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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밤 ◈
◇ 상 ◇
카탈로그   목차 (총 : 3권)     처음◀ 1권 다음
1920.12.1
방정환
상편 1920년 12월 1일 발행,《개벽(開闢)》제6호에서
중편 1921년 1월 1일 발행,《개벽(開闢)》제7호에서
하편 1921년 12월 1일 발행,《개벽(開闢)》제8호에서
1
그 날 밤 (상)
 
 
2
〈1〉
 
3
여자에게서 온 편지 ──. 실로 영식이게는 생후에 처음이다.
 
4
첫 번 한 번 읽고는 읽고도 무슨 소린지 의미가 분명치 못한 것 같아서 다시 한 차례 읽고야 겨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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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숨기지 못할 미소를 입 가에 띄우고 그 발그스름한 편지가 가늘고 작게 쓰여진 글자를 한 자 한 줄씩 글자 모양과 줄 바른 것을 주의하여 보며 문면에 나타난 것보다 더한 만족을 거기서 구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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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는 겉봉을 다시 집어 들고 어느 곳 몇 번지라고 어떻게 썼는가, 최영식 무엇이라고 썼는가를 보았다. 물론 시내 ××동 ○○번지라고 틀림없이 쓰고 최영식 밑에는 씨(氏) 자가 삐지게 똑똑히 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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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씨], 氏[씨], 殿[전]자와 氏[씨]자와 그 쓰는 구별이 어떠한 것인가. 殿[전]자는 보통 편지에 으레 통상 쓰는 것이고(우리가 일찍이 쓰지 않던 것을 남의 바람에 멋 모르고 흔히 쓰지만), 氏[씨]자는 좀 친한 이에게 다정하게 쓰는 것인가. 즉, 여자가 남자에게(사모하는 남자에게) 쓰는 친한 다정한 글자가 아닌가. 그렇다 하면 그가 그 구별을 생각하고 氏[씨]라고 쓴 것일까 혹은 그대로 쓰는 대로 별다른 생각없이 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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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그 殿[전]자 쓸 곳에 氏[씨]자를 쓴 그 氏[씨]자에 그의 친근하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견디지 못하겠다. 그러나 영식이는 그 氏[씨]자 좌측 옆에 친전(親展)이라고 쓴 두 글자를 보고 빙그레하였다. 전일에 친구에게서 온 것 중에 그리 대단치도 아니한 편지에도 친전이라고 특서한 것은 종종 보아서 친전이란 그것이 그리 특유한 것이 아닌 줄로 생각하던 터인데 지금 생후 처음 여자에게서 온 편지에 쓰인 친전은 무언지 중대한 비밀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두 글자를 보고 그와 자기와의 사이가 퍽 친근할 뿐 아니라 아주 밀접한 것같이 느껴져서 아까 생각하던 氏[씨]자는 퍽 친한 터에 쓰는 글자로 쓴 것이라고 단정해 버려 만족한 기쁨이 전신에 넘쳐서 세상이 졸지에 이상(理想)의 평화, 행복의 세상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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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편지를 들어 눈을 스르르 감으며 코와 입에다 대었다. 향긋한 향내가 가느름한 하게 코에 맡아진다. 그는 또 빙그레하고 입은 다문 채로 웃었다. 혼자 몸으로는 지탱치 못할 희열과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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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마침 사랑문 소리가 나고 창 밖에 신발 소리가 나므로 그는 깜짝 놀라 편지와 봉투를 책상 서랍에 급히 틀어 넣고 방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니까 어느 틈엔지 비가 시작되어 부슬부슬 오고 김(金)과 임(林) 두 사람이 검은 우산 하나를 받고 와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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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꼭꼭 닫고 무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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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는 모양이 어쩐지 편지 보던 것을 아는 것 같게 염려가 되나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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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니 좀 드러누웠었지 ── 어서 올라오게. 비 맞고 섰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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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네의 동작만 보았다. 자주 자기네 사랑같이 놀러 오는 그네는 목달이 구두 끈을 풀고 기탄없이 방으로 들어가 털썩털썩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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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의 주머니에서도 담배가 나오고 영식이도 담배함을 내어 놓아 각기 한 개씩 피워물고 두서없는 한담이 시작되었다. 이 말 저 말 하다가 언뜻 김이 영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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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 참! 자네 담배 그만 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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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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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이는 담뱃재를 떨면서 반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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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씨가 자네 담배 먹는 것이 좀 흠이라고 하더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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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이가 심중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허(許) 씨(편지한 여자)의 이야기가 기어코 나왔다. 영식이는 심중으로 퍽 시원하고 반가우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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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씨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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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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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자네 좋아하는 허정숙이 말일세. 허정숙이가 누구를 보고 그러더라네. 자네더러 사람은 좋은데 담배를 먹는 게 좀 ─ 재미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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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이는 참을 수 없이 기뻤다. 그리고 그가 어디서 언제 누구에게 그런 말을 어떤 태도로(아주 언짢게 했는지 좋게 좀 흠이라고만 부드럽게 했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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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있나 그런 여자가 더구나 어느 남자를 보고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나…… 자네들이 부러 하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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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세 이 사람아. 왜 허하고 같이 주일 학교 교사 노릇하는 조 씨가 아니 있나? 그 조 씨가 이 사람에게(김 군을 가리키며) 어떻게 아주머니뻘이 돼서 자주 놀러 가거던 …… 바로 어저께 그러더라네. 그래서 이 사람이 듣고 왔거든…… 어쨌든 자네는 수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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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옆에 잠자코 있던 임이 가장 침착하게 설명한다.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확실히 성미 깔끔하고 독신자(篤信者)인 그가 그런 말을 하였으리라. 그러나 과히 나쁘게 말은 아니하였겠지……하며 영식이는 머리 속에 성미 결백하고 행동이 얌전하여 여자끼리도 별로 교제가 적다는 얼른 좀 쌀쌀해 보이는 허를 그리면서 입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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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담배 먹거나 안 먹거나 상관할 것 무엇 있나? 