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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세 노승의 미인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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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신채호
신채호의 유고로 1960년대 북한에서 발굴되어 『룡과 룡의 대격전』 (1966)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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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 노승의 미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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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물에 말을 씻고 백두산 돌에 칼을 갈아 적군을 토평하리라’는 호기로운 노래를 부르던 남이 장군은 그 아내 권씨가 얼굴과 자태만 절대 미인일 뿐더러 또한 장군에게 지지 안 할 총명과 지혜를 가진 부인이라 남이 장군이 매우 사랑하였다. 장군이 어제는 이웃의 동무 두 사람과 함께 서울 동대문 밖 호국사란 절에 놀러 나아가 이야기가 자기의 아내 자랑에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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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그 외양만 사랑할 만할 뿐 아니라 그 속마음까지도 철석같아 참 믿을 만한 여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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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랑하니 그 두 동무도 장군과 같은 미인의 아내를 두었던지 덩달아 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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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도 남만 못한 여자는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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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랑하였다. 그리하여 내 아내가 나으니, 네 아내가 나으니, 내 아내가 믿을 만하니, 네 아내가 믿을 만하니 하며 한창 말다툼이 되는데, 머리 깎기에 게을러 눈빛 같은 머리털이 더펄더펄하게 두 귀를 덮은 늙은 중이 그 곁에서 듣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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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잘 나면 역적질을 하고, 여자가 어여쁘면 서방질을 합니다. 서방들은 어여쁜 아내를 믿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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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깔깔 웃는다. 그 중은 나이 몇인지 모르나 중으로 그 절에 와서 60여 년을 지냈으니, 적어도 백 살은 되었겠다고 하는 늙은 중이라. 그의 귀와 눈은 소년같이 밝으며 앉으면 나미타불이나 찾으며, 만법개공 의 진리를 깨달았노라고 제가 제 이름을 오공화상(梧空和尙)이라고 지은 중이라. 그러나 중을 천대하는 시절에 아무리 늙은 중일지라도 이같이 남의 말끝에 토(吐)다는 당돌한 중을 누가 용서하리요? 일행 세 사람이 일제히 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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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네의 말끝에 중놈이 무슨 참견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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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주먹을 들어 치려 한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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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노승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마는 서방님네의 말을 듣다가 지난 일이 감촉되어 죄 짓는지를 모르고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시면 노승이 미인의 아내 까닭에 중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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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은 서걱서걱한 호반의 자제라,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달래고 노승의 언권(言權)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제 신세를 진술하는 끝에 역사상에 빠진 송도 말년의 조선 몽고 중국 세 민족의 이목을 놀라게 하던 대사건이 노승의 입으로 다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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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이 중 되기 이전에는 전답도 많고 다른 재산도 상당하게 가졌던 고려 때 부귀가의 아들이었습니다. 17세에 송도에 유명한 재상 황씨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놈이 제 계집을 자랑한다 하니, 노승도 어리석어 그런 줄 모르나 아무커니 노승의 눈에는 그 뉘도 그때 노승의 아내이던 황씨 같은 미인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얼굴만 반반한 계집이면 미인이라 합디다마는 황씨는 이마 머리끝부터 발꿈치까지 미인 아닌 곳이 없었습니다. 그 같은 미인의 아내를 가졌던 노승이 왜 중이 되었겠습니까? 고려 때에는 중이 매우 존귀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승은 그 존귀를 위하여 중이 된 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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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이에 미쳐서는 한숨을 쉬고 눈물을 두어 줄 흘리더니 다시 말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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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네가 《고려사》를 보셨으면, 고려 말년에 몽고의 압제받던 사실을 아시리라. 그때에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을 먹을 뿐이 아니라 중국의 북방으로 나아가 몇 십 국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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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적병이 고려에 침범하매 처음에는 송도 군신들이 전력을 다하여 방어하였습니다. 몽고가 아무리 강하다 하나 만일 상하가 화목하여 방어를 잘하여 왔으면 나라가 안전하였을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문무당(文武黨) 싸움 끝이요, 최씨가 세도하는 판입니다. 그리하여 문신과 무신이 서로 잡아먹으려 하며 황실과 최씨가 서로 잡아먹으려 하여 마침내 서로 몽고의 세력을 끌어 자기 미운 파를 없이 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씨가 망하고 무신이 망하고 그 밖에도 망한 놈이 많습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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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가 고려를 침범한지 60년 만에 마침내 그 내란을 인하여, 고려 정치에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간섭이지 어느 무엇을 간섭하지 안한것이 없어 백성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아프고 쓰리고 부끄러워 말할 수 없는 일은 곧 여자의 약탈이었습니다. 몽고 황제가 자기의 딸 하나씩을 뽑아 우리 임금의 황후로 주고는, 그 값에 전국 여자를 1년에도 몇 십 명씩 뽑아다가 자기의 황후나 첩이나 또 그 왕공귀인의 아내나 첩을 만듭니다. 몽고 태조 성길사한(成吉思汗)이 죽을 때에, 자기의 얻은 땅이 동에서 서에 가기가, 남에서 북에 가기가 각기 한 해 길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이 하늘 아래에 육지가 접한 곳은 몽고땅 아닌 곳이 없었을 듯합니다. 고려는 나라 이름이 있었으니, 몽고 황제의 땅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하여 여자는 고려의 여자만 빼앗아 가려 하던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미인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았던 까닭 같습니다. 해마다 처녀를 뽑으러 나오는 사신이 옵니다. 고려사에도 대개가 기재되었지만, 그 사신이 나오는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놀랍니다. 말은 처녀를 뽑아 간다 하지만, 실상이야 처녀 뿐이겠습니까? 어여쁘기만 하면 남의 유부녀라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딸을 나면 숨기어 키울 뿐 아니라 사람마다 그 아내를 빼앗길까 하여 문밖에를 못 나가게 하였습니다. 여자가 내외한다 하고, 남을 보지 않는 풍속이 그때부터 났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나라의 풍속이 고래(古來)부터 그런 줄 알며, 혹은 유교의 예법이 성행하면서 여자를 규방에 가두기 시작한 줄 아나, 이는 다 사실이 아닙니다. 노승은 그때에 더욱 어여쁜 아내를 가진 까닭에 더욱 공구(恐懼)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어찌 내 아내의 얼굴을 박색으로 만들꼬? 하는 생각이 나며, 단장과 수식 같은 것을 못하게 하나 그 연연한 미색이야 변할 수 있습니까? 깊은 방에 가두고 남이 못 보게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쓸데없었습니다. 