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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자의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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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
채만식
1
敗北者[패배자]의 무덤
 
 
2
오래비 경호는 어느새 고개를 넘어가고 보이지 않는다.
 
3
경순은 바람이 치일세라 겹겹이 뭉뚱그린 어린것을 벅차게 앞으로 안고 허덕지덕, 느슨해진 소복치마 뒷자락을 치렁거리면서, 고개 마루턱까지 겨우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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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라기보다도 나차막한 구릉(丘陵)이요, 경사가 완만하여 별로 험한 길이랄 것도 없다. 그런 것을, 이다지 힘이 드는고 하면, 산후라야 벌써 일곱달인 걸 여태 몸이 소성되지 않았을 리는 없고, 혹시 남편의 그 참변을 만났을 제 그때에 원기가 축가고 만 것이나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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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아무리 애석한 소년 죽음일값에, 가령 병이 들어 한 동안 신고를 하든지 했다면야 주위의 사람도 최악의 경우를, 신경의 단련이라고 할까 여유라고 할까, 아뭏든 일시에 큰 격동을 받지 않고 종용자약하게 임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이는 전연 상상도 못할 불의지변이어서, 무심코 앉았다가 별안간 당한 일이고 보니 사망(死亡) 그것에 대한 애통은 다음에 할 말이요, 먼저 심장이 받은 생리적 타격이 대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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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뿔을 바로잡다가 본즉 소가(죽은 게 아니라) 말승냥이가 되더라는 둥, 불합리의 간접교사를 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둥, 언뜻 암호문자(暗號文字)처럼 생긴 이유를 찾아가지고, 남편 종택이 제법 그때는 녹록치 않은 소장 논객으로서 어떤 잡지의 전임 필자이던 직책을 내던진 후, 집안에 칩거한 것이 작년 이월 초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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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를 그만둔 이유는 그러한 것이었으나, 그를 단행한 직접 동기는 고향의 부친에게서 온 한 장의 서신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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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마악 잡지사에 출근을 하려는 참인데 편지가 배달이 되었다. 이맛살을 잔뜩 찡그리고 읽어 내려가던 종택은 귀인성 없는 늙은이들, 죽지도 않는다고, 불측한 소리를 두런거리면서 방바닥에다 편지를 내동댕이치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그 손으로 잡지사에 사직원을 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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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의 사직이야 시일 문제인 줄 경순도 알기는 알던 터이지만, 시아버지의 편지가 그와 무슨 관련이 있을 줄은 뜻밖이라 궁금한 대로 편지를 걷어가지고 읽어보니, 강진사의 예의 한문에 토를 달아 가면서(아들이 순한문은 잘 몰라본대서 언제고 그 투다) 한 발이 넘게 달필의 붓글씨로 휘갈린 사연이 우습기도 하고 솔직하기도 하나, 결국 함축 있는 반박이었었다. ─ 너는 그것이 심히 불가한 양으로 이 애비를 책망하였음이나 진실로 그렇지 않을 연유가 있는 배로다. 하고뇨 하면, 천하의 목탁이라 칭시하는 일보 야며 너도 간여를 (日報) 하고 있는 잡지야며를 상고할진댄 신문지사(新聞之士)와 잡지지사(雜誌之士) 그를 극구 칭양하여 솔선 고무하니 의(義)임을 가히 알지로다. 우황 거세(擧世) 그를 따름이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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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 관지컨대 유의지사(有意之士)와 유산지민(有産之民)이 모름지기 숭상할 대도(大道)인지라, 내 빈재(貧財)를 나누어 흔연히 행한 바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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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써서 주는 사직원을 받아가지고 나가서, 속달등기로 부치도록 사환 계집아이를 분별시킨 후에 건넌방으로 도로 들어와 보니, 남편은 외투까지 입은 채 출입하려던 차림 그대로, 방 한가운데 가서 버얼떡 드러누워 눈을 감고 침음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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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는 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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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남편의 머리 옆으로 조용히 앉으면서,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짚어보면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진작부터도 남편이 침울하게 지내왔고, 하다가 오늘은 또 그러한 서신이야 사직원이야 해서 가뜩이나 저렇게 마음이 편안치 않아하고 하는 것을 경순은 잘 이해할 줄도 알고, 그러므로 근심도 되고 하여 자연 얼굴에 흐린 그늘이 지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것이 곤곤히 드러만 나는 애정과 명랑한 빛을 통째로 지우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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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아내를 올려다본다. 근심은 그대로 가득한 얼굴이나 금새 아내의 등이라도 다독다독 해줄 그러한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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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여 겨우 일 년 남짓하니 연애적 기분도 미처 가시지 않았을 무렵이기야 하지만, 시방 종택 자신이 정신생활의 중대한 난관을 만났고, 경순은 그의 고민을 제 살로써 충분히 느끼고 하는 절박한 시기에 처하여서도 그들의 도타운 애정은 결코 전면에 나타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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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갈아 입구 절러루 누우세예지, 여기는 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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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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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머리를 괴었던 한편 팔을 뽑아다가 이마를 뒤로 씻으면서 입을 꾸욱 다물고, 응 한다. 길쭉한 아래턱이 쑤욱 더 나오고, 널따란 이마가 씻는 대로 더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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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구우, 인전 아침 불 때예지요? 낮에두 집에 기실 테니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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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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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구, 자 요오! 옷 갈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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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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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애긴가 뭐, 응 응만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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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내가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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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푸스스 일어나 앉은 채로, 외투며 양복을 벗고, 아무렇게나 바지와 저고리를 꿰고 걸치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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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벗어 내놓는 것을 걷어다가 양복장을 열고 차례로 걸면서, 밖으로 대고 안잠이를 불러, 이 방에 군불을 지피라고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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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내키잖는 손으로 담배 하나를 피워 물더니, 아랫목 보료 위에 가서 잔뜩 쪼그리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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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양복장 문을 닫으려고 할 때다. 무엇을 까막까막 생각하느라고 건성으로 손을 놀리던 경순은 별안간 웃음을 하나 가득 달뜬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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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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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급하게 들어서다가, 그러자 남편이 하고 앉았는 양을 보고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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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 쫓겨가시나? …… 치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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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바륵 웃으면서, 제 자세를 내려다보더니 혼자서 또 고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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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바닥두 뜨듯헌데…… 그래두 안방으루 건너가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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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고개를 흔들고 경순은 보료 밑을 짚어보다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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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전에, 전에에, 우리 결혼허기 전두 말구, 또 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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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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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양행허구 싶다구 그리셨지요? 불란서 같은 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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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 란서? ……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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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저 거시키 누구냐, 뿔룸……? 응 뿔룸이야, 뿔룸 내각이 생기구 그럴 땐데, 그날 일요일날 내가 하숙으루 찾아가니깐, 사진서껀 나구 헌 신문을 읽으시다가 불란서나 한번 휘익 다녀왔으믄 좋겠다구, 인제 결혼허구 나서 둘이서 같이 갈꺼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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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혹시 그랬을지두 모르지…… 그런데, 그런 옛말은 별안간 왜 가구 싶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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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리구 나는 가구 싶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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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제 아랫배를 내려다보다가, 바륵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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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도 아내의 눈을 따르다가 마주 씨익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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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아직 겉으로 드러나게 부르진 않아도, 삼 개월이라고, 며칠 전에 산과의사의 확진까지 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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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아내를 마주보고 웃던 눈을, 재차 가슴 아래로 흘리다가 이윽고 다시 위로 젖가슴께서 잠깐 멈추더니, 도로 아내의 눈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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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랜 옛적, 동물로서 많이 취각(臭覺)으로 살던 본능이 아직도 혈관 속에 처져 있어서 그러한지는 몰라도 임신 삼 개월 마침 그때가 아낙이 사랑스러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아낙은, 역시 그때가 남편에게 느끼는 애정이 가던 중 고조에 오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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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숭업게 왜 자꾸만 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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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수삽하여, 부질없이 치맛자락으로 배를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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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그새 벌써 다른 생각에 눈을 까막까막, 주의가 아내에게서 딴 데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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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먼저에 하다가 만 이야기가 다시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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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글쎄에…… 양복을 걸믄서 양보옥 양복자앙 허다가 괜히 양행이란 말이 생각이 나겠지요. 그리군 전에 그 이야기두 생각이 나구…… 어떠세요? 마침 이렇게 수서언허기두 허구, 그러니깐 바람두 쐬실 겸,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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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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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얼훨, 좀…… 뭐 해필 불란서루만 가신다는 게 아니라, 천천히 구라파루 아메리카루 일주를 허서두 좋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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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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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전 아무래두 한동안 시굴루 내려가서 지내는 게 좋잖아요? 괜히 분잡허구, 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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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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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이왕 서울 살림은 헤치구 일어서는 길에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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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구 허더래두 여권두 문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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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잡아서 운동을 해보지? 널리 대구…… 되다가 못되더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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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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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비는 아버님 안 주시거들랑, 뭐 그래 주실 여유도 없으시대지만 이 집 이거 팔구, 아무래두 시굴루 내려가자믄 팔아야 할 테니깐…… 한 오천 원은 받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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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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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구, 모자라는 건 내 논 따루 몫지어 주신 거 아버지더러 돈으루 주시라구 허지. 그렇지만 아버지가 그건 안 들으실 거구, 오빠더러 이야기를 해예지. 뭐 오빠는 우리 일이라문 돈이나 한 몇천 원은 얼른 해 주실 건데…… 그러니깐 여비두 걱정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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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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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구 나는 그동안 시굴서 집에 가서 있던지, 모처럼 시집살이라두 좀 허던지, 또오 오면 가면 허던지 그리구우, 네? 나느은……”
 
