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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향(祭饗)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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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1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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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饗[제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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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前景[전경](1937년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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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崔氏[최씨])  …… 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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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자(永五[영오])  …… 12세
5
손자(相仁[상인])  ……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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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막 (갑오, 前景[전경]에서 4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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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崔氏)  …… 27세
8
김성배(金成培)  …… 최씨의 남편, 동학당 접주,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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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英洙)  …… 아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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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 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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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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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읍 수령(邑守令), 각방 이속(各房吏屬), 참령(參領)이 거느린 병정 1지대, 동학당원 2명, 동네 남녀노소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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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막(경신, 前景[전경]에서 18년 전, 제 1막에서 25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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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 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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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  …… 아들,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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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  …… 며느리, 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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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相仁)  …… 손자,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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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의 친구  4,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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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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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3막(희랍 신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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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 5,6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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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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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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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금강(錦江) 유역의 어느 한읍(寒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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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景[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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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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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집 정면에 횡으로 안채, 상수로 안채와 약간 간격을 두고 종으로 사랑채, 안채에는 하수로부터 건넌방, 마루, 안방, 부엌, 사랑채는 전면으로부터 사랑방, 대문간, 광(단 안채를 되도록 전면으로 다가나오게 하기 위해서 사랑방은 안으로 통한 뒷문께만 보이고 광도 적은 일부분만 보여도 좋다) 집은 초가로 낡아서 지붕을 패이고 추녀와 벽이 퇴락되고 하수로 위태하게 쏠렸으나 뼈대가 굵고 드높고 칸살이 넓고 뒷마루의 난간이나 문짝 하나에도 가공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것으로 이 집이 과거에 부유했다는 면영이 나타난다. 하수 건넌방 옆에서 시작하여 전면까지는 형해만 남은 울타리. 울타리 옆으로는 전면 바로 우물. 우물 옆에는 늙은 향나무. 우물은 빈지가 낡아 바스러지고 우물두덩이 보송보송한 것으로 폐정(廢井)임을 보인다. 마당에는 시든 잡초가 우거졌고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낡은 살림살이나부랑이가 모두 오래오래 사람의 손이 치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집 전체의 기분이 폐가와 같이 황량하고 거기에 인물을 배치해도 헤성헤성하니 어울리지 아니하고 집과 사람이 안길성없이 각돌아 보인다. 10월 초순(음력으로 9월 9일) 오정이 좀 지나서 막이 열리면 휑뎅그렁하니 덩치 큰 빈집에 머리털이 하얗게 센 노인 최씨가 마루 앞 뒷마루에서 짝소리 없이 밤을 겉 껍질을 까서는 물 담은 그릇에다가 담방담방 담느라고 자지러져 앉아 있는 것이 인상적으로 보인다. 마루에는 제상, 남방에서 제사 때에 쓰는 목기(木器), 향로, 촛대 같은 것이 위선 꺼내만 놓은 대로 들여다보이고 최씨의 주위로는 물기있는 자배기며 말린 고비, 호박고지 같은 것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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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이윽고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독백) 아이고, 허리야! (마당에 비춘 그늘을 내려다보고) 발써 오때(正午[정오])가 겨웠구나. (먼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한숨. 다시 밤껍질을 벗긴다. 間) 벌써 이 제사가 마흔두 해째로구나! 마흔두 해. 엊그제 같드니 어느결에 마흔두 해라니! (間) 마흔두 해가 되고 내 나이 일흔이고, 일흔 살! 많이도 살었다. 스물일곱 살 때에 내가 그 지긋지긋한 일을 당하고는 새파란 청상과부로 자식 남매를 길러가면서 울면불면 사느라고 이 나이까지 살었으니, 오래두 살구말구. (間) 작년에는 이 제사를 내 손으로 다시 지내랴? 했더니 그래도 죽지 않고 한번 더 지내기는 지낸다. (뒤 울안, 무대 뒤에서 까치가 깍깍 짖는다) 까치는 짖는다 마는 아무도 반가운 사람 올 사람은 없다. 벌써 열여덟 해나 두고 일년 삼백예순날을 밤이나 낮이나 기달려도 그 사람은 아니 온걸. (間) 애비 없이 길른 자식을 살어 생이별하고, 그런 지가 벌써 열여덟 해. (間) 어데 가서 죽었느냐 살어나 있느냐, 죽었다면 죽은 혼백이라도 배나 아니 고프게 제사나 지내주려만 죽었다는 기별도 없고 살어 있다는 소식도 없고. (한숨) 내가 죽기 전에 제 얼굴이라도 한번 보았으면 죽을 때에 눈을 감기련만. (間) 전생에 무슨 업원이 그다지도 지중해서 남편이 총뿌리에서 죽은 것을 이 눈으로 보고 자식을 생이별하고 집안은 치패해서 늙발에 고생을 하고 하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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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에서 탁발승이 꽹과리에 맞추어 염불하는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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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듣고 있다가) 벌써 가을이라고 절에서 중이 동냥을 하려 내려왔구나. (間) 우리 집에도 오면 무얼 주나? 쌀은 찌러 가서 아직 아니 왔고 돈이 웬 게 있을라구? (주머니를 뒤지다가 동전 한푼을 찾아낸다) 있구나 ! 동전 한푼이. 이거나 주자. 내야 무얼 바라고 시주를 허며 적선을 허꼬마는 자식 손자들이나 좋으라고. (염불 소리 끝나고 최씨는 대문간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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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두어 닢 주었으면 좋겠구만서도 (귀를 기울인다) 그냥 지내가 바리는구먼? (섭섭해한다) 그럴 테지, 집구석이라고 모양새가 이렇게 빈 집 같으니 동냥 다니는 중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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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책보를 둘러메고 씨근버근 대문간으로 등장) 할머니 ! (마루 앞으로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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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반겨) 오냐. (대문간께를 내어다보면서) 네가 올려고 까치가 짖었구나? 어멈도 오느냐? (머리를 쓸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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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엄마 아니 왔수? (둘러본다) 나는 학교서 바루 온걸? 아침에 엄마가 오늘이 외할아버지 제향이라고 엄마도 갈 테니깐 날더러도 학교 파하거든 집으로 오지 말고 외갓집으로 가라구 그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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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응 그랬으면 어멈도 인제 오래잖어서 오겠구나. 점심 먹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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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응 학교서 벤또 먹었어. 언니는 어데 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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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너이 외할아버지 산소에 성묘 갔단다. 네 외숙모허구 나허구 벌써부터 한번 다녀오라고 졸랐더니 오늘은 제향날이구 허대서 다녀온다고 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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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성묘를 추석에 가지 지끔 가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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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무때 가면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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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그래두. (間) 그러구 아즈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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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네 외숙모? 꼬마둥이 데리고 물방앗간으로 쌀 찌러 가고. (밤 한 톨을 본두기를 벗겨서 준다) 밤 먹어라 그리구 칼 가졌지? 