[헌강왕대](西[서] 八七五[팔칠오]∼八八六[팔팔육])쯤은 都城[도성]의 景況[경황]이 前[전]보다도 繁昌[번창]하여, 城中[성중]에 茅屋[모옥]이 없고 歌吹[가취]가 길에 널리어서 晝夜[주야]에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王[왕]도 자주 臨海殿[임해전]·鮑石亭[포석정]에 燕饗[연향]을 베풀었으며, 이중에 音曲[음곡]이 와짝 進步[진보]하여 海神[해신]·處容舞[처용무]·山神舞[산신무]·地神舞[지신무] 등이 다 이때에 생겨났으며, 鄕歌[향가]의 流行[유행]이 또한 盛[성]하여, 次代[차대] 眞聖王[진성왕]의 때에는 (王[왕][이]년 西[서] 八八八[팔팔팔]) 鄕歌[향가]의 大家[대가][승] 大矩[대구]를 命[명]하여 <鄕歌[향가] 三代目[삼대목]>을 勅撰[칙찬]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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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貴紳[귀신] 사이에 唐[당]나라의 留學[유학]이 盛[성]하고 漢文學[한문학]이 立身[입신]의 큰 階梯[계제]를 짓게 된 뒤로 國文[국문]은 차차 壓倒[압도]되어, 마침내 發達[발달]이 阻滯[조체]하게 되었읍니다. 唐[당]에 가서 留學[유학]한 이 中[중] 그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여 榮職[영직]을 얻은 者[자]가 많은 中[중], 金可紀[김가기]·崔致遠[최치원]은 특히 著名[저명]하며, 더욱 崔致遠[최치원]은 十二[십이]에 渡唐[도당]하여 十八[십팔]에 巍科[외과]에 이기고, 叛賊[반적] 黃巢[황소]를 討[토]하는 檄文[격문]을 지어서 文名[문명]이 天下[천하]를 흔들었으며, 그 支那[지나]에서 職務上[직무상]으로 草[초]한 文字[문자]를 蒐集[수집]한 <桂苑筆耕[계원필경]>은 시방도 支那[지나] 詞苑[사원]에 傳玩[전완]됩니다. 崔致遠[최치원]은 號[호]를 孤雲[고운]이라 하니, 憲康王[헌강왕] 十一[십일]년(西[서] 八八五[팔팔오])에 歸國[귀국]하여 크게 經綸[경륜]을 行[행]하려 하였으되, 衰季[쇠계]한 世代[세대]라 猜疑[시의]가 많아서 뜻을 얻지 못하고, 翰墨[한묵]과 山水[산수]로써 一生[일생]을 마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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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賊[유적]의 蜂起[봉기], 弓裔[궁예]·甄萱[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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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康王代[헌강왕대]의 富盛[부성]은 一時[일시]의 鍍金[도금]과 같아서 오래 지니지 못하고, 思想的[사상적] 靡爛[미란]·卑屈[비굴]과 道義的[도의적] 頹惰[퇴타]와 經濟的[경제적] 荒廢[황폐]에 因[인]한 新羅[신라] 衰亡[쇠망]의 機運[기운]은 眞聖王代[진성왕대]에 들어서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되었읍니다. 眞聖王[진성왕]은 女主[여주]로 昏暗[혼암]하고 侫倖[영행]이 國政[국정]을 맡아서, 그렇지 않아도 풀어졌던 網紀[망기]가 더욱 말못되고, 諸州郡[제주군]이 貢賦[공부]를 바치지 아니하여 國庫[국고]가 비게 되매, 드디어 盜賊[도적]이 四方[사방]에 일어나게 되었읍니다. 그중에 北原[북원](今[금] 原州[원주])에 據[거]한 梁吉[양길]이 가장 有勢[유세]하더니, 新羅[신라] 王族[오아족] 중의 弓裔[궁예]란 者[자]가 그에게 덤비매 自己[자기]는 南方[남방] 忠淸[충청] 方面[방면]의 經略[경략]을 主[주]로 하고, 東方[동방]의 일을 弓裔[궁예]에게 맡기었읍니다. 