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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하는 것과 합리화하는 것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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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7.26~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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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는 것과 합리화하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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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희 씨의 문장을 독(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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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미(混迷)를 극(極)한 격화된 상태에 있어서 대체 자기 자신을 어느 위치에다 설정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자아의 재검토’를 외치면서 인류의 역사가 일찍이 가져 보지 못한 거대한 격동 속에서 초조에 찬 자아의 반성을 요구하여 문학의 본도를 탐구하자는 소리가 시끄러울 만치 높아진 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일일런가. 홀로 앉아 있는 서재의 밖에서 거대한 파도 소리가 몰려들어 오고, 불이 닿는 듯한 수만 군중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가두(街頭)를 뒤흔들 때에, 종이를 대하여 펜을 들고 있는 고요한 마음속에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는 분격한 정열을 누를 길이 없어 주먹을 부르쥐고 분노하며 행렬의 대오 속에 뛰어들어 보았으나, 지금 걸어온 길 10년을 돌아보니 그곳에서 찾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남은 것은 회신(灰燼)한 형해뿐. 이리하여 잃어버린 예술을 찾고 상실한 인간을 참구하자는 요구가 역사적 반성과 자아의 검토와 재인식에 숨어서 육체적인 절박을 가지고 프로 문학의 장성들에 의하여 부르짖어지기 비롯한 것은 언제부터의 일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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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체 무엇이 있길래 피리와 붓 대신에 칼을 들려고 하였고 내가 누구의 자식이길래 가냘픈 휘파람 대신에 폭풍우 같은 아우성을 가져 보려고 하였던가 하는 자기 반역의 과중(過重)과 내가 여태껏 지던 지주(支柱)는 어디 있고 내가 방금까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혼미의 심리와 회의 정신, 이것은 사면초가의 미증유의 사회적인 정세가 이 당의 지식인에게 한가지로 던져 주는 한 개의 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백모나 박모 윤모의 어느 누구에 한한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종래의 프로 작가의 누구에게도 그리고 다시 나아가서는 진리에 불타는 격투적인 정신을 행동에로 앙양시켰던 지식인의 전부에 있어서 태반 공통되는 고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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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르짖음이 예민하고 혼미를 품고 있을수록 그것은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그만큼 심장을 잡아 찢는 절박성을 가진 것이었고 그의 반성이 정신적 위기에 직면한 자의 적나라한 고백이고 추태도 무지도 털어 놓고 자기 자신을 폭로하여 자기의 가진 허장과 가면을 박탈하여 모든 것을 이 곳에서 숨김 없이 재단받으려고 하려는 정열이 크면은 클수록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연소해 버리려는 육체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증유의 바바리즘과 거센 탁류의 시절에 있어서 한가지로 맛보는 수동적인 인텔리겐트의 공통한 ‘패배의 심리’인 까닭이다. 일찍이 문학 운동이 균형된 보조를 가지고 나아갈 때에는 자아의 문제는 거지반 집단의 문제에 종속되었고 계급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과의 새에 모순 생긴다든가 운동 전체와 개인과의 심리의 새에 어떠한 간격이 생길 때에는 그것은 전자에 따라서 후자는 두 말 없이 귀속될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일종의 생활의 일원화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배후에 확대되는 세력의 몽상을 잃고 열광적인 행진의 앞에서 상상치 않았던 심연이 그를 들이켜 버리려고 할 때에 자아의 탐구와 인간에의 귀환은 드디어 인텔리겐트 예술가의 폐엽에 좀먹기 비롯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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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전환기에 있어서의 문학적 자아의 반성이 그의 회의와 검토의 종국에서 지드의 경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안이한 명제로써 단원을 지으려고 할 때에 우리들은 그 곳에서 다분히 멜레주코프스키와 에세닌의 비극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고 ‘비애의 성사’에서의 연여(年餘)에 긍(亘)하는 사색이 인간학의 파편에서 종말을 보이고 적나라한 자기 반역의 정신과 자기 폭로의 격투적인 정열이 일로 자기 합리화의 길에서 식어 벌리려고 할 때에 그 곳에 남은 것은 결코 이데올로기의 습득과 예술의 상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에 이른다. 그렇다! 