가졌거든 끄내서 벗겨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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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칼을 꺼내면서) 이게 외할아버지 제향에 쓸 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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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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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그럼 엄마가 와서 보구 욕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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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웃으면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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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제향에 쓸 걸 제가 미리서 먹는다구. (그러면서도 밤은 집어 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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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최씨는 영오와의 대화에 있어서 처음 몇마디씩은 그런 대로 나이 어린 영오한테 알맞은 말로 심상히 하지만 그러다가는 어느결에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심하면 그의 존재까지를, 잊어버리고 곧잘 혼잣말로 넋두리를 하듯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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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머리를 쓸어주며) 괜찮다. 먹어라. 너이가 제일이지 제사에 잘 채려놓는다고 소용이 있으며 또 돌아가신 이가 무얼 안다드냐! (間) 그러나저러나 너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너이를 오죽 귀여워하시겠느냐! 외손자는 외레 더 귀엽다는데 (間) 신통하다. 볼수록 신통하다. 내가 네 어미를 포태해 가지고 일곱 달 되든 달에 그 끔찍스런 흉변을 당했는데 그 일이 바루 엊그제 같은데 그것이 아버니 모르는 세상에 나와서 바스락바스락 자라더니 인제는 그것 속에서 또 이런 것이 생겨났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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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할머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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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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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언니는 왜 안 가고 그러구 있수? 동경 말이야. 인제는 방학도 다 지내고 벌써 개학을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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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노수(여비[旅費])가 없어서 못가고 있단다. (間) 노수뿐이겠느냐 ! 웬만하면 그것이 어떻게 소중한 손자 자식이라고 수만리 밖에 가서 고학을 한다고 그 모진 고생을 다하게 두고 보겠느냐마는 (間) 생각하면 앞이 어둡다. 저는 정성이 있어서 공부를 하려 드는데 나는 뒤를 대지 못하고 고생을 시키니 ! (間) 차라리 박토나마 한섬지기쯤 남은 게 있으니 그걸 팔어서 편안히 공부를 하라고 해도 그것 머리를 내저으면서 싫다는구나. 할머니허구 어머니허구는 무얼 먹고 사느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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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건성으로 듣다가) 할머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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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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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나 접때에처럼 이야기 좀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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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접때에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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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호랑이 이야기 해주었지? 포수가, 호랑이가 포수를 잡아먹었는데 포수 아들이 나처럼 쬐꼬만 포수가 말이유. 호랑이를 잡었다는 이야기 아니해 주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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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오 참 그래, 그 이야기를 또 해달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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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아니 그 이야긴 말구 그 이야기처럼 무섭구 재밌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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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런 무섭고 재미나는 이야기가 인제는 있어야지? (間) 가만있자, 그래라 그럼 내 꼬옥 하나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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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응 아주 재밌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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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이윽고) 너이 할아버지가 갑오년에, 네 어미를 낳든 해니까 꼬옥 마흔세 해가 되었다. 그해 갑오년에 너이 외할아버지가 동학(東學)을 하셨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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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동학? 동학이 무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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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너이는 다 모르는 거다. 새로 천지개벽을 한다고 모다 모여서 수군수군하고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이런 주문이나 웅얼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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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하하 그게 무슨 소리유? 뭐 ? 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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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게 중 같으면 나미아미타불하는 염불이란다. 그래 너이 외할아버지도 그런 동학을 하고, 동학만 한 게 아니라 접주(接主)를 했더란다. 접주라는 건 이를 테면 몇 사람 몇 사람 한패 동학꾼 속에서 어른인가 보더라. 돈도 숱해 갖다가 버렸지, 너이 외징조할아버지 그리니까 너이 외할아버지네 아버지 말이다. 그 어른이 돈을 많이 모으섰드란다. 벼를 천 석이나 추수받었으니 부자 아니냐? 그랬든 걸 수령(守令)들이 토색질해 가고 화적들이 노략질해 가고 그러고도 한 오백 석거리나는 넉넉했는데 이번에는 알뜰한 자제님 너이 외할아버지가 동학을 하느라고 그걸 또 반이나 넘겨 없앴구나! 그까짓 재물이야 없애나마나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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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그렇게 돈을 디려서 무얼 하는 거유? 저, 미두하는 거 그런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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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니지, 괜히 허왕한 소리들을 하느라고 그랬지만, 뭐 천지개벽을 한 뒤에는 자기네 뜻대로 좋은 세상이 되고, 그런다는 거지. (間) 그래 그러더니 그해 갑오년에 동학난리가 덜컥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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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난리? 접전하는 거? 총 가지고 전쟁하는 거 말이지? 하 멋이다! 그럼 외할아버지도 전쟁하러 나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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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럼 가구말구, 글쎄 골골마다 동학꾼들이 들고 일어서서 창이야 칼이야 총을 텡텡 놓고 고을 수령이며 아전들을 잡어 죽이고 군기고를 바수고 병장기를 빼앗어 가고 그러니 백성들은 피란을 가느라고 야단이 나고. (間) 그러다가 며칠이 지내니까 사방에서 관병(官兵)들 허구 동학꾼들허구 접전이 일어나는구나. 그렇지만 얼마 아니 되는 관병들이 어데 그 숱해 많은 동학꾼들을 당해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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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동학꾼이 이겼어? 그럼 외할아버지 편이 이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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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렇지 처음에는. 그래 처음에 그렇게 이기니까 아주 뭐 기세가 등등해 가지굴랑 자, 인제는 서울로 쳐올라가자 하고 글쎄 서울로 쳐 올라간다고 각처의 동학꾼들이 수만 명이 한군데로 모이잖었겠니. 그러자 서울서 수천 명 내려보내는 관병허구 맞닥들렸구나. 거기가 저 충청도 땅 한산(韓山)인데 한산 접전에 이번에는 동학꾼이 아주 하빡 함몰을 당해잖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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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동학꾼이 졌어? 외할아버지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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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렇지. 그래서 동학꾼들이 수천 명이 죽었드란다. (間) 에이 그건 무슨 짓들이라고 그렇게 살생들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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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그럼 외할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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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한산 접전에 겨우 돌아가시지는 않구 살어 오섰더라. 집안에서는 모다 죽은 사람이 살어온 것만이나 반가워하고 좋아했지. 그랬더니 웬걸! 조금 있으니까 쫓겨난 수령이 다시 내려오고 하더니 관가(官家)에서 동학꾼 잔당을 잡어 죽이려고 야단이 나는구나. 뭐 감영에서 병정들까지 풀려나와서는 개미새끼 퍼지듯 퍼져가지굴랑 조금만 얼쩍지근해도 잡어가느라고 집집마다 호구 적간을 하면서 이잡듯 하는구나. 그래서 너이 외할아버지는 집에 있지를 못하고 피신을 하시잖었겠니? 아 그랬더니 아들을 못잡은 대신 너이 외증조할아버지를 육십이 넘은 노인을 그 볼모로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는 동학접주한 아들을 내노라고 매일같이 주리를 틀고 문초를 하는구나! 그 어른도 아드님 잘못 두신 죄로 말래에 죽을 봉욕을 하시고 필경 돌아가섰지만, 그런 참인데 하루는 그게 그러니까 바루 구월 초사흗날이다. 저녁때 땅거미가 어슬어슬 질려고 할땐데 글쎄 뜻밖에 너이 외할아버지가 어엿하게 집에를 돌아오시잖겠니! 원 그 판이 어느 판이라고 그렇게 어엿이 들어오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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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조금 전부터 서서히 암전하다가 마지막 말이 끝날 때에 완전히 암전을 마친다. 다시 급히 밝아오면서 제1막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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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전경에서 4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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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80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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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간과 사랑방 뒷문 앞으로 안마당을 가리는 차면 하나가 더 있는 외에는 전부 전경과 같으나 집이 황폐하지 아니했고 살림살이 제구도 풍부하거니와 윤기가 흐르고 우물도 폐정이 아니다. 무대가 다시 밝아지면 안방 마루에 모친이 영수를 업고 섰고 김성배는 그 앞에 가 앉아 있고 최씨는 임신중에 부른 배를 안고 넌지시 물러서서 있다. 모친과 최씨는 겁이 나서 초조한 기색으로 대문간께를 자주 돌아보고 말하는 목소리는 소곤소곤 죽여서 낸다.
 
