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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남매(男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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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1
채만식
1
이런 男妹[남매]
 
 
2
1. 高潔[고결]한 精神[정신]
 
3
하학종 소리가 때앵땡, 아래층에서 울려 올라온다.
 
4
사립으로 된 ××학교 육학년 교실이고, 칠판에는 분필로 커다랗게 다섯자만
 
5
“고결한 정신……”
 
6
교편을 뒷짐져 들고 교단 위를 오락가락하던 영섭은, 종소리에 바쁘게 교탁 앞에 가 멈춰서면서, 잠깐 그쳤던 말을 다시 이어, 일단 높은 음성으로
 
7
“……그러므로 사람이라껏은……”
 
8
하고 대강대강 거두잡아 결론을 맺기 시작한다.
 
9
“어떠한 경우를 당할지라도 그 고결한 정신 즉 높고 깨끗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단 말야……”
 
10
뚝 끊고서 아이들을(한 사십 명이나, 모두 고개를 되들고 앉아 선생의 입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휘휘휘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11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도 잘 알겠지만…… 저 동양의 대성 공자께서도 불의이 부차귀는 어아에 여부운이니라, 응? 그 뜻 알지?…… 의 아닌 그러니까 옳지 않은, 옳지 않은 일을 해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하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으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단 말야……”
 
12
또 말을 끊고, 입술에 침을 묻히고 나서(이야기는 도로 장황해 가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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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고 귀하게 되고 하는, 큰 불의만을 경계하는 건 아냐! …… 조고만한 일 가령……”
 
14
교탁 위로 채점부(採點簿) 옆에 놓인 토막 연필을 집어, 버쩍 쳐들어 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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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쓰던 연필 한 토막일지라도, 또는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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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팔을,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가리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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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흘린 동전 한푼이라도…… 그런 사소한 것일지라도…… 옳지 못한 것을 탐을 낸다던지 해서는 결단코 고결한 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란 말야…… 쌀이 없어서 한 끼 밥을 굶을지언정, 한 끼는 말고 열흘 스무 날을 먹지 못할지언정, 옳지 못한 일, 양심에 부끄러운 일, 남에게 치소를 당하는 일, 그런 일을 해서 배를 채우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해서는 안된단 말야…… 세상에는, 저 거리에를 나가 보면 그와 같이 옳지 못한 일을 해서,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능라 금수를 몸에 감고 뻐젓하게 나와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냔 말야…… 그러한 사람들은 비록 좋은 집에 살고 고량진미를 먹을망정, 비단옷을 입어 외양은 좋을망정, 정신으로 말하면 똥개천과 같이 더러운 사람들이란 말야……”
 
18
열을 내어 한참 말을 토하는 것이나 이맛살을 잔뜩 찡그림은, 끝의 누이동생 헤렌의 호사스런 양장 맵시가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19
따라서 그는 마음이 한 구석 부끄러우려고 했다. 그러나 강경하게 그것을 물리친다. 비록 동태 동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의를 끊은 지가 오래고, 마음으로도 그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20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고, 점심 벤또를 먹을 시간이라, 교실 안의 아이들은 모두 좀이 쑤시는 모양이다.
 
21
영섭은 그러나 상관하지 않고, 여태도 끝을 맺지 못한 ‘고결한 정신’의 훈화를 다시 잇댄다.
 
22
“……그렇기 때문에, 안자─공자님의 여러 어진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름이 높은 안자 그이로 말하면, 반소사 음수하고 곡괭이 침지라도 낙역재기중이라고, 공자님께서 칭찬을 하셨단 말야…… 집이 가난해서 밥 대신 나물을 먹고 물을 마시고, 베개 하나가 없어서 팔을 꼬부려 비고 잠을 자고, 그러면서도 낙은 그 중에 낙대루 있단 말야…… 그리고 그러한 것을 고결한 정신이라고 이르는 것이란 말야! 고결한 정신……그러니까 여러 사람들도……”
 
23
힘을 주어 부르짖으면서 쾅 교단을 한번 구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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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던지 그와 같은 고결한 정신을 저바리지 말고 항상 명심을 해야 한단 말야…… 그리함으로써 학교에 와서는 좋은 생도가 되어야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착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훌륭한 국민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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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을 맺고, 아이들을 휘익 한 바퀴 둘러본 뒤에
 
26
“……다아들 알았나? 내가 시방까지 하던 말…… 고결한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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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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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시원한 대답이 사십여 개의 입으로부터 일제히 울려나온다.
 
29
작문 시간이었었고 ‘고결한 정신’은 그 작문 문제로 낸 것이었었다.
 
30
영섭은 전에도 그러하듯이 이 ‘고결한 정신’도 아이들한테는 좀 어려운 작문 문제인 듯해서, 제작기 집에 가서 지어오도록 숙제로 해두고 시간중에는 문제의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었었다.
 
31
‘고결한 정신’으로 말하면 그런데, 영섭 자신이 그 고결한 정신의 절대 주장자이었었고 동시에 그를 실천 궁행을 하는 사람이었었고, 그러한만큼 평소에도 늘 직접 혹은 간접으로 아이들에게 그 정신을 도입(導入) 고취(鼓吹)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32
진실로 영섭에게는 ‘고결한 정신’이야말로 공자의 인(仁)보다도, 야소의 박애(博愛)보다도, 석가의 자비(慈悲) 보다도, 보다 기본적이요 동시에 더 높은 도덕이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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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고결한 정신’은 이를테면 그의 장기(長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어서 한번 그것을 갖다가 작문 문제로 내걸고 내용 설명을 하는 마당에서도 여느때의 그런 것과는 달라 단순한 기계적 해설에 그치지를 않고 스스로 열과 진정을 들여 일장의 간곡하고도 힘찬 훈화를 해 마지않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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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섭은 대답하는 아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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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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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고개를 끄덱끄덱, 한참 둘러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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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 알았지?…… 으음…… 작문은 그러면 집에 가서 지어 오고……에에 또 시방이 즘심시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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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39
“으음…… 그러면 즘심들 먹고…… 에! 급장, 직원실에 가서 선생님 벤또 가지구 와아.”
 
