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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팔경답파기(關東八景踏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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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김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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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八景踏破記[관동팔경답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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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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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연한 기회로 자연의 품을 찾아 그 속에 묻히고자 이 길을 떠나게 된 것인 만큼 다른 어른들과 같이 경치 좋은 곳을 찾아 詩囊[시낭]을 단단히 채우고 노래 근이나 실컷 불러 보자는 고답적 의미를 가지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길이라 하기에는 우리의 성의와 준비는 너무 적습니다. 혹 성의와 준비가 넉넉하다 해도 제법 경치를 보고 경치에 합당한 감흥을 느끼고 그 느낀 감흥을 제법 똑똑한 시로 짓고 노래로 부르기에는 너무 저희들의 식견과 재질이 부족합니다. 너무 천식이요, 鈍覺[둔각]이요, 俗輩[속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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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워낙 소리가 크면 귀먹어리도 귀를 돌리고 가시가 길면 발바닥도 따끔하는 일이 있지 않아요. 이 셈으로 이런 淺見[천견]에도 한두 가지 알아지는 것, 이런 둔감에도 어떤 때는 혹 가다가 느껴지는 것, 이런 속안에도 혹 띄우는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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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번 이 길의 대강 노정을 부탁하고 거리 거리의 풍물을 그리고, 그리고 때때의 단상을 적어보려 하는 것이 오직 이 예외, 이 기적, 이 비약을 바라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를 따라 읽어가시노라면 필자 딴은 봉황이나 호랑이를 그린 셈인데 독자 여러분께는 닭이나 고양이로 보이게 될 때만 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聖域神境[성역신경]에 대한 여러 어른의 선입감을 더럽혀 드릴 적도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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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닭으론 보인다고 또는 고양이로 그려졌다고 결코 봉황이 봉황 아닌 까닭이 되고 호랑이가 호랑이 못되는 고양이될 까닭이 만무합니다. 필자의 감흥이 적고 窮愁[궁수]가 졸하다고 관동팔경이 어떠할 리야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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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嶺東八景[영동팔경]을 그리다가 嶺東八不景[영동팔불경]을 만들어 놓고 만다해도 鐵嶺東岸八勝景[철령동안팔승경]은 영원한 嶺東八絶[영동팔절]로 일점의 虧缺[휴결]없이 기암 초벽 양쪽 5백리에 그들이 임한 滄溟[창명] 그것 같이 길고 씩씩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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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씩씩하고 아름다와 진실로 그들을 그릴 화가, 그들을 쓸 시인, 그들을 노래할 가객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러하여 모든 허물은 필자에게로 돌아오고 말 것이나 필자는 鈍且愚[둔차우]할 법 하되 제 才不足力不及[재부족력불급]을 알 만한 그리하여 제 부족불의 소치를 無我無他[무아무타]한 제 강산을 돌려 보내지 아니할만한 의협·아량만은 다소 가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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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 程[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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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생활을 하려면 몇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휴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쓰고 잘 집으로 천막을 가져갈 것은 물론 그 외에 먹을 양식 음식, 만들 기구, 입을 옷, 덮을 덮개, 깔까래 배탈이나 발병이 났을 때에 쓸 간단한 약에 불킬 등촉, 바늘과 실 서적 지필 이런 등 속을 다 치면 열 가지 스무 가지도 넘는 온갖 것을 다 끌고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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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왠만한 살림을 지고 가는 셈이지요. 그래, 이 생활을 떠나는 사람이 미리부터 자세자세 생각을 하여가며 만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암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준비를 한다 하여도 떠나가기 전과 떠난 뒤와는 전환이어서 무엇이든지 가까왔으면 하는 것이 생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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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하는 때 혹 얼토당토 않은 것이 있었으면 편할 때가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 까닭에 해보신 이는 다 아시겠지만 얼마를 두고 일일이 조항을 적어놓고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족이 없도록, 미비가 없도록 하려니 자연 가지 수가 늘고 무게가 늡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져 가는 것이 물론 좋지요. 