82
모친    글쎄 이애야 잠깐이고 무엇이고 방으로라도 좀 들어앉어라. 이렇게 마루에 앉었다가 누가 불쑥 마당으로 들어서기나 하면 어떡헌단 말이냐! 어여 방으로 들어가자. 내가 사뭇 떨려서 기색을 할 것 같다.(성배의 팔을 잡어다린다) 글쎄 어떡허자고 이 사지(死地)를 어엿하게 들어온단 말이냐!
83
성배    괜찮어요. 괜찮어니 걱정 마시고 제 말씀 들으세요. 지금 어머니한테도 아버지 말씀을 들었지만 저도 소식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뭐 아주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니까 지금 이 길로 동현에 들어가서 자현(自顯 : 自首[자수])을 할려는 참이어요.
84
(모친과 최씨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85
모친    그건 무슨 소리냐! 자현이라께? (間) 아서라. 애여 그런 소리는 내지도 말고 너이 아버지며 집안일이며 다 잊어버리고 지금 바루 멀리멀리 피해 가거라.
86
성배    그럴 수 없어요, 자 어머니.
87
모친    글쎄 어쩌자구 이렇게 고집을 쓰느냐! (間)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더래도 하자.
88
성배    뭐 더 할 말씀도 없어요. 그러고 지금 오면서 고을 사람들을 여러 사람 만났으니까 벌써 소문이 다 퍼졌을 거예요. 저도 많이 생각해 보고 나서 이러는 노릇이니 말리지 마세요.
89
모친    아니다 못한다. 그런 말은 다시는 입밖에 내지도 말고 어여 도루 피해 가거라.
90
성배    그럴 수 없어요. 자식 때문에 육십 노친이 그런 액경을 당하시고 필경 비명에 돌아가신대서야 될 말인가요? 제가 저즐른 일이 아니라고 늙으신 아버니를 위해서는 자식 된 제가 일을 당해야 할 텐데 항차 저 때문에.)
91
모친    (푹푹해서) 그러니 글쎄 너이 아버지나 내나 그렇게도 경읽듯이 그 원수의 동학 좀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하고 말릴 때 그만두었으면 오늘날 와서 이런 일을 당하지를 않었지!
92
성배    허허 어머니도 모르시는 말씀을! 일이 이렇게 낭패가 되었기망정이지 여의하게 성사되었다면야 두루두루 좋지 않었겠어요? 그렇게 좋자고 한 일이 세상 운수가 비색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도시에 면목은 없읍니다마는 저는 지금도 잘못했다거나 죄를 졌다고 생각은 아니해요. 이건 참 불효 말씀 같지만 만약에 일이 이 앞으로 다시 거사를 해서 소망을 이룰 싹수가 있다면 저는 아버지 일을 모른체하고 다시 한바탕 들부섰을지도 모릅니다.
93
모친    그러니 어여 가서 소원대로 동학이나 하란밖에! 왜 일껀 하든 짓을 그만 내버리고 사지로 들어와서 자현을 하네 어쩌네 하느냔 말이다. 응?
94
성배    인제는 소용이 없어요. 일이 이렇게 낭패된 마당에는 쓰잘데없는 목숨인 걸 제가 살자고 아버지는 그런 봉욕을 하시게 할 수는 없어요. 자, 그러니 어머니도 저를 (일어나서 절을 한다) 마지막 보세요.
95
모친    (주저앉아 운다)
96
성배    (최씨를 돌아보고) 일루 가까이 오우.
97
최씨    (조금 가까이 와서 앉는다)
98
성배    이번이 마지막 길이니까 그리 알고 내가 없은 뒤라도 어머니 아버지 잘 모서주서요. 그러고 (모친의 등에 업힌 영수를 넘겨다보고 최씨의 부른 배를 보면서) 무엇이 생겨날는지 모르겠소마는 그것들 둘이나 잘 길러서 말래에 몸이나 외탁하오. 슯고 고생되지만 할 수 있소. 다 팔자를 잘못 타고 났거니 하면 그만이지.
99
최씨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100
모친    (성배를 부여잡고) 못한다 못한다. 가면은 담박에 총으로 쏘아 죽일걸. 그새도 저기 과녁자리에서 몇십 명이 총뿌리에 스러졌단다. 못한다 못간다.
101
(갑자기 대문간이 환하게 밝고 인기척이 들린다. 세 사람 놀라 대문간깨로 고개를 돌리는데 횃불 잡은 병정이 앞을 서고 다른 병정 두 사람이 차면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어 토방 밑까지 달려든다. 모친과 최씨는 망지소지해서 와들와들 떨고 있고 성배는 흔연히 일어선다. 횃불 잡은 병정은 횃불을, 다른 두 병정은 총부리를 각기 성배한테 들이댄다)
102
병정 갑   (횃불잡이) 네가 김성배지?
103
성배    그렇소.
104
병정 갑   응 이놈 꿈쩍 말고 나서거라. 여차하면 그냥 대고 불질(銃질)이다. 바깥에도 겹겹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리 알고 냉큼 나서라.
105
성배    염려 마우. 그렇잖어도 지금 자현을 하러 동헌으로 들어갈랴든 참이요.
106
병정 갑   이놈아 말은 잘한다. (다른 병정을 보고 저놈 잡어내렷)
107
병정 을   -
108
병정 병   - (달려든다)
109
성배    (순순히 마루에서 내려서면서 신발을 신으려고 한다)
110
병정 을   이놈아 아니껍게 신발은 ! (성배의 상투를 갓 위로 얼러 잡고 마당으로 내리박지른다)
111
모친    -
112
최씨    - (동시에) 아이구머니 !
113
병정 을   (꾸짖어) 이년들.
114
성배    (병정 병을 흘겨본다)
115
병정 병   (총 개머리로 성배의 옆구리를 찧으면서) 이놈아 누구를 뇌꼴스런 눈깔로 거듭떠보니? 주리때를 앵길 놈 같으니로고.
116
병정 갑   앞참 세웟.
117
병정 을   (성배의 덜미를 짚어 앞으로 내세운다)
118
성배    (모친과 최씨를 한번씩 돌려다보고는 꼿꼿이 걸어나간다)
119
최씨    (마루에 엎드러진다)
120
모친    (부르짖으면서 토방으로 뛰어내려 뒤를 따른다)
121
(성배와 병정 일행 차면 밖으로 사라지고, 모친은 따라가기가 기진해서 차면 앞에 쓰러진다.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122
최씨    (한숨)
123
영오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잡으려 왔으까? 할머니.
124
최씨    오시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더라니까 그중 어느 놈이 관가에 가서 먹어댔겠지 머. 그러나마나 자현을 하러 갈려든 길이니 일반은 일반이지만.
125
영오    그래서 그렇게 잽혀가서 ?
126
최씨    잡어다가는 황새족새를 해서 옥에다가 가두어두고 그때부터는 문초지. 주리를 틀어가면서. 그러다가 필경 총으로 쏘아죽인다고. (한숨)
127
영오    총으로 쏘아? 징역 안 살고?
128
최씨    그때 세상에는 웬 게 그런 법이나 있다드냐 ! 죄지은 사람이면 그저 잡아다가 매를 때리기 아니면 귀향을 보내기, 그렇잖으면 작두로 목을 쓸어 죽이든지 총으로 쏘아 죽이든지 그렇지 (間) 그래서 너이 외할아버지도 그날 그러니까 그게 바루 구월 구일날 내일이다. 내일 오때(五午[오오])나 되어서 촌에서 붙잡혀 온 다른 동학꾼 둘하고 같이 셋을 한꺼번에 총으로 쏘아 죽인다고 사정(射亭)으로 끌고 나와서는.
129
(무대 급히 암전. 다시 서서히 밝아지면 제 2장)
 
