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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열의 스페인 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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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7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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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스페인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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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간 산 세바스티안 피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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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오전 9시에 스페인을 향하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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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조 9시에 스페인 피서지로 유명한 산 세바스티안에 도착하였다. 시가지 중에 해안이 있어 시설이 굉장하였다. 길에는 다마루라란 나무 병목(並木)이 있어 자못 유연한 맛을 주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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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는 시민이 5만 명인데 하절에는 배 이배(倍二倍) 되어 호텔마다 만원이다. 호텔 음식은 올리브 기름 요리가 많아 비위가 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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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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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투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유명한 것이다. 뿔 돋은 소를 캄캄한 창고 속에 넣어 두었다가 문을 여니 뛰어나와서 사방으로 위기 좋게 뛰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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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마기사(騎馬技師)가 2, 3차 창으로 찔러 숨을 죽인 후 금은색복(金銀色服)과 모자를 쓴 기사가 벌건 보를 들고 색종이로 만든 꼬챙이를 3대 소의 등성머리에 꽂고 다시 칼을 가지고 숨구멍을 찌르니 소는 발광을 치다가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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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관객들은 악들을 쓰고, 손바닥을 치며 귀부인에게서는 화환이 떨어지고 북적북적한다. 만일 죽지 않는 시(時)는 사람이 진 것이 되어 관람석으로부터 방석이 풀풀 날려 기사를 때리며 외친다. 때에 따라서는 기사가 3, 4인씩 죽어나가는 수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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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순하고 정직하고 근실한 소는 기묘한 사람의 기술에 놀림을 받아 최후를 마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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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일에는 종일 비가 와서 오전에 해수욕 좀 하고 방 속에서 지냈다. 야(夜) 9시에 떠나 수부 마드리드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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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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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에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내셔널 호텔에 투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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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지리상으로 유럽 서편에 있으나 상고신화(上古神話)에 의하면 피부상으로는 유럽이라고 할 수 없다는 곳이다. 스페인 반도는 생기기가 소와 같고 또 바다가 둘러서 여러 나라가 침입하려면 쉬웠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이 최초의 세계적 문구(門口)가 되었고, 르네상스 이후로 미국의 항로가 되어 있고 항상 서북쪽 사이에 전장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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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은 딴 나라 사람과 달라 지리적으로 세계적 문이 되어 오고 가고 하는 인종이 많아 그리스종, 로마종, 보헤미아종의 잡종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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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부녀는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흑색 망사를 쓴다. 머리가 검고 키가 작으며 얼굴이 둥글고 푸근하며 검고도 정열 있는 눈이 검은 망사 속으로 으슥히 비쳐 보이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스페인 여자는 반드시 사랑의 보수를 한다는 전설도 들은 바 있어 더욱 유심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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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삼림 위에는 청남색 강한 광선이 쪼여 있고 그 사이로는 백색 석조건물이 보이고, 파초가 너그러진 가운데는 여신 동상이 처처에 있고, 기염차게 토하는 분수가에는 웃통 벗은 노동자, 유아들이 한참 무르녹은 멜론을 벗겨 들고 앉아 맛있게 먹고 있다. 아직도 원시적 기분이 많고, 도로에는 흙먼지가 많아 유럽 중에는 보지 못하던 동양적 색채가 있으며, 마차가 많고 노동자가 많으며 걸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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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견한 콜럼부스가 스페인인이요, 오페라로 유명한 카르멘이 스페인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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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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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예술은 매우 다수 다양하니 이는 지리상으로나 모든 관계상 여러 종류가 침입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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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는 선배가 후배에게 전하는 노력이 있을 뿐 아니라 왕왕 천재가 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다. 상고부터 여러 가지 미관을 가지고 중세기 암흑시대에 조그마한 불꽃을 가졌다가 근세에 와서는 지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 각국이 침잠(沈潛)하였을 때 스페인에는 큰 화가를 가져 대자만(大自慢)이었다. 당산(堂産)스페인 그림은 강하고도 영혹(靈惑)적이었다. 또 민간으로는 형용할 수 없이 신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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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기천 년 전 스페인 조상이 가졌던 원시적 무사기(無邪氣)한 기분과 환상을 현대에서도 오히려 주장할 만하다는 것을 안출(案出)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오리지널을 인정할 수 없으나 스페인의 회화는 역사적 계통이 확실하다는 것은 명언(明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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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때 동방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후년에 천재 그레코가 나서 뒤를 이었고, 후인 화가 중에는 이탈리아 피렌체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도 있다. 후안2세시(왕정시대, 16세기)는 전반 주의(注意)가 이탈리아로 향하여 유학하는 자, 혹 대가의 그림도 가져왔다. 그때 로마 법왕(法王 : 교황)이 대(大)화가를 스페인으로 외교관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국민적 예술이 전성시대가 되어 이탈리아에서와 프랑스 화가들이 이리로 배우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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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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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중의 하나인 궁전 구경을 갔다.