예배당에서만 안 먹었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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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벌써 절대로 안 먹으리라 결심을 하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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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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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지. 모르는 남자의 일에 상관할 바도 없고 더군다나 그의 성미가 여자끼리도 남의 말을 잘 아니 하는 터인데 유독히 자네의 일을 그렇게 염려를 하니까 좀 ─ 으 ─ 수가 났단 말이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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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김이 임에게 협력을 구하는 듯 얼굴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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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 담배 연기를 천장으로 대고 휘 ── 뿜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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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 어쨌든 보통이라고는 볼 수가 없어 ── 그럴 듯도 한 일이 아닌가. 그도 미혼 처녀로 조금 있으면 노처녀라는 소리를 들을 터이고 그런데다가 자네로 말하면 그와 한 취미인 음악가야. 또 남자 간에도 이름난 미남자야……. 거 어찌 안 그렇겠나 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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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에 김은 신이 나서 물었던 담배 불을 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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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보아 내가 거짓말인가. 예배볼 때에도 그렇지. 자네가 아니 오는 날이면 그가 두리번두리번 찾다가 영 아니 오고 없으면 풍금 탈 때에도 풀이 하나도 없이 타고 예배만 끝나면 즉시 바로 달아나지. 또 만일 자네가 풍금을 타러 나갈 때면 그는 고개를 푹 숙이느니 예배가 끝나도 그렇게 급하게 가지 아니하고…… 그게 다 ── 그래서 그러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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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부인(否認)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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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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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픽 웃기는 하나 기실 영식이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퍽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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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그 허에게서 내게 편지가 온 줄을 알면 얼마나 더 떠들까. 저렇게들 이야기하고 있는 허가 보드라운 손으로 마음을 다하여 쓴 편지가 저들 앉았는 그 옆의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줄을 알면 저들이 얼마나 나와 허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떠들고 벌써 편지까지 오고가는 나와 허와의 사이를 얼마나 속으로 부러워하고 시기할까……. 현재 그 허에게서 반가운 편지가 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저렇게 떠들고 있구나 생각할 때에 영식이는 자기 몸의 한없는 행복을 깊이 느꼈다. 저들과 자기와는 원래 별다른 차이가 있는 인물인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만치 허와 자기와의 사이는 다른 제삼자가 엿보지 못하고 짐작도 못할 비밀하고 친밀한 사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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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예민한 관찰과 추측을 자랑하는 김에게 내게는 벌써 이렇게 편지가 왔다네…… 하고 내어밀어 그가 벌써 편지까지 왔는가 하고는 놀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잠그지도 않은 저 서랍 앞턱에 있는 편지를 혹시 저네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고 적지아니 겁이 나는 한편에 저네들이 장난을 하다가 무슨 동기로든지 저 서랍을 열어 그 편지가 있을 줄은 꿈도 못 꾸는 저의 눈 앞에 드러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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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한 턱 내게…… 여자끼리도 교제를 잘 아니 하는 그런 여자의 눈에 들고…… 한 턱 안 낼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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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김의 소리에 영식이는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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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을 낼 일이 있어야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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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창문을 드르륵 열고 문지방에 턱을 고이고 혼자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도 없이 바깥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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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려서 어느 때쯤이나 되었는지 분간을 할 수 없다. 다만 가늘은 비가 그저 부슬부슬 내리고 처마에서는 낙수물이 똑똑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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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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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장마가 겨 ─ 우 지나고 요새는 화끈화끈하는 햇볕이 다시 내리쪼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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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이는 그 지루한 장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매일 퍼붓는 비를 귀찮은 줄도 모르고 가장 재미있게 행복하게 지냈다 ──. 꿀보다도 무엇보다도 달고 재미있는 첫사랑의 속삭거림에 다른 일은 전혀 모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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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에게 편지를 주고받고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반쯤 되었는데 그 동안에 허에게서 온 편지는 아홉 번이나 된다. 영식이가 허에게 한 것보다는 둘이나 적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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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 산록(金華山麓) 골바위 느티나무 밑 볕 안 드는 그늘을 골라서 돗자리를 집에서 갖다가 펴고 영식이는 앉았다. 그래도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볕이 헝겊 무늬처럼 얼룩얼룩 비치는데 그 조그만 볕이 얼굴에 동전짝만 하게라도 닿으면 뜨거운 인두를 가깝게 대는 것처럼 따갑다. 그는 사현금(四絃琴) 갑을 벼개로 베고 하늘을 쳐다보며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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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덟 시가 퍽 지루하게 기다려진다. 여덟 시부터 청년 회관에 자선 음악회가 있는데 자기도 출연한다고 허에게서 어저께 편지가 온 까닭이다. 해는 아직 질 것 같지도 아니하고 따가운 볕이 돗자리 위해 듬성듬성 비친다. 드러누운 채로 팔목을 들어 양복 소매를 걷고 시계를 본즉 이제서야 다섯 시 반이 조금 지났다. 그는 담배가 먹고 싶었다. 영영 안 먹으리라 결심은 하였지마는 ──. 그 후에도 학교에서 누가 담배를 내어 주면 싫단 말 아니하고 받아 먹은 일이 서너 번이나 된다. 지금도 불현듯 담배 생각이 나서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손이 양복 주머니로 들어간다. 역시 담배는 없었으나 들어갔던 손에는 편지가 쥐어 나왔다. 어저께 허에게서 온 아홉 번째 편지다. 몇 번이나 읽은 그 편지를 다시 내어서 글자 모양도 보고 내용의 구절 구절도 보는 중 또 눈이 ‘2년 후 영광 있게 졸업 성공하실 날을 낙삼아 기다립니다…….’ 하는 구절에 머무르고 어저께 처음 보고 가지가지로 나던 생각이 또 되풀이해서 나기 시작한다.
 