자기 반성이 승려적인 참회로 변하고 비판이 교활한 자기 합리화를 싸고 돌 대에 간판은 스스로 그의 글자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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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은 10년 고투의 불후의 명예요 얻은 것은 ××에의 굴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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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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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문자의 위에 나타나는 격렬한 자기 반역의 표현이 사실은 정열을 가장한 한 개의 참회의 돌맹이었고 자기를 비판하고 자기의 약점을 해부하여 모든 것을 반성과 성찰에서 재출발하겠다는 양심의 피력이란 것이 이외에도 저열한 자기 합리화의 술수에 불과하나 것을 발견할 때에 ‘상식의 양심’은 실망의 눈물을 가슴속에 씹으면서 ○하는 자의 실체에 대하여 극도의 불신과 그리고 그것이 일층 강렬한 증오의 염원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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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거나 저랬거나 권태에 지친 근래의 평단에 있어서 회월 박영희 씨가 조선일보 학예면에 지난 18일부터 전후 6회에 긍하여 발표한 「권태에 지친 근래 평단」이라는 문장은 박씨 자신이나 또는 편집자가 예기한 이상으로 ‘평단의 권태를 없이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위선 박씨가 대구에서 글쓰는 자유를 완전히 보장받은 이래 반개(半個) 성상(星霜)동안 수다한 종이 위에 발표한 거대한 양의 원고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또한 출중한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은 동지가 금년에 들어서 연속적으로 게재하는 이갑기, 백철, 박영희 씨 등의 획기적인 업적 중에서도 가장 ○세적(○世的)이고 또한 교훈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다시 나아가서 그것은 마지막으로 문장하고 평론하는 본체의 복장(腹臟)이 흥분에 떨고 격분에 경련(痙攣)하는 나머지에 그것이 논리의 상실과 체계의 혼란까지를 결과하는 데 이를 만치 자리 합리화의 술수와 과거에의 증오에 노골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여름 날의 권태를 소탕할 만한 ‘청신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관념의 희롱이 신비를 허장할 때에 그것이 학문적인 면모로써 기만하는 것을 수많이 보아 왔고 논쟁하는 문자의 정열이 지식인의 양심을 방송하는 뒤에서 우리는 흔히 속된 히스테리를 발견하였던 까닭에 오히려 솔직하게 자기의 무논리를 털어 놓고 ‘나는 나다’ 하는 학교 논리학을 펴 놓으면서 첫자에서 끝자까지를 오로지 증오의 혼선으로 묘사한 것이야말로 가장 뚜렷하게 ‘패배의 심리’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모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영자(影子)를 감추고 단 한 개의 기치의 존립만이 가능하다. ‘나의 길은 신성 불가침이다’하는 명제, 이것이야말로 ‘패배의 심리’가 가 닿을 최후의 항구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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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박씨의 전기의 문장을 일독하고 그가 말하려는 주지를 추려보면 논리의 혼란과 비과학성이 우심하여 총괄적으로 그것을 개괄하기는 극난한 일이나 대체 다음의 몇 가지로 추려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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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각자는 각자의 길이 있다. 박은 박의 길 그리고 칸트는 칸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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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논쟁이란 경기적(競技的) 야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의 충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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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비평은 필요없고 작품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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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예술가에게는 정신적 패배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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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마는 그것은 이야기를 따라 시시로 언급하기로 하고 전기의 각 조목의 수필적인 논지가 곧 다음의 것을 논리의 귀결로 얻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박씨 자신도 이론적인 의도를 그 곳에 두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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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각자의 길이 신성 불가침을 고조하여 비판의 불필요와 비판적 상호 섭취에서 는 발전을 꾀할 수 없다는 학문 내지는 예술의 역사적 발전의 계기의 무시에 도달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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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사적 발전의 계기를 말살하여 프로 문학 10년의 역사를 운동 경기로 대치하는 이론으로 발전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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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비평 문학의 독자성의 거부와 과학으로서의 예술학(미학)의 불성립을 이론 적 귀결로 수득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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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에서는 박씨 문장 전체에 있어서 붉은 실과 같이 문채(紋彩)를 그리며 관류하고 있는 ‘패배의 심리’의 극도의, 그러므로 지극히 저열한 자기 합리화가 결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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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예술적 