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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아직까지 농민이라고 하면 그저 농사만 짓고 순박한 인물들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역사상으로 내려온 모든 사실(史實)을 살펴보면 농민 중에도 특별하게 뛰어난 영웅호걸들이 퍽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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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진나라 말년(中國秦國末年[중국진국말년])에 양성(陽城)땅의 한 농부로서 밭에서 김을 매다가 천하가 크게 어지러움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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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장상이 어찌 씨가 있으랴(王侯將相寧有種乎[왕후장상령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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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당시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강한 진나라(秦國[진국])에 반항하여 여러 군현(郡縣)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후일의 한패공(漢沛公)과 초패왕(楚覇王)의 한 앞잡이 군이된 진승(陳勝)이도 중국 역대 농민 영웅중에 유명한 인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삼국시대(三國時代) 즉 신라 말년(新羅末年)에 일개 향촌의 농민 자제로서 신라에 반항하고 일어나서 당당하게 후백제(後百濟)란 나라를 건설하여 사오십년 동안이나 임금노릇을 하던 절세의 영웅이 있었으니 그는 세상 사람이 이미 잘 아는 견훤(甄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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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본래 경상북도 상주군 가은현(慶北[경북] 尙州郡 加恩縣) 사람이니 그 부친 이아자개(李阿慈介)는 그곳의 한 농민으로 뒷날에 장군(將軍)까지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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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견훤이 강보속(襁褓中[강보중])에 있을때 그 부친 아자개가 들에 가서 밭을 갈고 있었는데 그 모친이 견훤을 둘쳐 업고 머리에다 점심 광우리를 이고 가서 아자개의 점심밥을 먹이는데 물도 떠다주고 밥 심부름도 하려고 조용하고 서늘한 숲속에다 견훤을 뉘어 놓고 점심밥을 다 치른 뒤에 와서 본즉 뜻밖에도 산더미 같은 큰 호랑이가 와서 어린 견훤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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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머니는 호랑이가 그 아이를 해치러 왔나하고 크게 놀라며 고함을 치며 야단을 하였더니 사실 그 호랑이는 어린 견훤을 해치러 온것이 아니라 그를 젓(乳[유])을 먹이고 있으므로 그들 부부는 퍽 반가이 여기기도 하고 또 신기하게 여기며 이웃 사람들도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여 서로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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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출처에 있어서는 옛날 어떤 기록(記錄)에는 또 한가지 이상한 이야기가 씌어져 있으니 무진주(武珍州=지금의 전라도 광주(全南光州[전남광주])에는 전날 어떤 처녀가 하나 있었는데 남자와 서로 살지도 않었었는데 임신(姙娠)이 되었으므로 그 부모가 퍽 이상히 여기어 그 처녀를 불러서 책망을 하니 그 처녀는 말하기를 밤중이면 어떤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와서 같이 자고 가는 일이 있다 하므로 그 부모는 더욱 괴상하게 생각하고 그 처녀를 시켜 그날 밤에 당사실을 그 동자의 옷에 꽂아두게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그 종적을 살펴본즉 과연 그 당사 실이 북쪽에 있는 담장 밑으로 들어 갔으므로 그 곳을 파고 본즉 아무것도 없고 기둥같이 큰 지렁이(蚯蚓[구인])가 있으므로 그 부모가 더욱 괴상하게 여기어 그 지렁이를 잡아 죽이고 임신한 그 딸을 내어 쫓았더니 그 처녀가 쫓기어 상주 가은현으로 가다가 농부 이 아자개에게 잡히므로 그 처가되고 얼마 있다가 사생아를 낳으니 그가 곧 견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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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견훤은 