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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西伯利亜[서백리아])를 거쳐서(여행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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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을 떠난 뒤의 여정은 벌써 지금까지 지나온 망막한 사막의 자취도 없는 그러한 길이 아니었다. 처처에 기복한 구릉과 광대한 고원의 경사를 점철하고 있는 초장(풀밭)은 지금까지 지나온 단조하고 변화 없는 풍경에 비하면 아주 다른 세계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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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 일정한 교통에 의하여 완전히 개척된 도로였다. 우리를 실은 마차는 가끔 열, 스물씩 집합되어 자그마한 유목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천막 떼를 바라보며 달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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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의 유목민에 속한 양이나 마소(牛馬[우마])도 수백 수천의 대군을 이루어 부락 부근에 방목되고 있었다. 벌서 광막한 사막의 여행이라는 기분은 사라지고 인간생활과의 끊임없는 관련을 늘 의식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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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의 경사는 거의 한없이 계속되었다. 오정 때쯤 고륜의 시가를 출발한 마차는 이날이 다 저물 때까지 줄곧 내리막길의 질주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고원을 내려감에 따라 기온은 더욱 추워졌으나 바람은 없어 여행은 훨씬 곤란이 적어졌다. 석양 때쯤 우리는 도중의 어떤 역마을(駄站[태참])에 도착하였다. 스무나문 쯤 되어 보이는 천막 집단으로 형성된 유목민 부락의 하나였다. 다른 천막들보다 훨씬 큰 한 천막은 얼핏 보아서도 이 부락의 가장 으뜸 되는 추장의 천막인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천막 앞에 마차를 멈추고 내려섰다. 우리 마차가 멀리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흥미와 호기심에 긴장되어 몰려나왔던 부락민들은 악의 없는 의아(疑訝)의 눈을 빛내면서 와하고 벌써 우리의 마차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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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의 출입구인 긴 포장을 들어 헤치면서 나온 장대한 홍안의 노인은 우리가 내놓은 고륜정부의 여권과 공문을 받아 보더니 모여든 사람들에게 무엇인지 쾌활하게 설명하는 듯하였다. 아마 우리 두 사람 단싱(丹増[단증])과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여주었던 것 같다. 단싱은 노인과 인사를 하면서 몽고어로 무엇이라고 말하였으나, 나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할때까지 미소를 띤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기만 하고 서 있었다. 우리가 천막 속으로 들어가니 부락민도 모두 따라 들어왔다. 천막 안은 7~8평이나 되어 보였다. 월추형(月錐形)으로 친 천막의 맨 꼭대기 정점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천막 안 한구석에 세워둔 긴 막대기로 열고 닫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이 천막가옥의 연돌(煙突)인 것이었다. 맨 한가운데 땅에는 구멍을 파서 거기에 커다란 쇠 냄비가 걸려 있고, 연료는 모두 우마나 양의 똥을 바싹 말려둔 것을 쓰는 것이었다. 이 지대에 나무가 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풀도 막대한 가축을 기르는 유일한 사료였으므로 그것으로 불을 땐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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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유목민은 하루에 식사를 한 끼밖에 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금이 극히 귀하여 간도 맞추지 않고 맹물에 그대로 양고기를 삶아서 고기는 칼로 베어먹고 국물은 차 대신 먹는 것이 그들의 천편일률적인 식사였다. 추장도 칼 같은 것을 허리에 차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이 나이프이며 포크였다. 채소와 어육(魚肉)의 갖가지 식료품에 식상하여 조리법의 강좌를 그들의 신문과 잡지의 필수 기사로 하고 있는 문명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단조무미한 식사는 나에게도 하나의 경이였다. 나는 단싱에게서 몽고 유목민들의 이러한 식사 풍습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혈색이 좋고 활기에 충일한 얼굴들을 주위에 보면서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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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 특색 있는 식사에 참례하였다. 그러나 섣불리 정주문명(定住文明)의 물에 몸을 씻은 우리는 준비해 가지고 온 면포(麵匏), 초콜릿, 닭고기 삶은 것 등을 꺼내 이 무미단조한 음식을 정정(訂正)하지 않고는 못 견디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기를 실컷 다 먹고 나서도 그 긴 칼로 뼈다귀를 깎아 먹었다. 천막 안에 모여 앉은 10여명 넘는 그들이 한결 같이 뼈다귀를 한 조각씩 들고 앉아 깎아먹는 그 모양과 또 그 뼈다귀 깎는 소리는 일종 기묘한 것이었다. 단싱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그들의 식후에 가장 중요한 뺄 수 없는 취미라고 한다. 