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고 추워. 온 종일 비가 부실부실 내리더니 이제야 그친 모양이로군.”
3
용길이는 이같이 혼자 중얼거리면서 하품을 길게 한번 하고는 아까부터 읽고 있던 탐정소설 책을 덮어 놓았습니다.
4
“오늘은 별일도 없는 모양이니 일찍이 잠이나 자야겠다.”
5
용길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 걸고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6
이곳은 XX신문사 숙직실, 용길이는 이 신문사 급사로 오늘은 다른 신문기자 한 사람과 숙직으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같이 숙직하는 신문기자는 밖에 잠깐 볼일 있어서 나가고 용길이 혼자 남아 있던 터이었습니다. 용길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우 잠이 들려고 할 때 숙직실의 전화종이 몹시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용길이는 옷 입을 틈도 없이 그대로 뛰어나와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10
“네 다른 분요. 지금 급한 볼일이 계셔서 잠깐 밖에 나가셨어요. 그런데 왜그러세요? 무슨 말씀인지 하시지요. 무어요? 도적놈이 들어왔어요? 그래 누 구든지 보내달라고요? 아이고, 그럼 야단났습니다그려. 사장님께서 시골 가시고 안 계신 중에 그 모양이 됐으니…… 그런데 이거 보세요. 도적놈이 언제쯤 들어왔습니까.”
11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모양 같은데. 이 댁 마님께서 어디 갔다가 와 보시니까 집 안이 온통 난장판이었답니다.”
14
“나 말입니까. 오늘 숙직하는 급사애에요.”
15
“그럼 당신이라도 좋으니 와 달라고 하십니다.”
18
용길이는 XX신문사 안에서 영리하고 똑똑하기로 이름난 소년이었습니다. 더구나 탐정소설 같은 것을 재미있게 읽을 뿐 아니라 거기에 연구도 하는 것 같이 보여서 어느 때든지 위험한 일에나 모험스러운 일에 용감히 내달았습 니다. 오늘 밤에도 사장님 별장에 도적이 들었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19
“옳다, 얼른 가보자. 이같이 좋은 기회에 한번 훌륭히 활동을 해보는 것도 심심치는 않겠다.”
21
저녁까지 내리던 비는 아주 그치고 드문드문 구름이 떠 있는 사이로 별들이 깜박깜박 반짝거리었습니다.
22
용길이는 동소문 밖에 있는 XX신문사 사장님 별장 앞에 이르렀습니다. 컴컴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퍽 넓은 집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집 둘레는 쇠창살로 둘러막고 철책 안에는 잔디풀이 우거진 넓은 뜰이 있었습니다.
23
용길이는 빗물에 젖어서 질퍽질퍽한 길로 걸어오느라고 흙투성이가 된 신발을 몇 번 굴려서 흙을 대강 털고 나서는 별장 정문으로 들어섰습니다.
24
주머니에서 회중전등을 꺼내 들고 사방을 비춰보았습니다.
25
그때 정문 바로 앞 철책 근처의 잔디풀이 누구에게 짓밟혔는지 흙투성이가 된 것이 용길이의 눈에 뜨이자마자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28
얼마 후에 용길이는 응접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29
“아이고, 길도 좋지 못한데 오느라고 수고했구먼......”
30
사장 마나님이 분주히 마중 나오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31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자, 이리 앉으셔서 어떻게 된 사실이나 말씀해주십시오.”