66
경순은 그 다음이 아주 재미있는 대목인데, 남편은 보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앉았기는 앉았으면서도 실상은 딴 생각에, 주의가 산만하고 그리고, 그래서 여태까지 말대꾸하던 것도 건성이었고 한 것을 비로소 알고는 그만 헤먹어서 응석하듯 , 그의 무릎을 잡아 흔든다. 재미나는 대목이란 건, 인제 한 이태고 후에 당신이 신호나 횡빈에서 배에서 내리는 날, 나는 이쁘디이쁜 애기를 안고 부두에 서서 마중을 하구요, 이 말을 하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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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택은 아내가 개두를 한 그 이야기를 결코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답게 재치있게 궁리를 해낸 양행이라는 그것이 일변 마음에 당겨, 두루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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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뜻, 양행이면 소극적이기는 할값에, 지금의 이 거추장스런 자기분열(自己分裂)에 대한 준열한 자책이 어느만큼 완화될 수가 있을 성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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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의 에네르기를 삼을 겸, 견문도 넓히고 미흡한 학문도 닦고 하면서, 한 이태고 삼 년이고 외국에서 지내다가 서서히 돌아와서, 차차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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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을 했을 때에는 당장 오늘이라도 뛰쳐나가서 여권도 주선을 해보고 여비도 마련을 하고, 부리나케 서둘러 하루바삐 떠나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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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처음의 한 순간이요, 마침내 속은 후련하게시리 그리로 경도가 되어버리질 않고서 차차로 찌뿌듬하니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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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종택은 강풍을 만나 파선을 하고 난 뱃사람과 흡사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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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바람이란 것은, 제풀로 두어두면 부질없은 파괴나 일삼는 해로운 물건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파괴나 하고 마는 자의 힘을 갖다가 역으로 인도하며, 나에게 순응하도록 이용을 하는 총명함을 타고 났다. 돛(帆)을 만들어 바람을 받아서 물 위로 배를 달리고 풍차를 세워 물레를 돌려서 동력을 얻고 하는 것이 다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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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런데, 사시 봄바람이나 선들바람만 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제 성격과 제 이유로 해서, 가다가는 성난 폭풍일 수도 있고 무서운 태풍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강풍을 어거하자면, 보다 더 실한 돛과 정정한 풍차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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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일찌기 바람 거칠지 않을 절기에 조그마한 돛을 만들어 달고 바다로 나왔었다. 했다가 그는 힘에 부치는 강풍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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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은 여지없이 찢어졌다. 그리고 배는 바다의 낯선 섬에 표착이 되었다. 종택은 지금에, 참혹한 파선의 형해를 바라보면서 해안을 두루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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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든든한 돛을 만들어 달고, 저 강풍이 불어치는 바다로 달릴 의욕은 불타오르나, 그에게는 그러한 돛을 만들 힘 ─ 체력이 없었다. 천지에 바다와 맞붙어 단판씨름을 않고는 살 수가 없는 판박이 뱃사람이 아니라 거기 어디 되는 대로 주저앉아도 넉넉할 팔자, 이것이 그의 타고난 불리한 약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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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마음은 한갓 풍랑 거친 바다로 쏠리는 것이나, 몸뚱이는 생리적 고통을 지레 겁을 내어 의욕을 뒤받쳐 주지 않고는 가재걸음을 치고 해서, 어찌 하자는 말도 나오지 않던 차인데, 공교로이 양행이라는, 아내의 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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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나 좋다고 몸뚱이는 들이 불란서로 아메리카로, 발칸으로, 지중해로, 모스크바로, 로마로, 세계지도를 제멋대로 뛰어다니고 있다. 겁이 다뿍 났는데 마차운 샛길이 나오니까 냉큼 그리로 도망을 빼는 꼴새다. 온갖 조조(曹操)는 그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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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낱 도피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보니, 처음에 양행이란 말이 나자 언뜻, 자기 분열의 가책을 면하려니 싶었던 것은 결국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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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코 견문이 좁거나 학문이 미흡해서 오늘 당장에 할 노릇을 못하는 일일세 말이지, 오히려 지금 정도로도 족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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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사 양행을 한다고 했자 산을 뽑아 짊어지고 올 바 아니며, 요술 둔갑을 익혀 가지고 올 바 아니며, 무기력한 인간이기는 오나가나 일반이 아닐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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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마 시방 역사는 백 년의 경륜을 하고 있지를 않느냐. 그는 바야흐로 세계로 하여금 어떤 사실에 뿌리를 박고서 독자한 시대적 성격을 창조시키고 있는 중이니, 그의 연령을 세기(世紀)로써 따져야 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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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이 불합리하고, 그 성격이 나의 생리(生理)에 맞지 않는 것은 딴 이야기다. 이번에는 갈릴레오가 도리어 그레고리 십삼세의 초사를 받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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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구는 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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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폭담을 들어야 한 차례인 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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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양행이나 하여 견문이며 학문쯤 조그만치 더 얻어 가지고, 한 이십 년 만에 돌아온댔자, 백 년을 가고도 남을 풍랑인걸, 종시 무위무능(無爲無能)하기는 일반일 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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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러므로 거추장스런 자기 분열은, 오늘 여기서도 짊어지고 있어야 하고, 내일 양행(─ 을 한다면) 거기서도 짊어지고 다녀야 하고, 그리고 모레 돌아와서도 끝끝내 짊어지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
 
89
종택은 한숨을 몰아 내쉬다가, 어느새 세계지도를 펴놓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 아내의 프로필을 삭막한 얼굴로 건너다본다.
 
90
그 뒤로도 부부는 저무나 새나 앉아서 하는 이야기란, 양행과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두서없는 한담이었었다. 그러나 일이 첫째 종택 제 자신이 와락 서둘지 않는 탓도 있기는 하지만, 막상 눈썹이 당장 타들어오도록 시각이 급한 무엇도 없고 하여, 자연 청처짐한 채 어떤 진척이나 고패진 결정은 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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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구러 두 주일쯤 지나서, 예기하지 못했던 ─ 그러나 당하고 보니 당연한 ─ 일이 한 가지 뒤집혀지고 말았다. 종택이 마호멧의 초정을 받아 아라비아 땅에를 갔던 것이다.
 