40
아이들과 같이 교실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영섭의 가끔 하는 친절이었다.
 
41
비로소 입의 해방을 받아, 아이들의 왁자지껄이는 소리에 섞여, 생철조각 딸그락거리는 소리, 벌써 째금째금 먹는 소리, 그중에는 쿵쿵거리고 물을 뜨러 나가는 놈 해서 모두 요란하였다.
 
42
새우젓 냄새, 장조림 냄새, 오이짠지 냄새, 콩자반 냄새, 깍두기 냄새, 구운 고기 냄새, 그것들이 한 가지 한 가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그것 죄다가 한데 버무려져서는 쩝쩌얼퀴퀴하니 자못 향기롭진 못하였다.
 
43
아이들 가운데 벤또가 없는 칠팔 명이나는 회만 동하게 우두커니 침을 삼키고 앉았을 며리가 없는 것이라, 하나씩 둘씩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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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벤또를 가지러 보내놓고 기다리는 동안, 교단의 걸상에 걸터앉아 무심히 한눈을 팔던 영섭은 나가는 아이들을 보자, 문득 생각이 나서, 얼른 교편을 들어 교탁을 따앙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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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내 말 듣고…… 다아들 도루 와서 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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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누구는 밥을 씹다가 말고, 누구는 밥을 떠넣느라고 입을 아아 벌린 채 모두들 우습게 생긴 형용을 해가지고 선생을 올려다보고, 나가던 아이들은 다시 제 자리로 제각기 돌아와서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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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즘심 먹고 나서, 아까 그 사람들, 월사금 못 바친 사람들 말야…… 그 사람들은 나가지 말구 교실에 남아 있어어? 할 말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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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고개만 몇이 수그러진다.
 
49
점심을 먹은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다 빠져나가고, 어느새 월사금 못 낸 아이 넷만 넓은 교실 안에 듬성듬성 떨어져 앉았다. 전반의 아이들에다 대면 어레미로 쳤어도 그렇게 잘 골라내기가 어려울 만큼, 얼굴의 영양이며 옷 입음새가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50
영섭은 늦게 시작한 벤또를 먹는 채, 네 아이를 교탁 앞으로 가까이 불러 앉힌다. 선생 앞에 바싹 와서 앉는 아이들은 더욱 고개가 깊이 숙는다.
 
51
“물어보나마나 다아 없으니깐 제때 못 내는 것이겠지만, 응?……”
 
52
영섭은 염소똥같이 새까만 콩자반을 날름날름 서너 번 집어다 먹으면서
 
53
“……그렇더래두 월사금 하나만은 제 달 제 달 바쳐야 하지 않나? 응? …… 많은 것두 아니고, 이 학교의 생도가 된 이상, 월사금을 바치는 건 그 생도 된 의무니까…… 응? 사람이 그렇게들 의무를 잘 실행하지 못해서야 쓰나?…… 자라서는 국민이 된 의무로 나라에 납세를 바쳐야 하고, 시방은 생도니까 다니는 학교에 월사금을 바치는 게 의무고, 응? 그런 걸 다아 알기는 알지? ”
 
54
네 아이는, 둘이만 목안엣 소리로 분명찮게 대답을 한다.
 
55
“물론 느이한테만 책임이 있다는 건 아냐…… 오히려 부모네가 잘못이지…… 아무리 가난하기루서니 자녀를 학교에 보낸 이상, 어떻게 해서던지 월사금을 내두룩 해야 할 텐데, 일반으로 조선 사람들은 아직도 책임 관념, 즉 의무 관념이 박약해! 대단히 재미 없는 일이야! …… 하다못해……”
 
56
밥을 큼직하게 한 덩이 저깔로 집어다가 넣으면서
 
57
“……집안 식구들이 밥을 한 끼 굶고서라도 자녀들의 월사금만은 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야, 들…… 더구나 이 학교로 말하면 세상이 다아 아는 바와 같이, 나라에서 세운 학교가 아니라, 설립자요 교주이신 박교장 선생님께서 당신의 사사 재물을 내서, 제군으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얻두룩 이 학교를 설립하신 게 아닌가?…… 그런 만침 학교의 재정도 넉넉하지가 못해서, 느이들이 모두 그렇게 월사금을 잘 내지 않던지 하면, 학교를 지탱해 나갈 수가 없단 말야…… 여러가지 경비도 써야 하지? 또오, 선생님들도 박하나마 제때 제때 월급을 타야만 밥을 해먹고……”
 
58
공교롭달까, 영섭은 다 먹고 한 덩이 남은 벤또의 밥을 저깔로 꿰어다가 입에 널름 넣으면서
 
59
“……밥을 먹어야, 학교엘 나와서 느이들한테 글을 배워 주시지?…… 어떡허나? 선생님들은 월급을 못 타서 밥을 굶고 학교에는 분필 한 토막도 못 사서 칠판에다가 느이들더러 보라고 글씨도 못 써주고, 그렇게 되면 어떡허나? 응?……”
 
 
60
직원실로 돌아온 영섭은, 다른 동료들이 벌써 월급을 탄 것을 보고, 회계한테 가서 월급봉투를 받았다. 부조며 그 밖에 이것저것을 다 잡아 까고 나머지가 사십일 원 몇십 전이었었다.(사십오 원의 월급인데) 전달까지만 해도 이 사십 원 각수의 월급봉투를 받아 쥐는 때의 영섭의 마음은 어두웠었다.
 
61
집세가 십 원이요, 쌀 한 가마니에 이십 원이나 가는 이 당철에, 위로 노모(老母)와 제네들 내외에 금년부터 소학교에 입학을 한 맨 큰놈을 비롯하여 어린것들이 셋, 그래서 도합 여섯 권솔이 한 달 동안을 살아가자 하매, 사십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는 최소한도로 용을 줄여도 오히려 부족이 생겨, 매삭 고만큼씩은 빚이 늘어가곤 했었다.
 