이 뼈다귀 깎기가 끝나자 다음에는 양고기를 삶은 국물을 마시는 말하자면 차(茶[다])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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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물을 마시는데 쓰는 그릇이라고는 오직 한 개의 나무잔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차례차례 돌려가면서 이 유목민식 차(茶[다])를 마시게 되는데, 먼저 먹고 난 사람은 지극히 깨끗하게 그야말로 물 한 방울 남지않게 그 잔을 닦은 다음이 아니면 결코 다음 차례를 돌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잔을 닦는 방법이었다. 실로, 혓바닥을 가지고서 이 예의 있는 의무를 그들은 실행하는 것이었다. 국물을 다 마시고나면 몇 번이나 그 커다란 넓은 혓바닥으로 나무 잔 속을 남김없이 곱게 핥아 닦은 다음, 이 의무의 충실한 수행을 감시하고 앉아 있는 다음 사람에게 잔을 돌리는 것이었다. 만일 이 대단히 깨끗한 잔을 필요로 생각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염치 불구하고 먼저 덤벼들어 제일 처음에 이 잔을 사용하여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생각다 못하여 다음날 아침 내가 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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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으나 모여든 사람들은 오랫동안 우리 옆을 떠나지 않고 더욱 나의 얼굴을 호기심과 흥미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천막 한쪽 구석에 . 설치되어 있는 침상 비슷한 것과 석유 상자로 만든 궤짝 두 개가 이 훌륭한 부락 장로의 주거를 꾸미고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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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금 그들의 단순하고 계박(繫縛:속박)없는 생활 기분에 강렬한 미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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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부부는 침상 위에, 우리는 사막에서 야영하던 때에 쓰던 침구를 꺼내 땅바닥에 펴놓은 다음 그 위에 드러누어 깊은 수면 속에 밤을 보내었다. 말똥 타는 냄새가 몹시 코를 자극하여 처음에는 퍽 불쾌하였으나, 그것도 얼마 안 되어 깊은 잠 속에 잊어버리고 그 이튿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에는 다시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확실히 노천에서 야영하던 때에 비하여 자고 난 다음의 기분과 신체의 상태가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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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도 거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여행하였다. 다만 이번에는 차차 경작된 토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경작지대가 귀리(燕麥[연맥]), 메밀 같은 것을 농사짓는 중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곳곳마다 있는 이들 농경 중국인의 소부락에는 상점같은 것도 보였다. 이러한 소부락을 지나고 구릉과 초장을 지나서 우리의 마차는 한가하게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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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 때쯤 되어 점심요기를 하려고 도중에 있는 역마을에 들리기 조금 전 우리는 이곳에 동양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는 금광산(金鑛山)을 멀리 바라보았다. 단싱의 설명에 의하면 구주대전 이전에 미국의 모 재벌이 이 광산을 99년간 조차하여 철도 부설을 준비하던 중 마침 구주대전이 터져 사업은 그대로 보류되었던 것이 전쟁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소비에트의 세력이 무서워 좀처럼 손을 대지 못하고 그대로 그 무진장에 가까운 매장량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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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마차의 말을 바꾸게 되었다. 우리의 희망대로 역마을에서는 이 부락에서 가장 강하고 날쌘(慓悍[표한]) 말을 2필 구하여 왔다. 그중 한 마리는 마차는 끌어본 일이 있는 말이나 다른 한 마리는 전연 제어(制御)를 받아보지 못한 야생마였다. 모두 보기만하여도 탐스러운 훌륭한 준마였다. 그러나 이 두 말을 우리의 마차에 달고 길을 떠나자 마자 곤란이 생겼다. 훈련 없는 한쪽 말이 다른 말과 보조를 맞추려고 하지 않고 그만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야성적 강력으로 함부로 동부 말의 반항하는 것도 헤아리지 않고 길 옆으로 빠져나가서 가까이 있는 산비탈을 향하여 마차를 끌고 뛰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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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몽고 마차는 우리가 흔히 보는 보통 마차와는 달라서 긴 끈으로 말을 마차에 맨 다음 , 마부(馭者[어자]:말을 부리는 사람)는 마차 위에서 말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혼자 말을 타고 마차와 함께 달리면서 마차 말을 코치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의 마차가 그만 이 생마에 끌려 달아나게 되자 마부는 어떻게 해 볼 수단도 없이 다만 뒤에 따라 달려 올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마차는 점점 산비탈로 길도 없는 곳을 높이 올라가다가 마침내 전복되고 말았다. 이럴 경우 원래부터 익숙한 단싱은 몸 가볍게 마차가 전복되기 전에 뛰어 내리고 말았지만, 나는 그대로 마차에 매달려 있다가 마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차 밖으로 튕겨나가 그만 근 10여 미터나 되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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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침 두꺼운 의복을 많이 입고 있었고 또 긴 양가죽 외투가 날개처럼 펼쳐져서 떨어질 적에 파라슈트 역할을 해준 덕에 아무데도 상하지는 않았었다. 