92
아침에 떠났던 남편을 근심으로 기다리던 중 오정만 하여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맞는 경순의 안심은 그러나 단지 그 순간의 것이요, 역시 짐작한 대로 일은 크고 절박했었다.
 
93
마호멧은 매우 친절하게, 코란과 또 한 가지 다른 명물을 내보이면서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느냐고 종택더러 물었다.
 
94
종택은 둘 다 일 없으니, 좋은 낙타나 한 마리 주었으면 그놈을 타고, 끄으덱끄으덱 세상 구경이나 다니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95
마호멧은 무얼 그다지 겸사를 하느냐고, 정으로 주는 것이니 물리치지 말고 제발 둘 중에 한 가지를 골라 가져달라고 간곡히 권을 했다.
 
96
종택은 그래도 사양을 하니까, 마호멧은 필경 울면서 세 번째 졸랐다.
 
97
종택은 그러면 며칠 말미를 주면 집에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본 뒤에 작정을 하겠노라고, 수유를 타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98
무서운 진통의 사흘이 저물어 올 때, 오후에는 어떤 낯모를 신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 늦어서, 불시로 출입을 한 종택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말았다.
 
99
그러나 그 밤의 정밤중에 그가 아현(阿峴)터널 앞에서, 막진해 나오는 제이호 급행열차를 정면으로 ─ 진기한 자살이라서 당시 신문에 게재된 그 기관차의 운전수의 말이라는 것에 의하면, 하릴없이 성난 짐승처럼 ─ 제 몸뚱이를 갖다가 기관차를 똑바로 들이받아, 산산 박살을 만들어버렸을 줄이야, 경순이 집에서 밤새도록 기다리기나 했을 따름이지, 꿈엔들 생각을 했을까 보냐.
 
100
진실로 경순은 밝은 날 아침, 첫편으로 배달된 봉함엽서의 유서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병원에서 경찰서의 사람이 보여주는 양복저고리며 외투며의 조각에 남은 성명이 아니었으면, 그 면상이 형적도 없이 으끄러진 머리와 팔이 하나만 붙은 동체(胴體)와 떨어져 나간 팔과 두어 번이나 동강난 다리와, 이런 것들을 가까스로 집어다가 그럴 듯이 맞추어만 놓은 피투성이의 끔찍스런 육괴, 그를 겨우 열두어 시간 전에 자기 발로 저엉정히 집을 나가던 나의 중난한 남편이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101
─무위와 무능에서 다시 나아가 나의 육체는 나를 망신되게 하는 것으로 밖에는 쓰일 곳이 없는 게 되고 말았다. 프로메테우스의 후손은 불초하여 약행(弱行)할지언정, 불을 도로 빼앗지 않기 위하여서는, 육체를 처분할 강단조차 없지는 않다. 그대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그대의 총명이 결코 그대의 전정을 어리석게 인도하지 않을 것만은 자못 안심이다. 새로이 탄생되는 생명은 그대의 의사에 있는 것이지 나의 간섭할 바가 아니다. 다만 참고로, 그 생명에서 새로운 진리를 하나 창조할 적극적 의욕이라면 모르거니와, 맹목적인 모성애로 쓰잘데없는 육괴나 보육하느라고는 청춘의 재건을 묵살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말을 해두고 싶다. 이 지편(紙片)은 욕과 조소를 하겠거든 하라고 경호군에게도 한번 보여줌이 좋겠다. ─
 
102
유서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103
태동(胎動)도 유산도 안 된 것이 도리어 이상할 만큼 경순의 심장에 울린 격동은 대단했고, 그러나 시계의 바늘까지 설 리는 없어서, 시집이야 친가의 가족들이 울고불고 쫓아올라오고, 그 알뜰한 시체를(화장이라니 될 법이나 한 말이냐고) 떠싣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장사를 지내고, 경순은 이어 서울로 회정해서 살림을 정리해 가지고 다시 내려왔고, 한 고장 한 동내인지라 시집과 친정을 오면가면 하는 동안에, 배가 불러오르는 속도의 비례로 뱃속의 생명도 자랐고, 팔월달에는 여승 종택의 모형(模型) 같은 조그만 놈이 세상을 나왔고, 인제는 그럭저럭 일년…… 심신은 술렁거렸던 파동으로 부터 다같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러나 격심했던 타격이 타격인만큼 그로 인하여 몸이 축갔으려니 하는 것도 노상 엄살은 아닌 것이다.
 
104
고개 마루턱에서 경순은 잠깐 숨을 돌리는 성하다가 이어 다시 길을 내려간다.
 
105
몇 걸음 더 안 가서 고팽이를 돌아 나서자 안개가 타악 트이고 저 아래 움푹한 분지의 한복판으로 얼른, 남편의 무덤이 내려다보인다. 공동묘지와 달라 가족묘지요 해서, 마침 그 근처로는 다른 무덤도 없고, 또 묘비가 섰고 하여 호젓은 해도 눈에 잘 뜨인다. 묘비는 장사 때에는 아직 없었어도 그 뒤에 해 세운 줄은 알아, 낯에 설지 않다.
 
106
애통은, 망극하던 초참과 달라 시방은 하나의 생리(生理)와도 같이, 살 속으로 훨씬 침착된 때라, 새삼스럽기보다도 차라리, 장사를 지낸 지 일 년만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남편의 무덤은 반가움이 앞을 선다.
 
107
반가움이란 참으로 뜻밖이었다. 경순은 무덤을 보던 눈을 내려 걸음을 주춤주춤, 포대기를 헤치고 들여다본다. 세상에 나와서 오늘이야 저의 부친이라는 사람과 겨우 무덤하고나마 상면을 하는 것이다. 어린것은 무얼 가만 좀 있으라는 듯이 잠이 한참 고부라졌다.
 
108
경순은 가만히 웃고 포대기를 도로 여며 준다. 그러나 만일 그 언젠가 남편과 마주앉아, 언제 양행을 하고 돌아오는 날 신호나 횡빈 부두에서, 이쁘디이쁜 애기를 안고 마중을 하마고 하려다가 만 그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면, 오늘 이 자리가 노상 그렇게 심성이 편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09
또 그도 그러하려니와, 경순이가 남편을 여의고 나서 이 일 년 동안에 지금 보는 바와 같은 무던한 성장(成長)이 없었다고 하면, 저기 반갑게 누워 있는 남편의 무덤을 망지소조 울고 부르짖고 하기에 좀처럼 낭자함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110
종택이 그러한 거조를 내기 전 그 당시…… 경순은 아직 그저 가엾은 아가씨이었을값에, 자리잡힌 부인이랄 수는 없었다.
 
111
몸 가지는 태와 기분이 많이 여학생 그대로요. 그래서 결혼은 했다지만 가정이라고 하느니보다 연애에 더 가까왔다. 남편에게 대한 애정의 형용이 그러하고, 쓰는 버캐뷸러리가 그러하고, 말의 억양까지도 그러했다.
 
112
일변, 고이 자라 학창으로부터 이내 가정으로 옮아앉았을 뿐이라, 생활의식이라는 것도 단지 남편을 사랑하면서 그의 사랑에 고스란히 파묻히는 것 그것 하나가 주장이요, 그것이 절대(絶對)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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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자면 인생으로서는 미완성인 채(미완성이 완성이 되려면) 그가, 일 년이 될락말락하여, 나이래야 또 과부라는 이름조차 잔인할 스물두 셋에 더럭, 삼십도 넘은 중년 여인만치나 노성을 했고, 한 것은 자못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14
남편의 변상을 치르고 나서 저으기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경순이 처음으로 주의가 가기는 제 자신의 한 경이로운 변천이었었다.
 