형상화에 대한 원시적인 이해와 철학, 예술과 실천과의 분리, 통틀어 이론과 실천과의 극단적인 분리에 의한 이원론이 이 글의 특징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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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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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씨는 전기의 문학 잡감 제1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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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은 군대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의견과 관념이 천 사람의 의견과 그 관념에 동일할 수는 없다. 각자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임화는 임화의 길이 있고 한효는 한효의 길이 있고 백철은 백철의 길이 있으니 각자는 일생 동안에 자기의 길을 완성하기를 힘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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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 내려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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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가진 문학상 혹은 철학상 신조를 상이한 주장을 가진 사람이 비판하며 공격한다고 해서 동일한 신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칸트는 어디까지든지 칸트며 헤겔은 어디까지든지 헤겔이며 톨스토이는 어디까지든지 톨스토이며 고리끼는 역시 고리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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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만일 문학 예술의 다양화와 문학적 창조에 있어서의 개별적 독창성의 존중에서 나온 말이고 또한 그 곳에 머문 것이라면 우리는 박씨의 이야기에 특별한 감상을 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리끼와 똑같이 그려라. 판표로프와 같이 묘사하여라’하는 공식적인 표어가 비판되어 창조에 있어서의 독창성과 개성의 존중은 이미 우리에게도 상식화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되는 근본적인 중점의 소재가 이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철학적 신조’에 있고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본질적인 태도(?)에 있고 생활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에 있을 때에 박씨의 문장은 이미 진리의 표현이기를 그만 두고 거대한 모순과 당착을 품고 도는 ‘패배의 심리’의 저열한 표정의 주름살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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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통하기 위하여 작가 전부가 한 가지 기차에 오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혹은 그는 기선을 타기를 또는 혹은 비행기를 타기를 용인받을는지도 알 수 없다. 다시 더 나아가서 그들이 한 가지 하이킹복과 색 같은 배낭을 둘러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 닿을 곳은 한가지로 로마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이것이 만일 동으로 흘러서 어느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든가 청계천으로 흘러서 살모사 장수의 도우가 되어 버린다든가 또는 남쪽으로 북쪽으로 갈라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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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가 로마로 향하기를 거절하고 청계천에 흐르기를 고집하면 우리는 그에게 그의 행로의 그릇됨을 지적할 것이요 그래도 그가 ‘박은 박의 길이 있다’ 하고 완강한 도리질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다른 수많은 청년이 그의 길을 좇아가지 못하도록 나침반의 착오와 그리고 그것의 유인(由因)된 바를 폭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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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비판은 비판당하는 일 인의 반모와 일 개의 백모를 계몽하고 지적하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글을 읽는 수많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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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영희 씨의 문장은 다른 또 한 쪽의 중요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칸트는 칸트의 길, 헤겔은 헤겔의 길’이 즉 그것이다. 이 아름다운 사항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문화 형태의 역사적 건설에 있어서 이미 유명해진 상식적인 명제의 반정립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 돌연히 완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칸트는 소크라테스를 거쳐서 존 로크와 흄에 이르는 2천 년의 ‘지혜의 역사’의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는 전혀 격리된 길,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의 산책로’에 외로이 혼자 서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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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영희 씨의 행로를 옹호하기 위하여 「문단 잡감」에 출장한 임마뉴엘 칸트가 1781년에 발표한 그의 삼비판의 최초의 거대한 저술 속에서 말한 바는 순수 이성의 능력 그 자체를 사색의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그의 체계를 구원한 종래의 철학 체계의 전반적인 비판의 위에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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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칸트의 길은 칸트의 길에서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피히테와 이여(爾餘)의 비판 철학의 후계자를 거쳐서 헤겔의 길에 도달하여 있는 것이다. 