62
하던 것이, 요행 그러한 경제적 곤경도 얼마쯤은 더얼하고 더우기나 시간의 여유가 조금은 더 넉넉하여 내 공부를 할 수가 있는, 어느 제약회사에(지배인을 친히 하는 반연으로) 자리 하나를 얻어 새 달부터는 그리로 옮아앉기로 제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참이고, 그런만큼 오늘만은 시장스런 월급을 받아든 마음도 그다지 우울하지는 않던 것이다.
 
 
63
영섭은 일찌기, 중학을 마치던 길로 삼 년 동안이나 만주의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방랑생활을 했었다.
 
64
영섭 같은 리얼리스트가 실속도 없는 방랑생활이라니 제 격이 아닌 것이었지만, 부친은 인력거를 끌고 모친은 빨래 품팔이를 하여가면서 근근히 중학 하나를 마치게는 해주었어도, 그 이상 더는 뒤를 댈 가량이 없자, 남달리 학문에 욕심이 과하던 영섭은, 일종의 실망과 울화로 그 거조를 내기는 냈던 것이었었다.
 
65
만주는 넓고, 소위 건설 도정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손끝에 전문적인 특수기술을 지니지 못한 이상, ‘고결한 정신’을 도창하도록 꼼꼼하게만 생긴 영섭에게는, 아편 밀매나 금제품의 밀수를 해먹을 인물이 못되는 만큼, 시(詩)조차 없는 싱거운 방랑이었지, 삼 년은 말고 삼십 년을 돌아다닌댔자, 그를 용납하여 몸과 마음을 갈앉혀 줄 천지는 아니었었다.
 
66
만주말을 따듬따듬 말할 줄 아는 것과, 어떻게 해서든지 독학으로라도 공부를 하여 변호사 시험을 치르겠다는 결심과, 이 두 가지의(삼 년 동안 만주를 방랑한) 소득을 안고서 고향인 경성으로 돌아온 것이 재작년 봄……
 
67
돌아와 본즉 부친은 그 전 해 여름에 이미 저승길을 떠났고, 큰 누이 동생 혜옥은 부친이 서둘러 별세하기 바로 얼마 전에 같은 어떤 인력거꾼한테로 시집을 보냈었고……
 
68
윤서방─영섭의 부친은 늘 인력거까지 끌어 자식을 공부를 시켰더니 저는 저대로 기도 맥도 없이 도망을 가서, 늙어가는 부모는 돌보려고도 않는다고 후회와 분개를 했었고, 딸 혜옥도,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더라면서 인력거꾼의 자식은 인력거꾼과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영섭에게 대한 분풀이삼아 그런 자리로 시집을 보냈던 것이었었다.
 
69
끝엣 누이동생 혜련은 그리고 그 전 해 가을부터 ‘헤렌’이라는 이름으로 종로에 있는 어떤 카페의 여급이 되어가지고, 모친과 영섭의 안해 및 두 조카를 근간히 부양하고 있었다.
 
70
영섭은 혜옥을 인력거꾼에게로 시집을 보낸 것도 찬성은 하지 못했으나, 혜련이 동네의 넝마장수에게서 혼인말이 있는 것을 박차고 카페의 여급이 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여 그를 꾸짖었다.
 
71
동시에 단연 그것을 작파하도록 명령을 하였다.
 
72
물론 이튿날부터의 양식조차 가량이 없이 맨손으로 돌아온 영섭이었었다. 그러나 그대로 앉아서 굶을지언정, 카페의 여급은 용서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었다.
 
73
혜련에게는, 부모의 피땀을 빨아먹어 가면서 십여 년이나 공부를 하고서도, 쓸데없이 만주로나 돌아다니느라고 집안을 불고한, 그러고도 수중에 동전 한푼 없이 돌아온 오래비 명색의 ‘고결한 정신’이나 동갈(恫喝) 같은 것은, 매일 카페에 나가서 수없이 보는 술주정꾼들의 횡설수설만큼도 못한 것이었었다.
 
74
며칠 두고 갈등이 있던 끝에 혜련은 집을 나가고 말았다. 그는 모친을 데리고 나가려 했으나, 모친은 대대로 두고 제사를 지내 줄 수 있는 자식에게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아니했다.
 
75
영섭은 그 이튿날부터 석 달 장간을, 하루 한 끼를 먹기가 어렵게 지내다가 겨우 모교 교장의 알선으로 직업을 얻은 것이 시방의 이 사립 ××학교 교원 자리였었다. 그것도 중학 하나는 정규로 마쳤다는 자격과, 만주에서 한 일 년이나는 소학교 교원 노릇을 해먹은 이력이 있는 덕택이었었다.
 
76
한 것이 재작년 유월부터니, 인제 꼬박 이 년……
 
77
그동안 영섭은 법률강의록과 법학서적과 육법전서를 외우기와, 즉 변호사 시험을 치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아니했었다.
 
78
그러나 월급은 박한데다가 소학교의 교원생활로는, 오후와 밤으로 제 시간을 가지기가 용이한 것이 아니었었다. 해서 항상, 보다 나은 자리를 얻자고 기회를 엿보아오던 중 마침내 그와 같이 경제적으로든지 제 시간을 좀더 넉넉히 낼 수가 있는 것으로든지, 두루 다 유리한 구멍 하나를 뚫게 되었던 것이었었다.
 
79
영섭은 벌써 지난 달부터 사려고 벼르던 책 한 권을 주문을 할까 했으나, 마침 생각하니 내일이 모친의 생일인데 다만 고기 두어 근에 국수 한밥사리라도 사야 하겠어서, 할 수 없이 월급봉투를 그대로 접어넣었다.
 
80
그리고서 마악 자리에 앉으려다가 보니까 큰 누이동생 혜옥에게서 사람이 왔다. 전에도 몇번 쪽지를 가지고 오던 이웃집 계집아인데 깨웃이 직원실 안을 들여다보는 게 벌써 갈데없었다.
 
81
다 알 조요, 그래서 이맛살이 먼저 찌푸려지는 것이나, 마지못해 밖으로 나와서 꼬기작꼬기작한 쪽지를 받아 펴본다.
 