그렇게 지렁이의 정기(精氣)로 태어난 까닭에 지렁이 모양으로 평생에 소금(鹽[염])을 싫어하고 또 그 까닭으로 고려태조(高麗太祖)가 견훤과 싸움을 할때에는 반드시 소금을 준비 하여 가지고 가서 그 세력을 억눌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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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점점 장성하여 체력이 강대 하고 지모(智謀)가 많으며 뜻이 또한 커서 모든 점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나이 이십여세 때에 일찍부터 소망하던 군인(軍人)을 지원하여 신라 서울(新羅京城[신라경성])에 들어가서 군인이 되었다가 멀리 서남해변 국방군(西南海邊國防軍)으로 뽑혀 가서 여러해 동안 있던중 언제나 무용(武勇)으로 공을 많이 세우니 나라에서는 그를 가상히 여겨 비장(裨將)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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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신라(新羅)는 국운이 점점 쇠퇴하여 진성여왕(眞聖女王)이 황음무도(荒淫無道) 하고 대각간위홍(大角干魏弘) (각간은 지금의 국무총리 같은 벼슬) 이 국권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나라의 기강(紀綱)이 아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하게 되던 중 진성왕 육년(眞聖王六年)에 와서는 더군다나 큰 흉년(凶年)이 들어서 일반 백성들이 모두 각처로 흩어져서 거지때 모양으로 밥을 얻어 먹게 되고 도처에 도적이 일어나 백주에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여 가니 세상은 마치 난마(亂麻)와 같이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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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부터 야심이 발발하던 견훤은 그것을 천재(千載)에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결연히 일어나서 도당을 모아가지고 먼저 신라의 서남부(西南部) 여러 고을을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편을 들어 불과 한달이내에 그 부하가 오천 여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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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근거지를 삼기 위하여 당시 웅주(雄州)이던 무진주(武珍州)를 또 쳐서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 싶었으나 아직도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있어서 감히 바로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신라 서남부 도통 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행 전주자사 겸 어사 중승상 주국한남군 개국공(新羅西南部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郡 開國公) 이라 칭호하고 또 이천 여호(二千餘戶)의 부락과 읍을 스스로 자기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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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북원(北原=지금의 원주 原州)에는 또 양길(梁吉)이란 자가 많은 도당을 모아 가지고 있는데 그 세력이 또한 강대하고 궁예(弓裔=뒷날의 태봉국왕이 된 사람)까지 거기에 가서 부하가 되니 견훤은 그 소문을 듣고 또한 회유하기 위하여 비장(裨將)의 군직을 주고 또 서편으로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에 순행하니 주민이 견훤을 반가이 맞어들이며 또 고기와 술로 그의 군사를 후하게 접대하니 견훤이 크게 기뻐하여 스스로 생각하되 인심을 이만큼 얻었다면 한나라라도 빨리 건설하여 왕이 될 수 있다 하고 여러 부하에게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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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삼국 이전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서 매우 융성하였고 그 뒤를 이어 또 진변 양한(辰辨 兩韓)이 일어났으며 또 그 뒤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 개국하여 육백여년을 내려 오더니 당나라 고종(唐高宗[당고종])이 신라의 청촉(請囑)을 받아서 장군 소정방(將軍蘇定方)으로 하여금 수군 십삼만명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황산(黃山)을 지나 사자성(泗泚城)까지 육박하여 