115
‘내 자신의 나…… 어디로 대고 보나 단지 나라는 사람, 나……’
 
116
일찌기 생각도 못했던 제 자신의 새로와진 발견이었었다.
 
117
하기야 그것이 큰 손실과 슬픔의 대상인가 하면, 허망하고 서글픈 노릇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만을 따로 띄어놓고 보느라면 일변 신통하기 다시 없어 미소라도 떠오를 것 같았다.
 
118
“내 자신의 나…… 새로운 내 자신……”
 
119
볼수록, 그 다음에는 가만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120
그러나 뒤미처 그는 어떤 긴장을 느끼고 다시금 정신이 들었다. 그 새로운 내 자신의 나는, 결코 장롱 속에 건사해 둘 노리개나 앨범에 붙여두고 시시로 떠들어볼 사진이나처럼, 순리(純理)의 인식의 대상에만 언제까지고 멈춰 있을 것이 아님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121
내 자신의 나인만큼 그러므로 인제부터서는 하나의 엄연한 실제문제로 나를 ‘생활’ 해야 한다.
 
122
생활해야 하고, 그러나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해야 한다. 잘 생활해야망정이지, 어리석은 짓이나 하고 추태나 부리고 부질없은 고통이나 사서 하고 해서는, (다른 아무개의 나도 아닌) 내 자신의 나를 욕되게 하고 내가 불행하게 하고 마는 것이다. 결단코 잘 해야 한다.
 
123
그때에 경순은 새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잘’이란 소리를 몇 번이고 입으로 뇌었다.
 
124
물론 막연한 말이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실제 생활의 많은 체험이 없는 그로서는 어떠한 기준을 세울 토대가 없는만큼, 제 자신의 총명이랄까 영리함이랄까, 아뭏든지 그러한 것을 믿고 종차 일에 임하면, 잘하려니 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125
남이 보기에는 지나친 전도부인적(傳道婦人的)인 조심이면서, 그러나 그러하면서도 일변 위태로와 보일 무엇이 없지 않으나 경순 자신은 그걸로 위선 안심이 되었다. 따라서 갈피없이 흐트러지던 여러 가지 상념이며 센티멘탈도 차차로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스러질 것은 스러지고 하여 심신(心神)은 비로소 한결되게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126
침착과 노성은 일찌기 이때로부터 가다오다 남의 눈에도 띄었거니와, 경순 자신도 어디라 없이 제 마음이며 몸가짐의 태도며가 무긋무긋함을 느꼈다.
 
127
그러구러 예측된 대로 제 시기에 해산을 하고 별 탈이 없이 몇 이레가 지나고 다시 두 달 석 달 반 년 이렇게 언뜻언뜻 지나가는 동안 경순은, 온갖 정성과 생활이 고스란히 어린것에게로 쏠리고 말았다. 그것은 이게 내 자식이거니, 황차 외로운 홀어미의 소중한 자식이거니 하는 타산으로 하여, 위정 그리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더구나 옆에서 누가 그걸 시킬 며리도 없던 것이요, 단지 샘솟듯 끝없이 절로 솟는 애정으로부터 우러나는 노릇이었다.
 
128
이 주관을 한 번 객관했을 때, 경순은 다시 새로운 만족과 안심을 얻었다.
 
129
그는 일찌기, 잘 생활하리라 했었다. 그런데 본즉 저는 잘 이상으로 잘 생활하고 있던 것이다.
 
130
무엇 한 가지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소중치 않은 것이 없었다. 가령, 요놈이 재주가 한 가지 또 늘어가지고 혼자 뉘어놀라치면 빠드읏하고 몸을 뒤친다. 들여다보면, 깔린 팔을 뽑으려고 노력을 하는 게 아주 대단하다. 조금만 그대로 두었다가 지쳐서 고개에 힘이 없을 무렵에 팔을 뽑아준다. 편안하다고 한숨까지 내쉰다.
 
131
세상의 어떠한 잘 아는 생활을 갖다가 놓아도, 경순에게는 갓난이의 팔 하나 뽑아놓아 주는 이 생활을 감히 따를 자가 없는 것이었었다.
 
132
경순의 생활의 기준과 코스는, 그리하여 스스로 결정이 되었고, 제풀로 벌써 잘 진행을 하고 있었다.
 
133
그 밖에 다른 생활은 마땅히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 기준의 코스를 따라야 하고, 따는 자라야만 경순에게는 용납이 될 터이었었다.
 
134
하기야 다른 생활이라고 해도 실상은 지극히 단순하여, 무슨 이렇다고 할 말썽거리도 아직 같아서는 생길 게 없다.
 
135
다만 한 가지, 동강이 난 채로 남아 있는 한 토막의 청춘의 처리 문제가 중대하다면 매우 중대하달 수도 있고 난관이라면 성가진 난관이랄 수도 있고 하기는 하나, 내부적으로는(어느새 말라비틀어져 가는 줄은 모르고서) 수면상태에 있고, 외부적으로는 누가 도끼를 둘러메고서 열 번 찍자고 달려드는 일도 없고, 겸하여 이런 시골이니 좀처럼(가령 기다려 본댔자) 그러한 맹랑한 활량이 있을 며리도 없고 해서 시방 짐작키에는 별반 위험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136
그렇거니 하면, 문득 섭섭하여 제 자신이 반감스럽고 연달아 남편의 유서의…… 맹목적인 모성애로 쓰잘데없이…… 운운한 구절이 솔깃하면서 어떤 모험심이 비밀히 손을 까불기도 한다.
 
137
경순은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스스로 야속할 만큼 결코 당황할 필요가 없다. 그는, 시방 거기 마당에서 노느라고 빼착빼착 우물 두던 가까이로 가고 있는 애기가, 절대(絶對)로 우물에 빠지도록은 안될 것을 잘 아는 어머니와 같아, 그리고 만약이라도 위험해 보일 경우에는 미리서 얼른 안아 올 여유와 자신을 두고 앉아 안심하는 것과 같아, 조금도 덤비거나 불안해할 거리가 되지 않던 것이다.
 
138
시어머니는 본시 편성이요 또 여자의 좁은 소견이라 하겠지만, 언뜻 장자의 유유한 풍토가 있어 보이는 시아버지 강진사까지도(물론 드러내 놓고 내색을 하는 것은 아니나 눈치가) 저 새파랗게 젊은 것이 신식바람도 쏘이고 한 터에 저대로 수절을 할 이치가 없을 것, 상필 팔자를 고쳐 갈 테니 아무리 개명이요 말세이기론 양반의 가문에 욕됨이 클지요, 황차 내 집안을 이을 저 어린것이 남의 의붓자식이 되어 간대서야 당치 않을 일, 그러잔즉 애비 없는 자식이 에미마저 놓쳐야 한단 말이냐, 해서 매우 울적하고 불안스런 모양이었다.
 
139
경순은 불쾌하기보다도, 그 근천스런 초조가 어쩌면 걸인이 연상되어 무심코 민소를 하곤 한다.
 
140
친정 부모는 또 친정 부모대로 , 저 어린것이 말이라도 민망하지, 수절과부로 평생을 늙히다니 차마 애처로와 볼까보냐고, 신식공부도 넉넉히 했고 한터에 자식은 젖이나 떨어지거들랑 제 조부모한테 내주고서 진작 팔자를 고쳤으면 작히나 좋겠느냐고, 은근히 상심을 하면서 한숨들을 곧잘 쉰다.
 
141
경순은, 다친 게 살은 내 살이라도 나는 짜장 아픈 줄을 모르는데 옆에서들 엄살엄살 하는 것이(육친의 살뜰한 정인 줄이야 이해를 못하는 바 아니지만) 하마 코웃음이 나곤 한다.
 