82
“생각다 생각다 못하여 염치 없는 기별을 또 합니다. 어린것마저 앓기 시작하더니 어제 저녁부터는 자꾸만 경풍을 하여요. 약이나 한 첩 지어다가 대려 멕이고자 하오니 일 원 한 장만 보내 주시면 오라버님 은혜 태산보다 높겠어요.”
 
83
남녀간에 사람이 궁이 끼면, 익혔던 글씨까지 주접이 드는 것인지, 명색 보통학교도 육학년은 마쳤으면서 연필로다가 오불꼬불 지렁이 기어간 형용을 그려 꼴이 알아보기에 장히 힘이 들었다.
 
84
영섭은 허리를 짚고 우두커니 먼산을 바라다보고 서서, 이맛살은 터질 듯 더 찌푸린 채 말이 없다.
 
85
화가 더벅더벅 나는 것이었었다.
 
86
넉넉하기만 하다면야 아무려나 친동기간이요 하니 고만 것을 동정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약삭빠른 수입을 가지고 내게 딸린 식구만 먹여살리기도 옹색해 죽을 지경인데, 이건 가끔 쪽지질을 해서는, 일 원 이 원 이렇게 뜯어가곤 하니 대관절 어떡허란 말이냔 말이었다.
 
87
그러나마 한 번 두 번의 동정으로 그 가난, 그 병이 구조가 될세말이지, 사실상 홍로점설이요 한강투석인데야……
 
88
또 따지고 보면, 누이동생만은 나의 동기간이라고 한다지만, 그 동기간인 것을 이유로 돈을 얻어가는, 그 돈을 정작 쓰는 데로 말하면, 매제니 생질이니 하더라도 타성(他姓)바지에 아무 상관도 없는 딴 남인걸, 그 남을 위해서 쓰는 데야 생색조차 나지 않는 동정이 아니냔 말이었다.
 
89
인력거꾼 강아무개(姜某 즉 妺弟)라는 사람이, 가난하고 병들고 그 자식이 경풍을 하고 하는 것이 물론 그네들의 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윤영섭이가, 제 앞도 변변히 가리지 못하는 터수에, 주제넘게 나서서 동정이니 구제니 할 책임이나 의무는 더욱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른 체 거절을 해도 결코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해쌓다가 빚이나 더끔더끔 더 걸머지고는 못 갚든지 하는 날이면 그때야말로 ‘고결한 정신’은 진흙칠을 하고 말게 될 것이다.
 
90
그런 일 저런 일 생각하면, 그저 입 싹 씻고 모르쇠를 할 일이지만, 그래도 핏줄이 무엇인지, 누이동생의 추렷한 얼굴이 눈에 밟히면서 불쌍한 생각이 한편으로는 들지 않질 못하였다.
 
91
오냐, 이번까지만(일 원 한 장이니) 집어주고, 그러나 이 다음부터는 천하 없어도 안될 말이다고, 양복저고리 속 포켓에서 월급봉투를 꺼내들고 보니까 월급날을 꼬옥 여새겼다가 마침맞게 쪽지질을 하고 앉았는 심사가 밉살스러서 다시금 화가 또 나는 것이었었다.
 
 

 
92
2.배고픈 精神[정신]
 
93
계동(桂洞) 긴 골목을 중간쯤 올라가다가 왼편길 옆으로 있는 행랑채의 행랑방……
 
94
밖에서 보면 길로 들창이 나고, 대문 안을 들어서면 세상 너저분한 부등갱이들이 시꺼멓게 철매 낀 바람벽 밑으로 먼지와 더불어 동거를 하고 있고, 솥단지가 걸린 부뚜막에서 조금만 비껴 디딤돌 위로 방문이 달리고, 방안은 천년 묵은 도배지에 빈대피로 댓잎을 하나 가득 쳐놓았고, 석유상자에다가 누더기 이불을 올려놓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서울이면 어디를 가나 한 모양으로 생긴 행랑방이었다.
 
95
혜옥…… 실상은 인력거꾼 강서방네요 근자에는 자식의 이름을 따서 노마네가 되었고, 남은커녕 제 자신이 제 이름을 잊은 지 오랜 그 혜옥이었다. 또 사실은 행랑방 살림을 하는 인력거꾼의 아낙일 바이면, 뉘집 아가씨가 젊은 신식 부인네처럼 무슨 옥이니 무슨 순이니 이름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차라리 강서방네라든가 노마네 혹은 노마어멈 등속이 수수하니 제 격에 맞을는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96
그 혜옥이던, 강시방네 아낙 노마네는, 꽁꽁 앓는 젖먹이를 품에 안고 앉아 시방 한숨이 잦다.
 
97
들창을 열어서 떠받쳐 놓았으나 방안은 그대로 어두컴컴하고, 바람 한점 들어오질 않아 숨이 막히게 덥다.
 
98
강서방은 방금까지 끙끙 앓는 소리를 하더니 그새 잠이 들엇느지.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숨소리만 고달프다. 머리맡에는 그래도 약병이야, 약봉지 등속이 놓여는 있고……
 
99
바른편 옆구리가 담이 결리는 걸로 시작된 병이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받고서 영영 자리에 누운 것이 그럭저럭 석 달이 가까와 온다. 그렇기 때문에 가솔린이 모자라 자동차가 코를 고는 이 당철, 일찌기는 그 자동차 등쌀에 파리를 날리던 인력거가 도로 득세를 하여, 벌이가 한참 좋으네 어쩌네 하는 것도,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는 강서방한테는 듣기에 괜히 속이나 상하는 소리지 아무 소용도 없는 노릇이었었다.
 
100
소 같은 장정이 허파가 늘어나도록 달음박질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던 것을, 여편네 노마네가 대신 나서서 약간 빨래품팔이 따위로 생계를 도모하자니 밥을 약먹듯 하고 지내는 판이었다.
 
101
그러니 어느 해가에 약을 꾸준히 대고, 더우기나 보약 같은 것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일이었었다.
 
102
하던 중에 또 엎친 데 덮치더라고, 어린것이 마저 병이 나 가지고는 필경 눈을 뒤집어쓰고 경풍까지 하니, 언제라야 그 목숨들이 살라는 목숨일까마는, 마구 죽어라 죽어라 하였다.
 