 
130
제 2 장
 
131
[무대]
132
정면으로 정기정(正己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사정. 좌우는 들을 건너 단풍든 원산. 무대가 밝아지면 사정 마루에 앞으로다가 수령이 좌정하고 뒤와 좌우로는 각방 이속이 나열. 대뜰에는 엎드린 형방. 대뜰 밑으로 바로 김성배 외에 두 사람의 동학당원이 결박을 진 채 끓어앉았고 그 뒤로 넌지시 참령(參領)이 거느린 병정 일지대가 정렬해 서 있다. 사정 좌우로는 겁먹은 남녀노소들이 묵묵히 서서 있고 김성배의 모친도 남의 부축을 받아 그중에 섞여 있다.
 
133
수령    너이들을 죄상에 의지해서 지금 처형을 하거니와 마주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말을 해라.
134
형방이   (청을 내어) 너이들을 죄상에 의지해서 지금 처형을 하거니와 마주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아뢰랍신다.──
135
사령    (죄수들을 들여다보고) 아뢰라.
136
죄수들   (꼼짝 아니한다)
137
사령    (김성배의 풀상투를 잡아 젖히면서) 아뢰라.
138
성배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다)
139
모친    (옆엣 사람에게 부축을 받고 서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는다)
140
사령    (김성배 상투를 놓아주고 동학당원 갑외 풀상투를 잡아 젖히면서) 아뢰라.
141
동학당원 갑  (우는 소리로) 살려주시요.
142
사령    (상투를 놓아준다)
143
사령    (동학당원 을의 풀상투를 잡아 젖히면서) 아뢰라.
144
동학당원 을  (우는 소리로) 살려주시요.
145
사령    (상투를 놓아준다)
146
수령    처형해라.
147
형방    처형하랍신다.──
148
참령    (병정들더러) 형장(刑場)으롯.
149
(병정들 달려들어 죄수 하나에 3,4인씩 붙어서 좌우로 끼고 뒤에서 밀고 나머지 병정들과 참령은 그 뒤를 따라 상수로 퇴장. 상수에 모여선 구경꾼들은 와 헤어지고 그중 김성배의 모친은 김성배에게로, 영감 하나는 동학당원 갑에게로, 여인 하나는 동학당원 을에게로 제각기 달려들다가 병정들에게 밀어박질려 물러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150
영오    그럼 할머니는 그때 어데 있었수.
151
최씨    나는 집에 있었지, 못 나가고, 애기 밴 여편네가 관가(官家) 행차나 병정들 행군하는 데 나서면 담박 총으로 쏘아 죽인다고 너이 외징조할머니가 어데 나가게 하시드냐, 그래서 나가지는 못하고 울타리 구멍으로 내어다보기만 했지.
152
영오    그런데 참 할머니.
153
최씨    오냐.
154
영오    외할아버지를 그렇게 잡어갔으니까 그럼 외 외(더담드가) 외징조할아버지는 내놓아 주어예지?
155
최씨    글쎄 경오는 그래야 할 것이지만 어데 바루 내놓아주드냐! 그런 뒤에도 훨씬 한 달이나 있다가 뇌물을 흠씬 먹고 그러고도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는 죄로 곤장을 사십 도나 때려서 내놓더라. 야숙한 일도 다 있지! 글쎄 그러니 그 노인이 몸이 성하섰겠니? 옥에서 나오시자 보름 만엔지 돌아가신걸. 그래서 너이 외징조할아버지 제향은 바루 시월 열사흗날이란다.
156
영오    그러고 그날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병정들이 끌고 가서?
157
최씨    그래 그렇게 사정 마당에서 앞뒤로 옹위해 가지고 사정 바루 건너편 과녁 있는 데로 끌고 가더니 (한숨, 間) 도망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가끔 다리까지 친친 동여서 과녁 앞에다가 일자로 세워놓고는 병정들은 열댓 걸음이나 이쪽으로 물러서더니마는, 아마 한 이십 명이나 되지? 그런 병정들이 주욱 늘어서서는 총을 꼬누더구나. 그래 방금 총소리가 나는 줄 알고 나는 울타리 구멍으로 내어다보다가 눈을 감었더니 이제나저제나 기달려도 총소리가 나지를 않겠지 ! 그래 웬일가 하고 눈을 다시 떠보니까.
158
(무대 급히 암전. 다시 급히 밝아지면 제 3장)
 
 
159
제 3 장
 
160
[무대]
161
정면은 들을 건너 단풍 든 원산. 상수로는 나직한 언덕이요, 언덕 앞으로 과녁, 하수는 흑막(黑幕). 무대가 급히 밝아지면 과녁에서 넌지시 떨어져 김성배와 두 동학당원이 결박을 지고 다리를 묶여 하수를 향해서 서서 있고 그 옆에는 둘둘 말아놓은 한 무더기의 섬거적, 병정 한 사람 손에 흰 무명 가드락을 들고 하수는 급히 등장.
 
162
병정    흥! 이놈들 평양감사를 나갑네 순천부사를 나갑네 하더니 겨우 섬거적 한 닢씩을 지고 염라국으로 가니? (가지고 온 무명 가드락으로 죄수들을 하나씩 하나씩 눈을 동여준다) 이놈들아 염라국에 가설랑은 제발 그놈의 “식은 참떡 조차떡 영떼먹고 망하지”* 소리 좀 하지 말어라. 그러고 괜히 개지랄들 하지 말고 진득히 자빠져있어. 나도 이런다고 백년 살겠니? 오래잖어 염라국에 가면 만날테니 그때는 막걸리나 한 사발씩 노누고 화해를 하자꾸나. (힐끔힐끔 돌려다보면서 하수로 퇴장)
163
(동학당원 두 사람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이윽고 하수에서 호령소리로 “겨냥”, 조금 사이를 두어 “쏘앗”소리가 나면서 여러 방의 총소리 요란하고 동시에 죄수들은 앞으로 쓰러져 딩군다. 하수로 엷은 연기가 밀려나오고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164
[*동학의 주문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에서 전화한 말]
165
최씨    (한숨)
166
영오    ………
167
최씨    그래서 너이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모진 죽음을 하시고, 연거푸 열흘 남짓해서 너이 외징조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그러고나니 집안이 아주 야지없이 망해바리는구나. 머 푹 망했지 폭 망했어. (間) 그래서 그때부터 심화로 눈이 먼 너이 외징조할머니허구 나허구 늙은 과부 젊은 과부 쌍과부가 쌍으로 앉힌 상청에서 밤이나 낮이나 눈물로 세월을 보냈드란다. 그러자 그해 동지달에는 내 뱃속에 들었든 네 어멈이 그게 어떻게 된 세상인지도 모르고 부등부등 머리를 두르고 나오는구나! 허기야 신통하지. 그것이 에미 뱃속에 그 무서운 파란을 다 겪고도 목숨이 붙어 있다가 나온 것을 보면 (間) 참 영오야 네 어멈은 무얼 하느라고 여태 아니 오는지 모르겠구나? 온다구 하기는 했지?
168
영오    응 온다구 그랬어. 나 그럼 이얘기 마저 듣고 가서 데리고 오까?
169
최씨    그래라마는 인제 올 테지. (間) 올 테거든 어여 와서 그릇들도 좀 닦어주고 이것저것 거들어주지를 않고,
170
영오    그러고 그 댐 이얘기. 응? 할머니.
171
최씨    그래서 그때 겨우 제돌이 지내간 네 외삼춘허구 갓난이 네 어멈허구 그렇게 둘을 데리고 또 앞 못 보시는 너이 외징조할머니를 모시고 내가 새파란 청상과부로 살어가자니 그게 오죽했겠느냐? 그래도 그때는 다행이 땅이 한 백석 추수거리나 남어서 그걸 도조로 내준다치면 만만하다고 도조를 잘러먹기가 일쑤고, 그 밖에 내가 경난하든 일을 어떻게 이루 다 이얘기를 하니! 그러느라고 내가 이 머리가 오십도 못되어서 이렇게 시었드란다. (間) 그러자 또 삼년 만에 병신년엔지 너이 외징조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그 뒤에는 나 혼자서 네 어멈 남매를 데리고 울면불면 살아가지를 않겄겠니, 그것들이 어려서 풍상을 겪은 깐으로는 별로 탈이 없이 물컷도 없이 잘 자라주어서 그래 그것 하나가 맘을 불이게 해주었드니라.
172
영오    그럼 할머니는 엄마처럼 이렇게 저, 저, 외갓집도 없었수?
173
최씨    외간가? 친정이지. 없었드란다. 있었으면야 어데 그렇게 고단하게 지냈겠니? (間) 그래서 아무려나 네 외숙은 학교도 다니고 여기 학교를 마치고는 저기 전주 감영으로 가서 농업학교라드냐 그걸 다녀서 졸업을 하고. 그러기 전에 열여닯 살 때 장가를 들였더니 즈이 내외간에 금슬도 좋고 그러고 네 어멈도 그 이듬해 봄에 시방 너이 집으로 시집을 보내고 네 외삼춘은 공부를 하고 와서 한 일 년이나 일본 사람네 농장에서 일을 보아주더니 돈을 모으겠다고 장사를 시작하고 내외간에 금실이 좋아서 병신년에는 아들을 낳고, 그게 시방 네 언니 상인(相仁)이다. 내가 첫손주를 본 심이지. 그러구 네 어멈도 시집을 가서 별로 말썽없이 잘 살고, 그래서 에라 나도 인제는 초년고생을 한 보람이 있어 말년에나 자식손자 영광 보아가면서 마음 편하고 몸 편하게 여생을 보내나 부다고 좋아했지! 그랬더니 웬걸! (한숨) 기가 맥혀서, 나는 전생에 무슨 업원이 그대지도 컸든지! (間) 글쎄 무오 기미, 기미년에 또 벼락이 떨어지는구나!
174
영오    벼락? 저 하눌서?
175
최씨    그렇지! 하눌서 떨어지는 벼락보다도 더 무서운 벼락이지 내한테는. (間) 그런 게 아니라 만세들을 불렀드란다. 만세. 그건 글쎄 또 무슨 짓들이라고. (間) 그해에 네 외삼춘이 그러니까 그게 아마 기미년 이월 초생인가 부다. 네 외삼춘이 한 열흘이나 가게 보든 것을 철갈을 해바리고는 밤낮으로 부리나케 나돌아다니는구나. 그렇게 나돌아다니다가는 또 어는 때는 친구들을 몇씩 데리고 들어와서 네 외숙모는 안방으로 쫓아버리고 건넌방에 모여 앉아서 수군수군하고 밤을 세우고.
176
(무대 암전, 다시 밝아지면)
 
