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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위(四圍)의 밭으로 밭마다 가득가득 덮였던 서속이야 콩 호박 고구마 등속의 전곡(田穀)들이 하루 이틀 한자리 두자리 걷히기 시작하더니 어제 오늘은 입동이라서 마지막 파랗던 무우 배추의 김장거리마저 말끔 다 걷어들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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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칠하게 바닥이 드러난 밭고랑에 남은 것이라곤 낭자히 흩어진 검부적과 잡초뿐 황량하기 다시 없고 무단히 섭섭해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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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청사 주위를 널따랗게 비잉 둘러섰는 포플라숲이 어느새 대 밑까지 노오랗게 단풍이 들어 분주히 지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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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건너편 언덕바지의 우리 독안공(獨眼公)네 과원이 그 무짙던 능금나무 복사나무 잎사귀가 하루만큼씩 더 성글어가던 중 이제는 등성 너머로 하늘이 내다보일 만큼 완구히 성깃성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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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번 모군이 왔을 제 그리로 안내를 했더니 가장귀마다 볼 빠알간 능금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과목(果木)의 대 밑으로 내다보면서(카메라적인 시각인 모양) 맛보다도 눈이 더 즐겁다고 하던 그 능금들도 시방쯤은 저기 어떤 가게머리에 가서 놓였기 아니면 누구의 식도를 (무참히) 통과한 지 오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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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날마다 오후면, 아이들께 십전박이 두어 푼을 들려보내서 삐뚤어진 놈, 찌그러진 놈, 그래도 싱싱은 한 능금을 바구니로 수북수북 받아다가는 온 식구가 잔치를 하곤 하던 철도 그럭저럭 마지막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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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덕에 과원의 고놈 영악스럽게 사나운 강아지와 눈은 독안(獨眼)이라도 무던히 호인인 주인영감이 더불어 이제부터는 웬만큼 한가하고 편안한 한동안을 안식할 수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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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松嶽山)의 단풍은 해마다 보아도 새로운 듯 가히 상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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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김립(金笠)은 송도엘 왔다가 푸대접을 받고 새막에서 꼬부리고 누워 자면서 홧김에 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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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읊었다지만, 실상 시방은 송악이‘기무시’랄 게 아니라‘태무송(殆無松)’이라야 적절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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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라곤 산명(山名)이나 꾸려나갈 구실같이 오다가다 몇 주씩 있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열에 아홉까지가 키 얕은 활엽수의 치목(稚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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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치목의 풍부한 잎사귀들이 때마침 황과 홍의 두 가지 빛을 중심으로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가지고 넓은 산 전면을 덮은 그 위를 방금 넘어가는 사양이 가득 비쳐 눈이 부시게 화려한 양이라니, 진홍 일색의 본 풍엽(楓葉) 보다 오히려 다채(多彩)하여 나은 감이 없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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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이 봄이면 보드라운 연록으로 그 험상스런 산세(山勢)와 대조되어 일경(一景)이요 여름이면 골마다 짙은 그늘로 더불어 물 맑아 소위‘물놀이’로 좋고 하기는 하다지만, 역시 가을 단풍이 그중 으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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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지네산’너머로 햇살이 가리면서 서천(西天)엔 진홍의 노을이 퍼져 산의 단풍과 서로 빛을 겨루는 듯 경개는 정히 절정의 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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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金剛)이며 내장(內藏) 등의 이름 높은 풍악(楓嶽) 이 있는데야 송악산쯤 물론 천하의 절승(絶勝)은 못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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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방 이 시각의 내 눈은 이상 더없이 즐겁고 따라서 그걸로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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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新報[매일신보] 1939.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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