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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해의 가을의 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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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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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의 가을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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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적인 소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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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중학 때에 일기를 썼던 것은 대부분 없어졌고, 동경서 예과(豫科) 때에 일기첩(日記帖) 때문에 단단한 화(禍)를 입고서 그 놈을 전부 불살라 버리고는 그 뒤 일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런데 소화(昭和) 9년(1934)에 고향서 지내면서 얼마간 일기첩에 손을 댄 기억이 있어서, 석유상자를 뒤적여 보았더니 5월부터 11월까지의 일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만4년 전이다. 이 해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혼란스럽고 또 이른바 액운이 함께 몰려든 해였다. 위선 정월 들어서 선처(先妻)가 아이를 낳고 9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평양서 하던 장사니 살림이니 한 걸, 전부 헤쳐버리고 성천(成川)에 와 있었고, 6월과 10월에 양차(兩次)나 카프사건으로 전주를 다녀왔고, 어린아이들은 양처(兩處)에서 연달아 홍역과 이질을 앓고도 분경치듯 하던 해이다. 심지어는 틈틈이 머리를 짜듯하여 써 본 소설이 거의 그대로 미발표를 당하였고, 그래서 말할 수 없이 우울히 보내던 1년이다. 카프가 해산된 건 바로 그 익년(翌年)이고, 내가 상경한 것도 그 이듬해다. 이 때의 일기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데 아마 클클하던 속을 좀 덜어보고 풀어 볼 생각으로, 일기라고 끄적거려 보던 모양이다. 그런데 글이 산만하고 격정적이고, 감상적이고 너무 혼란해서 도저히 활자로 화(化)해 볼 생각이 없다. 단 한 절(節), 내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하리 만큼 침착하니, 옛날 어린 시절을 회상한, 상당히 긴 것이 있어서 다행히 편집자의 요청을 어기지는 않게 되었으나 너무 일기답지 않아 독자에게 죄송하다.
 
 
 

1. 소화(昭和) 9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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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일기가 중단되었다. 11월 9일 전주에서 비로소 몸이 자유로 되어 이발하고 전보 치고 밤차로 그 곳을 떠났다. 평양, 순천을 거쳐서 19일 밤에야 집으로 돌아오게 된 때문에 이렇게 일기가 오랫동안 중간이 끊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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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이 맑다. 가볍게 풀솜 같은 구름이 몇 조각 떳더니 그것마저 없어졌다. 약을 연거푸 복용했더니 건강이 다소 회복된 모양 같다. 단장을 들고 뒷길로 나가 사창못 옆을 지나 송림 가으로 산보하다가, 길 위에서 문득 아이들 때 이 길로 수수감북이 찌고 대추 따러 다니던 기억이 피어올랐다. 그 때의 동무들 중에 방차손(方次孫)이도 팽(彭)둘채도 지금은 어디서 사는지 생사조차 모른다. 나는 한 토막의 기억을 붙들고서 오랫동안 마른 풀 위에 앉아 있었다. 소품자료는 될까 하여 형식을 갖추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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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차손이는 앞에 서고 팽둘채는 가운데 서고 맨 마지막엔 내가 서서 셋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공동묘지 밑을 끼고 국수당 있는 쪽으로 향하여 걸어 간다. 한참 풀숲에 어린 작은 길을 더듬어 가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둘채가 우뚝 서서 나를 돌려다 본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열 두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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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가운데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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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반명령적이다. 그러나 나는 우뚝 선 채 길을 비키는 둘채의 앞을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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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잔소리 말구 너, 가운데 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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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서도 좀 웃어 보이였다. 사실 나는 속으로는 괘심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를 이리다고 가운데 넣고 보호해 주는 척하려는 둘채의 심보가 고약스럽게 생각키였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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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두런거리는 것을 보고 제일 나이도 많고, 또 학교도 한 학년 윗반인 차손이가 가던 길을 돌아서서 알은 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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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채, 너 죽을까봐 그러니, 범한테 물릴까봐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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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손이 말을 듣기까지는 나도 그것만은 깜빡 잊었었다. 