이에 弓裔[궁예]가 士卒[사졸]과 甘苦[감고]를 같이하여 크게 部下[부하]의 歡心[환심]을 얻고, 兩三年間[양삼년간]에 江原道[강원도]의 大部[대부]를 服屬[복속]하여 勢威[세위]가 크며, 다시 松岳郡人王建[송악군인왕건]을 얻어서 京畿道[경기도] 地方[지방]의 略取[약취]에 힘쓰게 하여 疆土[강토]가 넓어지니, 梁吉[양길]이 이를 보고 怒[노]하여 討滅[토멸]하려하다가 도리어 그 逆襲[역습]을 만나서 敗亡[패망]해 버리고, 弓裔[궁예]가 드디어 北方[북방]의 大勢力[대세력]을 이루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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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裔[궁예]의 一邊[일변]에 新羅[신라] 西南海[서남해]의 武將[무장]이던 甄萱[견훤]이 扳[반]하여, 武珍州[무진주](今[금] 全南[전남] 光州[광주])를 빼앗아서 自立[자립]하고, 全羅[전라]·慶尙[경상]의 諸郡縣[제군현]을 服屬[복속]한 後[후], 孝恭王[효공왕][사]년(西[서][구]○○)에 都[도]를 完山[완산](今[금] 全北[전북] 全州[전주])으로 옮기고 國號[국호]를 後百濟[후백제]라 하니, 이는 대개 百濟[백제] 遺民[유민] 敵愾心[적개심]을 利用[이용]하려 한 것이요, 이리하여 二三[이삼]○년을 隔[격]하여 三國[삼국]의 舊勢[구세]가 다시 出現[출현]한 셈입니다. 이중에 新羅[신라]는 疆域[강역]이 날로 졸아들되 恢復[회복]할 힘이 없고, 天下[천하]는 필경 弓[궁]·甄兩人[견양인]의 雌雄[자웅]을 결단함으로써 運命[우명]이 定[정]하게 되었는데, 弓裔[궁예]에게는 王建[왕건]이 있어 水陸[수륙] 兩方[양방]으로 後百濟[후백제]를 누르고, 孝恭王[효공왕][칠]년(西[서][구]○三[삼])에는 羅州[나주]까지를 거두어 三韓[삼한]의 太半[태반]이 泰封[태봉]의 有[유]로 돌아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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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왕건]의 高句麗[고구려] 復興運動[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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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왕건]의 威望[위망]이 날로 높으매, 弓裔[궁예] 猜疑[시의]로써 臨[임]하게 되고, 이 때문에 種種[종종]의 葛藤[갈등]이 생기다가, 自立[자립]한 지 二八[이팔]년이요 稱王[칭왕]한 지 十八[십팔]년 되던(西[서] 九一八[구일팔]) 六[유]월에, 王建[왕건]이 드디어 弓裔[궁예]를 쫓고, 대신 主權[주권]을 잡고 國號[국호]를 高麗[고려]라 하고 年號[연호]를 天授[천수]라 하고, 翌年[익년]에 都[도]를 松岳[송악](今[금] 開城[개성])으로 옮기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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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後百濟[후백제]와 高麗[고려]와의 사이에 戰爭[전쟁]이 끊이지 않아서 서로 勝敗[승패]가 있었으나, 大勢[대세]는 高麗[고려]에 利[이]로워 갔으며, 그동안에 甄萱[견훤]이 新羅國都[신라국도]를 侵入[침입]하여, 王[왕]을 自盡[자진]케 하고 掠奪[약탈]을 마음껏 하여, 新羅[신라]로 하여금 恢復[회복]하기 어려운 瘡痍[창이]를 짊어지게 하였으나, 이도 또한 高麗[고려]를 위하여ㅕ 길을 터준 모양이 되었읍니다. 高麗[고려] 太祖[태조]는 이동안에 크게 外交的[외교적] 策略[책략]을 써서, 그 十八[십팔]년(西[서] 九三五[오삼오])에는 일변 新羅[신라]의 朝廷[조정]을 달래어 敬順王[경순왕] 金傅[김부]가 나라를 가지고 來降[내강]케 幽廢[유폐]케 한 後[후], 그 이듬해로써 後百濟[후백제]를 討滅[토멸]하여 半島[반도]가 다시 高麗[고려]에 統一[통일]되었읍니다. 新羅[신라]는 始初[시초]로부터 五六王[오육왕] 九九二[구구이]년을 지냈으며, 後百濟[후백제]는 四五[사오]년 만에 亡[망]하였읍니다.