아무의 아내는 절대 미인이란 소문이 불길같이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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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재산 얼마를 팔아 금은 주옥같은 경보 등속을 만들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에는 매양 서북방과의 관계가 많아 세가(勢家) 자제들이 아이 때부터 몽고말 중국말들을 배우던 때라 노승도 중국말도 알고 몽고 말도 알므로 아무 어려운 일없이 몽고 황제의 서울인 북경까지 갔습니다. 북경에는 갔지만, 북경 몇 십만 호에 어느 집에 내 계집이 들어앉은 지 알겠습니까. 잡히어 가기는 사신에게 잡히어 갔지만, 사신이 잡아간 계집들이 황궁에 들어가 황후되는 수도 있고, 혹 후궁에 들어가 고향산천을 바라보고 눈물을 뿌리며 청춘을 그대로 보내기도 하니, 내 계집이 황궁으로나 들어가지 안 하였는가? 만일 황궁에 들어가기만 하였으면, 설령 황제의 눈이 멀어 손으로 만져 본다 할지라도 아마 황후나 황비가 되었을 터인데, 그러나 그 중의 일을 알아본즉, 당시의 황비가 고려 여자라 하나 노승의 계집은 아닙디다. 어느 귀인의 처나 첩이 되었는가 하나, 하도 많은 귀인에 어느 귀인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하여 1년 동안이나 북경에 체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잘못하다가 소문이 나면, 계집있는 곳을 알기 전에 내 목숨부터 떨어질 염려가 있어, 자주 여관을 옮기어 가며 비밀히 탐문하느라고 가져간 금은만 소비하고 계집 있는 곳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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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설화대여석(燕山雪花大如席)’이란 한 말과 같이 때는 10월 초순인데, 주먹 같은 눈이 펄펄 쏟아집니다. 노승이 여관 한 상에 누웠다가 창밖에를 내다보고, 깜짝 놀라 “아아, 저 눈이 나 올 때 오던 눈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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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벌떡 일어나서 손을 꼽아보니, 꼭 북경 간 지가 1주년이 되었더이다. 속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대문 밖으로 나아가 큰길로 향하였습니다. 길에서 어떤 남여를 탄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라면 행길에 걸어가는 여자라도 혹시 내 아내가 아닌가 하여, 세 걸음에 한 번씩 발을 멈추고 돌아보는 때인데, 하물며 남여 탄 여자겠습니까? 그리하여 남여의 유리창으로 가만가만 겨우 보았으나, 내 아내는 아닙디다. 하릴없이 한숨을 짓고 돌아서려 하는 판인데, 남여 안에 앉은 여자는 몽고말로 하인에게 남여를 내리어 놓으라 하더니, 다시 고려말로 노승을 영감님이라 부릅디다. 그 소리에 어찌 반갑던지 달려들어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누구인지 알 수 없습디다. 그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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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이 나를 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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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인사를 하나 주저주저 하고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흥 남자나 여자나 잘 먹고 잘 차리면 아주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살피어 보니, 다른 여자가 아니라 노승의 집에서 부리던 여종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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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너냐, 아주 몰라보게 되었구나?”한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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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얼굴이나 몰라보게 되었지만, 아씨는 마음까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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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뜻이 있는 말이지만, 그때에 그런 말을 새겨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종에게 황씨가 곧 당시에 황제의 충신으로 유명한 몽고 장수 차손다다의 부인이 되어 고국 생각을 잊을 만큼 된 안락에 빠지고 여종은 그 집의 비자로 또한 상당한 영화를 누리는 줄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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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여야 아씨를 만나 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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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는 만나 무엇을 하렵니까? 이 길로 곧 고국으로 돌아 가십소서. 고국으로 돌아가시지 안 하다가는 황천으로 돌아가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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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으로 돌아갈지라도 아씨를 만나 보고야 돌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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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즉, 그 여종이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더니, 당장 얼굴빛이 새파래지며 노승의 수죄를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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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들으시오! 사나이란 것이 무엇으로 사나이라 한답니까? 적국이 내 나라에 침입하면, 칼 들고 활 메고 전장에 나가서 적병을 물리치고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거든, 그의 아내는 낯에 봄빛을 띠고 나아가 맞게 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전장에 싸우다가 죽어 버리어 울긋불긋한 피두루마기 입은 송장으로 돌아오거든 그의 아내가 눈물을 뿌리며 나아가 맞게 하는 것이 사나이의 일이 아닙니까? 적국의 정복을 받아 죽도 사도 못한 몸이야 제 계집이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깊이깊이 도장 속에 가두어 놓고 그 속에서 부처의 행복을 누리라 하였으니,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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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이 그렇게 아깝거든 계집을 빼앗길 때에 당장에 칼을 빼어 계집 빼앗아 가는 놈의 목을 찌르거나, 그렇지 못하면 그 칼에 자살함이 사나이의 일이거늘 ‘인제 가면, 언제 볼까?’가련한 노래나 부르고, 그 아까운 계집을 남의 품안에 들어가도록 하였으니,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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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이 아무리 중대하지만, 네 계집 이외에 계집보다 중대한 것을 얼마나 빼앗기었느냐? 나라 안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도 찾을 줄도 모르면서 어찌 계집 찾을 줄은 아느냐?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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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을 빼앗길 때에 빼앗기지 않을 힘이 없었은즉, 계집을 잃은 뒤에 찾을 재주가 무엇이냐? 그런 지각도 없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리 타국에를 나온단 말이냐?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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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의 있는 곳을 알았다 하자. 아닌 밤에 담을 넘어 들어가 등에다 붙들 쳐 업고 도망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였으면 참 딱한 생각이다.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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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계집을 사랑하다가 더 어여쁜 계집을 보면 마음이 변하듯이, 여자도 본 서방보다 더 사나이다운 사나이를 보면 본서방을 잊는 것이다. 하물며 너는 제 계집을 빼앗긴 놈이 되고, 차손다다 장군은 남의 계집을 빼앗은 놈이 되었는데, 계집의 생각에 어떤 놈을 사나이로 보겠느냐? 그 계집을 보려고 왔으니,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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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아닌 사나이 놈이 어찌 계집은 아느냐?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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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생명을 보전하려거든 곧 이 길로 돌아나가거라. 그러나 나는 모른다. 네 마음대로 할 것이다. 나는 간다. 네가 무슨 사나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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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장 수죄를 하고는 그만 하인을 부르더니 남여에 올라앉아 갑디다. 지금에 생각하면 그때 그 여종의 말이 구구관주요 자자비점이올시다. 