그러나 한 곳에 고정을 해놓고 하는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이동을 하여 가는 것이면 牛馬[우마]의 힘을 아니 빌리는 이상 각기 지고 갈 밖에는 없는 것이요, 또 지고가는 잔등이란 한 사람에 단 하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무겁고, 가볍고, 혹 가져갈 것이 있으며 그 단 하나인 잔등 위에 져야 할 것이요, 일단 지고 나서면 백리 건 천리 건 이를 악물고라도 끌고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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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연 중량의 適否適[적부적]을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니여요. 많이만 가지고 가면 좋다고 이것저것 욕심을 내서 잔뜩 메고 나섰다가 단 5리를 못 가서 “애고 나는 못가” 하고 주저앉으면 됩니까? 혹 지고 나선 것이니 그래도 끌고 가본다고 이런 때 악을 써 볼는지도 모릅니다만은 악을 쓰는 것도 한 시간, 두 시간 말이지 며칠을 두고 가는 터에 될 수가 있읍니까? 필경 알뜰살뜰 주어모아 가지고 온 것을 내버리지 아니치 못할 억울한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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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저희들도 떠나기 전 4, 5일을 두고 둘의 등에 적당할 무게가 될 만큼 제발 필수품에 備携[비휴]할 것을 의논하였던 것입니다. 의논을 하고는 첫째로 최대형의 ‘륙색크’ 등산용 배낭을 구하고 다음으로 아래와 같은 한 살림을 모을 건 모으고 살 건 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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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手氈[수전], 油紙[유지], 작은 삽, 飯盒[반합], 등산모, 茶碗[다완], 수통, 흡수기, 약품(소화제 옥도정기 등) 고추장, 간장, 사탕, 코코아, 커피, 쌀, 비누, 치솔, 치약, 면도, 거울, 地圖輿地勝覽[지도여지승람] 그 외 볼만한 책 여러 권, ‘엑스팬더 ─ 사진기’ 그리고 심심하면 볼 단편 하나, 우선 쓸 알콜 5합, 의류, 모기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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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적게 가볍게 하자고 고심고심한 것이 적고 가볍기는 고사하고 보통 지게로 져도 두 짐은 될 것 같습니다. 양분하여 넣고 보니 최대형이란 두 ‘륙색크’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무엇을 그만 둘가 하면 하나도 두고 갈 것은 없읍니다. 무게로 말하면 黃軍[황군] 말은 10관 이상이라지만 10관은 다 못된다 하더라도, 8, 9관은 달아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될 것입니다. 좀 과장해 말하면 집채 같은 누막이 엄연히 저희들 눈 앞에 가로 맞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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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이 雙泰山[쌍태산]을 바라보고 껄껄 웃었지요. 하도 어이가 없으면 도로 헛웃음이 나오는 법이 아닙니까? 하도 많기에 저래서는 안 된다 좀 더 보자는 한두 마디 의논이 오고 가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읍니다만은, 어느 말 고비에선지 “애끼 죽으나 사나 지고 나서 보자”는 만용의 절규가 나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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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 2, 3년간 몇 관 되는 짐을 지고 산께나 올라가 보았다는 것과 푼낱이나 있는 어깨의 뚝심을 저희들은 믿었던 것이니 이런 것이 다 어리석은 자의 탈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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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저희들은 어깨가 휘는 듯한 짐을 한 뭉텅이씩 걸머지고 예정대로 비 실은 검정 구름이 남산 머리에 떠돌고 있는 7월 19일 저녁 9시 5분 경주로 포항으로 곧 연락이 된다는 남행차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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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鏡臺[명경대]의 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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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나무, 잣나무 드높고 물 맑은 장안사에 다달아 여관에 드니 여관마저 깨끗하여 ‘부르조아’의 별장생활이 연상되어 나의 입은 옷을 한번 훑어보니 운동화 행색에 초라한 一書生[일서생] 그대로다. 시냇가에 내려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니 시원함이 내장까지 스며드는 듯 하나 속계의 더러운 이 몸을 곰곰이 생각할 때 한량없이 외람하여 담갔던 발을 빨리 거두니 물은 여전히 모르는 듯 맑고 맑아 소리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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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상을 대하니 그릇마다 새 것이며 반찬마다 입에 맞아 칭찬이 빗발치듯 한다. 보통 네다섯 공기밥을 게눈 감추듯 一定量[일정량] 하다가 가자고들 떠든다. 