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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童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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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3
채만식
순진한 농촌 여성들이 공장에 팔려 가서 겪는 고통을 그린 작품으로 설명될 수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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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童 話[동화]
 
2
그날까지가 ‘동화’ 고, 그래서 업순이는 그리로 떠났다.
 
 
 

1. 1. 그 안날 낮에

 
4
물기가 듣는 듯 그늘 짙은 뒷마루에서 업순이는 바느질이 자지러졌다.
 
5
(음력으로 칠월) 한여름의 한낮은 늘어지게 길다. 조용하고, 이웃들도 졸음이 오게 짝 소리 없다.
 
6
뒤 섶울타리를 소담스럽게 덮은 호박덩굴 위로 쨍쨍한 불볕이 내리쬔다. 오래 가물기도 했지만, 더위에 시달려 호박잎들이 너울을 쓴다.
 
7
손 가까운 데 두고 풋고추도 따먹을 겸 화초삼아 여남은 포기나 심은 고춧대들도 가지가 배애배 꼬였다. 그래도 갓난아기 고추자지 같은 고추가 담숭담숭 열리기는 했다.
 
8
울타리 밑에서는 장닭이 암탉을 두 마리 데리고, 덥지도 않은지 메를 헤적이면서 가만가만 쏭알거린다.
 
9
키만 훨씬 크지 가지나 잎은 앓고 난 머리같이 엉성한 배나무가 저처럼 엉성한 그늘을 장독대 옆으로 던지고 섰다. 까치가 한 마리 끼약끼약 짖다가 심심한지 이내 날아가버린다.
 
10
마주 환히 열어놓은 방 앞뒷문으로 소리없이 드나드는 바람이 소곳이 숙인 업순이의 이마 위로 서너 낱 드리운 머리칼을 건드리곤 한다.
 
11
한가운데로 탄 가리마가 새하얗게 그린 그림 같다. 조금 뒤로 젖혀진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어올랐다. 살결 희고 도도록한 볼때기가 귀밑께로 가면 배내털이 아직 부얼부얼하다.
 
12
업순이는 깜박 졸음이 오려고 하는 것을 참고 손을 재게 놀린다. 뻣뻣하고 커다란 아버지의 삼베적삼이 업순이의 조그마한 손과 굵다란 바늘 끝에서 솜같이 보드랍게 논다.
 
13
아닌게아니라, 업순이는 시방 정신은 딴 데 가 있으면서 보드라운 비단을 만지고 있다.
 
14
깨끗하고 정하게 생긴 하얀 비단, 눈이 부신 진자주 비단, 시원스러워 보이는 남색 비단, 하늘거리는 연분홍 비단, 첫봄 머리의 개나리꽃 같이 반가운 노랑 비단, 이런 여러 가지 비단들이 피륙으로 혹은 말라놓은 옷감으로 드리없이 손에 만져지는 것이다.
 
15
그저께 아침, 일이 다 그렇게 작정이 되어, 그 이야기를 어머니 아버지한테 듣던 때부터 업순이는 무시로 이렇게 비단 만지는 꿈 아닌 꿈을 꾸곤 했다.
 
16
그러고, 그런 때면 으례껀 저도 모르게 방긋이 웃음이 떠오르곤 한다.
 
 
17
처음 겸 마지막으로 딸 하나를 낳았더니, 생긴 게 또 복슬복슬하대서 어머니 아버지는 삼신님이 업을 점지해 주셨다고, 그래 업순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18
업순이는 시방 나이 열일곱, 그러니 옛날 세상 같으면 벌써 시집을 같을테고, 잘하면 지금쯤 첫아기라도 하나 낳았을 테지만, 아직 귀영머리를 땋은 채 처자다. 그렇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투철한 개화를 한 것도 아니요, 갈데없는 무식꾼하고 농투성이기는 하지만, 일찌감치 남의 집 민며느리라도 주자니, 무남독녀 외딸인 걸 그러기가 아깝기도 하려니와, 또 남의 집 민며느리란 팔자가 빠안히 들여다보이는 것인데, 그걸 눈 멀뚱멀뚱 뜨고서 그 고생줄로 몰아넣기도 애처롭고 해서 차마 못했던 것이다.
 
19
그러니, 그러구저러구 할 게 아니라 어미 아비는 개명을 못했을망정 시쳇속으로 어디 네나 개명을 좀 해보라고 집안 사세도 부치는 것을 억지삼아 읍내 보통학교에 들여보내서, 학교 공부(普通學校[보통학교] 卒業[졸업])를 시켜보았었다.
 