32
용길이는 아주 제 딴은 탐정소설에 나오는 탐정과 같은 태도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33
“아까 저녁때 비도 개이고 또 문안 일가 집에 볼일도 있고 해서 집안 하인애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겠나. 주인 영감님도 시골 가셔서 안 계시고 집안에는 늙은 마누라 하나밖에는 남지 않았었단 말이지. 내가 나갔다가 곧 돌아오게 될는지 어떻게 될지는 알 수도 없고 하기에 안팎 문을 단단히 잠그고 일찍 자라고 이르지 않았겠나. 뜻밖에 다른 일이 없고 하기에 아홉시 반쯤 해 서 돌아와 보니까 책상 서랍 장 서랍이란 서랍은 모조리 열리고 온통 집 안이 뒤죽박죽이 되었구먼! 없어진 것이라고는 책상 위에 놓아 둔 금시계 하나하고 장 서랍에 넣어 둔 금반지 두 개뿐인데 아무리 두루 살펴보아도 문이 란 문, 창이란 창은 잠긴 대로 그대로 있고 어디로 들어왔다가 나갔는지 도 무지 흔적이 없으니 이상하기가 짝이 없단 말이야......”
34
반말 섞어서 이같이 이야기하는 사장님 부인의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듣 고 있더니 용길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습니다.
35
“그럼 집 안에 남아있던 마나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올시다그려.”
36
“모르고말고. 그 마누라가 누워 자는 방으로 가 보니까 세상모르고 자고 있지 않겠나.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야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데그려. 그런데 그 마누라는 여러 해 우리 집에서 살아왔건마는 그동안 조금도 눈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다네.”
37
“네...... 그렇습니까...... 네, 알아듣겠습니다. 그런데 시계하고 반지를 잃어버리신 방이 이 방입니까. 아니에요 그럼 그 방을 좀 구경했으면 좋겠습니다.”
38
사장님 부인은 그 이웃방인 사장님의 서재로 용길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용길이는 방 안을 속속들이 자세하게 살펴본 뒤에 다시 묻기를 시작했습니다.
39
“아까 저녁에 출입하실 때 이 방문을 잠그시고 나가셨습니까?”
40
“저쪽 문은 잠갔지만 앞문으로 통한 이 문은 잠그지 않았었지.”
42
용길이는 이같이 대답하면서 허리를 굽혀 잠그지 않았다던 서재의 문 앞에서부터 바깥 문 안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나더니
43
“밖에 나가셨다 들어오실 때 그냥 신발을 신으신 채 들어오지는 않으셨지요?”
44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오다니 문 안에만 들어서면 으레 슬리퍼를 신으니까......”
45
“그럼 이 바닥에 흙이 묻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거 보십시오. 이 마룻바닥에 흙 좀 보십시오.”
46
그제야 사장님 부인도 흙이 드문드문 묻어있는 마룻바닥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47
“아이고, 참말 나는 이제야 보았는걸.”
50
“그러면 도적놈은 이 앞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철책 근처의 잔디풀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서 짓밟혔던 것을 보면 도적놈은 철 책을 넘어서 이 앞문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51
“아이고, 어쩌면 어린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조밀하고 대단할까.”
52
“어쨌든지 집 보던 마나님을 좀 만나보게 해주십시오.”
53
조금 후에 마나님이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55
“저 사람이 좀 만나보겠다 해서 부른 겔세.”
56
“마나님! 이거 보세요. 아까 저녁때 마나님께서 만나본 사람이 없습니까?”
57
“글쎄, 별로 만난 사람은 없는데…… 옳지 옳지. 내가 밖에 나가질 않았습니까. 아무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님이 마악 나가시자마자 뒤미쳐서 내가 문을 걸러 나갔을 때 얼굴이 흉측하게 생긴 젊은 애 하나가 지나가더니 ”마나님 안녕하십니까. 비가 꽤 왔습지요. 날이 개이니까 주인마님께서 아마 어디구경 나가시는가봅니다그려.“ 하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일가 댁에 다니 러 가신다오.“ 했더니 ”네…… 그렇습니까. 안녕히 계십쇼.“ 하고 그가 가버리던 생각밖에는 아니 나는걸요.”
58
노파의 말을 듣더니 용길이의 두 눈에서는 갑자기 광채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59
“그럼 마나님께서 그 젊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시겠습니까?”
60
“어두워가는 저녁이고 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똑똑히는 모르겠는걸.”
63
“마나님 고맙습니다. 마나님께 여쭤보려던 것은 그것뿐입니다.”