하긴 鐵原[철원]서 푸대접을 받고 차에서 까불며 기운이 진한 때 특징이 있는 길길이 높은 나무, 溽溽욕욕]한 淸溪[청계], 고요하고 아담한 주위, 모든 것이 산뜻하고 새로운 듯 한데 식사마저 마음에 들거니 오묘극치인 자연 속에서 고달픈 영육을 안식코자 하였던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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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샤스 바람으로 단장 하나씩 척척 사들고 나서니 바로 그럴 듯한 탐험대라. 3, 4차 금강산을 往訪[왕방]하였던 R선생과 우연히 장안사에서 상봉케 된 강군의 친우 H씨를 선두로 안내자의 수고를 빌림없이 산길을 올라는가나, 얼마쯤 걸어 올라가다 보니 우뚝한 石城[석성]이 있으니 이것을 신라 경순왕의 태자가 쌓은 太子城[태자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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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성을 지나면 바로 명경대 뒷등이 된다. 굴들이 있으니 큰 것이 黃蛇窟[황사굴]인데 전자는 천당으로 뚫리고 후자는 지옥으로 뚫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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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드러나기를 시작하여 먼저 걷던 이는 떨어지고 나중 걷던 이도 앞서며 날랜 이는 날고 더딘이는 긴다. 그 간격이 앞선 이가 소리를 높혀 “어 ── 이” 소리를 치되 아무 반응이 없다. 이 모양으로 오르고 또 오른다. 어떤 때는 통나무 다리를 건너며 어떤 때는 바위 문을 나오면 놀래 달아나는 다람쥐를 뒤쫓으면서 水廉洞[수렴동]에 이르렀다. 보는 것마다 묘하지 아니하면 기이하며 정신을 착란케 하는데 비는 시름없이 부슬부슬 내림으로 산기슭에도 부실부실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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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개울 바닥이라 발 들일 곳을 찾아 계속 건너갔다, 건너왔다 하여 끝없은 S자형으로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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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헛디디어 발바닥이 아플지언정 둥근 바위, 모진 바위, 큰 돌, 작은 돌이 불규칙하게 널려있는데 저마다 특유한 미를 가지고 있어서 길 걸음에 결코 싫증을 주지 아니한다. 一茶店[일다점]에서 금강산 기념의 수건을 하나 사서 뒤꽁무니에 척 차고 또 오르니 개울 맞은 편에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깎아 질러 불끈 솟은 넓적한 바위 앞에 당당하게 자욱이 물이 고인 곳이 있으니 이것이 명경대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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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 단풍 가랑잎이 무더기 무덕 깔려 푸르충충하다 못해 시컴해 보인다. 潭[담] 앞으로 커다란 바위돌이 비스듬이 놓여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아픈 다리를 쉬여 주기에 알맞다. 명경대 뒷등 앞으로 돌아가노라니 땅을 치닿듯 하는구나. 뒤따라 헐덕이며 오른 C군이 “이게 여행야, 달음박질이지” 하고 원망하는 듯 일동에게 호소하는 듯 툭 나온 소리가 여행이 맞도록 일행의 입에서 오르내려 핀잔을 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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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O, C 군이 몹시 가쁜 모양이다. 암자마루에 털썩 드러누운 채 세상 모른다. 이때에 초목에 비 덮는 소리만이 우수수하고 싸늘한 바람이 땀난 등허리를 지나간다. 해도 저물고 다리도 아프며 첫날이니 섭섭하나 望軍臺[망군대]는 다음 볼 기회로 미루고 비가 개기를 기다려 천천히 산길을 내려온다. 내려가는 길은 떡먹기 보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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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대에 이르니 이름모를 二十八女[이십팔녀]가 남자틈에 끼어 낚시대를 느리고 있다. 평평한 바위 하나를 골라 드러누워 한가히 쉬노라니 다시금 명경대가 눈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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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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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차차 속력을 더하여 갈수록 一島[일도]형의 흔드는 흰 수건이 점점 멀어집니다. 점점 멀어지다 나중에는 다만 희끗희끗한 점만 가물거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가물거리는 것조차 안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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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차차 서울도 멀어진다 하고 黃[황]군과 나는 짐을 얹고 대강 잘자리를 보았읍니다. 잘자리를 보고 나서는 서로 마주보고 빙그레 웃었지요. 이 웃음의 뜻을 우리는 직각적으로 서로 알았던 것입니다. 누가 왜 웃느냐 물은 일도 없고 왜 웃었나 대답한 일도 없지만은 이 壯擧[장거]?