 
103
오래비 영섭에게 쪽지를 적어 보내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마음은 대단히 초조하였다.
 
104
어린것은 풍이 인 끝에 불에 덴 듯 울고 보채더니 고패가 지나자, 기운이 지쳐 눈을 따악 감고 앓는 소리만(듣기에도) 힘이 든다.
 
105
이대로 잿불 사그라지듯이 소리도 없이 죽지나 않는가 싶어, 자꾸만 얼굴이 들여다보인다.
 
106
마음이 그대도록 경황이 없는 중에도 어제 저녁부터 굶은 배는 염치없이 고프고……
 
107
다른 것은, 가령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는 매맞기라도 두고두고 단련을 해나면 고통이 차차로 덜하는 법인데, 굶기 한가지만은, 굶으면 굶을수록 더 견디기가 어려우니 경험도 다 소용이 없었다.
 
108
시장해서 기운이 없는 탓인지 땀만 샘솟듯 흘러 휘휘 감기는 당목 고쟁이가 미치게 답답하고, 등과 어깨가 갈가리 나간 인조항라 적삼은 살에 가 달라붙어 떨어지지도 않는다.
 
109
그래도 나들이를 할 채비로 머리는 가려 빗었다. 닦달이나 잘하고 옷이라도 곱게 입혀 내놓으면, 그리고 마음이나 번화하여 표정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다지 추물 축에는 들지 않을 인물이었다.
 
110
강서방은 오후가 되자 열이 또 오르기 시작하는지
 
111
“아이구 아이구 아이구우!”
 
112
하면서 바스라질 듯 신음소리를 내다가 눈을 뜬다.
 
113
“여태 아니 왔나?”
 
114
휘휘 둘러보다가 묻는 말이다.
 
115
“아니 왔다우! …… 허탕을 하는지……”
 
116
“제에길! ……”
 
117
강서방은, 역정스럽게 두런거리면서 도로 눈을 감고, 타는 입술에 침을 묻히다가 또 부르대듯
 
118
“뭣 좀 시언한 거라두 없나?”
 
119
“시언한 것이 뭐 있수? 냉수밖에는……”
 
120
노마네는 딱한 소리도 다 한다고 쏘아주려다가, 차마 좋게 대답을 하느라고 하던 것이나, 그래도 음성은 은연중 모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제에길, 없는 걸 누가 억지루 달래나? 우랄지게!”
 
121
“내가 어쨌다구 괜히 그러슈? …… 내가 뭐 길길이 쌓아두구서 아니해 주어예지 말이지! …… 나두 엊저녁버틈 여태 굶구 앉았다우…… 자식은 방금 죽어가구…… 사람이 시방……”
 
122
“잘한다! 정칠 년!…… 둔 못 버는 사내가 워너니 사내값에 갈라더냐! 우랄질 년!…… 이년아, 남의 기집들은 사내가 둔 뭇 벌면, 기집이 척척 나가설랑 다아 벌어다가 멕여두 살리구, 앓는다치면 병수발두 들구 하더라!…… 무어냐? 너는 명색이……”
 
123
노마네는 그새 벌써 몇번째 듣는 포악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친정과 동생(혜련)에게서 돈을 뜯어오지 않는다고, 그 원망엣 소리로만 알아들었지 그 이상 더 야비스런 뜻이 머금겨 있는 줄은 통히 알지 못하였다.
 
124
그렇듯 선의의 오해를 하고 듣더라도 썩 추앙할 수 있는 심정은 아니어서, 가뜩이나 없는 정이 더 멀어지는 것이었었다.
 
125
물론 그런 게 아니라도 노마네는 같이 사는 사내요, 그래서 이름이 가시버시요 하여서 남들이 그러하고 법이 그러한 대로 그저 같이 살아갈 따름이요, 또 그 밖에는 달리 어떻게 하잘 이심(異心)은 나지도 않고, 먹으려고도 않고 하기는 하는 터이지만, 그러나 이 사내에게 대하여 무슨 의리나 깊은 애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었다.
 
126
더우기 자식 하나를 낳아 거기에 비로소 에마로서의 정이 함빡 쏟혀지면서부터는 가만히 생각하면 사내에게 대한 저의 애정은 도무지 하잘게없던 것이었음을 절로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7
교동(校洞)의 한약국을 나선 노마네는, 울고 싶도록 막막한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라, 길 옆으로 비껴서서 두루 망설였다.
 
128
영섭에게서 요행 일 원 한 장을 보내주어, 그것을 받았을 때만은 기뻤으나 급기야 어린 것을 들쳐 업고 약국에를 와서 진맥을 하고 나니까.
 
129
우황청심환 한 개와 탕약 세 첩을 지어 내놓는데, 환약값이 삼 원 이십 전, 탕약이 일 원 이십 전, 도합 사 원 사십 전이었었다.
 
130
그저께 약 세 첩을 지어가면서 오십 전이나 달린 게 있는데, 또 웬만해야 말이지 사 원 사십 전어치나 되는 약을, 단돈 일 원을 내놓고 달라고 할 염치는 나지가 않았었다.
 
131
날은 가뜩이나 더운데, 어린것은 등에서 울고 보채고, 마음은 자꾸만 더 답답하기만 하였다.
 
132
인제 한 군데 꼭 바랄 곳이라고는, 서소문정으로 동생 혜련을 찾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또 가기만 가면 돈이나 한 삼사 원은 얼른 내줄 것이니 믿음직하기도 하였다.
 
133
그러나 차마 가서, 돈 말을 낼 염치가 없었다.
 
134
요 전번에 십 원을 얻어다가 강서방의 병원 약값을 얼마간 불고, 석달이나 밀린 방세를 우선 한 달치만 치르고 한 지가 열흘이 다 못되었다.
 
135
그뿐만 아니라, 그새 석 달 동안 두고 쩍하면 쫓아가서는 얻어다 쓰고 얻어다 쓰고 한 것이 도합 백 원도 넘는 성불렀다.
 