신라병과 같이 연합하여 백제를 쳐서 없앴으니 이제 내가 어찌 완산(完山)에 도읍하여 의자왕(義慈王=백제의 최후의 왕)의 묵은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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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스스로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칭하고 관제(官制)를 만들어 일반 관리를 배치하고 기타 다른 제도를 모두 일신하여 새로 정하니 때는 신라 효공왕 사년(新羅孝恭王四年)이요 중국 연대로는 당나라 광화 사년(唐國[당국] 光化四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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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이렇게 나라를 건설하고 관제와 일반 제도를 설치하여 국내 인심을 수습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국제적으로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먼저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서로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고 또 북으로는 새로 일어나는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王建)에게 사신(使臣)과 공작선(孔雀扇), 지리산 대로 만든 화살(智異山竹箭[지리산죽전]) 등의 선물을 보내어 그 건국을 축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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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 이태를 지나 신라 효공왕 육년에 이르러 견훤은 다시 영토를 확장하려고 보병 일만명을 친히 인솔하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또 진예성(進禮城)까지 진출하니 신라왕은 크게 두려워 하여 아찬 김률(阿飡金律)을 고려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청하니 태조는 쾌히 승낙하고 구원병을 보내니 이것은 견훤과 태조간에 처음 생긴 충돌로서 그뒤부터 피차간 여러번 싸우기도 하고 또한 한때 화친(和親) 하기도 하더니 태조 삼년에 와서는 견훤이 또 삼천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을 치니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한참 싸우다가 양쪽의 세력이 막상막하(莫上莫下)한 까닭에 승부를 결단치 못하니 태조는 일시 견훤의 마음을 한번 느춰주기 위하여 그 일가 아우 되는 왕신(王信)을 볼모(人質[인질])로 보내고 화친(和親) 하기를 청하니 견훤도 또한 그 생질 되는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내서 서로 일시적인 화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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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뒤 얼마 아니하여 태조에게 볼모로 보냈던 견훤의 생질 진호(眞虎)가 급병으로 별안간 죽게 되니 견훤은 태조가 그를 고의로 죽인 것으로 의심하고 크게 격분하여 그 보복으로 왕신(王信)을 옥중에 가두고 또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서 전날에 선물(膳物)로 보냈던 준마(駿馬)까지 다시 찾아오니 양국(兩國)의 화평은 다시 결렬되는 동시에 견훤은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단숨에 근품성(近品城)을 쳐서 불지르고 또 신라의 고울부(高鬱府)를 내려 쳐서 그 국도의 근교까지 육박하게 되니 신라왕은 다시 왕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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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견훤은 태조의 구원병이 오기전에 먼저 신라를 쳐 없애버리려고 정예(精銳)한 군사를 뽑아서 질풍신뢰(疾風神雷)같이 신라의 서울에 돌입하니 때에 신라의 왕은 왕건 태조의 구원병 오기만 믿고 자기로서는 아무 방비도 할 생각도 하지않고 날마다 어여쁜 궁녀비빈(宮女妃嬪)들과 같이 질탕하게 놀기만 하던 차에 그날도 역시 왕비와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아가서 곡수류상(曲水流觴)에 술이 잔득 취하도록 먹고 궁녀 가희(佳姬)들의 요염한 춤과 노래에 넋을 잃고 음탕하게 놀다가 불의에 견훤의 군사가 쳐들어가니 군신상하가 모두 어찌 할줄을 알지 못하고 제각기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을 치니 왕은 겨우 왕비와 시녀 몇사람을 데리고 성남리궁(城南離宮)으로 들어가서 잠시 몸을 피하고 그의 여러 시신(侍臣) 궁녀 악공(樂工)들은 전부 난병(亂兵)의 칼과 창에 찔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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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견훤은 