를 행하는 것이 무던히 기쁘다는 생각이 피차의 흉중에 일어남을 서로 잘 알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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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천막 여행이나 관동팔경 보는 것이 무엇의 장하냐 하실 이도 계시겠지만은 壯不壯[장부장]이나 즐겁고 즐겁지 아니한 것이란 일의 크고 작은 것보다 그 일을 당하거나 하는 사람의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천막여행이나 관동팔경을 보는 것쯤 기실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3년이나 두고 벼르다가 마침내 때와 형편을 잘 얻어 해치우려 떠남이 다른 이에겐 어떻게 생각되건 저희들에겐 대견치 않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 구경을 하고 나면 “관동팔경도 그저 그렇더라” 하고 픽 웃어버릴 것밖에 필시 않되겠읍지요 만은 처음으로 하러 나설 때에는 끝에 올 환멸의 비애보다 앞을 바라고 나아가는 동경의 정이 앞서 神境[신경]에나 들어가는 듯한 희열을 금할 길이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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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면야 다 해본 뒤에 싱거운 것이 천막여행이나 팔경구경 뿐이겠읍니까? 혹 부자가 되고 싶다, 또는 부자가 되는 것이 무던히 좋다고들 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것도 되어 보면 별 신통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학자가 좋다, 정치가가 부럽다 하여 이런 자나 家[자]가 되면 별다른 행이나 복을 누릴 것 같이 갈구들 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들만 유독 독에, 뒤지에 행복을 쌀 담듯 담아놓고 아침 저녁 웃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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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모두가 하렬 때 안했을 때가 좋지요. 한 뒤가 할 때 처럼 좋아서야 요새 소위 첨단을 걷는다는 최신 청년들의 연애결혼에 파탄이 올 리가 있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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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잠이 들었는지 차가 “빽 ──” 하는 바람에 자던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오전 2시 반입니다. 황군은 책보인지 수통인지를 베고 그 덜컥거리는 중에도 코를 고는데 어제 저녁엔 거의 다 들어찼던 차안도 손님들이 태반이나 내려 태반이나 내려 휭해졌읍니다. 남은 손님들은 넉넉한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자는 모양 차 달리는 소리에 그들의 숨소리는 들리지 아니하나 그다지 밝지 못한 전등빛에 그들의 안 구부리고 자는 모양들이 이곳저곳에 보입니다. 그 모양들이 심히 가엾어 보이겠지요. 제각기 제 갈길이 있어 가는 것이련만은 “저들은 어디로 가노?” 하는 야릇한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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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나자 잠이 곧 깨인 뒤에 특유한 형언할 수 없는 호젓한 무엇이 내 가슴을 눌렀던 것입니다. 저 젊은이는 어디로 가며 저 늙은이는 어디로 가노? 저 남자는 그리고 저 여자는 어디로 향하는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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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淸人[청인]은 그리고 저 日人[일인]은? 가다, 가다 혹은 다음 역에서 내리고, 혹은 그 다음 역에서 내리고 혹은 또 그 다음 역에서 내릴 것이다. 혹은 역에서 내려서도 어떤 이는 동으로 가고 어떤 이는 서로 가고 하여 필경 제각기 제 길을 가고 말 것이다. 무슨 인연인지 모르나 잠시동안 한 차 안에 담기어 한 방향으로 달리다가 하나씩 둘씩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모여 들었던 것과 같이 하나씩 둘씩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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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이상한 것이다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납니다. 한 차안에 담기어 바로 자리를 같이하여 가거늘 서로서로의 가는 곳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남의 가는 곳은 고사하고 제 가는 곳은 어디 분명히 알고 갑니까? 나는 어디로 가나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포항을 간다 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盈德[영덕]이나 平海[평해]를 간다 하겠지요. 그 다음엔 蔚珍[울진], 三陟[삼척]을 지나 江陵[강릉]으로, 襄陽[양양], 杆城[간성]으로, 金剛山[금강산]으로 元山[원산]으로 간다 하겠지요. 그 다음엔 서울 가고, 또 그 다음엔 집에 가고 또 그 다음엔? 아마 학교 가고, 또 그 다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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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모릅니다. 결국 따져보면 제 가는 곳도 모르고 가는 이 인생이 아닙니까? 가는 곳도 모르면서 싫건 좋건 그 험하고 어려운 길을 대답없이 가니 인생이란 더욱 더욱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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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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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으로 그 자는 모양들을 보니 그 꼴이 더 가엾어 보입니다. 혹은 바보처럼 입을 떡 버리고, 혹은 동물처럼 이마를 찌푸리고 자는 그 꼴들이 모두 가엾어 보입니다. 눈을 비비고 제 정신에 돌아만 오면 행여 남에게 추함을 보일세라, 행여 남에게 약함을 띠울세라 하고 애동대동할 것이었건 만은 한번 잠이 들어놓고 보니 모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저 꼴들입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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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수운 것이거늘 제각기 젠 체합니다. 