노승이 정신이 부족하여 낱낱이 생각이 안 납니다마는 아마 만고 문장이라도 그보다 더 용한 명작(名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저런 죽일 년이 있는가? 내 옷 입고, 내 밥 먹고, 내 집에서 자란 년이 나를 이다지 욕을 보이는구나. 분이 정바기 부터 발꿈치까지 뻗치도록 났지만, 그러나 이 경위에 빠진 까닭에 이런 욕을 당하는 판이니 무슨 회답을 하리까?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계집 찾을 생각은 이대로 날아가고 어찌하면 그 여종을 죽일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동안이오. 어찌 내 아내를 만나보나 하는 마음이 다시 불 일어나듯 하여 홀로 방안에서 거닐다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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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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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숨 쉬며 ‘나를 대면하여 그같이 욕하는 년이 의례히 차손다다 장군을 만나면 내가 왔다고 고백하겠지? 고백만 하면, 나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 모르게 잡아다 죽이겠지? 그러나 당면하여 나를 욕하였으면 그만이지, 무슨 원수가 있다고 고백까지 할까? 그러나 세상일은 몰라?’하고 공구한 마음에 행장을 풀어, 그 가운데 금은 등속을 가지고 그 밤중에 옮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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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더니 그 말이 참말입디다. 차손다다 장군의 집을 이미 안지라 황금을 주고 그 집의 문방하인을 사귀어, 차손다다 장군의 임직한 날을 타서, 깊은 밤에 그 집을 들어가 그 하인의 지도로 차손다다 장군 부인의 침방으로 향하였습니다. 혹시나 그 못된 여종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하여 걸음걸음 멈칫하며 여러 중문을 지나 부인의 침방문 앞에 가서, 지도자는 도로 나아가고, 노승이 홀로 문틈으로 들여다 본즉, 촛불은 낮같은데 복색은 다르나 얼굴이 의구한 내 아내가 그 앞에 앉아 무슨 책을 봅디다. 곧 문을 부수고 들어가 움키어 안고 싶지만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소위 전날의 내 아내이던 이때의 차손다다 장군의 부인 황씨 그 계집이 귀를 기울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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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누구이냐? 엽분이 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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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분’은 곧 그녀 종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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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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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라니 이름 없는 ‘내’가 누구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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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고려말 하는 이는 엽분이밖에 없는데, 네가 누구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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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요, 문을 좀 열으시오! 문을 열어보면 누구인지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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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익으나 생각이 아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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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 계집이 문을 엽디다. 방안에 썩 들어서면, 반가운 마음에 손목을 턱 잡았습니다. 그 계집의 마음에도 너무 뜻밖이라 처음에는 한참이나 의심하는 눈으로 보다가 나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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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것이 누구인가요? 그러나 손목을 놓으시오! 여기가 어디입니까? 영감의 살 길부터 생각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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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은 그래도 손목을 놓지 않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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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으시오, 놓으시오!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 말씀을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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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이 하릴없이 잡은 손목을 놓고, 서로 작별한 뒤에, 간절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찾아온 말을 한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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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깊은 밤에 어떻게 들어 왔습니까, 담을 넘어 들어 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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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삐 긴긴 말을 다할 수 없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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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담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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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몇 해를 같이 살았지만, 영감의 근력이 그처럼 대단한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 시키는 대로 하여야 살지,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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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목숨이 다 무엇입니까? 우리 부처가 만나보았으면 그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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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기만 하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살아야 장래를 보지요. 우선 저 협실로 들어가시오. 남의 눈에 띄면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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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은 영문을 모르고, 참으로 살 곳을 가르쳐 주는 줄로 믿고, 협실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간즉 밖으로 문을 딱 잠급디다. 의심은 나지만 그래도 설마 내 아내가 나를 죽리랴 하였습니다. 찬물 한 모금 못 먹고 갇혀 사흘을 지내니, 차손다다 장군이 출직되었습니다. 침방과 협실이 벽 한 겹을 사이로 무슨 말이던지 다 들리는데, 그 계집이 반갑게 차손다다 장군을 영접하는 꼴입디다. 받고차기로 무슨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그 계집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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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서 본부가 찾아 왔습니다. 어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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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가 왔어요. 본부가 누구란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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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를 모르시오. 고국에서 같이 살던 남편이 찾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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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따라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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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더니 그 요악한 계집년이 그만 웁디다. 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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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렇게 쫓으려면 왜 잡아왔소.