가벼운 두통과 현기증은 느꼈으나 이것은 2마일 가까운 거리를 혼비백산하게 마차가 뛰어 구르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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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차가 이 모양이 되는 것을 보고 뛰어온 역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마차는 다시 꾸며졌다. 이번에는 아까 제멋대로 날뛰던 그 야생마 한 마리만을 매고 떠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저 혼자 마차를 끌게 되니 말은 쏜살처럼 속력을 내어 길을 달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중의 고장으로 늦어진 여정을 충분히 회복하고 3~40 마일의 길을 단숨에 달려 해지기 전에 다음 역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혼도 나고 고생도 했으나 이 야성 그대로의 한마(悍馬[한마]:사나운 말)의 기억은 생각만 하여도 시원스럽고 유쾌하였다. 이 역마을에서도 전일과 마찬가지로 제일 큰 천막의 손님이 되어 소박한 호의로 맞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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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주인이 굳이 권하므로 우리가 침상 위에서 주인의 침구를 그대로 쓴 채 잠을 자고, 주인은 땅바닥 위에 잠자리를 만들어서 잠을 잤다. 이것이 봉변의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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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잠이 깨니 웬일인지 전신이 이곳저곳 근질거리기 시작하였다. 다음 역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오전 중의 여행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갈수록 전신의 가려움이 심해 갔다. 원래 의복을 두껍게 입었으니 긁어보아야 소용도 없거니와 장갑을 벗어서는 손이 당장 얼 터이니 긁어볼 수도 없었다. 발광이 날 듯한 이 가려움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할 방법으로 나는 오후 여행에는 승마를 하였다. 마차에는 단싱과 마부를 타게 하고 나는 마부가 타고 가는 말을 대신 탔다. 마침 같은 길을 가는 어떤 승마 여인이 있어 서로 언어는 통할 수 없었으나 서로 전후하여 말을 달리는 흥미에 몸의 가려움을 조금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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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 우리는 부리야트족의 어떤 부락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밤을 묵게 되었다. 이곳에는 벌써 러시아 문화의 영향도 있고 또 근처에 산림도 있는 탓으로 목조 가옥이었다. 숙소에 다다라 조금 뒤떨어져온 마차가 오기 무섭게 짐 가방에서 새 내의를 꺼낸 나는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난로불 앞에 서서 벌거벗은 다음 전신이 발갛도록 긁고 나서 내의를 갈아 입었다. 그리하여 묵은 내의는 방밖에 내놓아 두었더니 이튿날 아침에 보았을 때에는 얼어 죽은 이가 하얗게 내의를 덮고 있었다. 나는 이 동사한 착취자의 큰 무리(大群[대군])를 브러시로 다 털어내 난로에 태운 다음 다시 상쾌한 기분을 회복하고 여행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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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 삽스크(賣買城[매매성])까지 하룻길을 남겼을 뿐인 우리는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시베리아의 삼림지대는 벌써 그 풍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경색절승(景色絶勝:빼어난 경치)한 풍경이 곳곳마다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해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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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 역마을의 한곳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길을 계속한 우리는 광대한 대평원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3백 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산에 빠른 웅겐의 백색 반혁명군이 처참한 최후를 마친 전적(戦蹟)을 발견하였다. 산 꼭대기에는 일찍이 백군이 최후 발악을 하던 포대의 자취도 보이고, 사람과 말 시체, 파괴된 차량과 다른 가지가지의 유기물(遺棄物)의 산란한 파편이 넓은 평원을 덮고 그 위에 우울한 겨올 하늘에는 주린 독수리가 사람의 주검을 뜯어먹을 기회를 엿보느라고 배회하여 자못 참담한 광경은 이곳에서 멸망되어간 수만의 혼이 구할 길 없는 절망과 저주를 상징하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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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거의 저물었을 때 우리는 목적 지점인 국경도시 트로이카 삽스크에 도착하였다. 인구 약 5천을 헤아리는 이 변경 도시는 벌써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 중심지였으며, 중국인들이 이 도시를 매매성(賣買城)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 있는 것이다. 중국 상인들의 수백호의 상점이 즐비한 중국 시가지와 서구라파식 러시아 시가지가 이 도시를 양분하여 러시아 사람들의 시가지에는 백양목, 낙엽송 같은 고목이 울창한 소공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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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훌라에게서 소개 받아 우리는 이곳에 와 있는 소비에트 대표 사파로프를 찾아 러시아 시가지로 들어섰다. 