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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궂은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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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9.4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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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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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비를 맞으며 홍제원(弘濟院)으로 왔다. 친구의 어머님 영(靈)을 모시고서이다. 팔십여 세 장구한 연월을 실어 담어 망자의 생애가 마지막으로 반시간다(半時間茶)에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었다. 나는 요사이 가끔 꿈을 꾼다. 꿈같은 인생. 꿈을 꾸고 나서는 악연(愕然)이 일어나 앉아서 죽음이라는 것을 시름겹게 생각해본다.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다가 끝끝내 아무 투철한 해결도 지어보지 못하고 그저 공포와 불안과 도피감에 싸여 어렴풋하게 흐리마리 해 버리고 그대로 다시 쓰러져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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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다가 결국 그 죽음이란 것에 정말 봉착할 때에는 무슨 의식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아마 의외로 그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다지 지긋지긋이 느끼지 않을는지도 모르리라. 그것은 마치 사형수들이 죽음에 대하여 무한히 번민도 하고 오뇌도 하다가 정말 사형집행장에 이르러서는 모든 잡념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고분고분히 형을 받게 된다는 것과 같이, 나도 칠십을 살는지 팔십을 살는지 살아 있는 그 동안에 모든 것을 훌륭히 단념해 버리고 될 수 있으면 평안하게 허둥지둥 추태를 피우지 말고 임종을 하게 되었으면 한다. 하나 그것도 또한 누가 알아 꼭 기필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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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시방은 이렇게 건강하다고 믿었지마는 본래가 무상한지라 어느 날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이 있을는지 누가 알 수 있는 것이랴. 아무라도 면할 수 없는 무상, 더구나 우리와 같이 하잘 것 없는 범부로서야. 이렇게 생각해보니 너무나 허무상을 느끼는 한낱 불안이 없지도 않다. 모처럼 어렵게 받아 가진 이 몸인데 그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그것은 아무라도 크나큰 손실이니까 그것처럼 서운하고 섭섭하고 안타까웁고 구슬픈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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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암만 딱해도 어쩔 수 없는 무상이고 아무라도 기어코 면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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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무상을 어떻게 하면 뉘우침이 없이 고이 받을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그 죽음이라는 화두(話頭)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그것이 도리어 먼저 끽긴(喫緊)한 일대문제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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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그렇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그 말이 필경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그 반면을 건드려 본데서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죽음을 제도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삶을 인도하는 종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그것은 원래가 공이었던 것이다. 오대(五大)가 단합하여서 ‘아(我)’라고 하는 한 형체를 구현하였던 것이니까. 이 몸뚱아리도 본래는 ‘공(空)’ 이었던 것이 틀리지 않는다. ‘공’ 에서 생겨 나왔다가 ‘공’ 으로 다시 돌아가버리는 것이 이 인생이라. 죽음이란 본디 떠나온 것으로 다시 찾아 돌아간다는 말이다. 본래가 밑천 없는 장사라서 아무러한 손(損)도 없거니와 또한 득(得)도 없는 것이 “생야일편부운기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死也一片浮雲滅)”로 그저 아무것도 아닌 그대로의 한 ‘공’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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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해 보니 우리는 매우 명랑한 심경을 얻을 수가 있다. 이 심경이 이른바 ‘극락’이란 경지인지도 모른다. 하나 이르기를 ‘공(空)’이라고 하여도 아주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텅 비인 진공(眞空)의 ‘공(空)’은 아닐 것이다. 그 ‘공(空)’ 가운데에는 공(空)에서도 묘유(妙有)라 ‘인생’의 꽃이라 하는 한 떨기 꽃이 그윽히 되어 있다. 그래서 그 꽃에는 미도 있고 멋도 있어 그 꽃을 읊조리고 그 꽃을 즐기는 것이 이 곧 이른바 인생풍류, 곧 풍아의 심경이라는 것일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것이 곧 이것을 이름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 의취(意趣)를 다시 한번 달리 바꾸어 말해 본다면 일체의 현상을 모두 환영이라고 관(觀)해 보며 그리고 그 환영을 환영으로만 돌리어 그대로 내어버릴 것이 아니라 그 환영의 재미를 맛보며 그 환영의 품 속에 탐탐하게 안기어 보자는 것이 곧 인생 본래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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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이 몸으로서도 또다시 악연(愕然)히 자기 생활의 무의미한 것을 새삼스러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이르자면 한 가락의 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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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비나마 실컷 맞아 좀 보자. 낡은 벼두루마기가 다 ⎯ 무젖도록 하염없는 인생을 조상하는 눈물로 삼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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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新報[매일신보]』 1938년 9월 4일)
【원문】궂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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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용(洪思容)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3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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