53
내가 좋아서 정해 놓은 것은 아니나 내 정혼해 놓은 여자가 있는 줄을 알면 결코 이런 문구는 쓰지 아니 하렸다. 그렇게까지 나를 믿고 있는 그가 지금이라도 내게 정혼한 여자가 있는 줄을 알게 되면 어찌하는가 단념하고 아는 체도 아니 할까. 내가 굳이 속인 것은 아니지만 속았다고 원망할까. 울까, 욕할까. 아니 아니 결코 울지는 아니 하리라. 속았다고 원망은 하겠지. 퍽 낙망하고 가슴 아프리라. 어쩐지 ‘내게는 정혼한 여자가 있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여자 그 처녀 숙녀를 속이는 것 같아서 안 되었다. 그러나 실상 정혼한 것도 부모가 하신 것이지 내가 얼굴이나 보았을까 성질이나 알까……. 정혼해 놓은 것도 부모의 일이고 그 여자를 학비를 대어 주어 고등 여학교에 통학하게 하는 것도 부모의 일이고 나중에 후회할 것도 부모의 일이지 나는 그 일에 좋으니 그르니 의견 한 마디 말한 일 없이 모르는 일이니까 내가 반드시 그와 동거하지 안하면 안 될 의무도 없고 당자인 내가 그 혼인을 파혼하고 다른 곳으로 간대도 내 죄과일 것은 조금도 없으니까……. 무슨 죄악일까. 만일 허가 그 일을 알게 되거던 나는 사실대로 그것은 내가 정혼한 것 아니니까 당자가 부인하는 이상 어디까지든지 그것은 헛일일 것이요, 나는 진정으로 전 사랑을 당신에게 바친다고 말하리라. 오직 내게는 당신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리라. 그러면 그가 어떠할까…… 내 말을 믿겠지! 아니 그래도 불안은 용이하게 없어지지 안 하렸다. 혹은 어쩌면 내말이 얼러맞추는 수작이라고 하지 아니 할까. 참말로 나는 지금 정혼했다는 데는 아무 뜻이 없는데……. 언젠지 학교에 가는 것을 길에서 그인줄로 알고 보니까 얼굴은 괜찮더구만 성질이 어떤지를 아나 취미 희망이 무엇인지를 아나 , 결혼은 반드시 연애로써 성립되어야 하고 연애는 반드시 이성의 합치라야 진실한 연애라 한다는데……. 2년 후 졸업할 날 그렇다! 그 안에 파혼이 되도록 하리라. 결혼 생활을 하다가 이혼을 하여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 여자에게 아무 결(缺)될 것도 없으니까…….
 
