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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데인지 몰랐다. 어찌 생각하면 옛날 성(城)터 같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달빛이 어른대는 ─ 달빛이 어른댄다 하여도 또렷한 건 아니고 다만 어슴푸레한 흰빛이 떠돌아 “달이 비취는구나.” 하는 느낌만 있을 뿐 ─ 허연 길 같기도 하였다. 넓이는 한 칸 통이 될는지 말는지, 길이는 무한한 가운데 유한한 듯하였다. 길은 길이라도 반공중(半空中)에 떠 있는 고대(高臺)인 듯하다. 그 길 위를 나하고 또 누구인지 둘하고, 셋이 묵묵히 거닐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그이는 아마 지나인(支那人)인 듯싶다.) 옛날 범중엄(范仲淹)의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새로이 짓겠다고 하였다. 그래 우리는 지금 악양루(岳陽樓) 옛터에 오른 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누(樓)의 자최라고는 주춧돌 하나도 없었다. 다만 아래를 나려다보니, 천연(天然)으로 생긴 듯도 하고 인조(人造)로 맨든 듯도 한 석반(石盤) ─ 이라 할까 반석(盤石)이라 할까 ─ 이 여기저기 띄엄띄엄 드러난 사이사이에, 수정같이 맑기도 하며 또는 모색(暮色)에 잠겨서 음울(陰鬱)하게 흐린 듯도 한 물결이 질펀하게 굽이진다 ─ 굽이진다느니보담은 그 고요한 품이 그양 널려 있다 함이 마땅하리라. 그것이 나에겐 기막힌 절경(絶景)으로 보이어 흉금이 활연(豁然)히 열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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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양루기(岳陽樓記)」를 다시 짓겠다는 이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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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도 ‘파릉승장 재동정일호(巴陵勝狀, 在洞庭一湖)’란 구절만은 고칠 수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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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매우 생각 깊은 어조로, “그는 그래, 그러나 그 외의 것은……” 하고, 자신이 넘치는 듯하였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웬일인지 범씨(范氏)의 ‘상려불행 장경즙최 박모명명 호소원제(商旅不行, 墻傾楫摧, 薄暮冥冥, 虎嘯猿啼)’란 것은 있을 수 업는 기괴한 일인 듯싶었다. 지나식 과장벽(支那式 誇張癖)에서 나온 엉터리 거짓부렁이인 듯싶었다. 장경즙최(檣傾楫摧)는 커녕 기름 같은 저 물위로, 가뜩이나 우들투들한 저 석반(石盤) 사이로, 배가 떠다니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산도 없고 숲도 없으니 범과 잔나비가 있을 리도 만무할 듯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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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지필묵(紙筆墨)을 벌리고 「신악양루기(新岳陽樓記)」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이와 함께 있던 내가 어느 사이인지 그 고대(高臺)밑에 있은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글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고대(高臺)위로 질랑갈랑 올라갔으랴. 올라가는 데는 물로 만든 조그만한 층층대가 있었다. 물이란 위에서 아래로 나려가는 법이언만 그 물은 어쩐지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듯하였다. 그 층층대 하나에 담긴 물은 한 되를 넘지 않았다. 나는 맨발로 그 수은(水銀) 같은 물을 찰랑찰랑 밟으며 올라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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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간 기억은 분명하건마는, 고대(高臺)에 오른 나는, 일찍이 그이의 곁을 떠난 적도 없고 또 올라온 일도 없는 듯하였다. 그는 그렇다 하고 그이는 거진 글을 다 지어 가는 모양인데, 오륙인(五六人)이나 어깨 너머로 그 이의 글 쓰는 양을 넘겨다보고 있었다. 어름푸레한 길바닥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를 누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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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중에 노작(露雀)군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셋이 산보(散步)할 때의 한 사람의 노작(露雀)군이던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동(同)군은 그 지나 시인(支那 詩人)의 글 쓰는 종이를 받들었든가 말았든가. 여하간 그 글짓기를 매우 열심으로 바라는 모양이며, 또 글 짓는 이에게 가장 긴(緊)한 사람인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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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쓰기를 마치자, 여기저기 뭉개고 고치며 읽기 비롯하였다. 물론 한문(漢文)이로되 범중엄(范仲淹)의 것과 달라 칠언(七言)으로 맞춰 나려간 것이었다. 그 글은 대개 잊어버렸으되, 끝에 다다라 이런 대문은 역력히 생각난다. 그이가 한시(漢詩)로 읊는 것을 내가 뜻만 짐작한 듯도 하고 또는 그이가 애당초에 우리말로 읽은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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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인가 이 성(城)밑으로 돌아들 제,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실안개로 싼 듯한 흰옷을 입고 발은 벗었으며 양식(洋式)으로 푸수수하게 머리를 쪽 찐 그 여자를 나는 얼른 본 듯하였다. 날씬한 허리를 버들가지처럼 휘어서 물인지 무엇인지 두 손으로 움키는 듯한 그 여자의 희미하고도 눈이 부시게 은빛으로 번쩍이는 윤곽은 마치 돋아오는 초승달과 같았다. 나에게 붉은 꽃 한 송이를 주었다. 성(性)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시(詩)와 행복(幸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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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문을 그이는 어찌 처량한 가락으로 읊조렸던지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후끈후끈해지고 눈물이 날 뻔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턱없는 감동을 부끄럽게 알아 스스로 제어하였으되, 읽는 이의 손도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며 노작(露雀)군 또한 두 뺨을 연지로 태우며 그들의 눈에는 분명히 눈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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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잘 지었다 하였다. 