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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한문(國漢文)의 경중(輕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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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3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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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漢文[국한문]의 輕重[경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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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의 국문(國文)이라 하면 이는 일반 한국인이 다 자기 나라 문(文)으로 인정할 것이며, 이왕의 한문(漢文)이라 하면 이 또한 일반 한국인이 다 타국의 문으로 인정할 것이니, 그 문자의 간결하고 번거로움도 논하지 않고 그 학습의 쉽고 어려움도 묻지 않고 다만 ‘국문’ 두 자만 들어 길에서 불러 말하기를, 이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하면, 비록 어린아이라도 모두 국문이 중요하다 국문이 중요하다 할 것이거늘, 이제 「국한문의 경중」이라 제하고 한 의론을 하면 혹시 췌론(贅論)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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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경중이 이와 같이 뚜렷이 차이가 나는 국한문을 이제 몇몇 어리석은 사람이 그릇된 견해와 망녕된 집착으로 터럭이 태산보다 크다 하며 한 물방울이 황하보다 넓다 하여 혹 연설회장에 청중이 운집한 데서 국문은 한문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크게 부르짖는 자도 있으며, 혹 잡지 문원(文苑)에 “천하사를 오직 한문을 읽은 자가 능히 짓는다”고 방언(放言)한 자도 있으며, 심한 자는 국문으로 노예를 삼으며 한문으로 주인을 삼고, 국문으로 신하를 삼고 한문으로 임금을 삼아 하루 빨리 국문을 폐지하고 한문만 숭상하려는 의사이니, 러시아인이 폴란드인을 멸망하고 폴란드어를 금지하고 외국어를 써서 점점 그 고국사상을 점차 줄이었다더니, 금일 한국인은 자기 국문을 스스로 금하고 외국문을 쓰고자 하니, 기자가 이에 논할 필요가 없는 국한문의 경중을 부득이 한번 논할 경우에 처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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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가 말하되 “내가 어찌 말하기를 좋아하리요. 부득이해서 말한 것뿐이다” 하였으니, 아아, 기자가 역시 어찌 말하기 좋아하는 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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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국문도 또한 문(文)이며 한문도 또한 문이거늘, 반드시 국문이 중요하고 한문이 가볍다 함은 무엇 때문인가. 내국문(內國文)인 까닭으로 국문을 중요하게 여기라 함이며, 외국문(外國文)인 까닭으로 한문을 가볍게 여기라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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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비록 내국문(內國文)이나 고승 요의(了義)가 창조한 이후 지금까지 천년에 다만 규방(閨房) 안에 있었으며, 하등사회에 행하여 불경(不經)한 언문책(諺文冊)과 음탕한 가사(歌詞)로 사람의 심덕(心德)을 어지럽혔고, 저는 비록 외국문이나 몇천년래로 학사·대부가 떠받들어 외우며 군신 상하가 지키고 받들어 이로써 치민(治民)에 쓰며 이로써 행정에 쓰며 이로써 윤기를 밝히고 도덕을 강론한 까닭으로 이것은 언문(諺文)이라 부르고 저것은 진서(眞書)라 일컬었거늘, 이제 갑자기 경중을 전도시킴은 무엇 때문인가. 