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시오. 어서 죽여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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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손다다 장군이 그 꼴을 보더니 그만 그 계집의 허리를 세여 안은 꼴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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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장난의 말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너를 어디로 보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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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의 말이요? 그런 장난의 말을 하느니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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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 울며불며 하다가 다시 화락하여집디다. 노승이 협실에서 보다시피, 그 광경을 들을 때에 죽기 무서운 마음은 어디로 가고 머리 속만 화끈화끈합디다. 차손다다 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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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놈이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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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즉, 대답이 없으니 아마 손으로 협실을 가르치는 꼴인 듯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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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어떻게 하여 협실에까지 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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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즉 밤에 담을 넘어 들어 온 것을 유인하여 가둔 이야기를 합디다. 장군이 한참 그 계집의 지략을 칭찬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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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놈이 담을 넘어왔으니 힘이 장사인 것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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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칼찬 장사 몇을 부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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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힘센 도적 하나를 잡아 협실에 가두었으니 잡아다가 저 건너 빈방에 가두어라 이 따위 놈은 관가에까지 알릴 것 업다. 집에서 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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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떨어지자 협실의 채운 문을 열고 노승을 끌어다가 그 말대로 건너 빈방에 가두고 담 넘어 들어왔다는데 놀람인지 문의 위아래로 좌우로 못을 치고 쇠사슬로 얽어 놉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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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는 죽었다만 분하여 어찌 죽나, 죽음이 분한 것이 아니라 그 계집을 살려놓고 내가 죽나. 협실에서 건넌방으로 이수되어 홀로 앉아 겨울에 짧은 낮을 기나긴 여름날 같이 보내고 밤을 당하였는데, 침방으로부터 연놈의 웃는 소리, 이야기하는 소리, 하인 부르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귀창으로 들어옵디다. 얼마만에야 인적이 괴괴하여 집디다. 인제는 다 자는가 보다 문을 차고 나가고 싶지만, 쇠사슬을 어찌 할 수 없고 벽을 무너뜨리고 나가려 하나 송도의 궁장 같이 두터운 벽을 어느 장사가 무너뜨리요? 방속에서 그 추운 날이지만 열이 나서 홀로 호도독거리는 판에, 문밖에 인기척소리가 나더니 모기소리만한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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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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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묻는 말이 들립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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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이냐?” 한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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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분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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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분이! 엽분이가 무슨 일로 나를 찾느냐?”한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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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나지막이 하옵소서 얼마나 배가 고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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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경에 배고픈 생각이 다 무엇이냐고 대답하였지만, 실상은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 음식이 눈에 번하게 보였습니다. 창문역으로 먹을것을 들이기에 주린 범이 무엇 받아먹듯이 낱낱이 받아 입에 털어 넣으니 살 것 같습디다. 먹고 나서는 엽분에게 무수히 치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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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전에 네가 그같이 옳은 말하는 것을 그때에는 죽으려고 눈이 뒤바뀌었던지, 너를 원수같이 보았다. 인제는 네가 사나이보담 훌륭한 여자인 줄 알겠다. 어떻게 나를 좀 나가게 하여다오. 나가기만 하면 내가 너의 은혜를 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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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요? 그런 말씀은 마옵소서. 쇤네가 본래 어려서부터 무의무탁한 년으로서 영감마님의 은덕을 입어 살아왔는데, 도리어 영감마님이 쇤네의 은혜를 갚는다 하십니까? 일전에 쇤네가 졸지에 무엄한 말씀을 하여 영감마님에게 득죄하였습니다마는 이제는 영감마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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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처님같이 보이고, 네가 하던 말을 부처님의 말보다 더 거룩하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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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쇤네가 전일에 사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말이 아니올시다. 인제도 다시 아씨를 생각하시며, 이 문을 열고 나오실 수 있다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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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문밖에 나설 수만 있다면 내가 죽더라도 그 연놈이야 죽이고 말것이다. 만일 그대로 내 목숨을 보전한다 하면 이는 참말로 네 말과 같이 사나이란 이름을 떼어놓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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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게 생각하셨습니다. 쇤네가 벌써 이 못을 빼고 쇠사슬을 끊고 자물쇠를 열 제구를 다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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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디다. 남자에 협객이 있느니 열사가 있느니 하여도 어디 엽분이 같은 이가 있겠습니까? 그 말을 마치고 집게로 못을 빼고 쇠사슬을 끊으며 열쇠로 자물쇠를 엽디다. 그리 하자니 어찌 소리가 안 나겠습니까마는 천행으로 발각이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함정에 든 범이 살아 나왔습니다. 다시 엽분이가 훔쳐 온 칼을 얻어 손에 들고 그 연놈이 껴안고 자는 침방으로 들어가니 촛불이 환합디다. 송도 당시에 어느 남자이고 검술을 모르는 남자가 없었습니다. 노승은 소년 시절에 더욱 검술로 유명하였었습니다. 검술에 익은 손으로 원수를 만났으니 서투르게 할 리가 있습니까? 칼을 잡고 바로 차손다다의 오른쪽 머리뼈 밑을 찔러 한칼에 끽소리도 못하고 죽습디다. 칼을 빼어 그 년을 죽이려 하나, 아 미인이란 것이 참 요물입디다. 차손다다가 소리도 없이 죽었지만, 그 계집이 곤하게 든 잠결에도 무엇이 감촉이 되었는지 깜짝 놀라 일어나는데, 촛불에 비추는 달 같은 얼굴 옥 같은 살빛 형용할 수 없이 기묘한 눈맵시가 사람의 정신을 홀리어
 