다시 헤겔의 길은 포이에르바하를 넘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길에 이르렀었지 아니한가! ‘각자는 각자의 길’에 통하여 있고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박영희의 길의 신성 불가침을 주장하는 만용에 찬 의욕은 ‘패배의 심리’의 불쌍한 최후의 지점이다. 그리하여 비판과 폭로와 유산의 무자비한 섭취의 길은 역사의 망막한 흐름과 한가지로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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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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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영희씨의 남용은 이 곳에 그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박씨는 그의 ‘잡감’을 적은 문장 제2회에서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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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 군이 인간을 탐구하겠다는 것을 말리고 저지할 필요도 없고 권리도 없는 일편, 임군이나 한군이 정치적 문예론을 창설하겠다는 것을 또한 시비할 필요가 없으나, 나는 문예의 본도라는 일정한 표준점에서 피차에 불필요한 것에 경기적 야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고 질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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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길과 행방에 대하여 참견할 필요도 없으나, 박영희씨 일인만은 ′문예의 본도′라는 일정한 표준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룩한 이유에 의하여 백철의 인간탐구를 옹호할 수도 있고, 한 보(步) 나아가서 평론가를 이분하여 이갑기, 백철을 전향 평론가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임화를 공격하고 김두용, 안함광 등을 임의 일당으로 간주할 자유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극히 편리한 박씨의 사유 재산인 ′문예의 본도′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학적 체계를 가진 것인지 박씨의 전기의 수필을 통하여서는 좀처럼 앞길이 망연하나 그것이 프로문학 10년의 참회에서 성립된 것이요 과거에의 극도의 증오와 바바리즘에 투항하는 불쌍한 ‘정서’의 위에 건설되는 ‘패배자의 문학’인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박씨 자신도 ‘전향 평론가’란 문구를 자기 성명 위에 붙이는 것을 최대의 영예로 생각하고 있으며 아직 이 땅에서는 씨가 증오하는 ‘정치적 문예 평론가’에 의하여서도 사용되지 못하였고 또한 사용할 용기도 가지고자 하지도 않은 것이 윤기정씨의 소설을 평하는 문장 속에서 박씨는 기쁨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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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주 오랫동안 집필하지 않았다가 그리고 전향 후의 신작이니만치 반가이 읽었다. 이 곳에서 군의 작품을 평하려고는 아니하나 군의 태도, 그 명확한 태도는 예술가적 양심에 깨끗함을 나는 즐겨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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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사용된 ‘전향’이란 문구가 ‘예술가적 양심’과 동의어로 쓰인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또 한 번 박영희 씨의 ‘양심에 깨끗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리하여 박씨가 말하는 바 ‘예술가적 양심′으로 학적 논쟁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문학을 전진에로 촉진시키고 향상에로 앙양시키기 위하여 불가피의 그리고 절대로 필요한 문학 생동이 못될 뿐 아니라, 그것은 와일드한 플에이만을 일삼아 한조각의 ‘스포츠맨쉽’조차 갖지 못하는 운동 경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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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것은 자칭 좌익 평론가 상호간에도 때로는 맹렬한 논전이 시작된다. 이 곳에도 약육강식이 있는 모양임을 알 때 전연히 상이한 이상을 가진 나에게 오는 공격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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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곳에서 박영희 씨의 문장을 손에 쥔 채 잠시 동안의 회고를 가져 보기로 하자. 회고는 우리에게 신경향파 문학이 자신을 수립할 때에 그의 반대자와 여하히 빛나는 혁혁한 논쟁을 전개하였는가를 가르쳐 줄 것이며 다시 초창기의 계급 문학이 자신의 발전을 꾀하고 그의 뿌리를 역사의 흐름 속에 확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얼마나 광휘 있는 논전을 진영 내에 전개하였는가를 보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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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신경향파의 이러한 이론적인 맹장들이 ‘독수리와’ 같은 용기를 품고 그의 대립자를 격퇴한 논쟁은 운동 경기적인 야심의 소위에 그칠 뿐이며 다시 박씨 자신이 김기진 씨와 토론한 비평 문제와 형식 문제를 싸고 도는 역사적인 대논쟁은 이론적 차이에 유인된 바도 아니요, 문학을 앞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예술가적 열정에서 나온 바도 아니요, 문학 운동을 전진에로 유도하려는 양심의 지시에 기인된 바도 아니요, 오직 타기(唾棄)할 만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구수(仇讎들이 가질 수 있는 불순한 감정상 충돌의 소산에 그칠 뿐일런가! 