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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초점의 시정 - 엄홍섭 군에게 항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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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2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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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초점의 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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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홍섭 군에게 항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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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은 다작가(多作家)가 아니라 과작가(寡作家)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얻어 읽기는 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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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말로써 엄홍섭 군의 졸작 「요지경」에 대한 비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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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알기엔, 그리고 나의 일이니까 내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지만 엄군의 말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작년 『조선문학』3월호에 「남매」를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다시 계속한 이래 『조광』에 「소년행」, 「제퇴선,」「요지경」의 3편, 『조선문학』에 「처를 때리고」와 전기(前記)한 「남매」의 두 편, 『여성』에 「춤추는 남편」과 지금 실리기 비롯한 중편을 썼고, 이 밖에 다시 단편 두 개를 최근에 썼다. 마지막 단편 두 개는 어떤 잡지에 가 있으므로 머지 않아 발표되겠지만 발표된 것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결코 과작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출판물의 여러 가지 제약과 나의 작가적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발표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 가장 많이 활동한 작가의 발표 작품 수에 비하여 그다지 적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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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군의 일은 엄군 자신이 잘 알겠지만 작년도에 엄군이 발표한 것보다는 수에 있어서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나의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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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론 문제는 나의 다작, 과작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곳에서 엄군의 나의 대한 ‘성실’을 재음미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엄군이 나를 가리켜 ‘평론의 여업(餘業)으로서 작품을 쓰지 않나?’ 하는 것은 필요치 않은 의문이다. 작가 엄군은 창작평을(특히 2월 창작평을) 소설의 여업으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神)의 앞에서 명언(明言)하되 나는 문학을 여업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고 따라서 평론, 소설, 희곡,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한번도 이를 여업으로나 심심풀이로 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우리들의 고난에 찬 문학의 명예를 위하여 이것을 단언해 둔다. 그리고 우리들의 문학에 한하여 여하(如何)한 의미의 여업도, 여기(餘技)도 이 곳에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겸하여 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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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 과작 시비와 김남천의 작가적 경력 등의 소개로 짧은 지면의 삼분의 일을 소비하고 엄군은 「요지경」의 주제에 대하여 비로소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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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은 현하 조선의 중산 계급 사회가 걷고 있는 퇴영의 일면을 그리려고 한 작품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보면, 너무 그 말이 황당하고 막연하니까 좀더 범위를 좁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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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백하여 두거니와 나와 같이 소심한 작가로서는 2백자 90매 지면을 가지고 감히 ‘현하 조선의 중산 계급 사회’의 ‘퇴영의 일면’ 같은 커다란 주제를 그려보려는 야심은 아예 당초에 가져 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엄군이 나의 졸작의 주제 위에 그러한 ‘정위를 내리고 보면’ 아닌 게 아니라 비평가의 생각이 너무 ‘황당하고 막연하다’는 느낌을 가짐이 당연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 김남천이가 이 작품에 설정한 주제는 결코 중산 계급의 퇴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군이 ‘범위를 좁혀 가지고’ 작중 주인공이 중산 가정의 청년이니, 감옥살이 한 사람이니, 지금엔 아편 중독자로서 전락한 사람이니, 또는 이러한 사람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느니 운운한 것은 주제의 문제에서는 다소 초점이 어그러진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평자의 의도와 같이 ‘정의’가 시험한 단안의 범위를 좁히는 것으로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이 ‘작품의 주제가 중산 계급의 퇴영의 일면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되지 못하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 결국 끝까지 읽어보아도 종시 엄군의 스스로 정의한 주제의 설명은 나오지 않고 만다. 한번 설정해 논 정의를 군의 그 뒤에 곧 망각의 하상(河床)에 던져 버리었는가? 그러나 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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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박경호는 자기 개인 한 사람만의 향락을 위하여 그것이 암담한 시대적 고뇌를 잊기 위한 너무나 감상적인 자살적 방편이었는지 모르나 자기를 자기가 썩히었다고 할 수 있는 점에서 증오감까지 날 것은 없지만 자기가 썩기 위하여 남까지 썩히려는 철면피 무뢰한 역행아(逆行兒)들이 난무하는 꼴을 어찌 이 작가는 요지경 속을 통해서 좀더 상세하게 보지 못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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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박경호란 작중 주인공이고 동시에 주체 건립의 문제 앞에 선 김남천이다. 그러나 대저 엄군은 이 우회굴곡을 극한 문장 속에서 작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무엇을 좀더 상세히 보기를 요구하고 있는가? 