54
그러나 2년 후 그 때까지 스물셋인 허가 기다려 줄까. 조금 가면 아니 벌써부터 헌 사람에게는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는 그가 자기보다 두 살이나 아래인(허는 아직 내 나이를 모르지마는) 내가 햇수로 3년이나 후에 졸업할 때까지 일 없이 기다려 줄까. 그 동안에 그의 부모가 강제로라도 시집을 보내렸다, 아니 아니 그래도 그는 다른 여성보다도 더 몇 갑절 깔끔하고 단단한 성격을 가진 그는 2년 3년이라도 꼭 기다려 주리라. 그는 편지를 머리맡에 놓고 양복 웃옷 속 주머니에서 포켓 일기를 꺼내더니 그 일기책 갈피에서 허의 조그만 사진을 꺼내 들었다. 왼쪽 이마에서 갈린 검은 머리가 바른쪽 눈썹을 거치고 지나 귀머리로 살짝 지나간 트레머리에 조금 갸름한 흰 얼굴을 조금 숙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게 천연히 들고 크도 작도 안한 부드러운 코 밑에 입술을 여무지게 다물고 잠잠히 무엇인지를 주시하고 있는 조용한 그 모양. 지금 그가 가늘고 부드러운 애련한 듯한 소리로 ‘저는 영구히 당신의 것입니다. 졸업하실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는 잠잠히 초연히 섰는 것 같다. 어쩐지 사진에 뵈는 그가 애련한 자태로 자기의 졸업을 독촉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느길 때에 그는 희미하나마 일종 불안과 공포가 가슴 속에 환영(幻影)같이 나타나는 것 같았으나 즉시 빙그레하는 미소가 그의 입 모습에 떴다. 그리고 그는 그 사진든 손을 하늘을 보며 드러누웠는 가슴 위에 놓았다. 물론 사진의 낯이 포근한 양복 세루와 마주 닿았다. 손은 그 위를 덮고……. 그는 눈을 스르르 감고 흰 적삼 검은 치마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을 허를 생각하며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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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이 ── 혼자 와 있네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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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사진과 편지를 급히 주머니에 넣으며 보니까 동네에 있는 친구 중에 가장 침착한 성질인 임이 모자도 안 쓰고 둥근 누런 부채를 들고 비탈진 길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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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많이 지고 겨우 어둡기 시작하였다. 빙수 파는 구루마에도 빙자(氷字) 쓴 등불이 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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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이는 일곱 시쯤부터 서대문 우편국 앞 전차 종점 근처에서 이 때까지 어름어름하고 서 있다. 세 ─ 루 양복 말쑥하게 입고 원래 희고 고운 얼굴에 면도까지 새로 하고 그 위에 맥고모자를 산뜻하게 사뿐 얹어 쓰고 허가 오기를 기다린다 . 그와 여기서 만나자는 상약(相約)은 한 일이 없으나 공연히 마음이 내키어 혼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줄은 그가 알면 부끄러울 겁도 나면서……. 모화관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많으나 허는 보이지 않는다. 문 안에서 나오는 전차는 사람을 가득가득 싣고 나와서 또 가득가득 싣고 들어가기를 벌써 10여 번째나 하였다. 야시(夜市)에 가는 사람들인지 연극장에 가는 사람들인지 전차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서 있고 그 중에는 악박골 물터에서 돌아가는 물병을 든 부인도 있고 기생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기생을 보는지 모여선 군중을 보는지 고개가 틀어지도록 보고들 간다. 꽤 어두워졌다. 전차가 또 나왔다. 가득 탔던 승객들이 내리기도 전에 발등을 디디어 가며 몰려 타더니 그래도 10여 명이나 못 타고 떨어져서 다음 차 오기를 기다린다.
 