이리하여 신경향파 문학을 건설하고 그것을 10년에 이르는 발전 위에 추진시킨 불후의 명예를 지닌 박영희 씨의 공적은 와일드한 폭행에 의하여 상대편에 부상을 입히는 것만으로 일삼는 야비한 축수 선수의 심리와 약육강식으로 살아가는 야수의 감정상 유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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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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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편의 공격에 열중하여 그들의 문학적 행동 전체에 대하여 부정의 일로를 고집하는 나머지 문학적 논쟁의 전부를 야비한 운동경기와 감정의 충돌로 돌리고 그것 없이는 금일의 발전을 볼 수 없었을 프로 문학 10년의 이론 활동의 일체를 타기할 만한 감정의 기복과 영웅 심리의 성쇠로만 간주하려는 박영희 씨의 포승이 박씨 자신의 목을 흘겨 매고 박씨로 하여금 구할 수 없는 당착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그에게 비판당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정치적 문예론자′가 아니었고 그에게 야유 당하고 모욕당하고 있는 것은 박씨의 소위 ‘자칭 좌익 평론가′들이 아니었고 의외에도 그들과는 전연히 상이한 이상을 가진’박영희 씨의 우금에 이르는 면면한 행로이었다. 그러나 박씨의 모순과 자가당착은 다시금 심각하게 발전한다. 그는 ‘잡감’의 수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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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정치적 문예론자인 논객들이 참으로 목전에 공리심을 버리고 조선문단을 위한다면 논(論)보다도 실(實)로써 거대한 명성에 착수할 것이니 모든 것이 작품에서 연구되고 증명되고 탐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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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논조가 비장한 절규로 흐를 때엔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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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창조하라! 작품을 쓰라! 쓸데없는 논쟁보다는 문학의 본도를 걸어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정돈된 작품을 한 편 완성하는 데는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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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씨가 이 곳에서 단지 거대한 작품의 소산을 기대한 것에 그치었다면 이것은 박영희씨뿐만 아니라 문학을 일삼지 않는 범용한 누구의 희망과도 일치할 것이기 때문에 별반 특별한 느낌을 줄 것은 아닐 것이나 이것이 다른 한쪽으로 미끄러져서 작품 행동과 비평 활동을 문학 창조의 두 개의 상호 연결된 측면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전연 분리하여 작품만이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비평과 이론의 수립은 ‘필요 없는 것’이며 한 가닥의 소설이나 콩트 나부랭이라도 끄적거리는 것이 백만 권의 가치 있는 이론적 업적보다도 으뜸 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박씨는 또 다시 구할 수 없는 혼란의 운무 속으로 잠겨 버릴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완강히 언명한다. 작품을 쓰는 것만이 문학의 본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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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론적인 활동과 작품 행동과의 평가에 있어서의 빙탄불상용의 이원적인 분리의 사상이 도달할 궁극의 상륙지가 어떠한 곳일는지는 상상이 잠시 동안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박영희 씨의 이원론의 맹아가 개화기의 봄을 맞이할 때에 그것이 비평 문학의 독자성의 거부와 그리고 예술학 건설의 부정의 ‘악의 화(華)’로 피어 터질 것은 이론의 당연한 귀결이 아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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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영희 씨의 금일에 지(至)하는 문학적 공적 중에서 씨가 조선의 근대 문학이 시민 문학의 혼란한 과도기를 넘어설 때에 배태 속에 자라나는 모순의 씨로 신흥 문학의 발생의 계기를 전제하여 그것을 신경향파 문학의 험준한 고개 위에까지 이끌고 다시금 그의 성장을 ‘카프’10년의 역사 위에 약속함에 이른 씨의 비평 활동을 발견할 뿐 아니라 다시금 더 나아가서는 이 땅에 있어서의 최초의 비평 문학의 수립자의 영예를 씨에게 돌리려는 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못지 않게 우리들이 박영희 씨의 업적 중에서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고 그것을 미래에까지 뻗쳐서 기대하고 있던 바는 씨가 예술 과학의 건설을 위하여 이 땅에서 노력한 최초이고 또한 유일의 노력자이었던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씨는 예술학이 아직 예술사회학의 경지에서 그의 길을 닦고 있을 때에 이 땅에서 구롯세와 프리체를 진전시키려고 하던 단 하나의 진지한 학도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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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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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人世) 백반(百般)의 무상은 이 곳에도 있다. 