시가지의 한 모퉁이에 방갈로 풍의 조그마하면서도 깨끗한 주택에서 그를 만난 우리는 그의 마음속으로의 환대를 받고 다음 여정인 우진스크까지의 길을 떠나기 전 3일간을 그의 집에 머물렀다. 당년 30세의 유태계 러시아인인 그는 쾌활하고 친절한 인텔리겐치아로 특히 유창하게 영어를 쓰고 있으므로 나하고는 다시없는 좋은 말벗이었다. 아직 결혼 전이었으나 이 국경도시 제일가는 미인이라는 젊은 처녀와 약혼을 하여 이 여인은 아침 저녁으로 찾아와서는 식사나 의복 등 모든 일을 돌보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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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도시의 인구는 약 5천이었으나 전쟁 전에 훨씬 더 번화하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 도착한 지 사흘째 뒤떨어져서 고륜을 떠난 다른 동지들이 모두 도착하여 마침내 시베리아 철도 연선의 상우딘스크를 향하여 사파로프와 그의 연인은 이 적막한 도시에는 드문 가극회(歌劇會)를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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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알선으로 이 도시 일류의 어여쁜 색시들을 모조리 모아 놓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 낡아빠진 극장을 임시로 수리하여 천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큰 홀을 꾸며 놓았던 것이다. 무대를 바라보는 홀에는 식탁까지 준비 되어 있어 신선한 우유와 흰 빵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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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연된 각본은 상당히 치기만만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연출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놀랄 만큼 세련된 점을 가끔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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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골이었으나 원래가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꼈다. 각본의 내용은 구주대전 당시에 니콜라이 황제가 독일 측 밀정인 황후의 미모에 탐닉하여 국정을 도무지 돌보지 않고 주야로 주색에 파묻혀 있는 정황과 당시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황제의 숙부 니콜라이비치가 이 꼴을 보고 애가 타서 황제 앞에 나와 간한다는 것이었다. 황제 앞에 나선 니콜라이비치가 “군기의 비밀이 모조리 그대로 적군에게 새어나가니 스파이를 경계하소서” 하고 말하면, 술에 취한 황제는 “그래 스파이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니콜라이비치는 두 주먹을 쥐면서,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하고 은근히 황후를 지목하나 어리석은 황제는 도무지 눈치를 채지 못하는 장면 같은 것은 소인극(아마추어극)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유머 미가 풍부한 연기로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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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페라의 밤을 마지막으로 하고 이튿날 우리 일행은 이 국경도시를 등지고 마침내 러시아의 영역에 발을 넘겨놓게 되었다. 고륜을 떠날 때에 도중의 위험을 우려하여 준비해 가지고 왔던 38식 일본 소총 한 자루와 탄환 20발씩을 나눠 가진 우리는 조그마한 군비처럼 무장을 든든히 한 다음 트로이카의 대열을 바로하고 의기당당하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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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반동 백색군대와 도적이 시베리아의 삼림지대를 위험한 지대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 단싱을 총사령 격으로 추천하여 어떤 때라도 적을 만나면 그의 지휘 하에 전원 일치하여 싸울 각오와 약속을 든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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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는 바퀴를 떼고 겨울 것으로 만들어 썰매 식으로 꾸민 것이었다. 한 차에 두 사람씩 분승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여행의 배경은 일변하였다. 이제는 사막도 광야도 다 없어지고 다만 하늘이 아득하게 서 있는 울창한 처녀림 속을 뚫어 긴 띠처럼 한없이 뻗어 있는 길을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새하얀 눈은 얼마큼이나 두껍게 땅을 덮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눈 위로 나와 있는 나무를 보고 상당히 깊은 적설(積雪)임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듬해 봄이 와서 눈이 녹으면 녹은 나뭇가지에 길 가던 나그네가 잊어버리고 간 장화 같은 것이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고 단싱은 말하였다. 높은 나뭇가지가 길 가는 사람의 손에 닿도록 눈이 쌓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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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차에는 각각 커다란 도끼와 부삽을 준비해 놓았다. 