 

 
177
제2막 (제1막에서 25년 후)
 
178
제 1 장
 
179
[무대]
180
제1막 1장과 같으나 연대가 묵은 그만큼 집이 낡고 살림살이 제구도 전경같이 적막하지는 아니하나 저으기 쓸쓸하다. 석양.
181
무대가 밝아지면 영수가 그의 친구 4,5인과 차면 앞에 서서 작별을 한다. 그의 친구들을 재가끔 무슨 뭉텅이를 꾸린 보자기 하나씩을 들었다.
 
182
영수    그러면 나도 저녁을 먹든 멀로 나가겠지만 가서들 저녁 자시고 그렇게 소임대로 잘 좀 하지. 그러고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날까?
183
친구 갑   그래도 좋지.
184
친구 을   시간은?
185
영수    글쎄? 몇시까지면 대강들 끝이 날꼬?
186
친구 병   늦일걸?
187
친구 갑   더딘 사람도 있고 빨른 사람도 있겠지. 아무튼 오늘 저녁은 일이야 있든지 없든지 한군데 모여 있는 게 좋으니까.
188
친구 정   모이는 거야 좋지만 하필 일러루 올 필요야 있나?
189
영수    그도 그렇지. 인제는 모이더래도 할일은 없으니까. 그람 어데 중앙지로 모이게 하지?
190
친구 을   그것도 좋지. 그럼 우리 집으로 모이는 게 어때?
191
일동    좋지.
192
영수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자, 자들 수고하게. (일일이 악수를 한다) 내일 날씨가 어떨는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193
일동    (하늘을 올려다본다)
194
친구 정   날이 다뿍 흐린 게 아무래도 위태한 걸! 더구나 날이 이렇게 훗훗한 게 비가 올 날씨야 !
195
친구 병   비가 오면 장(定期市場[정기시장])이 깨지라고?
196
친구 정   그거야 하눌이 막는 일이니까 할 수 없지. 한 장 동안 더 미루는 수밖에.
197
친구 갑   이렇게 미룸미룸 미루다가는 하대명년이게?
198
친구 을   아니 여기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내일 올 비가 아니 오지는 않을테니까 좌우간 오늘 일은 해놓고 볼 일인데 무엇을 그리나? 자, 가세.
199
(일동 다시 영수와 악수를 하고 차면 밖으로 퇴장. 영수 돌아서서 토방으로 올라온다)
200
영수    (부엌으로 대고) 여보.
201
서씨    (소리만) 네? (부엌에서 행주치마에 손을 씻으면서 나온다)
202
영수    저녁 다 되었소?
203
서씨    거진 다 되어가요 시장허시유?
204
영수    아니 얼른 먹고 나가야겠어서, 어머니는 어데 가셨소?
205
서씨    상인(相仁)이 업고 이웃에 마을 가셨나 바요.
206
영수    (마루로 올라가려고 한다)
207
서씨    날 좀 보아요.
208
영수    (돌아선다) 보라고? 밤낮 보는 얼굴을 보아서는 무얼 하게? (웃는다)
209
서씨    (웃으려다가 말고) 누가 장난하자나?
210
영수    그럼 왜 그래?
211
서씨    어머니가 여간만 걱정을 아니하세요! 가개는 철갈을 해바리고 대체 무슨 일로 밤낮없이 몰려다니면서 그러는지 모르시겠다고.
212
영수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것이 걱정된다느니보다 이녁이 걱정이 된다 그 말이지 (웃는다) 응? 내가 바루 알아맞혔지?
213
서씨    밉상이네! 뉘 걱정이 되었든지 대체 어떡하자고 그래요? 논을 쉬흔 말지기나 잽혀서 수천 원 들여가지고 장사를 벌려놓더니 그 밑천을 언제 뽑을랴고 그래요?
214
영수    그렇다고 이녁 밤 굶길까 바서 걱정이요? 염려 말어요 인제 밥보다도 더 좋은게 있으니.
215
서씨    무척! 나는 몰라요. 이번 장사에 거들나면 어머니는 당신 허리띠에 목을 매서 자결하실 테니.
216
영수    어머니 걱정일랑은 하지 말어요. 우리 어머니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어른이요 또 다 도량이 넓어서 그렇게 아등아등 하시잖은 어른이니까.
217
서씨    그래서 그걸 믿고 그러시우?
218
영수    그만해 두어요. 집안 여편네란 있는 양식으로 밥이나 해먹고 자식이나 길르고 하란 법이지 그렇게 사랑에서 하는 일을 이러니저러니 참견을 하고 나서면 마정스러워서 못쓰는 법이야 응?
219
(최씨 상인을 업고 차면 안으로 들어선다. 이때에 벌써 머리는 반백이 넘었다. 서씨는 시어머니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220
최씨    휘유! 아따 그놈이 등에서 어떻게도 날뛰는지. (토방으로 올라선다)
221
영수    (상인을 보고) 저놈이 할머니 허리 아푸신데 커다란 놈이 업혀대니면서. (웃는다)
222
최씨    손님들은 다 갔느냐?
223
영수    네 방금 갔어요.
224
최씨    (망설인다)
225
영수    (주춤주춤한다)
226
최씨    너는 언제부터가 가개문을 다시 열게 되느냐?
227
영수    글쎄요. 아직 모르겠어요. (間) 그렇지만 어머니 그걸로 너무 걱정하실랴 마세요.
228
최씨    글쎄 네가 다 오죽 알어서 하는 일이랴 싶어 맘은 뇐다마는.
229
영수    네, 아무 염려 마세요.
230
(영수, 건넌방으로 들어가고 최씨는 영수의 등 뒤를 이윽고 바라보다가 한숨을 짓고 돌아선다.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231
최씨    (한숨) 그러더니 바루 그 이튿날 그게 장날이었지. 오때가 될락말락해서 갑자기 독립만세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뒤엎는고나! 어떻게 놀랬는지 내가 그냥 가슴이 더럭 내려앉아서 정신을 못 채리다가 그래도 미심쩍어서 저 앞으로 나서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네 외삼춘이 맨 앞장을 섰구나! 친구 몇 사람허구 같이…… 보고 섰느라니까 꼭 미친놈 날뛰듯 하는구만! 별 말할 것 없이 미친놈 날뛰듯 해.
232
영오    순사가 잡어가잖어?
233
최씨    순사는 적고 그 적군들 많으니까 마치 떼세에 매(罵) 놓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더라. 그런 뒤에 며칠이 지나서 네 외삼춘은 붙잡히게 되니까는 도망을 해버렸지! 그저 하릴없이 갑오년에 너이 외할아버지가 겪든 그 꼴이야! (間) 그러자니 가개 보든 것은 아주 거들이 나바리고 논문서를 잡힌 것도 그해 오월까지가 기한인데 할 수 없이 떠내려가버리고.
234
영오    외삼춘은? 붙잡히지는 않었지?
235
최씨    그렇지. 그저 촌으로 피해 다니면서 가끔 밤을 도아 집에 들르기도 하고. 그렇지만 영영 붙잡히지는 않었느니라. 그 대신 영영 나가버리기는 했어도. (한숨) 그게 그러니까 그해 추석인가 부다. 봄 여름을 그렇게 피신을 해 다니는데 순사는 육장 집에 와서 소식을 묻고 그러든 차에 바로 팔월 열나흘날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
236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제2막 제2장)
 
 
237
제2장
 
238
[무대]
239
제2막 제 1장과 같다.
240
무대가 밝아지면 최씨 안방 마루에 앉아 청대콩을 까고 있다.
 