다 하잘 것 없는 것이거늘 제 혼자 잘난 척, 강한 척, 아는 척, 무던한 척 하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하면 얼마 아니되는 일생이니 될 수 있는 대로 善心[선심]으로 겸손하고 다정하여 서로 정답게 살다가 命[명]이 진하거던 一墳土[일분토]가 되건 一抹煙[일말연]이 되건 갈데로 가버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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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마침 永同[영동], 黃澗[황간]을 지나 푹푹거리며 추풍령을 올라갑니다. 승강단에 나서니 부슬비가 내리는데 하늘은 칠한 것처럼 검습니다. 밝은 낮 같으면 시내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혹 어여쁜 꽃도 보이련만은 워낙 어두워 다만 추풍령이기 분명한 큰 산의 마루가 어렴풋이 보일 뿐입니다. 빗방울 섞인 새벽 바람이 옷깃을 날리며 지나는데 사람없는 승강단에 섰으니 이야말로 나 홀로 嵬嶷외의]한 추풍과 면과 면을 마주 바라고 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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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한 대자연, 언제나 말이 없는 그 모양입니다. 나도 말없이 암흑 속에 솟은 그 어마어마한 윤곽을 보고 있노라니 그 큰 산이 산이 아니라 조선을 상징하였던 거대한 얼굴이 되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 크나큰 얼굴이 그 크나큰 눈을 뜨고 어리고 적은 나를 향하여 “왜거늘, 왜 깰줄을 모르는고? 저 닭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하고 호령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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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가 비록 들리는지 아니하나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내 영혼이 마치 바람맞은 가랑잎 모양으로 그 앞에 발발 떠는 것 같습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엄숙하고 비장한지 내 옆에 아직도 조는 조선 젊은이, 아직 철 안난 조선 어린이가 있다면 와락 흔들어 깨우고 싶은 초조한 마음이 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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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소리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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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산이 우리를 향해 소리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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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젊은 사나이야, 왜 하품만 하느냐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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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어린 딸들아, 왜 노리개만 만지작 거리고 있느냐 하네
52
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의 부름 그의 손짓함을 듣고 보지 않느냐 하네
 
53
왜 그의 가슴팍을 파 뚫을 줄 모르나 하네
54
왜 그 가슴 속에 파묻힌 쇠와 기름읍 파내지 못는가 하네
55
왜 그 이마에 우뚝한 집을 짓고 그 허리에 넓은 길을 못 내는가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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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팔을 부르걷고 곡괭이를 들고
57
메를 두르지 않는가 하네
 
58
왜 건설에 흐르는 땀을 위해 흐르는
59
玉流[옥류]에 씻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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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흥에 뛰는 가슴을 위해 불어주는
61
청풍에 헤져보지 못하는가 하네
 
62
산이 부르네, 조선의 산이 부르네
63
조선의 젊은이, 조선의 어린이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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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그 이마에 큰 집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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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허리에 큰 길을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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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 밑에 조선의 새 거리를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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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살림을 하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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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를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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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가 개잠이 들어 한참 꿈을 꾸는 판에 黃[황]군이 일어나라고 흔듭니다. 