59
이윽고 감옥 출장소 앞에 예상하던 바와 같이 흰 적삼에 검은 치마를 입고 영식이가 여기서 기다릴 줄은 짐작도 못하고 허가 내려온다. 영식이는 가슴이 무엇에 놀랜 것같이 섬뜩하였다. 그러나 얼른 붉은 전등 달린 전주 밑 전차 기다리는 사람 틈에 끼어 서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섰는데 허가 왔다. 그러나 그 군중 틈에 영식이가 있을 줄은 알지 못하는 허는 전차가 아직 아니 나오고 사람은 많고 하니까 군중과는 조금 떨어져서 혼자 얌전하게 악보를 손에 들고 섰다. 영식이의 가슴은 도수(度數)도 없이 뛴다. 저의 옆으로 슬쩍 지나갈까 그냥 모른 체하고 있을까 헤매는데 전차는 또 가득이나 싣고 나왔다. 전차의 정차하는 그 옆으로 모여드는 군중과 함께 영식이도 되도록 허와 만나도록 뒤떨어져 전차 승강구로 다가섰다. 허도 맨 나중에 다가서다가 영식이를 보았다. 갑자기 붉어지는 얼굴을 숙여 누가 볼까봐 언뜻 인사를 하였다. 영식이는 누가 볼까 겁하여 맥고 끝에 손 끝을 댈랑말랑하고 고개를 잠깐 숙여 인사하였다. 무언(無言)! 영식이가 승강구 손잡이를 잡고 서서 허에게 올라타라는 뜻을 표하였다. 허는 허리를 잠깐 굽히는 듯하며 먼저 타시라는 뜻을 보이더니 얼른 올라탔다. 영식이도 뒤따라 올랐다……. 벌써 만원이었다. 간신히 허만 차 안으로 들어서고 영식이는 차장대에 섰더니 차장이 자꾸 들어가라 하므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섰다. 그러는 동안에 전차는 떠났다. 쫓아타려는 노파 하나를 본 체 만 체하고……. 만원이라 복잡한 틈에 억지로 끼인 영식이와 허의 몸은 한데 닿았다. 어디선지 훈훈한 바람이 일어나 얼굴에 와 부딪고 따스한 그의 체온이 몸이 맞닿은 그리로부터 자기 몸에 옮아오는 것을 느낄 때에 가슴은 제어할 수 없이 울렁거린다. 그는 벌써 취한 사람같이 멀건 ── 하다. 차장이 와서 차표 내라는 소리에 어떻게 하여 좁은 틈을 부벼대고 차표 두 장을 떼어 주니까 한 분은 누구냐고 물으므로 턱과 눈으로 허를 가리켰다. 그랬더니 차장이 아무 말 없이 차표 한 장을 도로 주며 빙그레 웃는다. 영식이의 얼굴은 옆에 사람 민망하게 빨개졌다. 그러나 그나마 허가 돌아섰기 때문에 그 꼴을 보지 못하여 다행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차는 벌서 흥화문 앞 구세군영을 지난다. 내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 좁은 데 기생 하나가 또 올라 비집고 들어섰다. 영식이는 허와 기생 틈에 바싹 끼게 되었다. 기생의 몸둥이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까닭없이 그것이 싫어서 고개와 몸을 돌려 허를 향하였다. 더 한층 허의 몸이 신성해 보인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 영식이는 무릎을 꼿꼿이 펴고 허와의 키를 대어 보았다 검은 그의 머리가 코에 닿는지 눈에 닿는지 한다. 꼭 합격하는 소리가 속에서 나다 말았다. 영식이는 가만히 서서 다른 데로 향할 곳 없는 눈을 허에게로 쏟는다. 손잡이 가죽끈을 붙들고 섰는 그의 팔뚝은 전광(電光)에 비치어 희다 못하여 창백하게 보인다. 통통하고도 걀쭉걀쭉한 옥 같은 그 손과 그 손 끝에 반짝반짝 빛나는 희고 맑은 손톱, 저 어여쁜 손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을 추리라 생각하며 물끄러미 볼 때에 복스럽게 부드러운 손을 가진 그가 퍽 행복스러워 보인다. 깔끔한 성질을 설명하는 듯한 조금 파리한 듯한 그 턱에서 귀 밑까지의 티없는 맑은 살과 보기에도 서늘한 적삼 동정에 싸여 희고 맑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가슴 위 살을 부러운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영식이는 취하고 취하여 정신 잃은 사람 같았다.
 
