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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정조(貞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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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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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정조(貞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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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가의 생리를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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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보데를 따라 비평의 기능과 형태를 자연발생적 비평, 직업적 비평, 예술가의 비평 등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는 높은 취미는 본시부터 나에겐 있지 아니하다. 그런 까닭에 티보데의 이른바 예술가의 비평, 다시 말하면 작가의 비평을 표방하여 전문적인 비평가의 생리나 윤리나를 질문코자 이러한 글을 초(草)해 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언젠가 여럿이 모여서 잡담하는 석상에서 박태원 군이 작가란 본시 악덕가란 말을 해 오다가 ‘남천은 이중 악덕가’란 말을 하였고, 누군가는 나를 가리켜 ‘검술로 이를테면 이도류(二刀流)’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만만 해 두고 말았으면 괜찮았겠는데 박태원 군이 설명을 붙여서 ‘남천은 남의 작품을 디리 갈길 때면 비평가의 입장, 제작품 욕한 놈 반격할 때엔 작가의 입장.’ 이래서 결국 이중 악덕가요 이도류라는 말의 내용이 명백해졌다. 나도 웃었고 다른 분들도 웃었는데, 아마 지금쯤은 모두 다 이 때의 일을 잊어 버렸을는지도 모르겠다. 비평에 붓을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이 제 작품을 그릇되게 보아도 속으로는 어찌 생각하였든 글로 써서 반박을 하거나 논쟁을 제기치 않는 작가나 시인은 우리 문단에도 대단히 많다. 은연중에 이것은 하나의 미덕이나 풍속으로 되어 버린 것 같다. 정지용 군은 스스로 토론이나 시평을 쓰지 않는 것을 하나의 자랑으로 하고 있다. 또 무슨 생각 때문인진 몰라도, 월평도 잘하고 소설 문학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비평을 쓰는 임화 군도 제 전문 부문인 시론이나 시평엔 좀처럼 붓을 들지 않는다. 최재서 군은 제 구미에 당기지 않는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극력으로 피한다. 악평을 하여 작가들에게 미움(?)을 살 것을 싫어하는 때문이라면 지나치게 피상을 핥는 말이고 결국은 최군의 취미나 기호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인데, 어쨌든 군은 월평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리고 범연(泛然)한 대로 말하자면 최군은 소설보다도 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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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그대로 성미나 취미나로 돌려버릴 수 있다면 결국 내가 남의 작품을 비평도 하고 또 내 작품에 대하여 나와 의견을 달리 하는 비평을 당할 때엔 반박문으로 공격도 하고 또 틈 있을 때마다 주장이나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도 말하자면 내 성벽으로 돌려 보냄이 당연하겠으나 나의 지론은 반드시 그런 것에 만족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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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이태준, 기타 여러분들이 비평이나 평론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라든가, 시인 임화 군이 시론과 시평에 등한하다느니보다는 오히려 전연 손을 대지 않는 까닭, 혹은 최재서 군이 월평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 같은 건 종차로 서서히 들어보아야 알 일이지만 내가 남의 작품을 악평도 몹시 하고 또 내 작품에 대하여 주장이나 고백이 나를 시시로 되풀이하는 데는 남이야 이도류라든 이중 악덕이라든, 내깐으론 반드시 성벽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일정한 지론이 있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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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론이란 별것이 아니다. 창작 논쟁엔 작가가 참여함이 필요하다는 오래전부터의 전통이 나에게 남아 있는 때문이고, 또 문화인의 자격으로서 문화 사상 전반에 대하여 충분한 관심과 적극적인 정신적(挺身的) 태도를 취함이 떳떳하다는 생각과, 작가란 본래 비평가만 못지 않게 분석의 정신과 비판의 정신을 날카롭게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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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주장이나 신념, 명확한 모랄의 탐색 없이,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작가가 창작에 종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주장이나 그가 찾아서 제것으로 하려는 모랄이나가 반드시 정확하다든가, 또 이념이 정당하다고 하여도 그의 형상화의 방향이 반드시 가장 바른 길이라는 걸 누가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문화 예술이 프린시플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상실하고 있는 20세기적 정신적 위기의 시대에 있어서 이것을 탐색한다는 평론이나 사색이 왕왕히 광고 기구처럼 추상의 허공에서만 떠돌아다니고 좀처럼 현실 - 문학적 현실 위에 발을 붙이려고 하지 않을 때에 작가는 손을 결코 이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 간혹 가는 길 오는 길에 구두 코숭이로 돌맹이를 걷어차 듯하는 문예 비평 앞에 제 작품을 고스란히 제공한 채로 만족해 버리란 법은 더욱 없을 일이 아닌가. 이것은 반드시 쥐가 제 새끼를 사랑하는 것 같은 그런 작품애를 말함이 아니다. 작품이라든가 문학 현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정론화된 이론이라든가 또는 쇄말적 기술의 인상적 점묘라든가 하는 저기류(低氣流)가 횡행하는 시대이다. 한다는 소리가 이 즈음 문단은 침체했다느니 작가의 업적은 보잘 것이 없다느니! 그래 대체 평론가들의 쓰는 글이란 작년 1년을 두고 어느 한 편을 들어 제법 업적 운운이라 말할 것이 있는가. 그런 사람들의 평론일수록 외지의 치를 고스란히 옮겨 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일정한 문학사적 지식이나 현순간의 문학적 현상에 대해서는 한 줄의 분석도 내리우지 못하는 위인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분석과 판단과 탐색의 일체를 맡겨 버릴 수는 없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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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작가의 비평이나 주장이나 고백을 티보데류로 중요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창작의 비밀과 제작상 의도와 체험의 고백을 들고서 창작 논쟁에 참가하여 비평가와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과 타방으론 추상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에 흐르기 쉬운 비평가나 평론가에 대하여 비평 정신을 요망하고 일정한 윤리와 성실을 기대하여 문화 예술의 원리를 확립시키자는 일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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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양도류라든가 이중 악덕도 소위 풍속과 품위와 미덕에 대하여 별로히 부끄럼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이요, 더구나 그것이 작가의 정조 같은 데엔 얼씬도 못하리라는 것이 나의 소감이자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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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년간은 이러한 비평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우리의 문학적 현실에 대하여 투철한 분석을 갖지 못하는 비평이 실격을 당하는 과정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작가와 시인의 정조가 이 가운데서 비로소 정당한 시련을 받을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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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 1939년 1월)
【원문】작가의 정조(貞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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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 조선문학 [출처]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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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