142
바로 며칠 전, 오래비 경호도 앉았고 한 자리에서다.
 
143
경순은 한담을 하던 끝에 짐짓 친정 모친더러 대체 그 과부라는 것이 어쩌니 그렇게 여자한테 찔끔이요 상서롭지 못한 것이냐고, 또 과부면 과부지 제마다 남편이 아쉬워서 미치라는 법은 어디 있다더냐고, 웃음말 섞어 공박을 주었다.
 
144
모친은 그러나 대껄을 않고 웃기만 하고 있는데 경호가,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는 시방도 과부가 시집을 가면 못쓰는 걸로 아신단다. 그러면서도 딸너는 시집을 갔으면 하고 바래신단다, 우리 어머니 휴매니즘이야, 하고 꺼얼껄 웃었다.
 
145
경순도 같이 웃다가, 가만히 기시요 어머니, 내 시집 열 번 더 간 것보다 더 보람이 있게시리, 요놈 요 조그만 놈을(어린것을 추스르고 어르고 해싸면서) 요놈을 인제 어쨌든지 저기 저 햇덩어리만한 대장부를 만들어 노께시니, 할머닐라컨 오래, 오래 사시다가 재미나 보시요, 보쌈이나 못 들어오게들 하시요, 하면서 은근히 제 결심을 내비춰 보였다.
 
146
“너 그 말 잘했다! 헴 헴……”
 
147
경호가 또다시 그 말을 받아, 무릎을 탁 치면서 내닫다가 그게 몸짓이 너무 과했던지 기침을 한바탕 출렁거린 뒤에
 
148
“……내, 너한테 헴 헴, 첩지를 한 장 내리마 헴 헴……”
 
149
하고 연신 밭은기침을 하던 것이다.
 
150
모친은 정렬부인 가자란 소린 줄 알고서 말이나마 좋아서 혼자 웃고, 경순은 모르는 어휘라 두릿두릿
 
151
“무슨, 지요?”
 
152
“첩지…… 아버지두 참봉 첩지를 받구서 참봉을 했구, 헴 헴. 느이 시아버지 강진사가 쓰구 있는 그 위대헌 삼각산(三角山: 冠)두 첩지 값이란다, 실상 모두 인찌끼댔지만……”
 
153
“사령장 같군?”
 
154
“오옳지 맞었어! 헴헴, 그래 나는 너한테 무슨 첩지를 내리는고 하면…… 이애 이건 괜히 아버지 참봉 첩지나 강진사 진사 첩자처럼 인찌끼는 아닐다!”
 
155
“네에, 어서 첩지나 내리시우. 그렇지만 나는 한문을 모르니 첩지는 받어두 인찌끼 참봉 인찌끼 진사게.”
 
156
“아마 너는 오래비 덕에 정렬부인 가자나 타나보다!”
 
157
모친이 새에서 한마디 거드는 것을, 경호는 커다랗게 손을 내저으면서
 
158
“에, 천만에! 괜히 정렬부인 가자 탔다가는, 어머니 저애 영영 시집 못가우 헴 헴…… 그런 게 아니구 이애? 너 시방 고놈을 햇덩어리만한 대장부를 만든댔지? 응, 됐어 헴 헴. 태양은 광명이렷다. 비타민씨두 있지만 그런 건 날 같은 폐병쟁이나 배추장수한테 공덕이고, 헴헴……”
 
159
“인전 그마안 해 두시우, 기침 나오리다! 참봉 진사는 이담에 허지요.”
 
160
“뭣이냐, 태양은 광명이요 응? 광명은 진리(眞理)렷다, 그러니 너는 처억 진리의 어머니란 벼슬을 주는 거란 말이야 진리의 어머니. 어떠냐? 맘에 드냐?”
 
161
“하하하, 것두 해롭진 않지요! 하하하, 요게 요게 진리는 진리야!”
 
162
경순은 어린것을 들여다보면서 재미있어 한다. 농담 좋아하는 오래비의 한낱 농담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진리의 어머니라는 경순 제 자신에 대한 형용은 귀 밖으로 듣고 말 것이지만, 이 어린것이 진리라는 데는 마음에 차악 안기던 것이다.
 
163
“그렇지만 이애? 너 그런 벼슬했다구 가구 싶은 시집 못갈 건 없다! 괜히 헴 헴, 어머니가 날 칭원하실라!”
 
164
그 뒤로부터 경호는 곧잘 누이를, 이애 경순아 하는 대신, 여보 진리의 어머니, 하면서 유쾌한 애정을 농담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그 진리의 어머니 대신 진리의 자당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때는 누이가 차차로 염기(艶氣) 없어져 가는 노성에, 전도부인과 같은 일종의 경멸을 느끼고서 조소를 해주는 조롱이던 것이다.
 
165
고개 마루턱에서 고팽이를 돌아 내려서니, 오래비 경호는 오래간만에 넓은 대기 속에서 훠얼훨 이렇게 걷는 것이 대단히 유쾌한가 본지 벌써 저만치 멀찍이 모자는 빼뚜름 단장을 홰애홰, 길도 안 난 산비알 잔디밭으로 비어져서 가분가분 걸어내려가고 있다.
 
166
당자 자신은 방금 휘파람이라도 불듯 매우 신이 나 하는 모양이나 라글란 봄외투 밑으로 가뜩이나 쿠렁쿠렁 쌔지 않고 따로 따로 노는 앙상한 어깨가 눈에 띄는 게, 새삼스럽게 애처로와 경순은 마음이 언짢았다.
 
167
무덤이 있는 분지께로 거진 당도해서야 경호는 뒤를 돌려다보고 단장을 쳐든다.
 
168
경순이 오래비가 기다리고 섰는 곳까지 가까이 따라갔을 무렵 해서 마침 저편짝으로 지름길이 ( 있었던 모양인지) 등 너머 산지기네 아낙인 듯, 돗자리 만 것을 안고 배젊은 촌색시 하나가 부리나케 무덤 옆으로 가고 있다.
 
169
“이애 저거 봐라……”
 
170
경호는 누이가 제 옆에까지 당도하기를 기다려, 무덤 앞에다가 어느새 돗자리를 펴놓고는 도로 달아나듯 물러가고 있는 산지기네 아낙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171
“……산지기네 아낙이 철도 아닌데 헴 헴, 쥔네 과수아씨가 성묘 나온 걸 보구서 알심을 부리는 거로다. 됐어!”
 
172
경순은 그저 그런가 보다고 심상히 웃으면서 나란히 걷기 시작하는데, 경호는 빈들빈들 분명 누이를 무어라고 또 놀려줄 입초리다.
 
173
“거 뭐이야, 술을 한 병 차구 나오는 걸 깜박 잊었지! 돗자리를 펴 놓은 걸 보니 생각이 나는군!”
 
174
“술은 해 무얼 허시우?”
 
175
“뭘 허다니, 그래? 정든 님 무덤을 모처럼 찾아왔으면서, 너두 뭣이냐……”
 
176
“오온!”
 
177
“허허허허. 그래 뭣이야, 술을 한잔 부어놓굴랑 헴 헴, 저 자리에 가서 엎디려설랑, 애고오 애고, 한바탕 울어야 않나! 응? 어허허허.”
 
178
“내, 오온!”
 
179
“어허허허 허허허허.”
 
180
“오라버니 분배에, 울음이 나오려다가두 도루 들어가구 말겠수.”
 
181
“허허허허 어허허허. 그런데 뭣이냐, 달리 그런 게 아니라, 내 인제 그릴게 하나 있어서 한 말일다. 인제 한 백 호짜리루다가 하나를 그리는데 헴헴, 그걸 쓰윽 만화루 그리거던 만화루. 네가 무덤 앞에다가 술을 부어놓굴랑 엎디려서 애고오 애고 우는 걸 갖다가 만화루 그려요.”
 