한문은 폐해가 많고 언문은 폐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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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화약(火藥)이로되 정지(鄭地)는 사용하여 왜함 수백 척을 섬멸하여 잘싸운 이름을 얻었는데, 송악(松嶽) 어린아이는 새잡이에 쓸 뿐이며, 같은 포목이로되 임경업(林慶業)은 적병의 안목을 현혹시켜 한 성(城)을 보전하였는데, 의주(義州) 부녀는 겨울을 지내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철갑선의 신제(神製)도 원균(元均)을 주면 반드시 적을 이긴다고 할 수 없으며, 진천뢰(震天雷)의 좋은 대포도 김경징(金慶徵)을 주면 스스로 지킬 수 없으니, 무릇 석가의 정법이 두 요체(要諦)가 없으련만 남종(南宗)·북종(北宗)이 전하는 바가 각기 다르고, 기독교 성경이 두 본(本)이 없으련만 구교·신교가 표방하는 바가 각기 다르니, 그런즉 단군(檀君)이 재위하시고 기자(箕子)가 재상이 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군사권을 장악하며, 서희(徐熙)가 외교를 맡으며, 최충(崔沖)이 교육을 주로 하며, 전재(錢財)를 관리하는 자가 최영(崔瑩)의 청렴으로 강감찬(姜邯贊)의 밝음을 겸하며, 형법을 맡은 자는 유검필(庾黔弼)의 삼감으로 정약용(丁若鏞)의 식견을 갖추고, 또다시 까브리엘·그래드스톤·칸트·몽테스키외 등을 고용하여 고문을 갖춘 연후에 한 나라 정법(政法)을 정돈하더라도 몇백년 후 나무가 썩어 곤충이 생김을 알기 어렵거늘, 오늘날 한문의 말류지폐(末流之弊)로 말미암아 한문을 이와 같이 경시함은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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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記者)가 좌우 눈썹을 한번 찡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일러 말하기를, 한국인의 식견이 이와 같으니 의당 주객을 분간 못하고 상하를 거꾸로 놓고 한국인의 손에서 나와서 한국인의 눈에만 보이려는 소식지가 거의 전 부분이 순한문으로 저술되어 나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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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기자의 논한 바 한문의 폐해라 함은 그 뜻이 어려워 매우 읽기가 어려움을 비난함도 아니며, 그 동습지리(童習支離)를 탄식함도 아니다. 대개 그 한번 출입(出入)과 일주일노(一主一奴)의 중간에 다대한 폐해가 있다 할 수 있으니, 무릇 옛날 삼국시대에 순박함이 흩어지지 않고 사람의 지식이 미개(未開)하고 봉건(封建)이 미파(未破)하여 인민의 힘이 단결되지 않았으되 수(隋)·당(唐)의 많은 군사를 물리치고, 왜(倭)·말갈(靺鞨)의 여러 차례 침략을 물리쳐 혁혁히 나라를 빛내 외국에 떨쳐 빛나더니, 고려조 이래로 삼한이 통일되고 문운(文運)이 크게 열린 후 국력의 강성 장대함이 고대보다 매우 떨어지며 인민의 용감함이 고대보다 매우 못하여 몽고가 침략하자 한번 머리 숙이고 만주가 침략하자 두번 머리 숙임은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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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삼국 이전에는 한문(漢文)이 성행하지 못하여 전국 인심이 자기 나라만 떠받들며 자기 나라만 사랑하고, 중국이 비록 크나 언제나 우리의 원수로 보아 을지문덕의 휘하 한 종일지라도 수나라 천자를 뱀이나 전갈같이 보며, 연개소문의 부엌 밥짓는 여자도 당나라 황제를 개돼지같이 욕하여 남녀노소가 모두 애국혈성(愛國血誠)으로 천지간에 우뚝 서서 나라를 위하여 노래하며 나라를 위하여 울며 나라를 위하여 죽되, 변경에서 봉화 연기만 한번 오르면 나무꾼·목동도 적개심을 가득 품고 전진(戰陣)에 다다르는 까닭으로 큰 도적을 극복하여 명예스런 기념비를 청천강에 세우고, 검은 꽃과 흰 깃으로 만고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길이 전한 바이거니와 삼국 이후로는 거의 집집마다 한문을 쌓고 사람마다 한문을 읽어 한관위의(漢官威儀)로 국수(國粹)를 매몰하며, 한토(漢土) 풍속과 교화에 국혼(國魂)을 수송하여 말할 때마다 반드시 대송(大宋)·대명(大明)·대청(大淸)이라 하고, 당당한 대조선(大朝鮮)을 타국의 한 부용(附庸) 속국으로 도리어 인정하므로 노예 근성이 충만하여 노예의 경지에 길이 떨어졌거늘 오늘날에 있어서도 또한 국문을 한문보다 경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역시 한국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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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의 언어로 자기 나라의 문자를 편성하고 자기 나라의 문자로 자기 나라의 역사와 지지(地誌)를 편찬하여 전국 인민이 받들어 읽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외어야 그 고유한 나라 정신을 보존 유지하며 순미(純美)한 애국심을 북돋아 발휘할 것이거늘, 오늘날 한국인을 보건대, 당요(唐堯)·우순(虞舜)을 단군(檀君)·부루(扶婁)보다 더 신앙하며, 은(殷)나라 탕(湯) 임금, 주(周)나라 무왕(武王)을 박혁거세·동명왕보다 더 칭송하여 노래하며, 한 무제·당 태종은 천하의 큰 영웅으로 인정하되 광개토왕·태종무열왕은 조그만 나라의 작은 야만의 호걸로 보며, 송 태조·명 태조는 만고의 성천자로 반들되 