셋이 밤길을 가다 범을 만나면 꼭 가운데 있는 놈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었고 또 귀신도 가운데 선 놈을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둘채가 나를 보고 자리를 바꾸자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다. 둘채는 얼굴이 좀 붉어져서 거반 떨어져 가던 콧물을 훅 들여 마시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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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채 너 앞에 서라. 내 범한테 물려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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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차손이가 둘채와 자리를 바꾸어 가운데 서고 나는 그대로 맨 나중에 쫓아간다. 한참 동안은 덤덤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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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의 입구가 가까워 오니 벌써부터 흙 마른 무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구비를 돌면 풀숲은 많아져서 쏜살같이 작은 길이 국수당을 바라보면 뻔히 있다. 공동묘지에서는 개를 보아도 여우같이 보였다. 나는 그 쪽은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며, 앞에서 가는 차손이의 뒤통수만 보고 걷는다. 뒤에서 무엇을 따라오는 것 같다. 제 발자국 소리도 남의 것 같다. 잔등에서 털럭거리는 ‘다렝이’의 소리도 선뜻선뜻 간장을 도려낸다. 나는 생각다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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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당까지 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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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앞만 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뛰면 뛸수록 겁은 더하고 더해 가는 겁은 뛰는 다리를 더한층 재바르게 한다. 막 공동묘지 어귀를 휘여돌아 풀숲으로 접어드는데, 앞에서 뛰던 둘채가 툭하고 무엇을 끊으면서 발최ㅅ뚝을 굴러떨어지고, 이 바람에 뛰던 걸음을 걷잡지 못해 차손이도 꺼급서서 두어 번 허우적거리더니 언덕 위에 가로 넘어진다. 나는 어인 영문을 몰라 이들을 밟듯이 뛰어 넘고 겨우, 한 발이나 앞섰다가 다리를 잡아 세웠다. 우리가 온 길을 돌려다 보니 길슭에 있는 풀을 두 곳이나 서로 매어 놓았었다. 그 옆을 쏙새기와 왕구새와 으악새가 바람에 산들산들 나무끼고 있다. 둘채는 코를 찡 풀고 울먹울먹하면서 허옇게 벗겨진 발른 다리를 털며 최ㅅ뚝을 기어올라오는데 차손이는 억지로 웃으면서 무릎을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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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백정놈의 새끼가 걸 매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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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손이는 약이 올라 덤빈다. 둘채는 나를 쳐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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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손이 너 모르네? 넌 매 놓은 거 알았지? 알았기에 맨 뒤에 섰다가 넘어지지두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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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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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놈이 가운데 서기가 싫어서 앞으로 갔다가 제일 쌍히 넘어지고 지금 와서 누구에게 치원인가 싶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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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와서 걸 매 놓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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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문제시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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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많이 닷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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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둘채의 곁으로 갔다. 그랬더니 금시에 아파서 어루만지던 다리를 바지가랭이로 감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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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일 없다, 대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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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차손이 옆에 와 앉는다. 한참 동안을 조용히 그렇하고 앉았는데, 하늘에서 오르릉 하는 희미한 소리가 난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명주를 풀어놓은 것 같은 긴 구름이 한 줄 빗긴 높은 푸른 하늘에 잠자리 같은 비행기가 조그마하게 날고 있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서 목을 뽑고 쳐다보았다. 비행기는 원산 방면으로 가는가 햇빛에 날개를 땃비늘같이 반득이며 고요히 날아가 버린다. 우리들은 그의 그림자가 완전히 없어져 버릴 때까지 목을 꺾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비행기에 대해서 지껄이며 다시 길 위에 앉았다. 