182
“왜 인전, 어머니 말씀마따나 눈방울만 생긴 대장쟁이 떼, 그건 영 안 그리시우? 방향 전환인가? 만화루.”
 
183
“것두 인제 시절이 오면야 다시 그리지, 그리지만 헴 헴. 시방 그 만화를 그렇게 하나 그리는데…… 그려가지굴랑 찬(讃)은 갖다가 무어라구 쓰느냐 하면 헴 헴, 이날에 진리의 자당이 패부자의 무덤 앞에서 크게 울도다! 이렇게 쓰단 말이렷다. 응? 어떠냐? …… 그리구 화제는 불랍이구, 어떠냐”
 
184
“불랍인지 악취민지……”
 
185
“똥끼호떼의 후일담(後日譚)이라구 허는 게 좋겠군, 헴 헴. 옳아! 저녀석 똥끼호떼……”
 
186
경호는 단장을 들어 무덤을 가리킨다. 경순도 아까부터 생각 많던 얼굴로 어느덧 남편의 무덤을 바라보다가 도로 고개를 숙이고 잠잠히 걷는다.
 
187
“똥끼호떼란 말은 잘 허셨지!”
 
188
이윽고 경순은, 너무도 짧았던 행복한 시절의 추억이 다하고, 끝이 남편의 그 참변에 이르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혼잣말을 하듯 뇌면서 눈은 다시 무덤으로 옮는다.
 
189
“하! 갈데있나! 똥끼호떼 아니구야……”
 
190
경호도 명상에서 깨어나서 눈가는 대로 무덤을 바라다보다가 문득
 
191
“……그래두, 그래두는 말이지…… 똥끼호떼는 똥끼호떼라두 그 녀석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거 거 토옹쾌통쾌헌 일이 있구나! 응? 허허허허, 됐단 말이야! ……”
 
192
경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193
“……통쾌헌 것이…… 뭣이냐 헴 헴, 저 녀석이 글쎄, 아 저걸 좀 보지 저럭허구서 무덤 속으루 도망을 뺐으니 헴 헴, 아 도망을 빼설랑 저럭허구 있으니, 뭣이냐 글쎄, 마호메트는새로에 아라 영감이 와설랑 기관총을 디리대구서, 너 이 녀석 코오란을 읽을 테냐 안 읽을 테냐 헌들 어떡허나? 죽은 놈을 뉘 재주루? 허허허허, 거 통쾌허잖아 허허허허.”
 
194
“통쾌헌 건지, 원……”
 
195
경순은 비난의 음성인 것이 아니라 곰곰이 차탄을 하듯
 
196
“바우가 밉다구 발길루 걷어찼는지!”
 
197
“됐단 말이야 그 녀석이! …… 써억 통쾌하단 말이야…… 대가리루다가 급행열차를 정면으루 들이받은 것보다 그놈이 되려 걸작일다. 걸작, 허허허허…… 크크크.”
 
198
말끝이 별안간 기침으로 변한다. 경호의 건강으로는 말이 좀 과했고, 걸음도 졸지에 너무 속했을지도 모른다.
 
199
겨울이 물러가면서 금년 들어 처음 보게 날이 따사하고 좋아, 삼동의 지리하던 요양생활 끝이라, 모처럼 농장 근처고 어디고 산보라도 나가볼까 하던 차인데, 그러자 마침 오정만 하여 누이가 생질 놈을 안고 오더니, 인제 일주기(一周忌)도 임박했고 이놈도 그전에 제 도리를 치르도록 해줄 겸 잠깐 산소에를 다녀오고 싶다고, 그러나 시댁에서는 노인들이 나서서, 어린것한테 아직도 첫봄머리의 쌀쌀한 바람이 해로울까 하여 마땅찮아할까 봐서, 또는 교군을 차린다 하인을 안동해 준다, 오히려 단출함이 좋을 나들이를 긴찮이 분배를 놀까 봐서 , 그대로 잠자코 나왔으나 이십 리 상거를 도보로 왕복하잘 수는 없으니 인력거가 됐든지 자동차가 됐든지 무어나 탈것을 좀 분별시켜 달라고 하는 청이었었다.
 
200
경순은 명색이나마 시부모 앞에서 얼찐거리고 있는 몸이니, 또한 상청과도 다를 뿐 아니라, 대체 무덤이란 그다지 자주 나다니게 되는 것은 아니기야 하다지만, 일변 생각하면 생전에 서로 자별했던 정으로 보든지 생판 촌며느리와는 달라 출입의 구속이 없는 처지로 보든지, 장사를 하고 나서 우금 일년이나 그대로 문두름히 있었다는 것은 좀 박절했다고 할는지 매몰스럽다 할는지……
 
201
물론 작년 이보다 며칠 늦어서 저 자리에다가 저렇게 무덤을 묻고는 손에 묻은 흙도 씻는 둥 마는 둥, 바로 살림을 가다구니하느라고 서울로 올라갔었고, 두 달 만에 도로 내려왔을 때에는 삼백여 리의 기차여행이 위험이 느껴질 만큼 배가 불렀고, 그러자 팔월에 해산을 하고서는 몸이 소성될 무렵이라는게 늦은 가을과 이내 삼동이고 보니, 첫째 어린것을 안고 나오잔 말도 떼어놓고 나오잔 말도 나지 않았고, 해서 이래저래 마차운 계제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202
그러나 만약에(만약에라도) 저기 있는 저 무덤이, 백골이나 묻혀 있을 뿐 말도 없는 한 줌의 흙이 아니고, 방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결단코 경순은(하필 경순이리요, 누가 당했든지) 수화를 가리지 않았을지언정 그대도록 범연하지는, 가령 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걸로 미루어보면 사람은 죽은 이를 무정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살아 남은 인간이 무정한 게 아닌가 싶다.
 
203
아뭏든지 그래서, 경순은 오늘 나가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없는 것이 아니로되 내일 나가도 무던할 노릇이라, 그러한 오늘과 오늘이 일 년내내 저물곤 하다가, 오늘이란 오늘야 마침, 날세도 반갑고 하여, 그러면 다녀오는 거라고 작정을 하고 나니 미상불 그제서야 너무 소원했구나 하는 민망한 생각이 들고, 한 다음에는 누가 붙잡고 말릴까 무섭게 부랴사랴 달려나온 길이었었다. 그러나 병중이라 조심이 되는 오래비와 동행을 하자던 요량은 아니었는데 경호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라 오늘은 내가 진리의 어머니의 시종무관일다고 성큼 차리고 따라나섰던 것이다.
 
204
경호는 오늘 기위 산보는 하고 싶던 차요 해서 누이의 너무 호젓한 길동무도 해주려니와 저 역시 매제일뿐더러 생전의 삼십 년 가까운 다정한 친구의 무덤을 장사 때에 회장을 나왔을 뿐, 여태껏 찾지 못했던 터라 겸사겸사 나섰던 걸음이다. 그리고 아닌게아니라, 자동차를 내려 두 킬로 남짓한 촌락과 구릉을 오르내리기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매우 유쾌했었다. 그러나 그놈 유쾌한 놈에 겨워 무심코 겅중거린 것이 약간 무리라면 무리랄 수도 있었다.
 
205
경호는 단장을 놓고 유유하게 잔디 위에 가서 주저앉아 쿨룩쿨룩 기침을 치르고 있고, 경순은 애가 씌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오래비의 괴로와하는 양을 들여다보고 섰다.
 
206
이윽고 경호는 그득 넘어온 담을 출입할 때의 소용인 종이타구에 배앝아 도로 집어넣다가 너무 다붙어 섰는 누이를 힐끔 올려다보더니
 
207
“어린놈꺼정 안구서, 좀 조심해라! 괜히 겁두 안 나나 보구나”
 
208
하면서 웃음말같이 나무랜다.
 
