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붓한 바람이 지날 때마다 바시시하고 볏목들이 물결을 친다. 자라다 말고 열매를 맺은 벼일망정 제철이라고 노릇노릇한 목이 고분고분 숙어졌다.
3
재재거리고 날아드는 참세떼들 보고 새막에 앉은 허연 영감이 생철통을 달아맨 새끼줄을 왈그렁덜그렁 잡아흔들며 “우이 횟” 소리를 친다.
4
구추(九秋)의 한적한 소리가 노인의 가슴에서 먼저 우러나온다. 논 귀퉁이에 섰는 허수아비는 가난한 철한자다.
5
밭두덩 원두막은 3년 빈 셋집 같고 원두밭에는 시든 참외 덩굴과 콩 포기만 우북하다.
6
석양을 넘다 만 햇볕이 등덜미를 바로 쬔다. 더도 덜도 아니고 알맞게 야왼 햇밭이 당길성있게 따스하다.
7
유유하게 내리뻗친 산기슭이 들까지 다다른 곳에 낡은 초가가 요리조리 두세 채 놓여 있다-큰마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놓고 간 것처럼.-
8
물동이를 재주 부리듯이 머리에 이고 우물길을 가는 여인네의 등 뒤에서 여름내 새까맣게 햇빛에 그을린 발가벗은 어린놈이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를 부르고 쫓아온다.
9
이상한 듯이 구경을 하며 따라오던 흰둥개가 낯선 나를 보고 콩콩 짖으며 달아난다.
10
산기슭을 돌아 얕은 고개를 넘어가니 공동묘지가 나선다. 멧등마다 솜같이 흰 갈꽃이 드북드북 피어 바람이 부는 대로 가지런히 휘날리고 있다.
11
공동묘지는 볼 때마다 이사해올 집을 미리 둘러보는 듯하다.
13
철도 나지 아니한 초동(樵童)애들이 푸나무를 하면서 육자배기를 주고받는다.
14
“사람이 살며는 멫백년이나 사드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 노소가 있나. 살어 생전이나 내 맘대로만 놀거나……”
15
고개 위에 올라가 우거진 풀밭에 누우니 약오른 풀포기에서 물큰한 향내가 온몸에 배어든다.
16
손 가까이 하얀 들국화가 웃지도 않고 고달프게 피어 있다. 청초한 풀이 소복한 여인 같다.
17
한 송이 잡아끊느라니 아프다는 듯이 바르르 떤다.
18
몇만 길이나 될는지 까맣게 높은 하늘은 벌이라도 보일 듯이 맑고 푸르다.
19
밑도 없고 끝도 없고 차례도 없는 공상을 그 높은 하늘 복판에 띄워 놓고 이리저리 달리느라니 일어날 생각이 나지도 아니한다.
20
가을 해는 갈길이 바쁘다. 앞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을 조그마한 이 산 그늘이 거진 덮어버렸다.
21
들판으로 몰려나갔던 참새들이 무디무디 떼를 지어 황급히 날아들고 산 밑 오막살이에서는 저녁 연기가 곤소로니 솟아오른다. (묵은 기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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