 
36
新羅[신라]가 倂合[병합]되기 一[일]○년 전(西[서] 九二六[구이육])에 渤海[발해]가 契丹[계단]에게 亡[망]하고, 그 遺民[유민]이 많이 高麗[고려]로 投入[투입]하였읍니다. 高麗[고려]는 國名[국명]으로 이미 高句麗[고구려]를 이었거니와, 事實[사실]도 高句麗[고구려]의 모든 要求[요구]를 가지고 新羅[신라]의 統一[통일]을 물려온 것이니, 말하자면 南方[남방]의 손에 된 半島[반도] 統一[통일]이 破綻[파탄]을 보이매, 北方[북방]의 勢力[세력]이 이를 대신하여 새 局面[국면]을 열려 한 것입니다.
 
 
37
統一新羅期[통일신라기]의 文化[문화]
 
38
統一新羅期[통일신라기]의 文化[문화]는 朝鮮[조선] 歷史上[역사상]에 있어 여러 가지로 重要[중요]한 意義[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대저 朝鮮[조선] 사람이 처음 遠西[원서]로부터 東[동]으로 왔을 때에는 그 中心[중심]이 오래 시방 滿洲[만주]에 있다가, 그리로부터 차차로 半島[반도]로 進入[진입]하여, 많은 曲折[곡절]을 지낸뒤에 우리 朝鮮[조선] 民族[민족]을 形成[형성]하였는데, 朝鮮[조선]의 民族[민족]·社會[사회]·藝術[예술] 등이 대개 그 基礎[기초]를 統一新羅[통일신라]의 時代[시대]에 놓은 것들입니다. 시방 朝鮮[조선] 一切[일체]의 文化[문화]란 것은 要[요]하건대 新羅[신라]에 와서 形成[형성]된 그것에 약간 變通[변통]을 더하면서 承受[승수]해 오는 것입니다.
 
39
統一新羅[통일신라]의 文化[문화]는 대체로 보아서 固有[고유] 文化[문화]와 外來[외래] 文化[문화]의 葛藤[갈등]으로서 基調[기조]를 삼았으니, 支那[지나] 文化[문화]의 頂點[정점]인 唐[당]의 그것이 무서운 壓力[압력]으로써 臨[임]하고, 더욱 上流[상류] 社會[사회]가 그 앞잡이 노릇을 한 탓으로 一切[일체]의 文化[문화]가 外形[외형]으로는 대개 唐化[당화] 또 佛敎化[불교화]된 觀[관]을 呈[정]하였으되, 固有[고유] 文化[문화]의 질긴 生命[생명]은 民族[민족] 生活[생활]의 內面[내면]의 依然[의연]히 流傳[유전]하여, 事事物物[사사물물]에 그 衝突相[출돌상]과 矛盾[모순]을 나타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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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朝鮮我[조선아]에 대한 求心[구심]·遠心[원심] 兩勢[양세]의 鬪爭[투쟁]은 그때부터 시방까지 우리 頭腦[두뇌] 중에 傳承[전승]되면서 種種[종종]의 波紋[파문]을 國民[국민] 生活[생활]의 上[상]에 그리는데, 그것이 思想上[사상상]에 있어서 걸핏하면 比自主的[비자주적] 傾向[경향]으로 나타남은 그 가장 惡[악]한 癮癖[은벽]입니다.