깨여보니 차창 밖으로 물을 담뿍 실은 논들이 끝없이 뻗혔는데 차는 大邱[대구]역을 향하고 達城平野[달성평야]를 남으로 달립니다. 역에 내린 것이 5시 25분,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아직 흐리었고 흰솜 같은 뜬구름이 八孔山[팔공산] 골자기로 상봉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아침 밥을 싸들고 경주행 기동차를 타니 앞으로 세 시간을 넘어 달려야 浦項[포항]을 간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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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세상에 세 시간에 2백리쯤 가는 것이야 누워 떡먹기가 아니어요, 그러나 우리를 실은 소위 기동차라는 것이 서울로 이르면 ‘府廳[부청] 버스’만 밖에 못되는 것입니다. (그 모양이나 크기가 똑 같습니다. 다만 ‘부청버스’는 차장이 여자요, 바퀴가 고무인데 이 차는 차장이 상관이 기다랗고, 코가 주먹 같고, 게다가 혼자 떠드는 사내 놈이고 바퀴가 ‘레일’ 위를 굴으는 쇠로 된 것이 다른 점이라면 피차의 다른 점이겠지요.) 요런 당나귀만한 놈을 타고 앉았으니 그 시간에 그 거리를 갈까하고 의심이 아니 날 수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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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맹랑한 놈 다보겠다.” 하고 업수여겨지지를 않겠어요, 했더니 왠걸 시간이 되자 뺑 소리를 한 번 치고 당나귀만한 놈이 네 발이 아니라 네 박자를 덜거리기를 시작하고 보니 빠름이 실로 비호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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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 하루 이틀 묵어 芬皇[분황] 膽星[담성]의 네 자취를 또 한번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이 뫼(山)는 두 번이나 본 곳이요, 또한 앞길이 총총함으로 빛 붉은 남산과 樹陰[수음] 깊은 鳳凰臺[봉황대]를 바라보기만 하고 포항행 차를 동으로 몰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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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山江[형산강]을 왼편으로 끼고 근 한 시간 동안을 달려서야 우리의 도보를 시작키로 한 목적지 포항역에 다달았읍니다. 날은 아직 개지를 아니하여 비실은 떼구름이 長馨半島[장형반도]의 등성마루를 이룬 連山[연산] 위에 떠돌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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迎日灣邊[영일만변]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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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은 어려서도 자주 듣던 곳이요, 또한 동해안 유명 항만의 하나이라 보기 전에는 꽤 얌전한 항구인줄만 믿었던 것입니다. 했더니 마침 내려보니 그 거리일지 건물일지 원근 산야일지 하나도 보잘 것이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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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라 그렇겠지만은 첫째, 길이 질기 수렁 같고 더럽기 시궁창 같아 걸을려니 발 디딜 곳이 없을 지경이요, 길 양편에 늘어선 집이라는 것도 조선식의 얌전한 것이나 양식의 반반한 것은 눈에 띄랴 모두가 한 모퉁이를 쥐고 와락 당기면 기둥돌이 중방할 것 없이 단숨에 와르르 끌려나올 성냥갑을 가로 세로 마구 놓은 것 같은 일본식 중에도 왼 날림 일본식의 것들 뿐입니다. 길이 그 꼴이요, 집들이 또한 그 꼴이라 내리자마자 이곳의 첫 정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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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居民[거민]들까지 뚝뚝하기 짝이 없겠지오. 初行[초행]이라 해수욕장 가는 길을 몰라서 약시약시한 데를 어디로 가느냐고 지극 공손하게 물으면 대개가 “저리 가보소” 하고 우리의 가는 길을 턱으로 가리키거나 “내사 모르겠소” 하고 퉁명스럽게 내부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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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표정이 마치 빚장이나 대하는 것 같겠지요. 어찌어찌다 좀 곰살궂게 일러주는 친구를 얻어 만나면 십중팔구가 경상도 액센트를 면치 못한 덜된 日本[일본]말입니다. “이 친구들이 대체 왜 이런고” 하고 골이 슬그머니 나는 것을 타관이라 꾹 눌러 참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루퉁 해가 지고 근 20분을 위아래로 갈팡질팡 하다가 어찌어찌 수영장으로 건너가는 형산강 나루를 얻어 만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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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에 다달아 보니 강도 시가와 같이 탁하고 더럽기 짝이 없읍니다. 그러나 이 강산을 건너 倭松[왜송]들 사이로 뚫린 신작로 수백보를 가면 바로 그 신작로가 끝나는 곳에 묘망한 海景[해경]이 터집니다. 이것이 옛부터 고새잡이로 유명한 영일만, 우리가 서 있는 시가의 東灣[동만]의 西南[서남]인 이 백사장이 금년부터 시작되었다는 포항 해수욕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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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波[백파] 깨어지는 해변
 
 
81
우리는 그 시가와 그 居民[거민]과 그 濁江[탁강]에서 받은 모든 불쾌를 잊고 취한 듯 앞에 벌어진 명랑한 해경을 바라보았읍니다. 동으로 장향반도가 수십리를 떨어져 북으로 뻗혀 翠碧[취벽]한 장벽을 이루고 서로는 興海山野[흥해산야]가 움칫 蟠踞[반거]하여 훌륭하게 백 여리 大灣[대만]을 얼쌌읍니다.