불과 3, 4년, 비록 지금의 1년이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지난 날의 기십년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있어서의 비평 문학의 새로운 최초의 수립자가 그의 독자성의 거부의 이론적인 대표자로 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비롯한 2천 성상의 미학의 유산을 과학으로서의 예술학에까지 발전시키려는 조선에 있어서의 최초의 진지한 학도가 지금 상전도 벽해 되기 전에 그의 절대의 반대자로 역전하여 버리고 있다 . 그러므로 박영희 씨의 진정한 문학적 행적을 찾으려면 박씨 주장에 좇아서 10년 전 옛날로 올라가 한 편의 「사냥개」의 초라한 작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박영희 씨는 ‘문학의 본도’를 탐구한다고 ‘작품을 쓰라!’는 소리는 귀에 혹이 나도록 들려 주었으나 전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이래 수많은 종이를 평론과 비평에 소비하였을 뿐 그의 이른바 위대한 걸작은 하나도 발표되어 있지 않은 때문이다. 결국 비평이 쓸 데 없다는 것도 그리고 작품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닐 것이요 ‘논보다 실로써’ 작품만에 착수하라는 것도 아닐 것이리라. 사람은 불혹의 연세(年歲)를 넘어도 증오의 불길에 탈 때에는 혼이 이성을 상실하는 것이 ‘본능’이요 백전노장도 오히려 정당한 비판에서 ‘패배’의 통한을 방어하고 합리화하는 데 정신을 잃을 때엔 논리의 혼란과 자가당착과 그리고 자신을 모순 그 자체의 현신(顯身)으로 화하여 버리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성의 본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오랜 동안의 ‘인간 탐구’의 비상한 노력은 ‘인간성의 본도’를 그의 성과로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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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영희 씨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게 될 때엔 박씨의 혼란은 드디어 독자의 이성까지를 사로잡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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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군의 근간의 시는 그의 주장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데 재미있는 군의 심리가 연구되어진다. 군의 시는 섬역하고 애상적이나 그의 논은 강하고 사상적인 듯하다. 그의 시는 정신적이고 그의 논은 물질적이다. 그의 시는 정서적이라면 그의 논은 생리학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1인 2역을 하는 군의 심경의 고뇌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듯이 어떠한 환영이 나타나고 있다. 언행일치가 어려웁기는 하나 논과 작품의 차는 이다지 심한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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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임화의 논문에서 볼 수 있는 사상과 그의 시에 나타난 것과는 통일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전연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씨는 이러한 임화의 1인 2역적인 심경의 고뇌를 눈 앞에 그리며 한 개의 환영을(원컨대 이 거룩한 환영이 미네르바의 아름다운 자태이기를!) 붙듦에 이른다는 것이다.
 
62
이 곳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스스로 두 개의 큰 내용을 안고 있다. 즉 임화의 시의 내용은 그의 논문의 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 그의 하나요 만일 이것의 불통일이 사실일진대 이러한 작가의 사상과 형상화된 것과의 불통일은 무엇에 기인된 것이냐 하는 것의 해명이 그의 둘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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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박영희 씨가 비평가다운 진지한 성실성이 있고 작가다운 열정과 또한 작품의 리얼리티와 형상성에 대한 원시적인 이해에서 한 보라도 전진하고 싶은 노력이 있었다면 이러한 문제를 ‘그의 시는 정신적이요 그의 논은 물질적이다’ 하는 지극히 애매하고도 속학적인 분석으로 대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언행일치가 어려웁기는’하다 등등의 초보 수신 강화를 그대로 이식한 것에 의하여 이른바 ‘1인 2역의 고뇌’를 설명해 버리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그의 시는 정서적이라면 그의 논은 생리학적이다’는 말은 어떠한 ‘문학의 본도’에 의거한 비평일 것일는가? 문학하는 이의 문장은 원래부터 용어의 비과학성이 한 개의 특징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모양이나 유행도 이 곳에 이르면 진실로 ‘문학의 본도’의 오묘한 맛을 표현함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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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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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의 범속한 비평안은 임화의 시와 그의 평론이 내용하는 사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박영희씨와 같이 대립과 분열을 간취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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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정신」이후 「주리라」「나는 못믿겠노라」「골프장」등에 이르는 일련의 시는 강열한 낭만 정신에 비하여 사실미의 상대적 박약을 지적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결코 ‘정신과 물질’이라는 물과 기름과의 절대적인 거리를 표시한 영원히 상교(相交)할 날이 없는 평행선에 비할 바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68
설사 한 보를 물러서서 임화의 사상이 시에 있어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고 가상할지라도 비평가는 그것을 ‘정서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의 대립이라고 처치하고 언행일지는 고래희라고 만족하여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 물질과 정신과의 대립이 어떻게 되어서 정서와 생리학의 관계로 패러프레이즈 될 수 있는가?
