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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마의 인정(人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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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0.27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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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의 인정(人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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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들창에 비가 들이친다. 흙벽이 젖는다. 지붕이 샌다. 밤을 새워 우짖는 비바람에……. 걸레를 들이어라. 빈 그릇을 가져오너라, 오막살이 단칸 방 안에다 뚝배기 항아리 무엇무엇할 것 없이 너저분하게 별안간 악기전(樂器廛)을 벌려 놓았다.
 
3
곰삭은 추녀에 산(山)달이 들었을 때에는 제법 멋있는 풍치(風致)였었더니 이런 때는 두툼하게 새로 이은 지붕 처마가 몹시 그리워진다. 하기야 옛날에 원정(猿亭) 같은 풍류인은 지붕과 방고래가 허물어진 집에서 “여보 마누라 우리 방고래에는 달이 다 ⎯ 드는구려!” 하면서 장마 고래에 잠긴 달을 몹시 사랑하였다지만 나도 달빛을 띠고 추녀 아래서 누어 자본 적은 더러 있으나 아무튼 시방 이 방 안의 광경은 너무도 몰풍치(沒風致)만스러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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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추녀! 추녀 아래서 비를 피하면서 온밤을 드새우던 옛날 사람 ⎯ 오다가다 소낙비라도 만나면 지붕 처마 밑처럼 고마운 신세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고마웁던 온늑한 추녀 기슭도 요사이 와서는 모두 이른바 선자추녀로 드높고 짧아만졌고 더구나 호화스러운 양옥집에는 그나마의 짧은 추녀도 아주 흔적도 없이 없애어버리었다. “지붕 추녀 밑에서 하룻밤 드새어가겠오.” 그 인정미를 인제서야 어느 곳에가 찾아볼 순들 있을 것이랴.
 
5
바윗돌에 담장이 잎이 얽크러져 붉거나 울타리 밖에서 심지 않은 들국화가 저절로 웃고 섰는 것은 그대로 동양적 자연의 정취이다. 날로 야박스러워만지는 시속 정태(時俗情態)는 동양적 그대로의 자연의 정취까지도 좀먹어 버리었다. 옛날에 장단(長湍) 화장사(華藏寺)는 처마 기슭으로만 돌자 해도 삼천 리나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요새 세상에서는 사원도 그렇게 수천 간 늘이어 지을 필요가 없어진 모양인지 몇 층 집 단채집을 좁은 터에다 세워 놓고 가다가 어쩌다 단월가(檀越家)의 불공종(佛供鐘)이나 올리곤 한다.
 
6
종소리도 문종소(聞鐘笑)라는 화두(話頭) 비슷한 문자를 혼객(渾客)들끼리는 공부 삼아 문답을 한다. 산중으로 수행 순례하는 행자들이 저녁 나절이 되면 걸망을 지고 부지런히 큰 절을 찾아 달음박질하다가 산문 근처에 간신히 이르렀을 적에 ‘데 ⎯ ㅇ’ 하는 종소리가 느닷없이 들린다. 그 종소리는 큰 절에서 대중이 저녁 공양을 마치고서 바리를 걷는 신호이다. 그러니 저녁장을 잔뜩 대이고서 달려갔던 걸음……. 그 행자(行者)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 이 공안(公案)인데 흔히는 ‘문종소(聞鐘笑)’라고 허허 웃어버리는 것이 가장 나았다고도 이르나 그것도 역시 루(漏)가 없는 답안을 물론 아니라 한다. 그런데 그까짓 답안은 루(漏)가 있건 없건 요사이의 세태 같아서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저녁술이나 대접시켜 지붕 추녀 밑에서 나마 재워보내는 인심이 그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7
조선은 인정의 나라라는 이언(俚諺)도 근자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상부상조라든가 공존공영이라는 감정이 이 지붕 추녀의 운명과 함께 소장(消長)하는 듯싶으니 추녀가 없이 ○○당당(堂堂)하게 늘어세운 건축물이 즐비한 소위 현대의 문명도시의 거리에서 별안간 풍우를 만났을 적의 정경을 한 번 생각해보자. 어느 곳 들어설 데도 없어, 갈데없이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쪼르르 물에 젖어 헤매일 뿐이다. 그래도 몸이 물에 젖어 덜덜 떨려 허둥거리지마는 집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유리창으로 내다보면서도 도무지 매정하게 몰교섭(沒交涉)이다. 어허 ⎯ 맹랑하고도 야속한 세정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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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세 가지만도 인심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것 같다. 조상 적부터 전해 지니고 사는 묵은 집 속의 인심과 한 달에도 몇 번씩 보퉁이를 끌여가지고 이 집 저 집 남의 집 세방 구석으로만 돌아다니는 안타까운 살림의 인심이 아마 몹시 다를 것이다.
 
9
시방 악기전(樂器廛)을 벌여놓고 있는 이 방도 만일 삭월세 방이 아니고 내 소유의 영주하던 집인 것 같으면 벌써 작년(昨年)부터 비가 새이든 지붕이니 하다 못해 거적때기 하나라도 집어 얹어 놓았을 것이다. 섬거적 한 겹보다도 더 얇은 인심, 세집, 지붕 추녀를 싸고도는 인심, 한 항아리 잔뜩 괴인 구정물은 낙수(落水)를 따라 더러운 수포를 수없이 이루었다 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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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新報(매일신보)』 1938년 10월 27일)
【원문】처마의 인정(人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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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용(洪思容) [저자]
 
  매일 신보(每日申報) [출처]
 
  193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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