또 난병을 시켜서 마음대로 돌아 다니며 재물의 약탈과 부녀들을 겁간하게 하고 또 왕을 잡아다가 눈 앞에서 시살(弑殺)하고 궁중에 들어가서 왕비를 간음하며 왕의 일가 아우 김부(金傅=즉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를 세워 새로 왕을 삼은 다음에 왕의 아우되는 효염(孝廉)과 재상 영경(宰相英京)을 사로잡고 국보(國寶) 병기(兵器) 기타 금 은 보배 등속을 모두 옮겨가며 또 젊은 자녀와 백공(百工)의 기술이 있는 자도 전부 잡아 가고 중요한 궁전(宮殿) 관사 기타 모든 건물에다 불을 지르니 구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그 찬란한 신라의 문물(文物)은 일시에 다 타고 없어져 버리고 말었다. 이것은 물론 견훤이 본래 농민의 자제로소서의 과거 몇백년 동안에 신라의 농민들이 왕공(王公) 귀족 관원에게 무한한 학대와 천대를 받어오던 그 억울하고 원통한 분한을 일시에 보복하기 위한 행동으로 자기로서는 일시적이나마 통쾌한 기분을 맛보았을지 모르지만 그와같은 정도를 넘는 잔학무쌍한 행동으로 왕을 죽이고 왕비 궁녀를 겁간하며 구백년 동안이나 건설한 문물을 일시에 소탕시킨 것은 죄악중에도 큰 죄악으로 일반에게 크게 신망을 잃고 필경 왕건 태조에게 인심이 돌아가게 한 원인을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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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고려 태조는 신라왕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천의 정병을 거느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라의 서울을 향하여 가니, 때는 벌써 견훤이 신라 국토를 무찌르고 전승의 기세를 타서 태조의 군사까지 마저 쳐 없애려고 그의 진군하는 중도인 공산(公山=지금의 영천 永川 대구 大邱 사이) 아래에다 진을 치고 있다가 맞부딪쳐 싸우게 되니 태조의 군사도 상당한 정예의 군사였으나 원체 견훤의 군사가 강성(强盛)한 까닭에 참패에 대참패를 당하여 당시 용장(勇將)으로 유명하던 태조의 선봉장 김락(金樂)이 먼저 죽고 태조 자신도 포위당하여 위기일발의 위험한 가운데 있다가 다행히 그의 장수인 신숭겸(申崇謙)의 생긴 모양이 태조와 같은 까닭으로 옛날에 한나라 기신(漢紀信[한기신])이 한패공(漢沛公)으로 변장하여 대신 죽던 그 방법을 써서 신숭겸이 왕건 태조로 거짓 변장을 하고 항복하여 죽으니 태조는 그 기회를 타서 간신히 도망하여 겨우 생명을 보존하게 되니 이 공산 싸움은 역사상 유명한 큰 싸움으로 견훤이 또한 크게 싸워 이기니 당시 견훤은 싸우면 반드시 이겨서 공을 세우는 불멸(不滅)의 혁혁한 승리를 얻고, 가는 곳 마다 천하 무적의 명장이란 명성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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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또한 승세(勝勢)을 타서 대목군(大木郡)을 점령하니 이름이 널리 외국에 까지 떨쳐서 거란(契丹)은 사고마돌(裟姑麻咄)등 설흔다섯명의 사신을 보내 와서 서로 화목하기를 청하고 ─ 그때 견훤은 또 답사(答使)로 장군 최견(崔堅)을 동반하여 보냈으나 중도에서 풍랑을 만나 전부 몰사하였다 ─ 후당(後唐)은 또 사신을 보내 견훤의 성공을 치하하며 백제왕을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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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왕건 태조에게 또 격서(檄書)를 보내 귀항하기를 권하였으니 그 글은 당시 당나라에 유학하여 진사(進士)까지 하고 돌아온 유명한 문장 최승우(崔承祐)가 지은 것으로 그 글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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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약약차(强弱若此)에 승패가지(勝敗可知)라 소기자(所期者)는 괘궁어평 양지루(掛弓於平壤之樓) 하고 음마어패강지수(飮馬於浿江之水)라 의미복지위계(宜迷復之爲計)에 무후회지자이(無後悔之自怡)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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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약이 이와 같은즉 승패를 가히 알것이다. 우리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의 다락에 걸고 말을 대동강 물에 먹이려는 것이다. 