 
69
정서적인 것과 생리학적인 것과는 관념과 물질과의 관계와 같이 상호 대립되는 두 개의 관념인가?
 
70
물론 오노레 드 발자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적 실천과의 모순은 가능하고 이것은 태반 어떠한 작가에 있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불가피한 운명인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작가적 모순의 해명은 언행의 불일치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1인 2역의 고뇌로도 가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전혀 그 작가가 리얼리스트이냐 아이디얼리스트이냐 하는 것에 의하여 문제 해명의 ○○은 가능할 것이다.
 
71
세계관이란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생활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가 여하한 사회 계급에 속하여 어떠한 실천을 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나 예술가의 세계관은 창작적 실천에 의하여서도 완성 혹은 변경되는 것이니 그가 보수적 세계관 위에 서 있어서 오히려 자기의 주관적 관념에 의하여 객관적인 세계를 재단하려고 하는 아이디얼리즘에 가담하고 있다면 그의 창작 실천도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세계관을 진보적인 방향에로 변경할 수 없을 것이나 그가 설혹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관에 서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리얼리스트일 때에는 창작적 실천에 의하여 반동적인 세계관의 제방을 넘을 수가 있다. 다시 그가 정당한 세계관의 파지자이면서도 아이디얼리즘의 창작 방법에 의하여 창작한다면 그의 세계관은 창작적 실천에 의하여 심화 확대되지 못하고 작품 그 자체가 공식화될 수가 있다. 발자크가 그의 반동적 사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가 사상적으로 지지하는 계급의 내면적인 제모순을 능히 폭로하고 해부할 수 있었음은 이것에 의하여만 설명될 수 있으며 종래의 카프 작가들이 정당한 세계관의 파지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작품만을 생산하였던 것도 그가 철저한 리얼리즘을 그의 창작 방법으로 하지 못하였던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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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박영희씨의 다음과 같은 글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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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패배라면 그것은 백군이나 이군 등이 자기 체계를 세우기만 한다면 그것은 문단적으로 하등의 패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사실로써 한 사람이 그의 문학적 인생관이나 사회관이 변천해 간다고 해서 곧 패배가 된다고 규정한 예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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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의 이 논지가 예술가의 세계관의 불통일을 설명하고 있는 한 이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에 있어서의 세계관은 어떤 부면에 있어서는 유물론적이고 어떤 부면에 있어서는 관념론적 그리고 어떤 시대에 있어서는 진보적이고 어떤 시대에 있어서는 반동적이 듯이 그것은 오히려 균정(均整)되어 있지 않고 불통일되어 있는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괴테가 자연에 대하여는 유물론적이면서 역사에 대할 때엔 반드시 그렇지도 못하였고 쏠라 하웁트맨 또는 박씨의 말과 같이 입센 등은 처음에는 유물론적이던 것이 후년에는 관념론적 색채를 농후하게 하였고 톨스토이의 후년은 진보적인 견지와 반동적인 견지와의 쌍방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는 등등. 그러나 문제는 그가 어떠한 입장으로 전향하고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였을 때에 보다 객관적 진실을 훌륭하게 그의 예술 작품에 반영하였는가 하는 데 의하여 패배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이니 엎어 두고 자기 체계만 완성되었다고 패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영희 씨에게는 지극히 미안한 일이지마는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가장 과학적인 문학적 역사는 쏠라와 하웁트맨을 신비주의에서 예찬한 전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의연히 리얼리스트일 때에 그리고 당해 시대의 진보적인 계급의 이해와 일치한 창작적 실천을 하고 있을 때에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패배의 심리’를 위안시키려고 하는 박씨의 노력은 일층 더 안타까웁게 박씨 자신을 혼미와 회의 속으로 넣고 말 뿐 그곳에 남을 것은 ‘문학의 본도’도 ‘예술의 습득’도 아무 것도 아니고 ××에 대한 인간적인 굴욕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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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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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2일]
【원문】비판하는 것과 합리화하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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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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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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