60
전차는 어느덧 종로에 닿았다. 한 사람도 중간에서 내리지 아니한 승객은 의논한 듯이 모두 내렸다.
 
61
허의 뒤에 10여 보쯤 떨어져 서서 불빛 불그레하고 사람 와글와글하는 야시(夜市)를 눈떠 보지도 아니하고 청년회로 들어갔다 ──. 허는 악사석(樂師席)에 영식이는 일등석 중에 앞턱 가깝게 앉았다.
 
62
아홉 시나 가까워서 개회는 되었다. 순서는 진행되어 간다.
 
63
허의 피아노 독주도 무사히 마치고 밤이 깊어서 폐회되었다. 막혔던 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군중 속에 끼여 나온 영식이는 전찻길 앞 버드나무 밑에 서서 허의 나오기를 기다려 올 때와 같이 10여 보쯤 떨어져서 걸어 역시 만원되어 복잡한 전차를 타고(그러나 이번에는 간신이 자리를 얻어 앉아서) 새문 밖에서 내려서 모화관까지 가기는 동행하게 되리라. 동행을 하게 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리라는 결정도 나지 못해서 전차는 종점에 닿았다. 우둥우둥 일어서서 좁은 문으로 차례차례 내릴 적에 영식이는 의외에 형(사촌형)을 만났다. 한차에 타고 오면서도 승객이 많아서 몰랐던 것이다.
 
64
“어디 갔다 오세요.”
 
65
“배오개 좀 다녀온다. 구경갔다 오니/”
 
66
“아 ── 니요.”
 
67
하며 둘이 전차에서 내렸을 때에는 허는 주춤주춤하다가 벌써 7,8보쯤 간다. 누구 만난 줄로 알았겠지…… 별로 하는 이야기도 없이 갑갑해 하는 생각으로 형보다 앞서지 못하고 가면서 돌다리에서 꺽이기까지 흰 적삼, 검은 치마의 뒷모양을 희미하게 보면서 걸었다. 그가 꺽인 넓은 골목을 형과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들어보았으나 그는 벌써 보이지 않고 희미한 길 끝에 천연정(天然亭)이 검게 우뚝히 보일 뿐이었다.
 
68
밤은 깊다.
 
 
69
〈3〉
 
70
보름쯤 지났다. 편지가 네 번이나 오고가고 삼복으로 기어가는 여름날과 함께 둘의 사이는 나날이 뜨거워져서 거의 백열에 이르렀다. 영식의 허를 죽도록 사모하는 정은 자칫하면 제 힘으로 제어치 못할 인간 본능의 불길에 탈 듯 탈 듯하다. 그러나 영식이는 어디까지든지 연애의 신성을 믿었다. 그 신성을 존중하였다.
 
 
71
이 곳 저 곳에 청년회가 일어나고 교회마다도 청년회가 신성(新成) 혹은 부흥되어 올여름에는 변(變)으로 강연회와 음악회가 많다 ──. 오늘도 어느 엡웟 청년회 주최의 음악회가 종로 청년 회관에 있어서 음악회라면 빠지는 일 없는(서로 알게 된 후부터 더욱) 허와 영식이는 음악회를 보고 누르끼레한 시계 비치는 경찰서 앞을 전후하여 걸어 전차에 올라 앉았다. 허의 맞은쪽 줄에 앉았는 학생 몇 사람과 순경 두 사람이 시선을(허 외에도 트레머리 여자가 두 사람이나 있었건마는) 허에게로만 쏟는다. 영식이는 알지 못할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 세인(世人)이 못 갖는 귀진품(貴眞品)의 소유자 같은 기분으로 ──. 여러 가지 사람의 여러 가지 심중을 태운 전차는 반도 신문사 앞을 지나 야주개(당주동)를 지난다. 영식이는 또 이런 일을 생각한다.
 