241
최씨    (독백. 오늘이나 밤에 조용히 다니려 올려는지? 온대도 붙잡힐까 무서워서 겁이 난다마는 올려거든 오늘 와서 제가 질겨하는 송편이라도 좀 먹지는 않고)
242
서씨    (건너방에서 나와 최씨 앞에 앉아서 콩을 깐다)
243
최씨    어린놈은 자느냐?
244
서씨    네.
245
최씨    그것이 애비가 보고 싶어서 육장 아빠아 아빠 부르는걸!
246
서씨    ……
247
최씨    남들도 붙잡혀가야 다직해서 한 삼사 년 치루면 그만일 태니 그럴심 치고 자현을 시키라고 권면들은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한평생 그렇게 피신만 해 다니랄 수는 없고.
248
서씨    가서 한 삼년이고 치루고 나오는 게 낫지 그 짓을 유루 어떻게 해요. 그리잖어도 요전에 왔을 때 그런 말눈치를 뵈였더니 펄쩍 뛰면서 아직도 할일이 태산 같은데 웨 자현을 하라느랴고 그럽디다마는.
249
순사    (차면 안으로 환도를 덜그럭거리며 서슴잖고 쑥 들어선다) 안녕하십니까?
250
최씨    (자지러지게 놀라고)
251
서씨    (내외를 하느라고 방으로 들어간다)
252
최씨    (겨우) 네 어서 오시요.
253
순사    (토방 앞으로 가까이 와서 휘휘 둘러보면서) 거 송편속입니다. 그려?
254
최씨    네 어린것도 있고 해서 추석이라고 (間) 당신들은 명절에도 이러고 다니시우? 명절에나 편히 좀 쉬지는 않고.
255
순사    우리한테 명절 여부가 있나요. 허허허.
256
최씨    피차에 못할 일이요.
257
순사    할 수 없지요. 그래 자제한테서는 무슨 소식이나 있읍니까?
258
최씨    소식이 있은들 에미로 앉어서 어떻게 바루 대드리겠소?
259
순사    허허 그리기도 하시겠지만 추석이고 하니까 혹시 편지 같은 거라도 왔을 법해서 물어본 거지요.
260
최씨    그리구 저리구 간에 아무 소식도 없읍디다. 나도 이렇게 제가 질겨하는 송편을 빚으면서 기대리기는 하오마는 다리 아픈데 좀 올라앉이시요?
261
순사    네 좋습니다. 가개 보든 걸 넘기섰다지요?
262
최씨    네.
263
순사    웨요?
264
최씨    그건 두어두어서 무얼 하게요.
265
순사    그렇기도 하지만 얼마에 넘기섰읍니까?
266
최씨    물건 남은 것하고 집까지 터전까지 껴서 육천 냥 받었다우.
267
순사    육천 냥이면 일천이백 원? 거 잘 받으섰는데요!
268
최씨    그런 말씀 마시우. 그래보여도 그게 논을 오십 말지기나 잡혀서 채려놓은 가개라우.
269
순사    첨에 들인 밑천이 많다고 그 값이 다 나가나요. 그래 그 돈은 자제한테로 보내섰나요?
270
최씨    아니요. (황망히) 어데 가서 있는지 알어서 보내요.
271
순사    허허허허 자, 그럼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272
최씨    (청대콩 가지를 손에 든 채 일어서서) 네 평안히 가시고. 또 오시요. 또 와도 걱정이오마는.
273
순사    허허허허. 그렇지만 오기만 하는 거야 어떻습니까? 허허 안녕히 계십시요. (돌아서서 나간다)
274
최씨    안녕히 가시우.
275
서씨    (방에서 나와 앉는다) 가개 팔린 소식은 어데서 듣고 와서.
276
최씨    그 사람네가 그 소식 모르겠니?
277
서씨    그래도 가서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으니까 알지요? 좀 있으면 집집마다 살강에 숟갈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알고 다닐걸.
278
최씨    시방은 세상이 그렇게 밝단다. (間) 인제는 어두어서 안보인다. 불을 좀 켜지?
279
서씨    (건넌방으로 들어가서 석유램프에 불을 켜가지고 나와 적당한 곳에 걸어놓는다) 논 잡힌 것은 영영 아니 물러주겠대요?
280
최씨    그게 누구라고 물러주겠니? 그 사람은 꼭 제것을 만들 욕심으로 애초에 잡었든 것인데 그나마 기한이 하루이틀 지낸 것도 아니고 벌써 석 달이나 지낸걸. (間) 진작 알었드라면 내라도 나서서 다른 논을 제 값을 받고 팔어다가 그것을 물렀을 것을.
281
영수    (지쳐둔 부엌문을 열고 어엿이 나온다)
282
최씨    -
283
서씨    - (놀라 먼저 대문간께를 본다)
284
최씨    이애야 방금 다녀갔다!
285
영수    알었어요. 뒤울타리를 넘어 들어와서 부엌으로 들어오니까 이얘기하고 있는 게 벌써 그렇드구만요. (웃는다)
286
최씨    방으로 들어가자.
287
영수    괜찮어요. 방금 다녀간 걸 어데 되짚어 오나요. (시계를 꺼내본다) 아뿔싸 한 시간 밖에 아니 남았군. 어머니 가개는 제가 기별한대로 그 사람한테 넘기고 돈 찾으섰지요.
288
최씨    오냐.
289
영수    저 주세요.
290
최씨    (안방으로 들어간다)
291
영수    상인이는 자우?
292
서씨    네, 어데 가시우?
293
영수    응, 이러고 있어야 수족을 묶인 것 같아서 일도 못하고 그래 몇몇이서 오늘 저녁에 상해로 떠나기로 되어서.
294
서씨    (울상을 한다)
295
최씨    (돈을 손에 쥐고 나온다) 어데 가느냐?
296
영수    네. (돈을 받아 세다가 일부분을 도로 최씨한테 주면서 이게 이백 원이니 이것을 두고 가용에 쓰세요. 그러고 논이 그래도 그렁저렁 일백 한 오십 말지기는 남었으니까 추수하면 집안 지내기는 넉넉할 겝니다. 저는 이번에 떠나면 아마 돌아오기는 졸연찮을 것 같애요. 그러니 그렇게 아시고.
297
최씨    (질색해서) 이애야 그게 무슨 소리냐? 차라리 법소에 가서 자현을 하고 몇해 고생을 하고 말지 가기는 어데를 간단 말이냐.
298
영수    아니예요. 어머니는 다 모르십니다. (서씨더러) 고생스럽더래도 어머니 모시고 상인을 데리고 조심해서 지내요.
299
서씨    ……
300
최씨    글쎄 어떡하자고 이러느냐? 내야 다 늙어서 죽을 날을 날받어 놓다시피 했으니 죽으면 그만이라지만 (서씨는 돌아보고) 저 젊우나 젊은 것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어찌 살어가란 말이냐 ?
301
영수    그런 일 저런 일을 다 생각하다가는 꼼짝 못하게요. (間) 혹시형편이 여의하면 오시라고 기별할 테니 저것들 데리고 오세요.
302
최씨    가는 데가 어데길래?
303
영수    상해예요.
304
최씨    상해가 어데냐?
305
영수    청국이예요.
306
최씨    (펄쩍 뛴다) 머? 청국? 저, 대국 말이지?
307
영수    네 무얼 그러세요? 옛날과는 달러서 이틀이면 오고가고 한답니다. (시계를 꺼내 본다) 시간을 퍽 촉급하군. 자, 어머니 그럼 가서 편지로 자상한 말씀 드리지요. (서씨더러) 잘 있수.
308
