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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일에 기대하는 인간 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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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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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에 기대하는 인간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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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의 입장에서
 
 
 

1. 상. ‘성격의 피라미드’설 - 전형 창조의 이론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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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입장에서 명일의 인간 타입을 상망(想望)해 보라. 이것이 편집자가 필자에게 보낸 설문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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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에 걸쳐서 지금 지구 위에는 커다란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설령 영불(英佛)이 승리하는 일이 있더라도 기성의 민주주의적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어 가리라고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주관적인 희망을 무시해 버리고 역사는 자기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다. 이리하여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갖추는 것이든 간에, 지구상에는 구질서에 대(代)하는 새로운 질서가 복잡한 도정을 거쳐 가면서 도래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상망할 수 있는 명일의 상모(相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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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문학에서 새로운 한 사람의 인간 타입이 창조되기를 요청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처지에 앉아서 이러한 인간 타입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설문을 나는 내깐으로 그렇게 이해하였다. 이것에 관련시켜서 나는 이 단문을 초(草)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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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최재서 씨가 신세대론에 기탁(寄託)하여 ‘신질서에 신인간’이라는 표어를 던진 일이 있었다. 대체로 이것은 신세대를 대표할 작가에게 요청되는 임무로서 이야기되었던 것인데, 그 뒤 최씨는 「성격에의 유혹」이라는 논문 가운데서 성격의 중요성에 대한 작가의 신념만은 변함이 없지마는 현대는 성격 창조가 지극히 곤란한 시대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신질서가 요망하는 새로운 인간이 무엇인지는 최씨에게 있어서도 전혀 명료치 아니하나 씨가 성격을 ‘도덕적 선택과 자주적 책임’을 배제하고는 상정해 볼 수 없다고 언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하면 최씨는 윤리적 책임을 가진 자라야 가히 성격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요, 그러니까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가 신질서에 당(當)할 때에 한(限)하여, 그것은 비로소 새로운 인간 타입이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씨의 논지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명백히 할 점이 남아 있어서, 가령 도덕이나 윤리나가 주의나 계급이나 민족에 따라 다를 수가 있어서 히틀러와 처칠의 양인은 서로 서로 그들의 입장에선 가장 도덕적 책임에 충실한 자라 하겠고, 설사 그들의 두 질서를 멀리서 바라보아 역사의 필연성과 그것의 추진력이라는 차원적 입장에서 관망한다 하여도, 우리의 정의(情意)에 오르내리는 느낌은 단순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최씨의 이론은 서로 대립되는 어느 진영에게서도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그런 불명료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차치해 두고 나는 여기서 다만 최씨가 상정하고 있는 성격이나 인물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전형적 성격이었다는 것을 착안함에 그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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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씨의 주인공론도 이러한 측면으로 검토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임씨 역시 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전형이 아니고는 성격의 명칭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어서 이것이 없는 소설은 가위(可謂) 명칭만의 소설이요 그러니까 현재의 우리 소설 문학은 하나의 문학적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는 가공할 절망론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이론을 그대로 진행시키면 시대 정신을 체현한 자, 영웅, 천재, 사상가들만이 주인공 될 자격이 있겠고 성격의 피라미드의 기저에 깔린 자들은 하나도 성격이 될 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가령 예를 들면 이형식을 가진 「무정」이나 김희준을 낳은 「고향」이 그러한 인물을 가지지 못한 「율리시즈」보다도 훌륭한 문학일 뿐 아니라 ‘백마를 탄 시대 정신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지 않고 몰락 귀족의 색정한(色情漢)이나 시민 사회의 악당이나 편집광을 주인공으로 한 발자크의 「인간 희곡」같은 문학은 실로 소설이라 부르기에도 자못 부적당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임씨의 이론은 황당하다는 형용으론 부족한 것이어서 오직 씨의 대담성에 거듭 경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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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전후하여 김오성 씨가 틈틈이 지성인의 타입을 내세운 일이 있었고 서인식 씨도 전형적 성격을 영웅으로서 파악하려는 논책을 한 일이 있었으나 지면 관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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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새로운 시대 정신의 체현자와 신질서의 새인물을 창조한다고, 평론가들의 제창과 전후하여 몇 사람의 작가가 용약 진두(陳頭)에 나선 모양이나, 성과는 평론가들의 만족조차 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작가들의 천박한 두뇌와 역량의 소치이지, 우리 평론가들의 왜곡된 신세대론이나 편파(偏頗)한 주인공론의 죄과는 아니리라. 하고(何故)냐 하면 자기가 뱉은 말의 결과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 것이 왕왕히 우리 평론가들의 관습이기도 쉬우니까…….(6월 11일)
 