온조왕·왕건태조는 한때 소아배(小兒輩)로 웃으며, 한신(韓信)·팽월(彭越)·은 초동의 노래, 여항의 노래에도 두루 전하되 양만춘(楊萬春)·최춘명(崔椿命)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며, 소하(蕭何)·조참(曹參)은 규방이나 아이들 입에서도 어지럽게 외어지되 황희(黃喜)·허조(許稠)는 어느 시대 인물인지 깜깜히 듣지 못하고 적성(積城)의 한 조그만 고개에 있는 배반한 장군의 죽마고적(竹馬故蹟:積城縣[적성현]에 薛馬馳[설마치]라 일컫는 한 小峴[소현]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를 배반하고 唐[당]나라에 入仕[입사]하던 薛仁貴[설인귀]의 아이 때 말달리던 곳이라 일컫는다 ― 原註[원주])을 다투어 말하되 평양 석다산(石多山:乙支文德[을지문덕]이 태어난 곳 ― 原註[원주])은 고비(古碑)가 영락(零落)하고, 부여 한 옛강은 적국 장수의 조룡가화(釣龍佳話:唐[당]나라 蘇定方[소정방]이 백제를 쳐들어왔다가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나 강을 건너지 못하므로, 이는 강에 있는 龍[용]이 護國[호국]이라 하여 장사를 모집하여 백마를 낚싯밥으로 용을 낚았다고 일컬었다 ― 原註[원주])를 전하되 고려 구련성(九連城:尹瓘[윤관]이 女眞[여진]을 정복하고 이 성을 쌓았다 ― 原註[원주])은 묵은 풀이 황량하여 자기네 선조는 잃어버린 곳에 내버려두고 타인 보첩(譜牒)만 가슴속에 천 권씩이나 갈무리해 둔 격이니 부끄럽고 우스운 것이 이보다 심할 것이며, 초한(楚漢) 전장이 공경대부의 집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뇌수(腦髓)가 굳지 않은 6, 7세 소동자가 종일 영양(榮陽)·광무(廣武)·수수(睢水)·팽성(彭城) 등에 이가 시도록 외고, 우공치수(禹貢治水)가 네 삶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총명이 이미 감쇄한 7,80세 늙은 경전 공부하는 이가 몇년 동안 기주(冀州)·형주(荊州)·청주(靑州)·예주(豫州)·도산도수(導山導水) 등에 머리가 짧아지니, 애달프다. 『황명일통지(皇明一統志)』를 돌돌 외움이 낳고 자라고 한 본군(本郡)의 읍지(邑誌)를 한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며, 봉황루·악양루(岳陽樓)가 비록 좋으나 자기 정자가 아니거늘 시인·묵객의 몽상이 헛된 노력이고, 태산(泰山)·장안(長安)·낙양(洛陽)이 비록 경치 좋은 곳이나 우리 집 전원이 아니거늘 노래 부르는 아이나 기생의 구가하고 찬미함이 헛되게 깊으니, 애닯도다. 자장(子長)의 유○편(游○篇)의 글을 길게 읊음이 유사조사(游斯釣斯)한 고향의 산수를 한번 기록함만 같지 못하거늘, 부모나 조상의 빛나는 보배를 잃어버리고 이웃집 문밖의 거지아이를 구하여 만들었으니 후회스럽고 한탄스러움이 이보다 무엇이 더 많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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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이에 그 원인을 추구하면 한국의 국문이 늦게 나왔기에 그 세력을 한문을 빼앗기어 일반 학사(學士)들이 한문으로 국문을 대신하며 중국사로 국사를 대신하여 국가사상을 박멸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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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럽도다. 고려 태조가 말씀하시되, 우리나라 풍기(風氣)가 중국 땅과 매우 다르니 중화 풍속을 구차히 따름이 옳지 않다 하심은 국수(國粹) 보전의 대주의이시거늘, 몇백년 용렬 치졸한 노비가 이 가사(家事)를 그르쳐 소국(小國) 2자로 스스로 비굴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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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오늘날에 앉아서 오히려 또 국문을 한문보다 경시하는 자가 있으면 역시 한국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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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08. 3. 17∼19>
【원문】국한문(國漢文)의 경중(輕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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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申采浩) [저자]
 
 
  190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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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2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