20
그러나, 막상 그렇게 학교 공부를 시켜놓고 보아도 별 두드러진 수는 없고, 종시 촌 농투성이의 계집애 자식이지 별것이 아니었었다.
 
21
그러니, 자 인제는 동네 더벅머리 총각이나마 데릴사위를 정하잔즉 그건 눈에 차지를 않고, 그렇다고 ‘자격자’를 골라서 혼인을 하잔즉, 지체도 없으려니와 가랭이가 찢어지게 가난한 터수에 도무지 가량없는 소망이고 해서, 일이 대단 허무하고도 맹랑하게 되었었다.
 
22
“개명두 다아 구격이 맞구서 해야 하는 법이야!”
 
23
“그렇다우.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구 않어우?”
 
24
이건 두 내외가 마주앉으면 어이가 없대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갓 시속이 그렇고, 남들도 말만한 계집애 자식을 그냥 두어둔다고 흉하지 않는 것만 다행히 여겨, 그대로 두고 보아오기는 왔던 것이다.
 
25
그러자 계제에 전주 감영의 비단 짜는 공장에서 사람이 내려와서 구장을 앞장세워 가지고 이 집 저 집 계집애 있는 집을 적간하고 다니면서 직공을 뽑는 설레에 업순네도 선뜻 응하고 나섰었다.
 
26
업순이야 집에서 가끔 명주도 날아보았고 하니 보내봄직도 하고 그래 그렇게 가서 있으면 월급을 이십오 원이니 삼십 원이니 받는다니까, 한 일 년만 모아도 제 시집갈 마련은 존존할 테고, 또 그뿐 아니라 이 흉년 끝에 집에 두어두고서 펀펀 굶기느니 제풀로 가서 제 목구멍 하나 얻어 먹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디냐고, 이렇게 두루두루 좋겠어서 선선히 보내기로 작정을 한 것이고, 업순이 저도 두말없이 좋아했었다.
 
27
더우기 비단을 입어보지 못하는 촌 계집아이로, 가령 입지는 못할망정 비단을 제 손으로 짠다는 것, 그것 한가지만 해도 업순이한테는 우선 즐거운 꿈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28
하기야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더구나 과년한 계집애 자식인 걸 낯선 딴 고장으로 떠나보내기가 섬뜩하기도 하고 섭섭한 노릇이기도 하고, 또 업순이 저도 그런 마음이 없는 게 아니요, 하지만 그거야 일이 다 작정된 뒤에 투정삼아 생기는 걱정이요, 그래서 ‘머 어떨라구, 괜찮겠지’ 이렇게 억지로 안심을 할지언정, 뒤미처 새삼스럽게 그것을 갖다가 작파를 할 생심은 못하도록 구미가 당기는 좋은 계제였던 것이다.
 
 
29
“둥, 둥.”
 
30
새말 오까무라상네 농장 절에서 울리는 낮북 소리가 그것도 꿈결같이 아스라하게 들려온다.
 
31
울타리 밑에서 메를 헤적이던 수탉이 깜박 생각이 나서 홰를 툭투욱 치더니
 
32
“교꼬오오.”
 
33
늘어지게 한 마디, 이어서 또 한 마디 거푸 세 마디를 울고는 구국구국 암탉한테 자랑을 한다.
 
34
업순이는 콩밭에 가신 어머니도, 읍내로 고무신을 바꾸러 가신 아버지도 오래잖아 오시겠거니와, 오시던 멀루 점심을 드려야 할 테니까, 미리 상을 차려놓아야 하겠거니 생각은 한편으로 하면서도, 바느질손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35
“두우 두…… 저런 오오사헐 년의 돼지새끼가…… 두우.”
 
36
갑자기 앞마당에서 어머니의 역정이 나서 외치는 목청 소리에 놀라 업순이는 바느질을 내던지고 뛰어나간다.
 
37
콩밭 열무를 조그맣게 한 다발 머리에 인 어머니는 마당 가운데서 두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소리 외치고, 허리에 짧은 새끼토막을 맨 돼지 새끼 한 마리가 채전밭께로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을 가고 있다. 말려서 마당질을 하려고 펴 널어둔 푸달진 보리다발을 고놈이 와서 개평으로 작살을 내던 모양이다.
 