 
 

2. 하. 각층의 ‘타입’ 발견 - 산문 정신의 시무(時務)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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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문학적 형편을 돌아보아 과연 신세대의 정신을 체현한 자이거나 또는 신질서를 감당하는 인물을 영웅이나 지도자로서, 아니 하나의 훌륭한 타입으로서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와 같은 처지와 문학적 전통 위에 앉아서 우리는 그러한 타입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이 불가능할 때엔 문학은 깨끗이 사망 선고를 써야 온당한 것일까. 나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이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나는 그러한 평론가의 무사려(無思慮)한 추상론에는 지지를 표명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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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지배하게 될 당래할 신질서의 내용이나 형태나가 무엇이 되어질는가는 필자와 같은 자의 섣불리 단정할 바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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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을 만연히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와 교체되는 내용을 띠리라는 것을 상정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태리나 독일 같은데서 그런 것을 누누히 바라볼 수가 있다. 물론 민족과 국가에 따라 그 내용과 성질이 판이할 것으로 파시즘이나 나치즘이나 스탈리니즘을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으나 영불 등의 구질서와 구별되는 신질서임에는 틀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5, 6년의 연천(年淺)한 자도 있으나 개중에는 20여 년의 건설의 역사를 가진 자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나라에서 어떠한 신인간 타입이 문학적으로 훌륭히 창조되었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한다. 나치즘은 세계 문학의 계열에 어떠한 주인공을 보내었는가. 이태리는? 아니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소련은 어떠한 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을 세계 문학사에 참열(參列)시키고 있는 것일까. 일국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을 창조하였었다 하여 그의 인기가 일시 세계에까지 떨친 미하일 숄로호프의 「개척된 처녀지」의 다비도프에 대해서는 막심 고리키가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우리 러시아 젊은 문학은 아직 세계 문학에 내세울 만한 인물을 창조하지는 못했다고, 사정은 정히 이러하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확실히 그들과 같은 문화적 전통도 소설의 유산도 가지고 있지 못하거니와 국정(國情)과 환경도 판이할 것이다. 이러한 때 헛되이 성격의 피라미드를 되풀이하고 있음은 천박한 공식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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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의 취할 바 길은 어디 열려 있는 것일까. ‘전형적 성격’에 대한 별개의 해석을 가져야 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전형적 성격 내지 타입이란 것을 한 사람의 피라미드의 상층으로 이해하지 말고 당해 시대가 대표하는 각층의 각 계층의 타입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나 사상가나 돌격 대원만을 시대 정신의 구현자라 보지 말고 그리고 이러한 한 사람의 주인공의 운명을 통하여서만 사상을 얽으려 하지 말고 역사적 전환기가 산출하는 각층의 대표자의 개별적 성격 창조를 통하여 역사적 법칙의 폭로에 도달하는 문학의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햄릿은 그러한 인물이다. 돈키호테도 또한 그러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영웅도 아니요 백마를 탄 시대 정신도 아니었다. 하나는 결단력이 없는 정말(丁抹)의 왕자, 하나는 과대망상광일 뿐이었으나 그들은 한가지로 봉건 제도와 봉건적 세계관의 붕괴를 체현한 아름다운 전형의 천재적인 형상이었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해서 리얼리스트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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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발자크에 이르면 더욱 철저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작품의 하나 하나 또는 작중 인물의 주인공이란 것도 무의미하여진다. 「인간 희곡」은 백편에 가까운 소설로서 형성되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각층 각 계급의 각양 각색한 수천의 인물들이 죽는가 죽이는가의 맹렬한 생존 투쟁을 통하여 불란서의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내적 행진을 모순의 양태째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관찰문학론의 졸고 중에서 아메리카 리얼리즘의 현상에 대해서 대방(大方)의 주의를 환기하여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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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왕왕 우리 소설 문학에 대해서 절망적인 파괴론이 행하여지는 것을 구경하지만 비평가들의 무절조한 허영심의 발로일 뿐이다. 산문 정신은 불사신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공연한 비관론의 되풀이가 아니다. 비관이나 절망은 시인의 주관적인 고백으로선 재미도 있지만 비평 정신으로서는 자기 파산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은 살아야 한다.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써야 한다. 이 길을 발견하고 찾는 것만이 시무의 논리가 용약(勇躍)하여 참가할 사무(事務)가 되기에 마땅할 수 있을 것이다.(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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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40년 6월 11∼12일)
【원문】명일에 기대하는 인간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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