(영수 허둥지둥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고 최씨와 서씨 뒤미쳐 눈물을 씻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간다.
309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310
최씨    (한숨) 그래서 그날 밤 그렇게 뒤울타리를 뛰어넘어 나가버리더니 그런 지가 열여덟 해가 되엇다! 열여덟 해!
311
영오    그래서 시방도 외삼촌은 상해라는 데 있수?
312
최씨    모르지. 처음 갔을 때는 가끔 편지도 하고 하더니 편지뿐이드냐! 육장 논을 팔어서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해서 한번에 열 말지기도 팔고 닷 말지기도 팔고 그렁그렁 십년지간에 논 일백오십 말지기를 다 팔어서 그 뒤를 대고 (間) 그런 전장(田莊)이야 다 제가 객지에서 요긴하게 쓰느라고 팔어 없앤 것이니까 원통할 것은 없지만. 글쎄 그러니까 그게 어느 해냐? 경오년이지. 경오년 이짝으로 팔 년째나는 통히 소식조차 없구나! 그러니 답답할 게 아니냐? 죽었는지 살어 있기나 한지.
313
영오    편지해 보지?
314
최씨    편지를 하면 도로 오고 도로 오고 하는걸. (間) 그렇게 논밭 있든 것을 요모로 조모로 다 팔어 없애고 논이래야 겨우 박토 한 섬지기 남은 것에다가 세 식구가 목을 매어달고 울면불면 이날 이때까지 또 살어를 왔구나. (間) 그래도 인제는 네 상인이 언니가 그만큼이나 장성을 했고 시방은 고학을 한다고 고생은 해도 인제 내년 내후년이면 졸업을 한다니까 졸업을 하고 나오는 날이면 저 고생한 보람 있이 또 제 어멈이 초년의 생과부로 고생한 보람 있이 편안히 잘살게 되겠지. 내야 그 덕을 볼 날까지 살어 있을는지 모른다마는 혹시 모진 목숨이 죽지 않고 몇해 더 살어 있느라면 제 덕으로 두 다리를 쭉 뻗고 다만 몇날이라도 편히 살다가 죽을 테지. 나는 시방 믿느니 그것뿐이다.
315
상인    (차면 안으로 등장) 영오 왔구나.
316
영오    언니 ! (뛰어가서 팔에 매어달린다)
317
최씨    인제 오느냐? 어여 올라와서 점심 먹어라. 십리길이나 다녀오느라고 다리 아프겠다.
318
상인    (영오를 데리고 마루로 와서 걸터 앉는다) 고까짓 데 다녀왔는데 다리는 무슨 다리가 아퍼요?
319
최씨    그래도 이애야! (일어서려고 한다) 점심 먹어야지? 어멈 물방앗간으로 꼬마둥이 데리고 쌀을 찌려 가더니 아직 아니 왔다.
320
상인    점심은 먹었어요. 아 산지기가 반가워하면서. 그만두라고 해도 새로 밥을 한다, 닭을 잡는다, 술을 사온다, 머 여간 흠선하게 대접을해야지!
321
최씨    어찌나! 워너니 윤서방이 전부터 맘씨가 좋더니라. 시방도 명절때면 나를 잊지 않고 무얼 해오고.
322
상인    산소에 벌초도 잘 했더구만요.
323
영오    (밤 하나를 벗겨서 상인에게 준다) 언니도 먹우.
324
상인    이 녀석아 너는 할아버지 제향에 쓸 걸 네가 먼점 운감하는구나? (웃으면서 밤을 받아먹는다)
325
영오    할머니가 먹으라신걸.
326
최씨    너도 벳겨 먹어라.
327
상인    저는 배가 불러서. 인제 이렇게 껍질을 벳겼으니까 다시 본두기를 곱게 쳐야지요?
328
영오    언니 언니?
329
상인    왜 그래?
330
영오    나는 할머니한테 외할아버지 이애기랑 외삼춘, 언니네 아버지 말이야 하하, 상해로 간 외삼춘, 아주 재미있는 이애기 들었다누.
331
상인    동학 이애기, 기미년 이애기, 그런 거 들을 게로구나?
332
최씨    그애가 호랭이 이애기를 해달라고 졸르니 내가 웬걸 호랭이 이애기를 그렇게 알어야지!
333
영오    언니 언니.
334
상인    그래서 ?
335
영오    언니도 이애기 하나 해주.
336
상인    이녀석아 대낮에 이애기는! (웃는다) 너는 소설쟁이 될려는 게로구나?
337
최씨    그놈이 제 어멈을 닮어서 그러지. 이애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338
영오    그래도 우린 가난하잖은걸 머. 어여 언니, 이애기 해주어.
339
상인    그래라. 그 대신 너는 밤을 벳겨서 내 입에다가 바쳐야 한다.
340
영오    응 그렇지만 재미나는 이애기를 해주어야지 해.
341
상인    재미있지. 자, 시작한다, 저, 옛날 옛적 간날 간적 더벅머리 총각 놈이 접시밥을 갈러먹고 사는데에……
342
영오    싫여 장난하느만.
343
상인    하하. 아니야 그런 옛날 말이다. 아주 옛날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불, 밥도 해먹고 불도 때고 불도 켜고 하는 그런 불이 없이 살었단 말이야
344
영오    피. 불이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어? 가짓말.
345
상인    아니다. 너 저 김생들 못보니? 김생들이 어데 불을 쓰든? 그와 마찬가지야. 사람도 아주아주 옛날에는 김생들처럼 불이 없이 살든 때가 있어요. 이녀석 이애기삯은 안 주니? 인다구 밤.
346
영오    (벗겨서 제가 먹으려던 것을 웃으면서 준다) 자요.
347
상인    옳지 (받아 먹으면서) 그래 그렇게 불이 없이 사느라니까 고생을 하지 않겠니? 자, 음식도 날것으로 먹어야지, 뜨듯하게 불도 못 때지. 그래서 겨울이면 치워서 와들와들 떨리지, 밤에 불을 켜지도 못하지. 그래서 사람들이 무척 고생을 하는데 그때에 불은 누가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하누님이 그것을 하늘에만 잘 건사를 해두었드란 말이지. 그러고는 하눌 밑에 인버러지 사람 말이야. 사람들이 아무리 고생을 해도 불을 주지 않는단 말이야.
348
영오    웨?
349
상인    불은 거룩한 것이래서 버러지같이 땅 우에 기어다니는 인간들 한테는 그런 거룩한 것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런데 하누님 신하에 프로메테우스, 응 프로메테우스라는 음 무어라고 하꼬? 음 프로메테우스라는 신령님 하나가 있는데 하로는 가만히 이 땅 위를 내려다보니까 인간들이, 사람들이 말이야 치운 겨울에 얼음판 우에다 모다 와들와들 떨고 있거든, 그걸 보니까 프로메테우스가 거 어찌 불을 하눌에다가만 두고 불쌍한 인간들은 저렇게 고생을 시킬까 부냐고, 에라 이건 이럴 게 아니라고 살그머니 하누님 몰래 불을 훔쳐내왔잖었겠니. 들키면 경이야 하하. (間) 그래서 불을 그렇게 훔쳐가지굴랑 인간들이 있는 땅 위로 척내려왔단 말이지.
350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제3막 제1장)
 