38
업순이는 보리를 잘 지키지 못해서 무색하기보다 어머니의 하는 양이며, 돼지새끼가 기급해서 도망가는 꼴이 하도 우스워서 업을 오므라뜨리고 어머니한테서 무우다발을 받는다.
 
39
“오사헐 년놈들! 어쩌자구 이 숭년 끝에 짐승을 놓아먹여!”
 
40
어머니는 돼지새끼가 도망간 울타리 구멍께로 한참이나 눈을 흘기다가 토방으로 올라와서 마룻전에 파근히 걸터앉더니, 후유 더운 숨을 내쉰다. 새까맣게 볕에 그은 얼굴로 줄기줄기 땀이 흘러내린다.
 
41
“어머니, 나 시암(우물)에 가서 시언헌 찬물 떠오까?”
 
42
“오면서 먹구 왔다. 느 아버지는 아직 안 오싰냐?”
 
43
“응, 하마 오실 틴디……”
 
44
어머니는 손에 잡히는 대로 마침 옆에 있는 몽당부채를 집어 들고 얼굴을 부친다. 바람은 나는 둥 마는 둥 소리만 벌컥벌컥 요란하다.
 
45
“무수(무우)나 아니나 물을 못 얻어먹어서……”
 
46
어머니는 토방에다 놓은 무우다발을 내키잖게 내려다본다.
 
47
“……못생기디못생긴 것들이 고동(장다리)만 솟았더라.”
 
48
“콩은?”
 
49
“이렇게 가문디 콩인들 성헐 것이냐? 모두 베애배 꾀이구……”
 
50
어머니는 한숨을 후유 내쉬면서 이글이글 불볕이 내리는 하늘을 심정스럽게 내다본다. 말짱하니 구름 한 점 없다.
 
51
“숭년은 또 들어두었어! 별말 헐 것 없이 숭년인걸. 작년에 그 모진 숭년이 들구 보리숭년까지 겸치더니, 어쩌자구 올에두 이러는지! 이년의 고장은 누가 살인을 히였단 말인지……”
 
52
여느때 같으면 흉년 걱정에 저도 따라서 걱정이 되겠지만, 오늘부터는 업순이는 그리 딱하지 않았다. 만약 올해도 흉년이 들어서 어머니 아버지가 굶게 되거들랑, 저금을 그만두고 그놈 십 원까지 해서 십오 원씩 집으로 보내자는 요량이 있어서 그렇다.
 
53
업순이는 예산을 이렇게 했었다. 처음 여섯 달 동안 견습을 하고 나면 그때는 이십오 원씩 옹근 월급을 준다니까, 그놈에서 기숙사 밥값이 칠 원 오십 전이라니, 그걸 제하면 십칠 원 오십 전. 그 십칠 원 오십 전에서 이 원 오십 전만 용돈을 쓰고 오 원은 집으로 보내고, 십 원씩은 꼭꼭 저금을 해둔다. 그래서 삼 년만 하면 삼백육십 원이라. 근 사백 원 돈이니까, 그땔라컨 그놈을 찾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한테는 큰 소를 한 마리 사드리고, 어머니한테는 양돝 걸구(암놈) 한 마리를 사 드리고, 집안의 빚도 갚아 드리고, 그리고 한 백 원은 남겨서 시집갈 밑천을 한다.
 
54
시집이란 게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기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하도 걱정을 하시니까 꼭 가기는 가야 하는 것인가 보니, 그러면 그렇게 해서 그 끈터리로라도 시집을 가는 것이 옳을 것 같고, 또 그럴밖에는 별수가 없다.
 
55
업순이는 이렇게 작정이 삼 년 작정인데, 만약 올해 흉년이 들어서 십원씩 저금을 못하고 집으로 다 보내게 된다면, 일 년을 더 늘려서 사 년은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 년은 말고 오 년 육 년이라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56
“어머니, 즘신 잡수?”
 
57
업순이는 부엌으로 들어가려면서 돌려다보고 묻는다.
 
58
“느 아버지 오시거든 같이 먹자. 하마 오실 테니, 상이나 채려 두렴……”
 
59
어머니는 머리채가 허리 아래로 치렁거리는 딸의 뒤태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또 한숨을 내쉰다. 오늘 아침까지도 어린애로만 여겨온 딸이 그 치렁거리는 머리채하며 통통한 몸집하며가 갑자기 처녀 꼴이 완구히 박혀 보이고, 그런데 저렇게 장성한 계집애 자식을 낯선 타관으로 보낸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앞이 잘리는 것 같았다.
 
