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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뿌띠 부르 인텔리요, 내가 농촌의 중산가(中産家)에서 태어나 이래 반생을 그 환경에 순응하는 생활을 해온 때문이오.‘생활’의 힘으로가 아니라 서적으로써 이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을 파악은 했소. ─ 대부분의 인텔리의 예대로 ─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노동자·농촌과 같은 세계관을 가지기는 했을지언정 그들의 생활과 감정은 가지지 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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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더구나 안된 것은 나는 아직까지 계급진영에 들어가 정치적(略[략])의 체험도 가지지 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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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로서 과거에 노동자·농촌의 생활이나 또는 그들의 정치적(略[략])을 주제로 한 몇개 작품을 써 내놓았다는 것은 낯이 따가운 돈 끼호떼 식의 만용이요 선의(?)의 무지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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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르와 인텔리의 몰락과정 특히 후자의 고민상과 그(略[략])에로 전락의 필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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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조아와 및 그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폭로, 기성문화의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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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몇 가지가 앞으로 당분간(당분간) 나의 창작활동의 범주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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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그다지 남의 앞에 내어놓고 이야기할 거리까지는 못되나마 창작활동을 창작활동답게 하자면 최저한도의 생활의 안정이 필요해야겠다고 절실히 느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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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인형의 집을 나와서』를 쓰면서 더우기 느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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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바삐 써다가 주고 한시바삐 고료를 받아와야 하겠다”고 하면서 쓰는 작품은 도저히 작품답게 될 수가 없소. 나는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 최초의 장편인 그 『인형의 집을 나와서』를 잡쳐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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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고프면 밥 먹고 싶지 소설 쓰고 싶지 아니하오. 나는 밥 먹는 것 장만 하느라고 1933년 1년 동안에 장편 한 개와 1막 희곡 한 개밖에는 쓰지 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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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좀더 두뇌가 밝은 평론가가 생기도록 그들이 공부를 했으면 좋겠소 나는 앞으로 내 작품에 . 대해서 누가 어떠한 시비를 하건 절대 대응치 아니할 작정이요마는 몇몇 평론가는 보면 정말 한심한 이가 많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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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낳아놓은 작품을 살릴 데 살리고 깎을 데 깎는 것이 평론가의 큰 그리고 유일한 임무이겠는데 실은 ‘을축 갑자’ 의 결과에 이르는 게 거의 전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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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조선일보] 193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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