209
경순은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하나, 그렇다고 사뭇 질겁을 해서 물러서기도 박절한 짓이라, 어린것만 한옆으로 비껴 안는데 마침 잠이 깼는지 포대기 속이 꼼풀꼼풀한다.
 
210
“다아 지무섰군, 우리 대장이.”
 
211
경순은 둘러보다가, 저만치 무덤 앞에 편 돗자리가 눈에 띄었으나 무얼 그러겠느냐고, 넌지시 북덕잔디 위로 가서 퍼근히 앉아, 포대기를 헤치고 들여다본다.
 
212
간드러지게 생긴 얼굴이, 눈은 아직 그대로 지그려 감고 콧등을 찡긋찡긋하다가, 고 육중한 입을 하 벌리고 하품을 늘어지게 배앝는다. 그리고는 젖꼭지를 찾느라고 입술을 오물오물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반짝……
 
213
“깨꾸우, 자아 젖 먹어야지……”
 
214
경순은 가슴을 헤치고 젖통을 드러내다가 물려주면서
 
215
“자아, 젖 먹구우.”
 
216
아직도 잠이 더얼 깨어 눈을 시일실 감으면서도, 주먹은 가져다 커다란 젖통을 움켜쥐며 잡아당기며, 꿀꺽꿀꺽 빨아 넘긴다.
 
217
경호가 앉은 채로 돌려다보다가
 
218
“고놈이 아범한테 온 줄 알구서 때맞춰 깬 거로다!”
 
219
“하하, 그랬나? 이 사람…… 그렇지만 가만히 기시우, 그까짓 미운 아빠는 내가 젖 배불리 먹구서 이따가 천천히 만나보겠읍니다아.”
 
220
경호는 몸의 피로를 쉬면서 앉아, 가냘픈 대로 봄빛을 즐기기에 정신이 팔린다.
 
221
이월 보름께라 아직은 일러 바람끝이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철이지만, 여기는 북쪽으로 언덕이 막히고 움푹 패인 분지가 되어서 바람은 없고 한갓 다양만 하다. 맑기도 하려니와 햇볕은 따사한 걸 지나쳐 정이 들게 포근하다.
 
222
주위는 깜박 잊어버린 듯 조용하다. 묘지와 같이 괴괴한 게 아니라 잠자는 애기와 같이 한가하게 조용하다. 조용하고 볕이 봄스러운 품이 금새 어디서 꿀벌이라도 한 마리 왱 가늘게 울고 날아드는 성싶다.
 
223
잔디풀은 여태 그냥 시들어 있다. 그러나 속대를 뽑아보면 벌써 물이 올라 촉촉할 것 같다.
 
224
앞으로 느릿하니 미끄러져 내려가던 구릉이 다하면 아래서는 보리밭이 다랑다랑 기어올라왔다. 먼 빛에 보아도 가지런히 골을 타고 자란 보리풀이 제법 탐스럽다.
 
225
밭에는 연달아 넓은 들판이 자꾸자꾸 퍼져나간다. 빛 그늘이 가물가물, 들판은 퍼져나가다 퍼져나가다 못해, 끝이 희미해진 거기서야 겨우 아스라한 산들과 만난다.
 
226
들판에는 가까이, 거기도 하나 또 저기도 하나 그리고 저기도…… 네 패 다섯 패 군데군데서 쟁기를 멘 소가 뒤에 선 사람으로 더불어 늘어지게 움직이는지 마는지, 어쩌면 아구를 내는 입이 보이는 것도 같다. 완구히 봄을 장만하고 있다. 제각기 들판도 밭도 잔디풀도 부지런히 그러나 얌전스럽게들 봄을 장만하느라 여념이 없다.
 
227
얼마를 그럭하고 넋없이 앉았었던지, 경호는 이윽고 제정신이 들자 후, 거진 소리를 내어
 
228
“봄! 봄은 봄일다!”
 
229
하면서 앞에 놓았던 단장을 집는다. 그때다. 무심코 내려다보던 눈인데, 뜻밖에도 거기에는
 
230
“네에, 봄이올시다, 안녕합쇼?”
 
231
하는 듯이 정말로 봄이 한 놈 고개를 뾰족이 내놓고 있는 것이다. 털이 송알송알한 갓 돋은 할미꽃 엄이다.
 
232
어떻게도 신통한지 고놈을 쏘옥 손가락으로 잡아 뽑아가지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허리가 고부라져서 들여다보고 있다. 얼굴에는 어린 아이같이 무심한 희열이 넘친다.
 
233
처음에는 그것도 봄을 찾아냈다는 단순한 기쁨이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다지 아름다울 것도 없는 한 포기의 할미꽃의 엄에서, 일찌기 다른 생활에서는 맛보아 보지 못한 어떤 새로운 희열을 지금에 비로소 느끼고 있던 것이다. 생명의 창조를 보았다는 즐거움인데, 그러나 그는 실상 돌이켜, 자류(自流)의 비판을 가질 겨를은 미처 나지 않았었다.
 
234
‘생명의 창조! 생명의 창조!’
 
235
경호는 불현듯이 누이와 누이의 품에 안겨 있을 그 어린것이 보고가 싶어 꿈으로부터 깨어난 사람처럼 중얼중얼 중얼거리면서 경순이 앉았는 곳으로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 미상불 거기에는 예기했던 바보다도 그 이상으로 훨씬 더 황홀한 정경이 벌어져 있었다.
 
236
가느다란 미소를 드리우고, 품에 안긴 어린것을 들여다보느라 약간 소곳한 머리의 하이얀 가리마 밑으로 곱게 빚어진 누이의 얼굴, 그녀는 개개의 모습이며 전체의 선이며 윤곽이며, 분명코 누이의 얼굴임에는 다름이 없으나 이토록 아름다운 표정은 일찌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었다.
 
237
경호는 그것이 대단히 아름다운 줄은 알았으나 미처 달리 생각을 해 볼 사이는 없고, 단지 한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운 것으로만 여겨 내심에, 저 애가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 할까 보다고, 이런 실없은 걱정을 하면서 무심코 한 발자국만 더 떼어놓다가, 그제서야 활연히 그 아름다움의 아름다운 소이를 깨닫고, 한꺼번에 숨을 들여쉰 채 주춤 그 자리에 멈춰 선다.
 
238
경순은 그때 마침, 어린 놈이(배가 불러 해찰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빨간 젖꼭지를 입술 밖으로 물리고서 말끄러미 어머니를 올려다보다가 그대로 벙싯 웃는 그 입…… 그 입으로 어머니는 마악 입술을 가지고 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었다.
 
239
“야하! ……”
 
240
경호가 커다랗게 감탄을 할 때에는, 경순은 쪼옥 입맞추는 소리를 내면서 도로 고개를 쳐들고 웃는다.
 
241
“왜요? ……”
 
242
경순은 어린 놈을 추스려 올려 볼비빔을 하면서
 
243
“……자아 뭐라구 또, 험구를 허실려구. 그렇지만 큰아버지 자아, 암만 나를 험구를 해보시우? 내가 뭐 꼼짝이나 하나, 자아.”
 
244
“하하하하, 그건 명담일다! 헴 헴. 그런데…… 그런 게 아니구 내 오늘 소득이 많구나!”
 
245
“소득은, 웬……”
 
246
“일왈 헴 헴, 조곰 아까 느이 모자가 허구 있던 그 포즈를 말이다. 헴헴. 그대루 살려만 노면은 머, 아주 「모나리자」가 왔다가 울구 가겠더라! 내 인제 그릴 테니 보렴.”
 