60
그러나 그는 혼자 속을 눅인다.
 
61
‘그렇다고 이 흉년에 집안에다가 붙잡아 두고 굶기기나 하면 무얼 하나. 그런 대로 보내주어서 제 목구멍 하나나 얻어먹게 하고 제 시집갈 밑천이라도 장만하게 하는 수지.’
 
 
 

2. 2. 그 안날 저녁에

 
63
맷방석만한 달이 높다란 솔숲 위로 솟아올라 마당을 환히 내리 비춘다. 밤이 갑자기 재미나는 요술 같다.
 
64
가물기는 해도 이슬이 내려 촉촉해서 달밤이 더욱 호졸곤하다. 보릿겨로 모깃불을 지핀 연기가 저 혼자서 몽기몽기 피어올라 매캐한 냄새가 퍼져온다. 모기떼가 멀리서 오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
 
65
마당 한가운데 밀짚 거적을 펴놓고 모녀가 빨래를 다린다. 저편으로 따로 가마니쪽을 깔고 앉아서 아버지는 짚신을 삼는다. 고무신을 신을테지만 그래도 혹시 짚신이 아쉰 때가 있을지 모르니, 두어 켤레 삼아 주께시니 가지고 가라고, 시방 정성을 들여서 삼고 있는 참이다.
 
66
“이건 잿물에다가 삶으면 못쓴다더라……”
 
67
어머니가 마침 다 다린 깜장 인조 지리멩 치마를 개키면서 업순이더러 이른다.
 
68
“그러닝개 좀 쩔었더래두 삶지 말구 비누루 빨어 입어라.”
 
69
“응…… 그렇지만, 광포는 갠찮지? 단속곳 말이우……”
 
70
“그건 삶어두 갠찮기사 허지만, 그것도 삶느니 그냥 빨아서 뜨물에다가 당거 두먼 땟물이 좋아지느니라마는……”
 
71
“신이 그리두 좀 적잖더냐?”
 
72
아버지가 먼저 사온 고무신이 작다고 아까 낮에 바꾸어 온 걸 그래도 미심쩍어서 하는 말이다.
 
73
“이번 치는 꼭 맞어요.”
 
74
“신이라건 좀 낙낙히여야지, 더군다나 새신을 신구서 정거장까지 십리길이나 갈라먼서 너머 째머는 발 부릍는다.”
 
75
“예. 그리두 째던 안히라우.”
 
76
어제 사온 보리 열 말이며 쌀이며, 아버지 옷감이며, 어머니 옷감이며, 또 업순이 제가 입고 갈 옷감들이며, 그게 모두 이제 받을 월급에서 선하(先拂)로 받은 이십 원을 가지고 쓴 것이다.
 
77
곰곰이 생각하면, 업순이는 제가 벌이한 돈으로 당장 이렇게 요긴하게 쓰는 것을 우선이라도 누구 동무한테 자랑이나 해보고 싶게 희한하고 즐거웠다.
 
78
키 크고 엉성한 강냉이대들이 듬성듬성 섰고, 상치 아욱 쑥갓 들이 고동이 서서 꽃이 피고, 마늘이 쫑이 솟아서 잎이 시들고, 강낭콩 포기가 풀 속에 묻히고 한 채밭에 흰 빨래가 으슴푸레하니 널려 있다.
 
79
업순이가 밭에 들어서서 빨래를 한가닥 집으려니까, 풀 끝에서 쨍이가 한마리 호르르 날아간다. 쨍이가 날아간 쪽에서는 개똥불이 희미하게 불을 켜 가지고 이리로 날아온다.
 
80
업순이는 어렸을 때 쨍이를 잡으러 다니고, 개똥불을 잡아 호박꽃으로 초롱을 만들어 가지고 놀던 일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그는 빨래 걷던 손을 멈추고 한참이나 개똥불을 바라보면서 혼자 웃는다.
 
81
빨래를 거진 다 다렸을 때 사립문 밖에서 옆집 새댁이
 
82
“업순아?”
 
83
부르면서 들어온다. 구럭에 무얼 담았는지 묵직하게 어깨에 메었다.
 
84
나이는 업순이보다 한 살 아래 열여섯 살이라도, 작년에 옆집의 서른한 살먹은 명칠이한테 시집을 왔대서, 그래 각시다. 그 표적으로다가 뒷데시기에는 밤알만한 쪽이 붙어 있다.
 