136
최근 석 달은 돈 십 원씩 혹은 칠팔 원씩 제가 주어서 쓰기도 하고 얻어다 쓰기도 하고 해왔었다.
 
137
하되, 그러는족족 싫은 눈치 한 번 보이지 않는 그 동생이었었다.
 
138
그러한만큼 오늘 아까 먼저에도, 보나 안보나 끙짜를 할 오래비 영섭보다는 차라리 혜련을 생각하기는 했었으나, 죽도록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 못했던 것이었었다.
 
 

 
139
3. 호강하는 精神[정신]
 
140
서소문정 ××아파트, 저편짝 가로 있는 혜련 즉 ‘헤렌’의 방……
 
141
헤렌은 하얀 부사견 바탕에 파랑줄이 굵게 져내린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서 아직도 잠이 깨지 않았다. 오후 한시가 가깝다지만 물론 헤렌 같은 여자에게는 시방이 한새벽쯤 되었다.
 
142
더블벳은 아니라도 베개는 또 하나 놓이고, 처네 자락도 금새 인간이 한몸뚱이 빠져나간 자리가 완연하였다.
 
143
그 침대에서 빠져나간 인간이 시방 양복장문을 열어젖히고 복장을 갖추기에 한참이었다.
 
144
양복장 문 안쪽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넥타이를 매고 섰는데, 잠뱅이 위에 와이샤쓰 자락이 드리운 그 밑으로 너벅다리를 지나, 그리 굵지는 못해도 사십객(四十客) 답게 털이 숭얼숭얼한 장딴지를, 꼭 눌린 양말 대님에 매어 구두 버선목이 엇비슷하게 반만 가리었다.
 
145
헤렌의 하나, 둘, 셋, 에 있는 ‘작자’가운데, 제일호(第一號)인 최(崔)였다.
 
146
아사 양복바지를 꿰어, 역시 새하얀 아사 와이샤쓰 어깨에 얇고 좁다란 멜빵을 메고 나서 저고리를 떼어 입은 뒤에 마지막 값비싼 진자 파나마 모자를 가만히 머리에 얹고 나니까 정히 신사다.
 
147
비로소 뒤를 돌려다보는데, 코 밑에 몽당수염과 가무잡잡한 살빛이며 파르스름하나 두꺼운 입술이, 우선 보매 상당하다.
 
148
물론 부르조아 타입은 아니나, 인제 오래잖아 배는 얼마큼 나옴직해 보인다. 궁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최는(단장 대신이리라) 양복 저고리에서 부채를 뽑아 방안의 무더운 공기를 부치면서 침대. 옆으로 다가오더니
 
149
“여바? 여바!”
 
150
하고 가만가만 헤렌의 팔을 흔들면서 부른다.
 
151
헤렌은 시일실 감기는 눈을 가까스로 뜨다가 불끈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내뱉고 한다.
 
152
“나, 가아.”
 
153
“가아?”
 
154
“응.”
 
155
사내는 죄꼼 미련겹게 계집을 내려다보다가 돌아선다.
 
156
“아듀우!”
 
157
헤렌이 눈을 감은 채 때꾼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158
최도 그대로 걸어나가면서 마주
 
159
“아듀우!”
 
160
“아이, 차으음! ……”
 
161
헤렌이 문득 생각이 나서, 팔을 뻗혀 손가락을 오물오물 사내를 부른다.
 
162
최는 돌려다보더니, 빨리듯 침대 옆으로 걸어온다.
 
163
“나 고쓰까이 하나두 없어어!”
 
164
“으응, 고쓰까이!”
 
165
최는 지갑을 꺼내더니 있는 대로 십원짜리 석 장을 머리의 둥근 손탁자 위에다 내놓는다.
 
166
“……어제 저녁에, 어떻게 큰놈 한 장을 다아 털구, 요거야!”
 
167
“그거믄 돼!”
 
168
“모자라거던 이따가라두 전화 걸면, 멧센자 시켜서 보내께……”
 
169
“응, 봐서…… 그리구 저녁에 미세에 와아?”
 
170
“아, 참…… 네시 아까쓰끼루 대구까지 좀 다녀와야겠구면……”
 
171
“으응…… 그럼 언제 돌아오구?”
 
172
“내일.”
 
173
“으응…… 그럼 오미야게 많이, 응?”
 
174
“한 차판 실구 오지.”
 
175
사내와 거진 엇갈리듯 형이 찾아왔다.
 
176
헤렌은 다시 잠이 들려고 하다가, 대답 소리에 조심조심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형을 보고는 발딱 일어나 앉는다.
 
177
앉으면서 형의 얼굴을 한번 훑어보다가 단박 한단 소리가
 
178
“언니, 또 두어 끼 굶었구려?”
 
179
“굶긴 왜 굶어어!”
 
180
반색을 하는 것이나 노마네의 목소리는 목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181
“흥! 보믄 모를까!…… 어디 보자? 노마 왔니?”
 
182
헤렌은 생질놈을 안자고 두 팔을 벌인다.
 
183
“노만지 노샌지!…… 다아 죽어간단다!”
 
184
“왜? 응? 앓우?”
 
185
“경풍을 허구…… ”
 
186
“그런데 저렇게 없구 다녀? 이 더운 폭양에! ……”
 
187
헤렌은 뛰어내려와서 어린것을 들여다본다. 잠이 들었는지 지쳐서 기운이 없는지, 눈을 감고 숨만 가늘게 내쉰다.
 
188
“……그래, 약은? 병원은?”
 
189
“그리잖어두 약국에 왔다가……”
 
190
“응? ……”
 
191
“………”
 
192
“돈이 없던 거루군?…… 내 온! …… 왜 진작 나한테루 오들랑 않구서…… 아가아? 노마야? 노마야?”
 
193
어린것은 눈만 떠보다가 도로 감는다.
 
194
헤렌은 방금 최가 손탁자 위에다가 내놓고 간 돈에서 십 원 두 장을 집어 형에게 쥐어주면서, 얼른 병원이고 약국이고, 가보라고 등을 밀어낸다.
 