 
 
41
佛敎[불교]의 古神道[고신도] 攝收[섭수]
 
42
統一新羅[통일신라]의 文化[문화]는 특히 佛敎[불교]로 더불어 큰 交涉[교섭]을 가집니다. 朝鮮人[조선인]의 生活[생활]에 冥想[명상]과 理論[이론]과 美感[미감]을 준 것이 佛敎[불교]요, 世界的[세계적] 氣宇[기우]를 길러준 것도 佛敎[불교]지마는, 그 現實的[현실적]·力行的[역행적]·勞作的[노작적] 本質[본질]을 깎고 隱退的[은퇴적] 氣分[기분]과 遊食的[유식적] 風習[풍습]을 醞釀[온양]해 준 것도 後來[후래]의 民族[민족] 生活[생활]에 대하여 큰 害毒[해독]을 이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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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漢文學[한문학]의 流行[유행]이 國文學[국문학]의 生長[생장]을 防遮[방차]하고, 佛敎[불교] 哲理[철리]의 玩味[완미]가 固有[고유] 信仰[신앙]의 發達[발달]을 阻害[조해]한 것이 朝鮮人[조선인]의 自覺[자각]을 막고 自主力[자주력]을 薄弱[박약]케 한 主要[주요]한 原因[원인]인데, 이것도 실상 統一新羅[통일신라]로부터 어쩔 수 없이 그리될 運命[운명]에 붙들렸던 것입니다. 朝鮮[조선]의 古道[고도]는 「발그뉘」라 하여 日[일]을 天[천]으로 崇拜[숭배]하고 天主[천주]를 祖上[조상]으로 信仰[신앙]하여, 太陽[태양]의 性德[성덕]인 光明[광명]을 欣慕體現[흔모체현]함으로써 宗旨[종지]를 삼는 것인데, 이 「발그뉘」를 八關會[팔관회]란 佛敎的[불교적] 名句[명구]로써 불러서, 古義[고의]를 沒却[몰각]하기도 이미 이때에 시작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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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間[민간] 雜俗[잡속]의 成立[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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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正朝[정조])과 대보름(正[정]월 十五[십오]일)과 파일(四[사]월 八[파]일)과 수리(五[오]월 五[오]일)와 流頭[유두](六[유]월 十五[십오]일)와 百種[백종](七[칠]월 十五[십오]일)과 秋夕[추석](八[팔]월 十五[십오]일) 등 歲時[세시] 名節[명절]도 다 新羅[신라] 이때에 成立[성립]된 것이며, 衣服[의복]·飮食[음식] 등 시방 우리 民俗[민속]의 淵源[연원]이 대개 이때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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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調[시조]와 雜歌[잡가]·風水說[풍수설]·道詵[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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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上[문학상]으로 말하면 漢文[한문] 爲主[위주], 國文[국문] 閒却[한각]의 風[풍]이 이때에 생긴 것이요, 國文學[국문학] 중의 主要[주요]한 者[자], 時調[시조]와 雜歌[잡가]와 <박타령> <深淸[심청]> 같은 朝鮮[조선] 獨特[독특]이라는 長編[장편] 叙事詩[서사시]다. 이때에 生成[생성]한 것이며, 俗尙上[속상상]으로 말하면 一部[일부] 朝鮮人[조선인]의 痼疾[고질]을 이룬 風水說[풍수설] 같은 것도 新羅[신라] 末葉[말엽]의 名僧[명승] 道詵[도선]에게서 시작된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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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二八年[일구이팔년] 三月[삼월] 月刊[월간] 靑年[청년](卒業生[졸업생] 記念號[기념호]) 第八卷[제팔권] 第二號[제이호]>
【원문】통일기(統一期)의 신라(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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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남선(崔南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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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8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