85
업순이하고는 이웃도 이웃이지만 퍽 가까운 동무다. 내일 아침에 업순이가 멀리 떠난다니까, 작별삼아 가만히 찾아온 것이다.
 
86
“무얼 저렇게 미구 온대여?”
 
87
업순이가 돌려다보면서 웃으니까, 새댁도 따라 웃으면서 밀짚 거적 위에다가 메고 온 구럭을 내려놓는다. 맛난 참외 냄새가 물큰하니 코로 스며든다.
 
88
“업순어머니 진지 잡섰시유? 업순아버지 짚신 삼우시느만.”
 
89
새댁은 이렇게 고루 인사를 하고 대답을 받고 하면서, 업순이 옆에 가 바투 앉는다.
 
90
“내일 떠난다는디 서운허기는 허구, 그리서……”
 
91
새댁은 구럭을 넘겨다보고 말끝 대신 눈으로 웃는다.
 
92
“아이, 아슴찮이라! 시방 원두막에서 오는구만?”
 
93
“응. 그것두 ‘찌락소’가 원두막에서 자닝개루, 내가 쫓아가서 뺏어왔지, 머 영감이나 마느래가 있어 부아! 될 말이간디……”
 
94
새댁은 고개를 내두르면서 입을 삐죽거린다. ‘찌락소’란 건 제 남편 말이고, 영감이니 마누라니는 시부모 말이다.
 
95
“입을 저렇게 놀리닝개루 밤낮 얻어맞구 그러지!”
 
96
업순어머니가 나무라는 말은 아니고 농담삼아 한마디 거든다.
 
97
“아이, 업순어머니두, 번연히 속 다 알먼서 그러시네! 내가 괜시리 그러간디라우? 날 미워서 밤낮들 때리구 구박허구, 그러닝개 나두 그러지라우…… 업순이 인주어, 내가 좀 잡으께……”
 
98
새댁은 일을 도와 주자고 업순이를 밀고 다가앉는다.
 
99
“……내일이면 멀리 갈 사람이닝개 편안히 있다가 가야지.”
 
100
“아이, 별소리를 다 허네. 인제 다아 대린걸, 머.”
 
101
“그리두 인주어.”
 
102
업순이는 더 사양을 않고 물러나 일어선다.
 
103
“그럼 나는 가서 빨래 걷어갖구 오께…… 그러구 참, 새댁 이따가 나허구 맥 감어? 응?”
 
104
“응. 아아주 글러루 간다구 맥을 다 감구? 히히.”
 
105
“지랄! 누가 거기 간다구 그러간디? 더우닝개, 맥 감자구 그맀지. 그렇지만 새댁 너머 늦으먼 또 집에 가서 매맞구 그러게?”
 
106
“갠찮이여. 원두막에서 잔다구 허구 나왔으닝개. 예서 실컷 놀다가 원두막으루 가먼, 그만인디 뭘……”
 
107
“그럼, 아주 잘되였구만…… 맥 감구 참외 먹구, 그러구 이스윽허두룩 놀다가 가? 응?”
 
108
“응.”
 
109
새댁은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리다가, 차차루 시무룩하더니 한숨을 호오 내쉰다.
 
110
“나두 시집인지 급살인지나 안 왔으면, 업순이처럼 그런 존 디루나 가지! 업순어머니, 참 잘 허시우. 업순이두 나처럼 시집이나 잘못 가서 이런 고생이나 허구 허먼, 아이구 그 일을 어떡허게!”
 
111
“그런 말 허지 마소……”
 
112
업순어머니는 일변 네 말이 옳기도 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113
“오죽허먼 다 자란 자식을 멀리 타관으루 보낼라구……”
 
114
“업순어머니두 그런 말씀 마시우. 나는 머리나 싹둑 잘러서, 그 지긋지긋헌 영감 마느래 밥상에다 올려놓아 주구서, 절루 중 노릇이나 가구싶읍디다. 나는 이렇게 육장 매나 맞구, ‘찌락소’ 녀석한테 부대끼구 허다가, 인제 며칠 안 가서 죽을란개비라우.”
 
115
“원, 별 청승맞은 소리두 다 헌다!”
 
116
달은 벌써 높다랗게 올라오고, 밤기운은 언제 낮에 그렇게 더웠더냔듯이 시원하다.
 
