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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1월 11일이올시다. 4년 전 오늘 새벽에 시산혈해를 이루던 세계 대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던 각 예배당 종소리에 깨어 일어나 우리도 무엇을 하여 보자고 의논하던 일이 어제 같이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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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4년 동안에 세계 형세도 다소 변경됨이 없지 아니하고 우리 사업도 기록할 만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평화의 소식은 아직 묘연합니다. 오히려 전쟁만이 더욱 격렬하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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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부터 해 오던 짐승 같은 전쟁이 끝나지 않아 새로 일어나는 인적(人的) 전쟁은 전 세계에 불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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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속아 사는 인생들은 이날의 평화를 기념하며 또 그것을 몽상합니다. 상해는 각 종족이 다 모여 사는 세계의 한 축도올시다. 승자와 패자, 그들이 이날을 어떻게 지내는 꼴을 구경하려고 나는 아침부터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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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0시 30분에 강서로(江西路) 중앙 예배당에서 거행하는 평화기념 예배회에 참석하였나이다. 회중은 모두 전쟁에 종군하였던 군인들과 또 그들의 가족들뿐이올시다. 아들들을 전쟁에 희생한 노인이 얼굴 가득히 흐르는 눈물과 목 메인 목소리로 성경을 낭송함과 11점을 떵 치자 회중이 기립하여 2분간 묵도하는 것과 그 외 모든 절차가 전승축하나 평화기념보다는 전사한 군인의 추도회 하는 것이 합당하겠더이다. 동시에 예배당 문밖을 내다본즉 거리에 XX의 행인까지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서서 묵도하는 것이 내게 무한한 감상을 일으키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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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군한 친구가 초청하여 ‘프렌치 클럽’ 식사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나이다. 6시 반부터 모여든 각국 군복을 입고, 사람 많이 죽였다는 표징이 번쩍번쩍하는 훈장을 한 군인들이 거의 6백 명가량이나 모여드는데, 절뚝발이·곰배팔이 등 상이군인들이 반수 이상이나 됩디다. 8시가 되더니 오케스트라가 각국의 국가를 연주하고 간단한 식사가 있은 뒤에는 한쪽에서 먹고 마시고, 한쪽에서 춤추고 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9시 반쯤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침상에 누워 가만히 생각한즉 예배당에서 어떤 목사가 연설하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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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광음은 의연히 지나가나 평화기념일은 평화의 세계보다도 전쟁의 세계, 생명의 세계보다도 퇴폐한 세계를 연상케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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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아니 오고,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에 형의 생각을 금할 수 없어 다시금 벌떡 일어나 마당 끝을 배회하며 구름과 달을 바라보니 가슴의 바다에 밀려드는 뜨거운 밀물(胸海熱潮[흉해열조])이 황포강의 저녁 밀물(黃浦晩潮[황포만조])과 함께 떠오르고, 마음에 품은 생각(心中所懷[심중소회])을 말할 곳 없어 하루 종일 본 바와 느낀 것을 기록하여 형에게 보냅니다. 붓대를 던지는 이 순간에 속옷 안의 가슴에 튀기는 무한한 회상을 형에게 알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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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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