72
‘오늘도 으레 종점까지 아니 가고 새문턱에서 내리리라. 그래서 그와 나는 성 밑 컴컴한 길로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며 가리라. 행인도 없는 길로……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나……. 오오 내가 그 이야기를 할까. 그가 말을 먼저 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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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틈엔지 차는 흥화문 앞을 지나 새문턱에 닿았다. 차장이 말리는 것을 모른 체하고 영식이는 뒤로 내렸다. 사람 없는 적적한 길에 내리자 차는 다시 잉 ─ 소리를 내면서 닫는다. 보니까 허는 벌써 앞으로 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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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길로 가게 될 때에는 영식이가 ‘이 길은 몹시 컴컴합니다.’ 하면 허는 ‘좀 컴컴은 해도…….’ 하면서 웃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아무 말도 없이 허가 성 밑 비탈길로 올라가고 영식이는 보호자같이 그 뒤를 따라 올라간다. 전당국(典當局) 대문 전등을 지나서면 성 밑의 길은 퍽 캄캄하였다. 그 캄캄한 곳을 걸어가게 되자 둘 사이의 간격은 퍽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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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붉은 옷 입고 키 큰 서양 부인의 피아노 독주는 퍽 재미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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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 캄캄한 앞만 보고 가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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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 좋더군요. 그러나 오늘 나는 맨 나중에 경성 악대의 조선 고가(朝鮮古歌)가 좋더군요. 양악(洋樂)으로는 처음 듣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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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좋긴 해도 무슨 소린지를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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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방아타령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좋지 않아요? 방아타령이라니까 속되고 야비한 것같이는 들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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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식이가 설명처럼 말하니까 허는 역시 앞만 보고 가면서,
 
81
“조선 노래도 말이 야비하고 천해 그렇지, 곡조는 좋은 게 많은 모양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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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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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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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술집 많은 곳을 지난다. 좌우에 늘어 있는 순대국집에는 지금도 흥정이 좋아 집마다 5, 6명씩의 노동자, 어떤 집에는 관청 하인 같은 양복쟁이 두엇이 술잔을 들고 떠들고 있었다. 그네는 이 길로 여자가 지나가거나 무엇이 지나가거나 술밖에는 알 바 없었다.
 
85
허와 영식이는 국 냄새 나는 그 곳을 얼른 지났다. 다시 컴컴한 속을 걷게 되었다. 어둠 속에 더욱 우중충한 독일 영사관 옆을 지날 때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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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여쭤 보려던 것이 있어요.”
 
87
하고 돌연히 꺼냈다.
 
88
“예? 무엇입니까?”
 
89
“저……요새 안 것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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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주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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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말씀입니까? 제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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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무슨…… 저 ── 제가 드린 편지나 사진이나 다 ── 될 수 있으면 도로 주시던지, 주시기 원치 않으시면 태우시던지…….”
 
93
의외의 말에 놀란 영식이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94
“왜요! 왜 그러십니까? 예?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 하십니까? 예”
 
95
허는 겉으로 보기에 퍽 태연히 걸어가면서,
 
96
“제가 편지로나 말씀으로나 하시는 말씀이 모두 진실이예요? 예? 모두 허위 아니예요?”
 
97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럼 정숙 씨께서 제게 하신 것도 모두 거짓입니까”
 
98
“아 ── 니요.”
 
99
“그럼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엇에서 허위를 발견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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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들으니까. 야, 약혼하신 이가 계시다구요.”
 
101
하면서 여전히 고개를 까닥도 아니하나 걸음은 좀 느리게 걷는다.
 
102
‘기어코 나왔구나.’
 
103
영식이는 속으로 부르짖고도,
 
104
“누가 그래요.”
 
105
하고 걸으면서 허의 얼굴과 입을 옆으로 보았다. 조금 안으로 숙인 듯한 고개, 흰 얼굴, 가는 목, 그가 연한 여성으로 일종 질투의 정에 속을 태우는 것이로구나 하고 볼 때에 더 한층 곱게 맑게 처녀답게 연하게 보인다.
 
106
“저는 그렇게 누가 그러더라는 말까지는 아니해요. 누가 그랬던지 사실은 사실이지요.”
 
107
“어느 때든지 말씀을 자세히 하려던 것입니다.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08
그러나 하는 그 뒷이야기가 허의 가장 듣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연동으로 가는 큰 길로 나갈 길은 벌써 지나쳤다. 둘이 다같이 벌써 큰 길로 나가게 된 것은 애처러워하였다.
 
109
조금도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110
“이야기를 마저 하고 가시지요.”
 