나는 평양에 오래지 않아 비행기 공장이 생긴다는 말을 하고 다시 평양이 서울보다도 장래에는 더 발전한다는 엉뚱한 소리까지 했다. 대추 사냥 가던 것은 잊어버리기나 한 듯이 이러고 있는데 국수당 쪽을 보던 둘채가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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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박서방 온다. 우리 여기 풀을 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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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발딱 일어선다. 과연 박서방은 고개 너머로 가서 속새와 가당나무를 섞어서 나무를 한 짐 해 지고 지금 막 국수당 고개턱을 내려오는 참이다. 차손이도 자기네가 넘어진 분풀이를 이 영감에게 하려고인지 곧 둘채의 말에 찬성하여 누렇게 덮인 곳을 골라서 둘이 함께 풀을 마주 매고 그 위에 푸른 풀을 엉켜서 덮어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게 한다. 나는 우두먼히 이들의 하는 것을 보고 섰다가 다시 박서방 오는 쪽을 보았다. 그는 작숭이를 받쳐들고 언덕길을 주춤주춤 내려오고 있다. 벌써 둘채와 차손이는 길 밑으로 내려가서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나는 달려가서 풀을 풀어 버릴까 했으나, 박서방이 풀숲을 살짝 넘어서는 것도 볼 만하리라는 이상한 생각을 품고서 그들의 시키는 대로 최ㅅ뚝 밑에 내려섰다. 허리를 구부리고 몸을 가리운 뒤에 둘채와 차손이는 아까 온 방향을 도로 뛰어 간다. 나는 그의 뒤를 천천히 쫓아가며 박서방을 생각했다. 그는 이 고을서 제일 잘사는 부자집 절게(머슴)로 있었다. 장가를 든 적이 없다고 박총각이라고도 부른다. 연세는 오십이 넘었으나 칠십은 된 것처럼 늙었었다. 이 영감이 나뭇짐을 지고 풀 매놓은 곳을 살짝 넘어서는 것을 보면 둘채와 차손이가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 그러나 나의 속에도 어딘지 모르게 나뭇짐을 지고 뒹굴어 넘어진 박서방을 보는 것이 유쾌스러우리라는 잔인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우리들 셋은 은돌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숨을 죽이고 박서방이 내려오는 것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박서방은 점점 가까워 온다. 그는 그곳을 넘어설 것인가 그곳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 나의 마음은 안타까웁게 조마조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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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 날보구 늘 놀리더니 오늘은 한 번 본때 있게 뒹굴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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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연신 코를 훌쩍거린다. 차손이가 지껄이지 말라고 등허리를 쿡 찌르고 ‘쉬’ 한다. 풀숲에 다리를 스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나뭇짐이 사각거린다. 나는 몸을 푹 박고 박서방을 보았다. 그는 작숭이를 움켜쥐고 껑충껑충 뛰듯이 이리로 온다. 눈은 발밑을 보지 않고 먼 앞을 파고 있다. 나는 그만 얼굴을 푹 수그렸다. 일 초 이 초 꿍 하는 소리와 함께 박서방은 무밭에 나무짐을 졸리고 저만큼 굴러 떨어진다. 우리들은 서로 숨을 죽이고 낯이 해쓱해서 두 다리 짬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모두 얼굴이 굳어져서 처음 생각과 같이 웃지들도 않는다. 낑낑거리며 박서방이 일어나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겨우 얼굴을 들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박서방은 얼굴은 찡그리고 흙묻은 중의를 털면서 슬며시 일어난다. 지게는 아직도 그대의 밭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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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한 놈의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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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얼굴을 두리번두리번 한다. 누추게 땀에 배인 흰 당목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이였는데, 수염과 눈썹엔 서릿발이 잡히었고 까맣게 탄 얼굴엔 눈에 띄게 굵은 주름살이 눈가상에 어리어 있다. 그는 맥이 나가 한참 동안을 멀거니 섰더니 다시 밭으로 내려가 지겟짐을 지고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며 길 위로 올라간다. 땀방울이 금시에 얼굴에 내발린다. 나는 이상한 죄스러운 생각에 가슴을 뒤설레고 있다. 박서방은 퇴! 하고 침을 한번 뱉어서 작숭이를 쥐고 눈앞을 조심조심 우리들이 숨어 있는 다리 위를 건넌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박서방의 발소리가 지나간지 한참 뒤에 나는 다리 속에서 나왔다. 내 뒤를 쫓아 둘채와 차손이도 아무 말 안하고 기어 나온다. 길 위에 올라서서 박서방 가는 쪽을 바라보니 그의 나뭇짐이 누렇게 가을풀이 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를 쓸쓸히 수수밭 쪽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바른 다리를 주춤주춤 저는 것도 같다. 박서방의 그림자가 수수밭 옆으로 사라져 없어져도 그대로 우리들은 우두커니 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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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공론』, 1938년 10월)
【원문】어느 해의 가을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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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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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日記) [분류]
 
◈ 참조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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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9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