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아니하나 내부의 치장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사방 벽이 모두 수(繡)요, 훌륭한 천정화(天井畵)도 많았다. 식당 문에는 동키호테의 일면이 직물로 되어 있다. 나오다가 성당 하나를 보았다. 채플 여섯이 있고 중앙 채플에는 예수의 사적(事蹟)이 그려 있고, 출입문에는 아름다운 목조가 많이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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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야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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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에 있는 고야의 묘를 전차를 타고 찾아갔다. 이 건물은 전에 성당인데 고야의 걸작 천정화가 그려 있다. 그리하여 세계인이 모여들므로 고야의 시체를 여기다가 옮겨놓고 옆에 이와 똑같은 성당을 지어 놓았다. 중앙은 묘요, 좌우 채플에는 고야의 걸작 「설교자의 군중」이 그려 있다. 이 그림은 필립 4세가 호색가이어서 어는 성당에 미인 있다는 말을 듣고 침입하려고 할 때에 성당 안에서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막으러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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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숯장수의 아들로 바위에 숯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재능을 본 어느 신부가 택하여 그를 공부시켰다. 15세부터 방탕하여 여자로 인하여 살인까지 하였다. 이탈리아에도 가 있었고 투우사도 되고 갖은 짓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유순한 것과 비참한 것이 겸하였다. 화면에도 이것을 잘 표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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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만년에 시력이 쇠약해지고 귀머거리가 되고 빈핍(貧乏)하여 판화를 묘(描)하려고 1828년 5월에 조국을 떠나 멀리 적막한 남 프랑스 보르도에 우거하였다가 파란 많은 82세를 최후로 마치고 말았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이 묘를 보고, 그 위에 그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 생각났다. 처음이요, 또 최후로 보는 내 발길은 좀처럼 돌떠 서지를 아니하였다. 내가 이같이 감흥해 보기는 전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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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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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구극(舊劇)을 찾아갔다. 길도 거의 알다시피 하여 차츰차츰 찾아간 것이 옳게 들어섰다. 극장 근처에는 너절한 사람이 많았고 궤짝 위에 놓고 파는 행상인도 무수하였다. 마치 조선의 전라도나 경상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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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문이 열리니 서로 앞을 다투고 악을 쓰고, 떠밀고, 야단이다. 다른 유럽에서 보지 못하던 유아들을 데리고 와서 울고 짜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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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구극이었다. 중국 의복과 흡사하고, 소리를 빼서 노래하는 것은 일본의 나니와부시(浪華節:사미셍 반주로 곡조를 붙여 노래하다가 이야기하다가 하는 노래) 같은 감상이 났다. 스페인 춤으로 유명한 캐스터네츠(대나무통)를 두 손에 들고 딱딱 소리를 내며 추는 춤도 있었고 깍지를 쳐서 추는 춤도 있었다. 역시 유럽 각국에서 보지 못하던 이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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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도 미술관 인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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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 제리제를 모작하였다는 카스티야를 동(東)으로 걸으면 시벨레스 광장 가까이 가아도쟈 정거장 지붕이 보인다. 국왕의 대관식과 결혼식을 행하는 상 헤로니모 성당 첨두(尖頭)가 보이는 곳에 레티로 공원의 청엽(靑葉)을 뒤로 한 적연와(赤煉瓦)와 백수성암(白水成岩)으로 된 높은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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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3대 화랑이 있으니, 즉 파리 루브르, 런던 내쇼널 갤러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다. 입구 정면에 있는 고야의 동상과 측면에 있는 벨라스케즈 동상이 곧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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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의하면 중세기 종(終)까지 차처(此處)는 진사장(塵捨場)이었다. 그 후 대로(大路)가 되어 왕족, 귀족들의 산보장이 되었고 귀족의 영양과 공작(公爵)들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속살거리는 장소가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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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3세는 박물관을 치우기 위하여 현재 미술관을 건설하였다. 벨라스케즈, 무리요, 엘 그레코, 고야 등 천재가 차제(차례)로 배출하여 현재 세계에 드문 명 미술관을 작성하였다. 양으로나 질로나 실로 세계적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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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는 다른 도회와 같이 내 놓을 만한 성당도 없고, 전설도 역사적 아무 것도 없건만 이 도회를 찾아 세계인이 모여 드는 것은 오직 이 프라도 미술관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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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미술관 안에 발을 디뎌놀 때 과도한 기대로 하여 심장은 뛰었다. 가벼운 충동이 내 몸에 파급하였다. 현재 스페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작품은 다 이 건물 중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귀재 벨라스케즈, 고야, 그레코, 리베라, 그 외 허다한 명장(名匠) 걸작을 실(失)할 것 같으면 스페인은 무엇을 가지고 자랑하려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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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들어가면 긴 방이 보인다. 좌편에는 이탈리아파실(派室)이 있어 라파엘그림과 다 빈치의 조콘다가 있다. 고대화 진열실은 지하실이요, 정면실에는 스페인이 생(生)한 많은 천재의 작품이 있다. 벨라스케즈의 「궁전생활」 「기록」 「수루바랑의 음울한 사제」 등 엘 그레코의 신비적 그림, 고야의 「피 흘리는 전쟁화」는 모두 고시대의 생활 기록이나 현재 우리와 같은 심사를 가졌고, 고통을 하였고, 감격하여 생을 영(營)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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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취한 여자의 나체도」 「1808년 5월 23일 사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있다. 모 일본인이 고야의 그림을 카피하려고 3년 동안을 다녔으나 카피를 못 하였단다. 실로 고야의 거완(巨腕)은 재래 회화에 대한 도전이요, 신시대의 효종(曉鐘)이었었다. 화랑 중앙에서 나와 조용히 사방을 보면 일종 장엄 정숙한 감이 생기며 우리의 마음은 현세에서 멀리 떠나 전혀 별세계로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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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는 우리가 주거하는 세계의 인물과 사물을 그리지 아니했다. 사람의 영(靈)을 그렸다. 그러므로 그레코의 그림은 육안으로는 알 수 없고 마음으로 감미하여야 한다. 그는 흑색을 많이 썼다. 그레코는 고야보다 200년 전에 나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 전설을 제일로 파(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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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千里[삼천리]』(1934. 5)
【원문】정열의 스페인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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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정열의 스페인 행 [제목]
 
  나혜석(羅蕙錫) [저자]
 
  삼천리(三千里) [출처]
 
  193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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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