100
“아이고, 내 손으로 저것이야 어떻게 죽이나, 차라리 이 칼로 내가 자살하지.”
 
101
생각이 일어나며 칼 잡은 손이 사르르 풀어지는 듯 합디다. 그러나 마치 의협 여장부 엽분의 책망이 내리는 것 같이 용기가 와락 나 차마 그 칼로 그 목을 쳤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말이나 몇 마디 물어보고 죽이었다면……’하는 생각이 가끔 납니다. 한 칼에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니 눈과 달이 빛을 세워 낮 같은데, 사방이 괴괴하고 엽분이만 뜰에 섰습니다.
 
102
“너도 나를 따라 같이 가자!”
 
103
한즉
 
104
“같이는 고사하고 혼자 나아갈 수는 있습니까?”
 
105
노승은 황금 먹은 문지기가 그대로 있는 줄로 믿고,
 
106
“대문으로 나가자!”
 
107
대답하였습니다.
 
108
“문지기는 대문에 밤을 세워 지킵니다.”
 
109
하거늘 대강 그 들어올 때의 이야기를 한즉,
 
110
“아이고 영감 들어와 협실에 가두이신 그날 밤에 그 문지기들은 어디로인지 달아나고 딴 놈들이 세 놈이 나서서 지킵니다.”
 
111
그 말을 들으매, 나아갈 길이 망연한데, 엽분이는 그 집안의 모든 것을 자세히 아는 고로 어디서 사다리를 가져옵디다. 그만 사다리를 놓고 담을 넘으려다가 내가 잊은 일이 있다 하고, 다시 그 사신 방으로 들어가 손가락에 피를 찍어 벽에다 죽인 사실을 대강 적고, 그 밑에 노승의 속성명을 쓰고, 담에 올라 엽분이가 따라오기를 재촉하니, 엽분은 올라오지 않고 노승이 가진 칼을 던져주면 잠깐 쓸 일이 있다 하기에 황망 중에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칼을 던졌습니다. 칼을 받은 엽분은
 
112
“한 사람도 달아나기 어려운데, 어찌 두 사람이 같이 갑니까?”
 
113
하더니 그 칼로 목을 찔러 죽습디다.
 
 
114
7
 
 
115
엽분이를 서방님들은 이렇게 죽었다고 충비로 아시리다. 아니올시다. 충비가 다 무엇입니까? 엽분의 눈에 내 나라의 임금도 없고, 남의 나라의 황제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상정이 다 무엇입니까? 그러면 엽분이 누구를 위하여 자살하였느냐? 이것은 노승이 잘 압니다. 우선 엽분의 사적부터 대강 이야기하리이다.
 
116
노승의 아비가 고려의 평장사로 있었습니다. 평장사는 지금의 영의정입니다.
 
117
어느 해 흉년에 노승의 아비가 길에서 어떤 여자가 죽어 자빠졌는데, 어린 계집아이가 그 어미송장에 매달리어 우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어 그 송장을 묻어주고, 그 계집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며 얼굴이 절묘함으로 엽분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비가 엽분의 영리함을 사랑하여 글을 가르쳐 노승과 함께 한 등잔 밑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언제는 《국조고사》를 읽다가 엽분이가 윤관(尹瓘)을 영웅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아비가 그 이유를 물은즉, “여진(女眞)은 우리나라를 복종하는 종이요, 거란(契丹)은 우리나라를 침범하는 도적인데 도적을 치지 않고 종을 친 것이 무슨 영웅입니까?”
 
118
하고 엽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비가 매우 기특히 여기어 매양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엽분이에게 물었습니다. 물으면 서슴지 않고 당장에 판단을 내리고, 그 말대로 하면 아무리 나라의 큰일이라도 잘못된 일이 없었습니다. 몽고의 세력이 날로 침입하여 나라가 언제 망할지 모를 시기가 날로 닥치매 아비가 답답하여 엽분을 불러,
 
119
아비: 엽분아 네가 비록 어린 계집아이나 어른보다 사나이보다 초등한 계책이 많으니, 어찌하면 나라를 구하겠느냐? 말하여 보아라!
 
120
엽분: 몽고 군사가 육지에는 잘 달리나 물에는 익지 못하여 전일에도 서울을 강화로 옮기면 몽고가 다른 곳으로 다니며 노략을 할 뿐이요, 강화는 들어갈 생의를 못하였으니 강화로 서울부터 옮기어야 합니다.
 
121
아비: 강화로 서울을 옮긴다 하자. 몽고가 각처로 돌아다니며 백성을 살육할 것이 아니냐? 전국 백성이 다 죽으면 강화 한 고을로 나라 노릇을 할 수 있느냐?
 
122
엽분: 그러기에 서울을 강화로 옮기고는 싸워야 되지요.
 
123
아비: 싸우다니 과불적중(寡不敵衆)이라는데, 적은 고려로 많은 몽고를 어떻게 당하겠느냐?
 
