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가가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하고 체험하지 않으려 고집하던 사실의 일부를 그의 창작권 내에 이끌어 들였다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받아 들인 결과를 싸고 얼마든지 이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나 개인의 의견에 의하면 이러한 태도, 그것만을 가지고 넉넉히 환영할 현상이고 생각한다.
3
관념적으로 고집해 오던 세계를 일단 떠나서, 새로운 사실군(事實群) 가운데 주관을 해방한 것으로 한설야 씨의 『문장』5월호 소재의 「이녕」과 동지(同誌) 현민 유진오 씨의「가을」이란 소설이 있다. 이 두 작품에 그려진 사실의 일군은, 씨 등의 창작 세계가 처음으로 건드려 보고 받아 들이는 사실군의 일부분이다. 특히 한씨에 있어서는 작년 말의 작품「산촌」이 관념적인 고집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었던 만큼, 이 새로운 씨의 문호 개방은 주목에 해당한다.
4
그러나 사실을 받아들인다든가, 사실을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창조적인 문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 곳에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의 하나이다. 나는 다소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현민이 씨의 「가을」을 산보라고 부제를 붙인 것과, 한씨가 취급한 사실을 진창(이녕은 소설의 제목이다)에 지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문학이 하나의 창조적 문학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증거다.
5
그러면 창조적 문학은 어떻게 하여 생겨날 수 있는가?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건드리는 데서 일단 올라선 과정, 다시 말하면 사실을 소화하고 그것을 전형적인 것으로 재구성하는 데 의하여만 비로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씨 등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소이(所以)다.
6
(『동아일보』, 1939년 5월 17일, ‘호초담(胡椒譚)’란)
|
|
|
|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
글쓰기
】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
▣ 참조 지식지도
|
▣ 기본 정보
|
|
|
◈ 기본
◈ 참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