그리고 평자의 눈에 ‘박경호’와 ‘김남천’은 여하히 비치어졌던가! 엄군이 가지고 있는 비평의 흥미는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러므로 엄군의 본의에 속할 것이다.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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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성질로 보아 작중 인물 ‘박경호’가 일종의 유사 마약의 중독자가 되는 과정은 사실에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작자는 중독자라는 것을 ‘기정 조건’으로 작중 인물 위에 부여하고 이 단편으로 끌고 들어온 때문이다. 중독자가 되어서 일 개월 후 구체적으로 말하여 정축(丁丑) 7월 중순경의 어떤 날 아침부터 밤까지의 일이 문제이다. 약을 줄여서 이삼 일이면 완전히 중독자를 면할 수 있는, 그러한 순간에 처하여 있는 ‘박경호’가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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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병과 달라서 이것은 특수한 중독인 때문에 ‘기정 조건’의 리얼리티를 위하여 나는 상당히 긴 설명을 작품 모두(冒頭)에 기록하여 두었다. 다시 말하면 ‘박경호’가 마약 중독자가 된 것은 결코 아편 침을 맞고 그것을 향락하겠다는 퇴폐적인 욕망에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고 난치의 병과 시골 악덕 의사의 소치라는 것을 말해 두었던 것이다. 나는 사족인 줄 알면서도 혹시 엄군 같은 이가 있어 그것을 잘못 붙들까 저어하여 두 사람의 의사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빈약한 의학 서적을 참고하여 가며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엄군은 “박경호는 자기 개인 한 사람만의 향락을 위하여 그것이 암담한 시대적 고뇌를 잊기 위한 너무나 감상적이 자살적 방편” 운운이라고 이것을 이해한다. 작품 구성의 파탄까지를 각오하면서 붙여 놓은 이러한 작자의 노력은 엄군의 이상과 같은 이해 앞에 서야만 된다. 이 곳에는 비평이나 평자의 감수성이 문제가 아니라 독서법이 문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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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엄군은 ‘자기를 자기가 썩히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인물만을 보지 말고 ‘자기가 썩기 위하여 남까지 썩히려는’ 철면피와 무뢰한의 난무를 ‘좀더 세밀하게’ 보라고 작자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박경호’가 자기 스스로를 썩힌 자라고는 쓰지도 않았고, 또한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에 엄군이 지시하는 무뢰한의 난무를 바라볼 자격이 없다. 그것은 「요지경」평자의 자의의 취미는 될지언정 「요지경」작자의 책임도 의무도 아니다. 나는 작중 주인공의 명예를 위하여 그리고 이 작품의 주제가 어디 있는가를 명시하기 위하여 『조광』2월호 258페이지〔頁[혈]〕와 259페이지 간(間)을 다시 한 번 평자가 읽어 보기를 작가의 권리를 가지고 요구한다 그보다 더 . 중한 것, 그렇지 때문에 그보다 더 두려운 것, 더 슬픈 것, 더 쓰라린 것, 그것은 살덩어리가 썩어 가는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라 공포가 한 걸음 물러설 때 슬픔과 한가지로 왈칵 달려들어 비로소 경호의 전 몸뚱이를 붙들어 버리 ‘마음’의 문제였다. 마음의 성곽이 무너져 가는 것, 이것을 걷잡으려는 노력이 없어지는 것을 눈 앞에 볼 때에 경호는 비로소 제가 무엇인가를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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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에 ‘박경호’는 일순간 자살할 것을 결심한다. 만일 박경호에게 자살을 시킨다면 그것은 너무 심한 자기 애무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리하여 다시 주인공은 생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가진다. 그는 동일한 생리적 운명에 허덕이는 기생 ‘운심’을 안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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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주제가 가장 명백히 나타날 것을 희망하고 그려진 장면의 경개(梗槪)다. 그러므로 만일 엄군이 이 주제를 포착하여 기술적 리얼리즘의 부족이라든지 생활의 형상화의 빈약 등을 말한다든가, 또는 작가가 이러한 주제를 선택한 것에 대하여 분석과 비판을 내린다든가 하였다면 나의 작품 행동을 여업이라든가 혹은 그 이상의 말을 가지고 모독하여도 나는 그것을 기쁘게 감수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빈약하고 졸렬한 작가일지라도 불성실한 평자의 개인적 취미, 자의적 요설과 무고(誣告) 앞에 그의 작품을 맡겨 버려야 한다는 그러한 반갑지 않은 미덕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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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또한 나에게 취재 범위의 고정화를 충고한다. 물론 취재는 「제퇴선」등과 「요지경」이 유사할는지 모르나 나는 한 가지 주제를 되풀이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전자는 소시민의 인도주의적 허망을 고발하자는 것이 주제였으므로 후자와는 스스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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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찌하여 내가 작년 말까지(「요지경」은 똑똑히 본 사람은 보았겠지만 작년 8월작이다. 그러므로 「제퇴선」하고 동시기다. 2월호에 났다고 최근에 쓴 것같이 보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이러한 주제를 이것저것 추구하고 있는가는 내가 쓰는 소위 평론이라는 것을 만일 엄군이 읽었다면 스스로 명백할 일이다. 나는 평론과 작품을 가지고 오랫동안 주체의 자기 분열을 추구해 본 결과 최근 겨우 그의 초극의 단초를 발견한 사람이고, 동시에 이것을 토대로 하여 모랄론의 준비 과정에 도달한 사람이다. 아편 중독이라는 특수한 악한 조건 하에 작중 인물을 설치해 본 것도 결국 주체를 불 속에 넣어 보겠다는 의도 이외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의 문제를 방기해 버리고 안심하여 객관 세계를 이리저리 건드려 볼 수 없는 작가일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주체에 신뢰하여 매일같이 사립 학원의 교원이나 또는 농민의 생활을 창조할 수 있는 작가 제씨의 행복된 경지를 부러워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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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여(爾餘)의 문제는 엄군과 면담하는 기회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군은 2월 창작평 초회(初回)에 과학적 방법에 의한 작품상의 결점의 지적은 칭찬보다도 더욱 반갑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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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역시 동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에게도 비평의 결점을 지적할 동일한 권리와 기쁨을 주어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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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8년 2월 22~23일)
【원문】비평 초점의 시정 - 엄홍섭 군에게 항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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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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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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