풍설에 넘어진 거목이 때때로 길을 가로막는 일이 있는데, 양편을 밀림에 봉쇄당한 좁은 골목쟁이 길이니까 돌아서 갈 수가 없어 그런 때에는 이 장애물을 도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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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북으로 감에 따라 해는 차차 짧아졌을 뿐 아니라 울창한 삼림 속의 길이라 해가 채 다 지기도 전에 벌써 길은 어두워버리고 아침도 아주 늦어서가 아니면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 삼림지대의 여행 기간을 통하여 매일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11시부터 오후 5시쯤까지 겨우 5~6 시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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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 삽스크를 떠난 그날 밤 우리는 어떤 촌락에 도착하여 시베리아 농가에서 보내는 밤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도저히 모두가 한 집에 유 할 수는 없으므로 서너 농가에 분숙하였다. 단싱과 내가 폐를 끼친 농가는 회색 눈썹이 유난히 길고 한자나 되는 은빛 수염이 루버시카의 가슴을 덮은 늙은 농부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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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세수하느라고 떠다 주는 물은 영하 30도나 되는 혹한이었으나 그대로 냉수였다. 세수를 하고 나니 러시아 특유의 유명한 ‘사모발’의 대접이다. 다음에는 커다란 통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날 우유를 떠놓고, 소고기와 검정 빵으로 차린 저녁 식탁이 우리의 허기진 배를 불려주었다. 더욱이나 소고기는 오래간만에 먹는 만큼 대단히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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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나니 동리 집들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젊은 여인들이 대부분인 이 구경꾼의 떼를 모두 맞아놓고 주인은 손때 묻은 손풍금을 꺼내 민요를 타기 시작하였다. 여인들은 음악에 맞추어 서로 껴안고 춤을 추었다. 차츰차츰 음식도 무용도 본격적으로 되어 밤이 깊도록 유쾌한 기분에 잠겨 나는 그들의 음악을 듣고 무용을 구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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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순러시아식의 쇠고기 수프와 빵의 조반식사를 하고서 우리는 다시 길을 계속하였다. 길은 여전히 하늘에 닿도록 높은 숲 사이로 길게 뻗쳐 있었다. 눈도 여전히 깊게 쌓여 트로이카는 자못 경쾌하게 그 위를 미끄러져 갔다. 이리하여 트로이카 삽스크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우리 일행의 트로이카는 멀리 상우딘스크를 바라보며 이 시베리아 소읍을 끼고 흐르는 셀렌가하(河)를 건넜다. 10여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거울 판처럼 미끄러운 얼음 위로 준마에 이끌려 미끄러져 달리는 우리의 트로이카는 그야말로 일찍이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가 나는 새에 비하던 기분을 능히 상상하도륵 하여 주었다. 하반(河畔)의 경치 역시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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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경 우리는 시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가지고 온 여권과 공문서를 기관에 제출하고 이곳에서 만날 동무를 찾아서 그가 지정한 숙소에 들어 모스크바 가는 열차가 통과하기까지 이틀 동안을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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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진스크 일대는 당시 원동공화국의 일부였다. 중앙에 성립된 소비에트 공화국과 만주와 시베리아 일부 등에 몰려온 제국주의 세력과의 사이에 말하자면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성립된 이 원동공화국은 소비에트 동맹의 강화, 제국주의 세력의 퇴각 등으로 이미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하여 차차 소비에트 동맹 내로 해소되는 과정에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 정세는 험악하여 국경지대인 우진스크는 계엄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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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왔다는 소식을 어디서 듣고 왔는지 나는 이곳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 두 사람의 조선 청년의 심방을 받았다. 그들은 러시아 태생의 소위‘얼마우자’였다. 그리하여 러시아 과부의 양아들이 되어 있어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넓은 교제를 가졌으므로 나는 이곳에 있는 이틀 동안의 밤을 이들의 안내로 러시아 사람들의 가정 구경에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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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스크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소읍은 모두 다 상상 외로 높은 문화수준을 누리고 있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제정시대의 전제정치는 모든 진보적 정신을 유형(流刑) 또는 기타의 박해로 이곳 시베리아로 쫓아 보냈는데, 이 추방당한 망명가 ․유형수들의 교양과 문화가 어느새 이곳에 씨를 떨어뜨려 이양(異樣)하게 높은 문화수준과 놀랍게 세련된 교양과 취미가 말하자면 일반적 몽매(蒙昧)의 광범한 초원의 이곳저곳에 화려한 꽃과 같이 점철되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그 높은 향기로 뜻하지 않은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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