111
영식이 말에 동의를 표하는 듯의 허는 잠잠히 있었다. 두 사람은 큰 길로 나갈 길을 제쳐 놓고 그대로 가던 길로 다시 계속하여 걸었다. 벌써 그것은 방향 없는 걸음이었다. 둘은 누가 가잔 말도 한 일 없이 독립문으로 가는 길을 내어놓고 그 옆으로 놓인 조그만 길을 걸어 사람 없는 성 밑 월암(月巖)바위 위로 갔다.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멀리 감옥소 안에 높은 전등불이 보인다. 영식이는 흙 없는 바위 위에 앉았다. 허는 나중에 거기서 조금 뒤로 떨어져 조그만 소나무 옆 잔디에 앉았다.
 
112
인적도 없건만 영식이는 가는 소리로 낮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허의 앉은 곳은 높고 좀 간격이 떨어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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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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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다기 이 소리를 듣고,
 
115
“안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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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벌떡 일어나 주춤주춤 올라와 어름어름하다가 허의 옆에 엉거주춤하고 앉았다. 영식이는 재주와 수단을 다하여 허가 충분히 알아듣도록 자기 의사로 정혼한 것이 아닌 이상 어느 때까지든지 그 정혼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 것을 거듭거듭 말하고 허가 중간에 무슨 말을 낼 새도 주지 않고 뒤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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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반드시 연애로써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애는 반드시 이성의 합치라야 됩니다. 나는 정숙 씨를 이 점에서 사랑하며 나의 전부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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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몇 번이나 거듭거듭 말하였다. 엉거주춤하고 앉았던 영식이는 어느 틈엔지 편하게 털썩 앉아 있었다. 허는 만족한 모양이다. 전부를 다 ── 안 모양이다. 영식의 심중을 샅샅이, 그리고 튼튼히 믿는 모양이다.
 
119
“그렇지만 처음 그런 소리를 듣고야 어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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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을 얻은 후의 허의 말은 이러하였다.
 
121
“그러나 일면으로 보면 그런 불안, 의혹, 시기가 중간에 생겨서 그 연애는 더 강하고 더 뜨겁고 더 깊어가는 것입니다.”
 
122
허는 잠잠히 있었다. 그러나 입에는 미소를 띠고…… 두 사람은 묵묵, 밤은 적적, 한참이나 있다가 영식이는 그만 내려가리라 생각하면서 무언지 내려다보며 잠잠히 앉았는 허의 옆 자태를 본다. 무심하게…… 흰 뺨 위에 검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영식의 가슴은 점점 무심해진다.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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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밤이 깊으니까 그래도 산들산들한 것 같아요.”
 
124
“왜 추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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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때아닌 소리를 물으며 영식이는 전신이 오싹하고 전기에 찔리듯 찌르르함을 느꼈다.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친다. 저의 바른손은 늘 부러워하던 통통하고도 갸름한 피아노 잘 타는 흰 손목을 쥐고 있었다. 웬일인지 허는 손을 잡힌 채로 고개만 외면을 하고 가만히 있었다. 보드럽고 따뜻한 그 손목으로서 옮아 오는 따스 ── 한 기운을 느낄 때에 그의 머리는 다만 황홀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왼손을 가져다 쥐고 있는 손을 어루만졌다. 뛰던 가슴은 조금 쉰 듯하다. 그 손을 놀 마음은 물론 지금도 없다. 그러나 제 낯으로나 본능으로나 그대로 쥐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벌써 본능이니 무엇이니 알지 못하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내어 버려 두는 그 손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조금 바싹 다가앉으며 바른손으로 그의 뒤를 뻗어 그의 ○○○○를 ○○○○다. 그는 역시 ○○○다. 가슴은 도수 없이 뛸 때로 뛰고 머리와 얼굴이 화끈화끈한다. 그는 그대로 한참이나 가만히 앉았다. 몸이 무엇에 눌린 것처럼 덥다. 그는 바삭바삭하는 검은 머리가 자기 턱에 간지럽게 닿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미처 그의 더운 가슴이 벌럭벌럭 뛰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벌써 본능에 정복되고 말았다. 그는 벌써 연애니 신성이니 인생이니 우주니 알 바가 없었다. 머리가 어디 붙었는지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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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 손을 길게 뻗어 그의 ○○○○를 ○○다. 아무○○도 아니한다. 본능과 본능이 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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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 간다. 바위도 자고 소나무도 자고 세상이 모두 자는데 이 밤의 비밀을 알기는 오직 오직 창공에 졸린 듯이 깜박이는 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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