 

 
351
제 3 막
 
352
제 1 장
 
353
[무대]
354
배경은 빙원(氷原)과 눈쌓인 원산. 무대에는 눈 덮힌 빙판.
355
무대가 밝아지면 중앙에 남녀의 성별이 나지 않게 짐승의 털가죽으로 몸을 가린 원시인 5,6이 한 무더기가 되어 떨고 있고 손에 횃불을 든 프로메테우스 상수로 서서히 등장.
 
356
원시인들  (프로메테우스와 불을 보고 겁을 내어 뒤로 물씬물씬 물러간다)
357
프로메테우스  무서워하지 마라, 나는 너이를 구하려 왔느리라. 이 불을 너이를 줄 테니 이것을 받어가지라.
358
원시인 갑  그것은 무엇이오?
359
프로메테우스  이것은 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치웁지 아니하고 음식을 이것에다가 익혀 먹으면 보드랍고도 맛이 있고 이것을 켜놓으면 밤에도 모든 것이 보이고 또 이것으로 쇠를 녹여서는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어 사냥을 할 수 있고 너이를 침노하는 사나운 김생들을 대적해서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해서 너이는 겨레가 크게 번성할 것이요 좋은 세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360
원시인 을  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그렇게 좋드람? 어데(가까이 와서 불을 덤쑥 만지다가 질겁하고 물러선다) 아이구 아얏? (성을 내어) 그런 독하고 무서운 것을 주면서 우리를 속일려고! (동류를 돌아보고) 손을 대니까 머 끊어지게 아픈걸 그래.
361
프로메테우스  아니다, 그렇게 너무 가까이 대니까 데어서 뜨거운 것이다. 자, 이것을 받어가거라. 그러나 이것은 물을 끼얹으면 죽는 법이다. 마른 나무 가지를 모아놓고 거기다가 옮겨라. 그리고 어찌해서 영영 꺼져바리거든 산에 가서 쇳덩이와 돌덩이를 구해서 그것을 마주 부드치면 거기서 조고만한 불이 일어나느니라. 그것을 마른 풀잎에다가 받어서 불을 장만해라. 자, 받어가거라.
362
(원시인 한 사람이 나서서 횃불을 받는다. 프로메테우스 횃불을 주고 상수로 퇴장.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363
상인    그래서.
364
영오    멀 가짓뿌렁! 성냥이 있는데 왜 불이 없어.
365
상인    아 그 녀석이 너 할머니한테 여쭈어보아라 옛날에 성냥이 있었는가.
366
최씨    없구말구.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황(黃)개피허구 부싯돌뿐이었드란다. 그러고 네 말이 근리한 말인가부다. 옛날에는 밤에 화로에 불을 담어두었다가 그 이튿날이면 그것으로 불을 이루더니라. 그걸 불씨라고 하지 어는 집에서는 불씨가 삼대째 내려오느니 사대째 내려오느니 하고, 그리고 그 화로는 그 집 맏며누리가 꼬옥 맡어두더니라. 그렇게 맡엇다가 이튿날 새벽에 불을 이루는데 혹시 불씨를 죽였으면 집안이 망할 징조라고 큰일이 나지. 도루 쫓겨가기가 십상이었지.
367
상인    거봐 이 녀석아 내가 거짓말을 했니?
368
영오    그럼 자. (밤 벗긴 것을 준다)
369
상인    옳지. (받아먹고) 그런데 말이다. 그 뒤에 하눌에서 하누님이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아 인버러지들이 불을 가지고 있겠지! 아 그래서 하누님이 그만 노발대발 역정이 나서 어떤 놈이 내 거룩한 불을 훔쳐다가 저놈들 인버러지를 주었단 말이냐고, 인제 저것들을 불을 가지고 왼갖짓을 다해설랑은 오라잖어 하늘까지 올라와서 내 턱을 처받으려 들 테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고.
370
영오    하하하하 하누님 턱을 치받어
371
상인    그렇지. 너 비행기 알지? 그 비행기가 인제 조곰만 더 높이 뜨게 되면 정말 하나님 턱을 치받는다. 그런데 그 비행기라는 것도 따지고 따지면 바람이 불을 쓰는 데서 나온 것이어든.
372
영오    하나님이 그렇게 노해서 어쩠수?
373
상인    웅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붙잽히고 말었지. 붙잽혀서는 어떻게 됐냐 하면?
374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제 3막 제 2장)
 
 
375
제 2 장
 
376
[무대]
377
배경은 멀리 연산(連山)의 산봉우리들. 무대에는 그들 연산 중에 제일 높은 봉이 보이는 바위 하나. 무대가 밝아지면 한쪽 눈이 상하고 한편 귀가 떨어진 프로메테우스가 굵은 쇠사슬로 팔다리를 바위에 비끄러매고 앉아 있다.
 
378
프로메테우스  (눈을 치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의를 행한 보갚음(報果[보과])! 의를 이룬 보갚음은 영겁의 고초! 죽지 아니하고 영겁토록 받는 고초! 사나운 수리가 살을 쪼아먹고 까막까치는 눈을 파먹고 귀를 떼어먹고 그러고도 끊이지 아니하는 극형!
379
(천둥소리 우르릉거리고 번개를 친다. 폭우가 내린다. 폭우 그치고 강풍이 분다. 강풍이 그치고 눈이 내린다)
380
프로메테우스  (눈이 내릴 때에) 오오 그래도 나는 의를 이루었노라. 뉘우치지 아니하노라.
381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아지면 도로 전경)
382
최씨    아이! (혀를 끌끌 찬다) 불쌍하다.
383
상인    하하하하 불쌍해요?
384
최씨    그럼 불쌍하잖니! 언제까지고 그렇게 묶여 앉어 고생을 할 테니!
385
상인    그런데 얼마 전에 누가 가서 풀러놓아 주었답니다 할머니.
386
최씨    아이 잘했다. 아무렴 놓아주어야지.
387
상인    하하하하. (일어서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388
영오    언니 어데 가우?
389
상인    나 누구 좀 만나고 오마.
390
영오    나도 같이 가?
391
상인    너는 못 오는 데다.
392
최씨    일찍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393
상인    네. (차면께로 걸어간다)
394
최씨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저것이 뒤태는 여승 제 아범야!
395
영오    외삼춘?
396
최씨    그래. 돌아서서 저렇게 걸어나가는 걸 보면 그저 하릴없이 제 아범인걸! 뒷데숙이가 볼록 나온 것이며 어깨통이 떡 벌어진 것이며 걸음걸이며. (한숨)
397
상인    (한번 돌려다보고 차면 밖으로 퇴장)
398
최씨    (방백) 어여 하루바삐 공부를 다하고 와서 장가나 들고 자식이나 낳고 그래서 편안히 살어가게 해라. 믿느니 믿느니 그것뿐이다. (한숨)
399
영오    할머니 할머니
400
최씨    오냐.
401
영오    그런데 말이유. 우리 선생님도 그리시고 또 우리 반 동무아이도 그리는데 언니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사회주의한다고 그리겠지?
402
최씨    무엇? 사우주? 그건 무슨 말이라든?
403
영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이애 영오야 너이 외가집 상인이 형은 동경가서 사회주의한다지? 그래.
404
최씨    그럼 아마 돈없이 고학한다는 말인가 부구나? 그렇다면야 어떻니? 그렇게 고학을 해서라도 공부만 착실히 잘해서 장하게 되어가지고 잘살면 그만이지. (밤 담겨 있는 그릇을 들여다보고) 인제는 다 벗겼다. 그새 이애기를 하느라고 벗기는 줄 모르게 (밤을 벗겨서 물에 담근 그릇을 들여다보고) 많이도 벗겼다. (마지막 벗기던 밤을 물에다 담방 담그면서) 내가 옛날 ‘노구할미’뽄이다. 노구할미가 상전에 벽해 되는 것을 보고는 입에 물었던 대추씨 하나를 뱉어놓고 벽해가 상전이 되는 것을 보고는 또 대추씨 하나를 뱉어 놓고 연해 그런 것이 대추씨가 모여서 큰 산이 되었다더니, 나도 이애기를 하는 동안에 밤을 이렇게 많이 벳겨놓았구나! (바깥을 우두커니 내어다보면서) 구름도 허연 게 탐스럽게도 헡어진다!
【원문】제향(祭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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