124
엽분: 대감이 무슨 까닭에 고려는 적고 몽고는 많은 줄을 아십니까? 가령 몽고 사람 백만 명이 있다 하면, 그 백만 명이 다 몽고입니다. 우리 고려는 백만 명이 있다 하면, 그 중에 양반이 있고, 노예가 있고, 상놈이 있고, 잡색이 있어, 백만 명에 99만 명은 고려가 아니오. 겨우 1만 명이 고려입니다. 1만 명의 고려로써 백만 명의 몽고를 대적하게 됨으로 매양 ‘과불적중’의 한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근일에 각도의 장수들이 몽고와 싸울 때에 노예문서를 불사르고, 몽고만 쳐 물리치면, 노예도 양반의 동등으로 대우한다 선언하여 싸움을 이기고는 노예문서를 다시 꾸미게 됨으로 상놈과 노예들은 다 낙망하여 나라 일에 죽으려 안 함으로 싸우는 군사가 날로 저잔하니, 오늘에 전국의 노예문서를 없이 하여 노예라도 공만 이루거든 높은 벼슬을 줄 것이 제1급무입니다. 세가대족 들이 아무 재주와 공로도 없이 선대에 받은 사파땅을 가지고 그것도 부족하여 남의 땅을 빼앗아 앉아 놀며 계집과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몽고가 들어온다면 먼저 달아나니, 이 따위 귀인의 토지를 빼앗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몽고의 방어에 힘을 쓰라면 전국 백성이 춤을 추며 달려 올 것이니 이것이 제2급무입니다. 우리나라는 바다로 두른 고로 종고로 해군을 두어 태조 문성대왕도 해군 대장으로 왕이 되지 안 하였습니까? 근세에 서북의 방어에만 전력하여 해군이 아주 폐지되다시피 되었으니 참말 가석한 일입니다. 지키는 놈 열이 도적놈 하나를 못 막는다고 진공(進攻)을 피하고 방어만 하려면 방어도 못됩니다. 오늘에 연해 각지에 군함을 지어 해군을 설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의 남방으로 들어가, 송(宋) 나라의 후예를 세워 몽고를 쫓는다면, 중국 반폭이 모두 향응할 것이니 해군 부흥이 제3급무입니다. 북방의 여진이 원래 우리나라에 복종하다가 금나라가 망하여 스스로 대국이 되어 도리어 우리나라를 멸하더니, 이제 금나라가 망하여 몽고에게 복속하였으니, 그 중에 호걸들이 불복하여 매양 반기를 드니 군사로 여진을 원조하여 금나라의 이름을 회복하게 하면 여진이 또한 응종할 것이니 북방의 경영이 제4급무입니다. 몽고가 무섭다 하나 몽고의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몽고의 말이 무섭습니다. 군사 하나가 말을 10여 필씩 몰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말을 잡아먹고 남은 고기는 다른 말에 실음으로 만 리를 횡행하여도 양식을 걱정 안 하니, 이것은 쌀밥 먹는 고려 사람이 배우지 못 할 일이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평원·광야가 많음으로 말이 유린을 당하거니와 고려는 산이 많아 몽고의 말을 막기에 매우 편리하니, 먼저 노예잡색 등 명목을 폐지하며 놀며 먹는 계급을 없이 하며, 국경을 정리하여 백성에게 위신을 세운 뒤에 북방에 산성을 많이 쌓아 몽고 마병의 출몰을 막으며, 남방에 해군을 두어 중국 연해의 중요한 요새를 웅거하여 몽고의 병력을 막으면 몽고의 말도 피폐할 날이 있어 마침내 사람에게 항복할 것입니다.
 
125
아비: 오늘 조정안에 너의 말한 정책을 실행할 만한 이가 누구냐? 행할 수 없는 말이야 쓸데 있느냐?
 
126
엽분: 쇤네가 아무 무엄한 말을 할지라도 용서하신다면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127
아비: 내가 너를 사랑하는 터에 무슨 말이나 용서할 것이 아니냐?
 
128
엽분: 쇤네에게 국정을 맡기십시오.
 
129
노승의 아비가 그만 얼굴빛이 좋지 못하여지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엽분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변치 안 하여 매양 며느리를 삼으려 하였으며, 노승도 엽분이가 아내가 되었으면 하였습니다.
 
130
그러나 노승의 아비는 엽분을 항상 여개소문(女蓋蘇文)이라 이름하여 엽분이 만일 남의 집이나 나라를 맡으면 아주 흥망의 판단을 낼 계집아이라 하시며, 노승의 어미는 더욱 싫어하여 어디에서 온 뼈인지도 모르며 어찌 나의 아들과 짝을 삼으리요 하여, 기쓰고 반대하며 노승 아비의 친구들도 그 말을 듣고는 놀라서 만일 네가 엽분을 며느리를 ……(이후 중간이 누락됨)……
 
 
131
노승이 황씨를 죽인 뒤에 비록 말은 하지 안 했으나 속마음으로 “오냐 당초에 잘못이다. 엽분과 부처되었다면 내가 이 지경이 되었겠느냐? 이번에는 돌아가 문벌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은 아주 접어버리고 엽분을 정실을 삼아 데리고 살리라 하였습니다……. 엽분이도 그런 눈치를 의례히 채울 지혜가 있지만,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132
엽분은 죽을 때까지 정결한 처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조를 지키느라고 처녀로 있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내 서방될 사나이가 없구나 하고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일입니다. 그 자살한 때의 심사도 노승이 압니다.
 
133
“네가 무슨 사나이냐? 당초에 너희 정실이 되었을지라도 내가 억지로 서방이라 인정할 터인데, 이제와서 내가 너의 계실이 되겠느냐?”
 
134
하는 기괴한 심사에서 나온 사실입니다.
 
 
135
8
 
 
136
노승이 그 길로 여관으로 돌아와 문을 두드리니 여관의 하인이 문을 엽디다.
 
137
“어디를 가셨다가 며칠만에 이 밤중에 오십니까?”
 
138
하거늘
 
139
“긴급한 일이 있어 그리되었노라.”
 