195
“이걸 육장 와서는, 이래싸서 어떡허니!”
 
196
노마네는 비죽비죽 손등으로 눈물을 씻는다.
 
197
“체에! 언니한테나 돈이 귀하구, 또 고만 돈이 대단하지 나두 그런가? 머……”
 
198
“그래두 얘야!…… 너두 돈이 생기거던 잘 모았다가 시집두 가구……”
 
199
“하하하!…… 아하하하하…… 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우?……”
 
200
호사스런 생활의 차림새하며 기분도 명랑한 헤렌과 노마네의 그 흉악한 주제 꼬락서니하며 몸에서 푸욱 지르는 악취하며 근천스럽고 시든 표정 하며가 썩 구경스러운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었다.
 
201
일단 돌아가고 있던 노마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여다보면서
 
202
“내일이 어머니 생신인데, 좀 안 가 볼늬?”
 
203
하고 묻는다.
 
204
헤렌은 발을 대롱대롱 침대에 걸터앉아서 고개를 내흔든다.
 
205
“샌님 꼬락사니 보기 싫여서……”
 
206
“오라버니 보러 가나? 어머니 위해서 가는 거지.”
 
207
“건 그렇지만서두…… 아무턴지 오늘 저녁에 생각해 봐서……”
 
208
“생각할 것 무엇 있어!…… 안 가믄 어머니가 조옴 섭섭하시까!”
 
209
대답이 없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 노마네는 문을 닫는다.
 
210
“쯧쯧! 이유 없는 ‘춘향이’!……”
 
211
헤렌은 방안에서 혼자 형더러 혀를 찬다.
 
 

 
212
4. 이런 男妺[남매]
 
213
헤렌은 모친과 올케와 형이 서로가람 만류를 하여서, 이왕 온 길이니 같이들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일어서면 붙잡고 일어서면 붙잡고 하는 바람에 번번이 주저앉고 한 것이 그럭저럭 석양때가 다 되었다.
 
214
그렇다고 정작 저녁을 먹자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또 아무리 말리고 붙잡기로서니(뉘 고집인데) 뿌리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돌아가면 막상 오래비 영섭의 눈에 뜨일까 겁이 나서(살짝 왔다가는) 얼른 도망을 가는 것같이 보일 무엇도 없지 않을 성불러, 그래 카페에는 일찍 나가야 할 차례면서도 위정 늑장을 부리는 속이던 것이었었다.
 
215
모친이나 올케나 형이나는 또, 그들 역시 헤렌에게 한 끼의 저녁을 먹이기가 큰 것이 아니라, 영섭이 돌아와, 헤렌을 보고도 요행 전같이 노염을 내떨지 않으면 그것을 기회로 차차 남매간에 화해가 되겠거니 하는 선량한 계책들이었었다.
 
216
해서 안타까이 붙잡아 앉히기는 앉혔어도, 그러나 일변 조그마한 이모험이 반대로 큰 풍파를 다시금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여, 애가 타는 불안이 크지 않질 못하였다.
 
217
헤렌은 진짜 비단으로 모친의 옷감 일습과 귀한 과실을 많이 사가지고 와서 식구가 모여앉아 한 차례 잘들 먹었었는데, 또다시 제가 문밖거리의 가게에 나가 참외 수박이며 사이다 같은 것을 소담스럽게 사 들여다놓고 둘러앉아 먹고 있느라니까 마침내 영섭이 학교로부터 돌아왔다.
 
218
얼각대문 안으로 무심코 들어오던 영섭은 마루에 여럿과 같이 앉아 낭자히 참외 수박을 먹고 있는 헤렌을 알아보자, 그대로 주춤 멈춰서면서 단박 입술을 꽉 다물고 눈쌀이 패앵팽하여졌다.
 
219
헤렌은 해끗 돌려다보고는 도로 천연덕스럽게 먹던 수박을 먹고 앉았고.
 
220
모친과 나머지 둘은 아이들까지 벌떡벌떡 일어서서 영섭의 입으로부터 무슨 말이 떨어지기까지의 순간을 애를 바직바직 태우면서 기다린다.
 
221
“너, 내 집에 왜 왔늬?”
 
222
몇 걸음 안되는 마당을 척척 걸어 들어오면서, 다잡듯 지르는 소리였다.
 
223
“왜? 오빠 보러 온 줄 아슈? 우리 어머니 보러 왔지.”
 
224
헤렌은 아기똥하니 앉아서 대답이고, 그동안 영섭은 저편 마룻전에 가 털썩 걸터앉는다. 앉아서도 눈은 이내 헤렌의 덜미를 흘겨보면서
 
225
“너허구 나허구는 동기간 의를 끊었어! 그런데 네가 왜 내 집 문안에 발걸음이야?”
 
226
“윤영섭씨허구 윤혜련이허구 의를 끊었지, 나허구 우리 어머니허구두 모녀간 의를 끊었답디까?”
 
227
“너는 안 끊었다구 앙탈을 해두 절루 다아 끊졌어! 너 같은 것은 우리 어머니 자식두 아니야!”
 
228
“오백날 앉어서 염불하듯기 소래길 질러보시우? 내가 우리 어머니 딸이 안 뒈지구, 나허구 우리 어머니허구 의가 끊져지나……”
 
229
“얘들아! 제발 이러지들 좀 마라! ……”
 
230
모친이 겨우 나서서 애걸하듯 말리자고 타이른다.
 
231
“오늘이나 내가 하루 맘이 편하까 했더니 늬들이 들어서 필경 또 큰 소리를 내서 나를 이렇게 폭폭하게 하는구나…… 얘야! 혜련아, 네가 오라범더러 잘못했다구 빌려무나! 워너니 손아랫놈이 어디서 오라범한테 그렇게 떠받구 나서는 법이 있다더냐…… 그리구 애아범, 너두 참어라. 참구 그만 용서를 해주려므나!…… 저것이, 저 어린것이……”
 
232
눈물이 떨어지면서, 비죽비죽 울음 섞인 말로
 
233
“……저 혼자 떠돌아댕기면서 외롭긴들 오죽 외로우며, 같은 서울 안에다가 버젓한 부모 동기간을 두어두구서, 어린것이, 어린것이……”
 
234
모친은 마침내 목이 메어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울고, 영섭의 아낙과 노마네도 눈에 눈물이 괴고, 헤렌도 손수건으로 얼른 눈을 씻는다.
 