64
용길이는 다시 사장님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65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무엇이라고 그러셨지요?”
66
“책상 위에 놓은 금시계하고 금반지 두 개......”
67
이같이 대답하면서 사장님 부인은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실 생각으로 물 주전자를 들어서 찻잔에다 한 잔을 따라놓고 나서 방 한구석에 있는 흰 책 상보를 들쳐보더니
70
“아까 나갈 때 이 책상보 밑에다 과자 한 접시를 담아 두었었는데 과자가 한 개도 없이 다 없어졌으니......”
72
“과자가 다 없어졌어요? 그럼 그것도 도적놈이 먹었습니다. 어쨌든지 도적놈 쳐 놓고는 궁한 도적놈이로구먼요.”
73
하고 용길이가 빙그레 웃는 바람에 사장님 부인과 노파며 게집하인까지 따라 웃었습니다.
74
용길이는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고 앉아 있더니 이번에는 방 안을 구석 구석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75
그래서 차츰차츰 담벼락에 주물로 붙여서 만든 벽난로 앞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용길이는 그 난로 속에다 머리를 틀어박다시피 하고 들여다보면서 유심히 살펴보고 나더니 이같이 물었습니다.
77
“특별히 크게 만든 것이니까. 그 굴뚝으로 사람 하나쯤은 넉넉히 드나들걸 그래.”
79
“굴뚝 청소하기에 편하게 하기 위해서 벽돌로 발 디디는 데까지 만들었는데 그래.”
80
“요즈음은 이것을 별로 쓰지 않으십니까?”
81
“아마 거기다 불 피워보기는 작년 겨울이었지.”
82
“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마님 미안합니다만 추워서 못 견디겠으니 여기다 불을 좀 피워주십시오그려.”
83
“춥거든 이쪽 난로로 오지 그래. 자, 이리 와!”
84
“아니에요. 저는 이 난로가 좋아요. 안됐습니다그려.”
85
사장님 부인은 어쩌는 수 없이 마나님을 시켜서 불을 지피게 했습니다. 장작 몇 개비를 넣고 마나님이 불을 당겨놓자마자 그 난로 속에서 별안간에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연통 쑤시는 사람처럼 얼굴이 새까맣게 된 사나이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습니다. 사장님 집에 들어와서 시계와 반지를 훔 쳐가지고 도망가려다가 도망갈 기회를 놓치고 난로 연통 속에 숨어있던 도 적놈은 용길 소년의 꾀로 말미암아 붙잡히게 됐습니다.
86
사흘이 지난 뒤 이른 아침에 XX신문사 사장님이 시골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날 오정이 지난 뒤 사장 영감이 신문사에 들어오는 길로 용길 소년을 사장 실로 불러들였습니다.
87
“용길아, 요전 날 우리 집안일을 위하여 매우 애를 써 주었다니 고맙다. 그래 그 도적놈이 난로 연통 속에 들어가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니.”
88
사장은 그 뚱뚱한 배를 쑥 내밀고 의자에 걸터앉은 채 담배 연기를 상쾌한듯이 내뿜으면서 이같이 물었습니다. 용길이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89
“도적놈이 당초에 댁에 아무도 계시지 않은 것을 알고 들어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집 보던 노파를 불러서 물어보았습니다. 도적이 들어가기는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 확실한데 뜻밖에 예정보다 주인마님이 일찍이 돌아오신 때문에 도적놈이 나갈 기회를 잃고 쩔쩔매다가 책상보 밑에 있는 과자를 집어가지고 난로 굴뚝 속으로 들어가서는 그 과자를 먹으면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난로 속에 들어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것은 난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보고 알았습니다.”
90
“참말 수고 많이 했다. 이것은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너의 용기를 장려하는 뜻으로 주는 것이니 받아두어라.”
91
“아이고,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고맙습니다.”
92
용길이는 어찌도 기쁘든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보퉁이를 풀어보니까 그 속에는 훌륭한 양복 한 벌과 새 구두 한 켤레가 들어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