140
하고 들어가 촛불을 켜고 평사에 끌어 앉아 밤을 세우고 상자 안에 넣어 둔 몇 덩이 황금을 내어 몸에 지니고 옷을 내어 갈아입고, 여관의 식비를 갚고 새벽에 나서 북경성 남문을 나오니 갈 곳이 아득합디다.
 
141
아직까지 관계없으나 얼마 안 되어 차손다다 장군의 집안에서 장군부처의 흉보를 황제에게 올릴 것이다. 그리되면 북경 성안 성외가 발끈 뛰놀 것이오. 그뿐 아니라 온 중국 안에 죄인 잡으라는 엄칙이 내릴 것이오. 고려로 나아가는 연로에는 더욱 행인의 조사가 대단할 것이니, 만일이 길로 귀국하려다가는 잡히어 죽기가 십상팔구라. 이제야 내가 살 생각이나 하겠다 하고 춥고 배는 고프나 아직 이른 아침이라 음식점에 문 연 집이 없음으로 그대로 참고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갈 길을 물어도 대답이 없습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습디다. 노승의 아비가 사신으로 중국에 들어 다닐 때에 보조화상이란 중과 친절히 지내었는데, 그 중은 대명산 대명사(大明山大明寺)의 중이오. 대명산은 북경성 북쪽편에 있는 산이라던 이야기가 생각됩디다. 그러나 북경에를 다시 들어가기 싫어, 성을 안고 돌아 동북문 부근에 이르러 음식집에 들어가 요기를 하니 엽분이가 문구멍으로 주는 떡조각 몇 쪽을 받아 먹은 외에는 사흘이나 굶은 끝이지만 음식이 음식 맛이 없고, 나무나 돌을 씹는 것 같습디다. 대명산을 물어 노정기를 만들어 가지고 한낮이 못되어 대명사에 들어가 보조화상을 물으니 죽은지가 벌써 3년이랍디다. 보조화상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며 내가 인제 죽었구나 하는 소리가 가만히 목안에서 나옵디다. 다시 어디로 더 가려 하여도 갈 힘이 없어 그만 그 절에 쓰러져서 하루 밤을 잤습니다. 저녁은 맛이 없어 변변히 못 먹었으나, 아침에는 달아날 욕심으로 억지로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다시 북경으로 향할 때 온종일 걸은 것이 겨우 대명산에서 60리 되는 고려영을 오니, 해도 넘어가려 하고 더 갈 힘도 없어 여관을 찾아 들었습니다. 여관의 문밖에는 차손다다 장군의 가해자 고려 이아모를 잡으면 금 천 량을 준다는 현상문(懸賞文)을 새파랗게 써 붙였습니다. 노승이 몽고인이라 가장하고 여관에 들어가 선박을 사먹고, 어찌하여 이 마을 이름이 고려영이냐 물은즉, 고려 개소문이 당태종과 싸우던 곳인 고로 고려영이란 이름이 전하여 왔다 합디다. 중국인은 고구려·고려를 분별없이 씁니다.
 
142
“아 옛적의 고려는 싸움하러 이곳에 왔었는데, 오늘의 고려는 도망하다가 이곳에 왔구나!”
 
143
하는 탄식이 남모르게 나옵디다. 밤을 자고 일어나 식비를 치뤄 주고 나서려니 웬 나졸(羅卒) 한 명이 들어와 치보고 내리다 보더니 벼락같이 두 손을 묶습디다. 그래서 잡히어 북경으로 향하더니 그 나졸이 홀연히 한숨을 지며, 내가 잡기는 올케 잡았다마는 쇠가 쇠를 먹는다고 내 손으로 너를 잡다니…… 하며 눈물을 흘립디다. 그러나 노승은
 
144
“오냐! 네가 누구를 꾀어 보노나.”
 
145
하고 대답을 아니 하였습니다. 중도에 가면서 생각하니 잡혀 가면 이러나 저러나 죽은 몸인즉, 어디 저놈이 어떤 놈인가 시험이나 하여 보리라하고 졸지에,
 
146
“이놈아, 이 눈먼 놈아!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왜 잡아가느냐?”
 
147
고 꾸짖었습니다.
 
148
“내가 눈이 먼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이 변하였다.”
 
149
“마음이 왜 변하였느냐?”
 
150
“내가 본래 고려 남경 사람으로 거금 15년 전에 내 나이 18살이었다. 그때에 새로 아내를 얻어 한참 금실이 화락하게 지내는데, 몽고 사신이 처녀를 뽑으러 나왔더라. 말은 처녀를 뽑는다 하지마는 남의 새로 혼인한 계집을 막 빼앗아 가더라. 나뿐 아니라 그때에 계집 빼앗긴 놈, 딸 빼앗긴 놈이 무수하였지만, 금이나 은을 주면 도로 내어줌으로 부자들은 그래도 거의 다 찾아오고 가난한 놈만 계집을 잃는다, 딸을 잃는다 하였다. 나도 그때 조금만 그 사신의 입을 씻어줄 것이 있으면, 계집을 아니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손 텅빈 놈이 할 수 있더냐? 그만 계집을 잃었다. 그때부터는 이 세상에는 금이 있어야 사는 세상이로구나 생각하고, 무슨 악한 일이라도 금만 얻을 수 있으면 하리라 작정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본래 약한 놈이라 금 생길 기회도 많이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잃어버렸다. 요 사이에 와서는 마음이 아주 단단히 변하여 너를 잡았다.”
 
151
노승이 그 말을 들으니, 대개 꾸미는 말이 아니요, 또는 양심도 아직 남아 있는 놈 갔습디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로 그러면
 
152
“네가 나를 어찌 죄인으로 알고 잡느냐?”
 