117
멀리서 풍장(農樂) 소리가 아득하니 들려온다. 업순이는 어머니와 새댁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구수하게 하고 있는지 귓결에 들으면서 빨래를 걷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릴 인조항라 께끼적삼이다. 산뜻하게 입고 길 떠날 적삼인 것이다.
 
 
 

3. 3. 그 날 아침에

 
119
희엿이 먼동이 터온다. 엷은 안개가 땅 위에 내려앉아 조용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나뭇잎마다 윤이 번지르하게 이슬이 묻고, 풀 끝에는 이슬 방울이 영롱하게 맺혔다. 마당도 이슬에 젖어 촉촉하다.
 
120
참새가 서너 마리 지붕 말랑에서 지저거리고 둥우리에서는 닭이 조바심을 친다. 돼지울에서도 돼지가 시장하다고 떼를 쓴다.
 
121
맨먼저 업순이가 모기장 붙인 안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온다. 자고 난가 싶잖게 눈이 윤기 있고 맑다.
 
122
마루에서는 아버지가 아직 잠이 들어 있다. 업순이는 아버지 잠을 깰세라고 조심조심 비껴 걸어 나오다가 문득 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보느라고 멈춰 선다.
 
123
반 넘어 센 머리털과 머리보다 더 센 수염이 오늘 아침사 말고 새삼스럽게 업순이의 눈에 띄었다. 그는 아버지가 밤 사이로 이렇게 늙은 성만 싶어 처음 보는 것같이 희끗희끗한 수염이 들여다보여졌다.
 
124
수염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노라니까 어려서 했다는 일이 생각이 났다.
 
125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업순이 제가 어려서 아버지가 자는 데로 엉금엉금 기어올라 수염을 잡아 꺼들고, 또 아버지가 귀엽다고 안아줄 때도 자꾸만 수염을 잡아 낚으고, 그럴라치면 아버지는 허어 이놈이, 딸년이 아비 수염을 잡아 꺼드네 하면서 허겁스럽게 엄살을 했다고……
 
126
업순이는 그랬다는 일을 생각하고, 다시금 아버지의 수염을 들여다보느라니까, 어린아기 적 그때처럼 저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아버지한테 안기어 놀아보고 싶어졌다. 그랬으면 퍽 재미가 날 것 같았다.
 
127
아버지 머리맡에는 곱게 삼은 짚신이 두 켤레 놓여 있다. 그걸 보고서야 업순이는 오늘 잠이 깬 뒤로 처음, 오늘이 그리로 가는 날인 것을 생각했다. 하니까 어제도 그렇잖았고, 그저게 그그저께도 그렇잖았는데, 오늘 아침에는(언짢을 것까지 없지만) 가슴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어저께나 그저께처럼 몸이 두웅둥 뜨는 것 같기도 하고……
 
128
마당에서는 네눈이가 꼬리를 홰애홰 치면서 웃고 섰다가 업순이가 마당으로 내려서니까 요놈이 좋아라고 가로 뛰고 세로 뛰고 한다.
 
129
돼지는 발자죽 소리부터 알아듣고, 끼익끽 지르던 소리를 그치고서 꿀꿀꿀 알은체를 한다.
 
130
둥우리 문을 열기가 바쁘게 닭들이 후르르 후덕 날아 내려온다.
 
131
죽죽 뻗어올라간 소나무 틈으로 내다보이는 저 멀리 들판 건너 하늘과 땅이 맞닿은 끝에서 불그레하니 햇살이 퍼져오른다. 업순이는 그쪽을 바라보고 섰다가 저도 모르게 듭신 숨을 들이쉰다.
 
132
마침 구장이 사립문 밖에서 얼찐거리다가 업순이를 보더니, 턱을 쑥 내밀면서
 
133
“조반 일찍 먹구 말끔 다아 채리구서 기대려라, 응? 늦으면 못쓴다, 응? 이따가 내가 데릴러 오마, 응?”
 
134
남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제 말만 부리나케 늘어놓고는 이내 또 부리나케 달아나버린다.
 
135
해는 차차 솟아올라 살이 퍼져, 동화는 끝이 나고, 업순이가 그리로 떠날 시각이 가까와온다. (松都[송도]서)
 
 
136
〈女性[여성] 3권 7호, 1938 ; 蔡萬植短篇集[채만식단편집], 1939〉
【원문】동화(童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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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3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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