247
“「모나리자」따위는 미술 축에도 못 든다더니”
 
248
“허허허허. 그렇지만 헴 헴. 이놈 지구가 눈에 뵈는 사실대루만 사는 세상이니, 개체두 그럴밖에 더 있느냐! 춘향이두 시방 세상에 났었다면 카페나 빠에 가서 헴 헴!”
 
249
경순은 어린 놈을 안고 일어서서 무덤께로 천천히 걸어간다. 경호는 나란히 단장을 휘젓고 걸으면서
 
250
“그리구 헴 헴. 거 이제 보니 생명의 창조라는 게 재미가 그럴 듯헌 걸더라! …… 네 재미를 내 비로소 짐작한 배로다!”
 
251
“아이구 주정허시우! 아, 요거 말이지요? ……”
 
252
경순은 어린 놈을 오래비게로 보여주면서 볼을 대고 비비면서
 
253
“……요거, 요게 재미만? …… 천하를 다아 주어두 안 바꿀 텐데…… 그렇지이? 내 새끼, 내 강아지.”
 
254
“강아지”
 
255
경호는 괜한 음성을 지르면서 주춤 멈춰 설 듯, 누이의 어린 놈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256
“그러믄요! 내 강아지, 내 새끼…… 요게 내 강아지 아니우”
 
257
“흐음, 강아지라!”
 
258
경호는 즐겁던 얼굴이 삽시간에 불쾌한 주름살이 좌악 퍼진다. 퍼뜩, 강아지라는 말 그것에서 명색없는 생명, 쓰잘데없는 생명이라는 것을 연상했던 것이다. 그는 제 감격이라는 것이 생각하고 보니 쑥스러울 만큼 허망했다. 환상은 순간도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259
“흥!”
 
260
경호는 연해 콧방귀를 뀌면서 입을 삐쭉한다.
 
261
명색없는 생명을, 쓰잘데없는 생명을, 그 따위 생명의 창조가 워너니 기쁠 것이 무엇이야. 기뻐한다는 것은 결국 비뚤어진 주관의 착각!
 
262
애당초 창조부터가 무의미하지 않느냐.
 
263
발 밑에 짓밟히기나 할 명색없는 풀, 도야지나 개나 마소같이 만만한 생명, 이 지구 위에서 하루에도 몇만 명씩이나 새로이 창조되는 인간들이, 그 중에 단 몇몇이 과연 쓰잘데있는 생명일 것이냐.
 
264
악당의 창조를 어째서 축하해야 하느냐.
 
265
창기를, 노예를, 불의한 살상의 도구를, 결핵균이나 퍼뜨리는 폐병장이를 그것들의 무수한 탄생이 어쩌니 생명의 창조의 기쁨 값이 나갈 것이냐. 강아지라는 말에서 암시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경호로서는 오래지 않아 스스로 그러한 부정이 우러나고라야 말기는 할 것이었으나 그것이 너무 급했던 만큼 환멸의 반동이 가외로 컸던 것이다.
 
266
“허허, 허허허허……”
 
267
경호는 이번에는 갈려 들었던 불쾌한 주름살도 마저 없어지고 오히려 유쾌하게 웃어대면서
 
268
“……내, 착각이로다! …… 여보 진리의 자당님?”
 
269
“네에, 또 무어라구 시방……”
 
270
“허허허허, 뭣이냐 헴 헴, 시방 내가 생명의 창조가 기쁘다고 헌 건, 내취소로다.”
 
271
“자량해서 허시우, 언제래야 뭐……”
 
272
“그리고 너두 뭣이냐 헴 헴. 차라리 시집이나 일찌감치 한 번 더 가구, 응? 이건 내 유언일다.”
 
273
“내가 또, 귀 아플 일이 또 한 가지 생겼군!”
 
274
“나는 그리구, 뭣이냐, 폐병 들기전이라두 결혼 않기 잘했어! …… 헴헴. 그깐 놈의 명색 없는 생명, 그걸……”
 
275
“네에 네! ……”
 
276
경순은 가벼운 반발을 느끼면서 얼른 것질러
 
277
“……그렇지만 아무 염려두 마시우, 마시시구 그리구 인제 다아……”
 
278
하다가, 남편의 유서에 씌어 있던, 맹목적인 모성애로 쓰잘데없는 육괴…… 운운한 구절도(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생각이 나고 해서
 
279
“……두구 보시우들, 인제…… 요놈, 요 쪼고만 놈을 가져다 버젓한 대장부를, 진리에 사는 버젓한 대장부를 만들어 내세울 테니, 보기만 허시우……”
 
280
어린 놈은 어머니의 옴죽거리는 입술을 만지고 놀기에 재미가 쏟아진다. 경순은 앞니 앞에서 꼬물거리는 연한 손가락을 야긋야긋 물어주면서
 
281
“……정말 그렇지이? 응? 저 외가집 큰아버지처럼 몸두 비트을비틀, 사상두 비틀비틀 그런 이두 마알구, 또오…… 괴롭다구우 괴롭다구 몸부림을 치다가 애꿎인 기관차나 디리받구 그 야단을 낸 느이 아버지처럼 그렇게 사상에 잡쳐서 죽구 마는 이두 마알구…… 응? 아주 버저엇허게 진리에 사는 대장부…… 응 그렇지이”
 
282
반발 끝에, 공박삼아 말을 하는 동안 그러나 회포는 도리어 반대로, 그와 같이 돌아간 남편에게 새로와지는 측은한 정에, 몸과 혼이 구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동기간에게 대한 연민(憐憫)의 정에, 어느덧 고요한 애수가 가슴으로 서리어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때와 자리가 마침 그럼직한 소치도 있겠지만) 남편은 그리하여 가고서 오지 못하고, 그런대로 믿음이요 위안이요 해야 할 오래비는 저렇듯 건강과 기개가 부실하여 저무는 해와 같이 한심하고 한 것을 생각하면, 나의 외로움이 새삼스럽게 몸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283
경순은 그리하여 마음이(평정을 놓칠 것까지야 없지만) 저으기 산란한 대로 오는 줄 모르게 무덤 , 옆을 당도하자 이내 어린 놈을 훨씬 추스려올려
 
284
“자아, 좀 보소! ……”
 
285
하면서 얼굴을 나란히 무덤을 향해 머물러 선다.
 
286
“……예가 아버지 산소라네. 그 알뜰헌 아버지! …… 아빠 소리두 한 번두 못허게 도망을 해버린, 밉디미운 아버지! …… 글쎄 요걸, 요렇게두 이쁘구 재롱스런 걸 가져다 한번 보지두 못허구서, 쯧쯧! …… 그대로 기섰으면 오죽이나, 오죽이나 이걸……”
 
287
경순은 어느덧 목이 잠기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린다. 울려니야 심외(心外)이었으나 비회가 서리던 차에 막상 새살거리고 있는 내 음성 내 말이 더럭 더 슬픔을 자아내고 말던 것이다.
 
288
경순은 두 볼에 눈물이 한 줄기 흐르는 대로, 구태라 억지할 것도 없이, 마음 가는 데 맡겨 슬픔에 잠기느라 어린 놈을 안은 채 조용히 몸을 흔들고 섰다.
 
289
어린 놈은 손에 만져지는 대로 어머니의 입술이며 젖은 뺨을 가지고 놀기에 세계가 새롭다. 경호는 누이의 거동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혼자서 저편으로 돌아가더니 묘비의 각자를 들여다보면서 인제 해 세울 제 비명(碑銘)을 생각하고 있다.
 
290
조용하고 다양한 오후의 햇볕은 아직도 늙을 날이 먼 듯 무덤 위에 한가로이 드리워 있다. (1939년 2월 9일 松都[송도]에서)
 
 
291
<文章[문장] 1939. 4월호 ; 蔡萬植短篇集[채만식단편집], 1939>
【원문】패배자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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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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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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