153
한즉 다시 한 번 놀라운 빛을 띠고 돌아보며,
 
154
“네가 몽고말을 좀 하지만 걸음걸이가 고려놈이요, 얼굴이 고려놈이요, 네가 옷에 피묻은 자리는 없지만, 비린내 나는 것이 이상하다. 그래서 잡았다.”
 
155
“내가 참말 고려놈이요, 또 차손다다 장군의 부처를 죽인 죄인이다마는 죽인 까닭을 네가 아느냐?”
 
156
“듣지는 못하였다마는 필연코 장군의 처가 어여쁜 까닭에 통간하려다가 안 되므로 그 부처를 다 죽인 것이다.”
 
157
쇠약한 고려 사람으로 강성한 몽고 사람 가운데 서슬이 푸른 장군의 처를 통간하려 하였다는 말을 들으매, 너무도 기가 찹디다.
 
158
그러나 그런 이유를 캐어 변명할 것이 없어 곧 그 경과한 사실을 대강 이야기하였더니, 그 나졸이 그만 난배를 하며,
 
159
“어서 달아나십시오! 소인이 그대로 죽을지언정 어찌 서방님 같은 이를 잡아가겠습니까?”노승이 다시 바싹 대어들었습니다.
 
160
“네가 나를 살려다오! 내가 생면강산에 어디로 달아나느냐? 네가 나를 살리지 안 하면, 나는 죽는 놈이다.”
 
161
나졸이 머리를 긁더니
 
162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요, 방이야 한 방에 누워 자지만 먹을 것이 없습니다.”
 
163
“너 먹는 것은 있겠지. 밥 한 그릇이면 둘이 나누어 먹자꾸나.”
 
164
“아이고, 내가 집에서 먹을 것이 있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럼니까? 나는 영문에 입직하여 있고, 집에는 여편네 혼자 있습니다.”
 
165
“네가 금방 아내를 잃었다더니 언제 찾았느냐?”
 
166
“찾은 것이 아니라 여기 와서 또 장가를 들었습니다.”
 
167
“야, 그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 나를 숨기어 다오. 내 가진 황금이 나 잡으라는 현상금 갑절은 된다. 그것만 가졌으면 그대로 우선 살아가지 않겠느냐?”
 
168
“갑절이라니 2천 량이 있어요?”
 
169
“그렇다!”
 
170
대답하니 나졸이 크게 기뻐 다시 제 집 있다는 고려영으로 향할 때 나졸의 말이
 
171
“우선 거짓 내 아우 노릇을 하십시오. 그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172
“아우랄 것 없이 참 아우가 되기를 원합니다.”
 
173
하고 그 집에 당도하니 곧 고려영 남쪽 한가의 움막집입디다.
 
174
“네가 나졸로 움막을 지니고 있으니, 악한 짓은 아니 한 사람인가 보다.” 속으로 말하였습니다. 나졸이 제 여편네에게
 
175
“내 아우를 잃은 지 10년 만에 만났소.”
 
176
하며 들어갑디다. 그래서 노승은 그 여편네를 아주머니라 부르며, 그 여편네는 노승을 시동생으로 알았습니다. 절하고 본 뒤에 노승이 허리에 띤 황금 2천여 량 가량을 풀어 나졸에게 주며, 형님이 이것을 두고 쓰시오 한즉
 
177
“아무리 아우의 것이라도 내가 어찌 남의 것을 써? 우선 먹을 것이나 내어 놓지!”
 
178
합디다.
 
179
“이제는 그것이 형님의 것이요.”
 
180
하니까 나졸이 기쁜 중에 놀라는 모양입디다. 그리하여 움막 속에서 저녁을 썩 잘하여 먹었습니다. 차차 알아보니 나졸도 저의 조부 때까지는 상당하게 살아 왔으며, 저의 처음 결혼할 때까지도 구차하지 안 하였더니, 그 결혼한 아내를 사신에게 빼앗길 때에 그 재산을 다 팔아 아내를 찾으려고도 하여 보았으나, 그때에 아내나 딸을 찾는 사람은 적어도 만냥이나 가져야 되는데, 나졸의 재산은 그 십분의 일도 부족한지라, 계집은 계집대로 빼앗기고 재산은 재산대로 없어져서 살길이 없으므로 아내나 찾아보겠다고 북경으로 와서 돌아다닌지 10년이지만, 아내의 종적은 묘연하여 찾지 못하였으나 그동안 북경 말은 아주 능란하게 되어 고려인으로 아는 사람이 없으며, 나졸된지가 다섯 해요, 그 여자는 2년 전 흉년에 빌어먹으러 나선 하남 사람의 딸을 자기 수중에 있는 50량 은을 톡톡 털어 주고 산 것이라는데, 그러나 그 얼굴이 중등은 되겠다 하겠습디다. 그 여자도 제 남편을 중국 사람으로만 아는 모양입디다. 그 이튿날은 나졸이 번을 들어가는 날이라.
 
181
이제 아우의 돈으로라도 이 집을 좀 옮겨야 할 터이나 내가 들어가면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는 일이니, 나의 번 나오기까지 참아라, 형편이 하릴없이 그 동안은 수숙이 한 방에 있어야 할 터이니 거북하게 생각 마시며, 낮에는 누가 찾아오기가 쉬우니 앓는다고 핑계하고 이불을 막 쓰고 누웠으라 합디다. 그 애련한 진정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흐르게 합디다. 그래서 그 나졸은 번을 들어가고, 노승이 남의 젊은 여자와 위아래 목을 갈라 열흘을 한 방에서 잤습니다.
 
 
182
9
 
 
183
열흘만에 나졸이 나오니 들을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디다. 북경 성내 성외에 관리와 몽고인의 집을 빼놓고는 그 박에는 수 (이하 중단됨)
【원문】백세 노승의 미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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