마땅히 흐미한 것을 깨쳐서 스스로 후회를 하지 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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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것은 천하의 귀중한 명문으로 오늘날까지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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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해 오월에는 강주(康州)를 돌연히 쳐들어가 삼백 여명쯤을 죽이고, 팔월에는 장군을 보내어 양산성(陽山城)을 쌓고, 겨울 시월에는 또 날쌘 군사로 부곡성을 쳐서 차지하고, 성을 지키던 군사 일천명을 죽이며, 장군 양지(陽志) 명식(明式) 등을 산채로 잡아오고 그 다음해 칠월에는 또 오천 갑병(甲兵)을 보내서 의정부(議政府)를 쳐 없애고 성주 홍술(城主洪術)을 죽이니 홍술은 왕건 태조가 어금니 같이 아끼고 사랑 하던 용장이라 태조가 크게 통곡하며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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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구월에는 일길찬상귀(一吉湌相貴)를 보내서 수군으로 하여금 고려의 예성강(禮成江) 까지 침입하게 하여 삼일 동안이나 시위 행동을 하고, 염(鹽) 백(白) 정(貞) 세 고을의 배(船[선]) 일백 척을 불지르며 저산도(猪山島)에 있는 말(馬[마]) 삼백필을 빼앗어 가니 그때 견훤의 세력이란 참으로 굉장하여 비록 왕건 태조의 덕망과 그의 용장한 장졸로도 감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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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견훤은 원래 성질이 잔악하고 덕이 적어서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몹시 죽이고 부하의 장병중에 비록 공을 세운 사람이라도 무슨 잘못이 있다면 조금도 용서함이 없이 모조리 죽이었다. 그와 반대로 왕건 태조는 비록 군사는 견훤보다 약하나 덕이 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부하를 또한 지극히 사랑하니 천하의 인심이 점차 왕건 태조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견훤은 고창군(古昌郡)에서 고려 태조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팔천명이나 되는 정병을 일시에 잃어 버리고 또 훈주(渾州)에서 태조의 장군 유검필(庚黔弼)에게 제이차의 참패를 당한 뒤에는 신망이 더욱 떨어져서 웅진(熊津) 이북의 삼십여성(三十餘城)이 일시에 왕건 태조에게 귀항하고, 또 그 부하 중에서 용맹하고 지모가 있기로 유명하던 공직(孔直)과 술사(術士)로 유명한 종훈(宗訓)과 명의 훈겸(名醫訓謙)과 용장 상달(尙達) 최필(崔弼)들이 또한 일시에 태조에게로 투항(投降)하여 인심이 크게 동요되던 중 견훤은 처첩(妻妾)이 있어서 아들 십여 형제를 두었는데 그중에도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이 몸이 장대하고 지모가 많으니 견훤은 그 아들을 가장 사랑하여 장래 그 왕위를 금강에게 전하려고 하니 그 형(兄)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등이 미리 알고 마음에 항상 걱정을 하던 차에 때마침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이 되고 용검은 무주도독 (武州都督) 이 되어 임지에 가서 있게 되고 다만 신검 혼자서 곁에 있게 되니 이찬 벼슬로 있던 능환(能桓)이란 자가 사람을 강 무(康武) 두곳에 보내서 서로 음모를 하고 다시 파진찬(波珍飡) 벼슬로 있는 신덕(新德) 영순(英順)등과 밀모하여 신검으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 되는 견훤을 금산사 불당(金山寺佛堂) 에다 유폐(幽閉)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금강(金剛)을 죽인 다음에 신검(神劍)이 스스로 대왕이라 칭호하니 견훤이 사십여년 쌓아 놓은 공적은 그만 골육상쟁(骨肉相爭)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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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견훤은 비밀히 도망하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그를 극히 후대하였다. 그뒤 견훤은 태조의 힘을 빌려서 그 아들인 신검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다가 급히 태조가 신검을 쳐부신 후에 신검은 죽이지 않고 그를 사주하여 골육전을 시키게한 능환(能桓)만 잡아 죽이니 견훤은 크게 분하게 여기어 등창이 터져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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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로(末路)는 그와같이 비참하였으나 일개 농민의 아들로서 그와 같이 크게 활약을하여 후백제란 나라에서 사십 여년 동안이나 왕노릇을 하였고, 항우(項羽)가 한고조의 양장이 된 것과 같이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 하는 위업에 큰 공로자가 되었으니 또한 일세의 큰 영웅이라 아니 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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