범중엄(范仲淹)의 몇 백 곱절 잘 지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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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감흥에 심신(心身)을 사르던 내가 어느 결엔지 그네들을 떠나 고성(古城) 한 모서리에 외따로 서 있다. 그 때 누가 설명하기를 (사람은 보이지 않고 설명만 들렸다.) 이 고대(高臺)는 사람을 심판하는 곳인데 죄인들은 아모 데 아모 데서 판결을 받아 가지고 여기 와서 최종의 판결을 받는 법이라 하였다. 그러자 그 고대(高臺) 밑 절벽에 기대어 서 있는 죄인 하나가 나타났다. 그자는 키가 멀쑥하게 큰 품이 서양 사람인 듯하였다. 참으로 위에는 속셔츠만 입고 아래는 흑(黑) 세루 즈봉을 입었었다. 그의 앞 고대(高臺) 위에는 세비로 입은 판사(判事)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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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셔츠만 입고 있는 그 죄인의 꼴이 차마 볼 수 없이 무서웠다. 기실 아모 무서울 일이 없건마는 몸에는 고사하고 혼(魂)에까지 소름이 끼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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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단두대로구나.” 하는 무두무미(無頭無尾)한 생각이 불쑥 떠오르며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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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서운 변을 본 것은 언제 일이던지 또 아까 그네들과 지껄이고 떠드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역시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발로들 찬다. 그것은 아까 성(城) 중허리에 걸렸던 (악양루(岳陽樓)란 게 없었으니까)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 현판(岳陽樓記懸板)이었다. 새롭고 나은 것이 된 다음에야 묵고 썩은 옛 것이 무슨 쓸데가 있으랴 하면서들 이상하게 흥분된 모양으로 그 현판(懸板)을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하였다. 나도 한 번 박차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부르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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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없이 훌륭한 예술품이라도 삼 십 년만 지나면 그뿐이다.” 하고 속으로는 “하하, 내가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의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구나’ 하였다. 실상 「장 크리스토프」 속에 그런 말이 있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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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아갈 모양인데 그 「신악양루기’(新岳陽樓記)」를 세상없어도 한벌 박아 가지고 싶었다. 가지고 가서 모든 사람에게 자랑을 하리란 어린애같은 공상을 품고서. 다행히 노작(露雀) 군이 그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곧 그에게 초해 달라고 조르니까 그는 앙탈을 하다 못해서 초는 해 주려하건마는, 무슨 글자인지 두 자(字)를 빼고 쓰려 하였다. 나는 그대로 쓰자고 꿋꿋이 세웠다. 그는 화증을 내며 그걸 아니 빼면 말이 아니 된다 하였다. 원작자(原作者)도 뭉갠 것이냐 하매, 그는 물론이지 하였다. 내가 마츰내 동의(同意)를 하니까 그는 붓에 먹을 찍어 쓰기 시작하였다. 딴 것은 몽롱하건만 그 첫째 줄인가 둘째 줄에 혹이 서로 얼키설키한 계(癸)자가 있던 것은 또렷또렷 하였다. 그는 쓰다가 말았든가 다 썼든가 하였는데, 어쨌든 나는 그 「신악양루기(新岳陽樓記)」를 가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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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어느 왕궁(王宮)인 듯한 곳을 거쳐 나는 나온다. 나오는 대로 또 여러 개 층층대가 있었으되, 이번 것은 물이 아니고 대리석으로 된 듯도 하고 그양 나무로 된 듯도 하다. 방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그 층층대 족족 점잖은 노인이 한 분씩 단정(端正)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엔 어째 감개무량한 빛이 도는 듯하였다. 그들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한 듯도 싶고 또는 그양 흰 두루막만 입은 듯도 싶은데 다만 실제(實際)의 한 이배(二培)되는 갓에 대모 갓끈을 단 것만은 역력하다. 또 그들의 앞앞에 길다란 장죽(長竹) 하나씩이 놓여 있었다. 나는 어데선지 그 장죽 하나를 집어 가지고 나오다가 맨 아랫층에 이르러 “내가 왜 이걸 가져 가노?”하면서 그 담뱃대를 훌쩍 들이치고 총망히 달음박질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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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서는 그 노인들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넋두리를 섞은 청승궂은 울음이다. 그러자 여기저기 악마구리 떼 같은 곡성이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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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꿈 꾼 그대로를 될 수 있는 대로 아모 기교 없이 써 본 것이다. 잠을 깨자마자 하도 꿈이 기괴하면서도 역력하기에 적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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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꿈을 다 쓰다니!”하고 웃을 분이 있을는지 모르되, 나는 이 꿈의 세계에야말로 나의 의식적으로 쓰는 것보담도 더 훌륭한 예술적 표현을 얻은 나의 사상이 있고 감정이 있고 시(詩)가 있고 ─ 더구나 기분이 있은 듯 싶다. 그러고 처음에는 잉크로 쓰려다가 그 새파란 빛이 너무 똑똑하고 강렬하여서 연필로 초를 잡았다는 것도 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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