235
“어머닌 별걸 다아 가지구 걱정을 하시우……”
 
236
영섭의 기승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다.
 
237
“……아니, 너 당장에 물러가지 않구서, 이럭허구 있을 테냐?”
 
238
“흐응! 제에발 좀 있으라구 떡을 한 섬에치만 쪄놓구 빌어보지요?…… 더럽구 든적스런……”
 
239
“뭣이야? 네 아굴찌루다 누구더러 더럽단 말이 나와?”
 
240
헤렌은 그새 벌써 유유하게, 수건에 손을 씻고 모자를 찾아 쓰고, 마루가로 나와 걸터앉아 구두를 꿰면서
 
241
“왜? 내가 어때서요?…… 카페 여급이구, 화냥질한다구……그게 어때서요? 역적도모요? 서방을 두어두구서 하는 짓이우? …… 나는 나 좋으니 그만입디다!”
 
242
“아니, 저! 아, 뭣이 어째?”
 
243
“바루 이 앞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여자들 귀에다 대구 가만히 좀 물어보시우? 그중에서 배고푸구 헐벗구 고생하는 여자면, 열이면 열 다아 기생 여급 신세가 부럽다구 아니하나!”
 
244
헤렌은 구두를 토방으로 내려서더니, 얼른 웃는 낯으로 모친과 올케와 형이며 아이들을 둘러보면서
 
245
“어머니, 나 가요오…… 또 오께에…… 언디들두 잘 있수우…… 작은 언니 놀러오우…… 잘들 있거라아!”
 
246
골고루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에는, 잔뜩 외면을 하고 앉았는 영섭에게로 깜찍스럽게 고개를 돌려댄다.
 
247
“안녕히 계십시요, 깨끗하신 군자님!…… 그리구, 미안하지만 실지루 산 증거가 있으니, 저 혜옥 언니를 좀 연구해 보시지요? 그럴라치면 아무리 둔한 신경이라두 죄꼼 깨우치는 게 있을 테니깐요,”
 
248
빈정거려 주고는 회똑회똑 마당으로 내려서서 걸어나간다.
 
249
영섭은 지지 않고
 
250
“너보담은 나아…… 너보담은 깨끗해…… 밥은 굶을망정 정신적으로는 만족을 하구 자긍이 있어!”
 
251
헤렌은 싹 돌아서더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물끄러미 영섭을 건너다본다.
 
252
“네에! 제발 그것 말씀인데, 그렇지만 잘못 보섰읍니다! 억지의 말씀이십니다!…… 물질적으로는 머 말할 것두 없구…… 정신적으루두 파리 족통만한 만족이나 위안이나 자긍이나, 다아 없답니다요.”
 
253
“네 양심 같은 줄 아느냐? 버젓하게 있단다!”
 
254
“어 없어요!”
 
255
“있어!”
 
256
“어 없어요!”
 
257
“있어.”
 
258
영섭은 어느 겨를에 벌떡 일어서서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지고 마주 우김질이었다.
 
259
“어 없어요!…… 배는 고프지요? 헐벗지요? 남편이란 것은 무지막지한 노동자지요? 자식은 병이 나서 방금 죽어가두 약 한 첩 지어다 멕일 마련이 없지요?…… 그리구두 만족? 그리구두 위안? 그리구두 자긍?…… 없어요! 있을 택이 없어요!”
 
260
“너 같은 계집이면……”
 
261
“……그러니 아무 의미두 없구, 소득두 없는 짓이지요, 그러구서 그 덕은 누가 보는지나 아시우?…… 모른다면 가르켜 드리지요…… 그 사람네가 애꿎이 도덕을 지켜서, 무지하게 선량해서 말씀이여요……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해서 말씀이여요…… 이익을 보는 건 세상뿐이랍니다요?…… 질서가 유지가 되구 도덕 체껏이 시행이 되구 하는 덕택에요!”
 
262
“갓!”
 
263
영섭은 당장 쫓아내려와서 쳐죽이고 싶은 듯이 노리고 섰다가 발을 꽝 구르면서 팔을 번쩍 들어 일각대문께를 가리킨다.
 
264
“간다는데두 이 야단이시우!…… 그렇지만 하던 말은 마저 하구요…… 그래서 말씀이여요, 나는 말씀이여요. 인력거꾼이나 넝마장수나 노동자 기집 돼가지구, 새상 돼지만두 못한 고생 하면서 정신적으루두 아무 만족두 위안두 자긍두 없이 사는 것보다는 말씀이여요. 이왕이면 잡년이라두 좋구 화냥년두 좋으니 돈 벌어서 잘 먹구 잘 입구 편안히 지내는게, 세상이야 어디루 갔던지, 내 한몸뚱이한테는 충실하니깐 되려 만족이구 자랑이랍니다요…… 배고푼 창자를 틀켜쥐구두 도덕인가요? 제가 방금 죽어두 세상만 도덕이 섰으면 그만인가요?…… 흥! 세상에서 명색 잘났다는 놈일수록 제멋대루, 제 좋을 대루, 지랄입디다! 세상이야 어디루 갔던지…… 그러니깐 억울허구 못난 건, 저 혜옥언니나 당신 같은 골샌님……”
 
265
“아니, 네가 정녕, 시방……”
 
266
영섭이 필경 쫓아내려오자고 얼러대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267
헤렌은 그러나 눈도 깜짝 않는데, 아무래도 형세가 온당치 못해갈 것 같음을 알고 달려내려온 모친과 형이, 양편에서 안듯 헤렌을 데리고 나간다.
 
268
“두어두시우!…… 흥! 누가 감히 내게다가 손찌검을 해?…… 괜히.”
 
269
헤렌은 끄은히 앙살거리면서, 모친과 형에게 끌리듯 일각대문 밖으로 사라진다.
【원문】이런 남매(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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