 
82
그 지형과 크기가 영흥만과 흡사하니 북으로 외해와 연한 곳에 小島三四[소도삼사]가 點在[점재]하였던들 누구나 원산 송도원에서 동으로 葛麻半島[갈마반도]의 북단을 바라보는 감을 갖을 것입니다. 욕장이라 해도 아직 신설이라 그런지 그 설비가 변변치 못합니다. 헤엄치는 곳에 붉은 통 몇 개 띄워논 것과 과자 등속을 파는 매점 두 개, 철봉틀 하나, 그리고 몇 개의 천막이 쳐있을 뿐입니다.
 
83
이같이 아직 인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비교적 미미합니다. 그러나 그 모래의 힘, 솔의 푸름, 물의 맑음, 그리고 물결의 잔잔함이 동양 제일이라는 송도원보다 나을지언정 못할 것이 없읍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를 않아서 망정이지 차차 사람들이 이곳이 어떠한 줄을 알게 되는 날에는 필경 이곳에도 일없는 친구들의 빨간 집 푸른 막이 생기고 발가숭이 늙은 것, 젊은 것들이 구더기 끓듯 하리라고 생각이 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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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날 하루는 해변에서 수영이나 해가며 편히 쉬고 오는 날부터 大馬力[대마력]으로 걸어보자는 예정이었읍니다. 그래 우리는 沙場[사장]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짐을 풀고,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깔고 하였읍니다. 그리고는 밥 지을 아궁이를 파고 땔나무 부스러기를 줍고 반찬 만들 홍합을 사왔읍니다.
 
85
그리고 보니 한 살림이 제법 됐겠지요. 마치 요술장이가 주먹만 툭툭털면 달걀, 물고기, 남생이가 우물우물 기어나오는 모양으로 우리는 봇짐을 끌러 한참 부스럭부스럭하니 어느덧 집이 서고 구둘이 놓이고 솥이 걸리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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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어부들이 모여들어 연해 희한하다 합니다. 생각을 하면 딴은 희한할 것도 같습니다. 이렇게 살림을 차려놓고는 주워 온 나무로 반합에 밥을 짓고 생으로 먹다 남은 홍합으로 국을 끓였읍니다. 그리고 익은 밥 달은 국에 천리 가까이 끌고 온 고추장을 곁들여 첫 날의 고사 점심을 멋지게 먹었던 것입니다. 점심을 먹고나니 할 일이 그릇 부실 것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그릇 같은 것이야 언제 부시면 어떻습니까. 저녁 먹을 때 필요하면 씻어도 좋고 필요치 아니하면 아니 씻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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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잡힐 근심도 없는 이 신세요, 흉 볼 사람도 없는 이곳이 아니에요. 그래 먹은 그릇일랑 여기저기 제놓인 채 ‘아리랑’을 부르게 내던져 두고 팔을 베개 삼고 누워 홍합과 고추장으로 부른 배를 북삼아 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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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후에 배에서 쿵쿵 소리가 나면 저녁 지어 먹을 것이 오늘의 남은 근심이라면 남은 근심입니다. 그 외에야 누가 눕는다는 이가 있나, 앉으니 앉는다 시비하는 이가 있나, 자니 깨라는 이가 있나, 깨니 자라는 이가 있나, 그 자유로움이 진실로 저 물속에 노는 물고기 같고 그 한가함이 저 물결 위에 뜬 갈매기 같습니다. ‘장부의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할시고’를 부를 신세가 세상에 있다면 당연히 滄海邊[창해변] 백사장에 배 깔고 누은 우리의 이 신세일 것입니다.
 
89
한참 모랫바닥에 누워있으면 좀 더워집니다. 그러면 물로 기어들지요. 기어들어 헤엄을 치고 헤엄을 치다가 다시 선선해지면 또 모랫바닥으로 치굴고 내리굴고 합니다.
 
90
그러다가 구르는 것도 싫고 헤엄치는 것도 재미 없어지면 모래 위에 두 다리를 버티고서 바로 그 바다의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멀리 水天[수천]이 어울어진 곳에 떠있는 점점한 범선도 헤어보고 가까이 白波[백파] 깨어지는 곳에 어부들의 짓, 텀벙하고 멸치 잡는 모양도 구경합니다. 멸치라 해도 이곳서 잡히는 것은 우리가 보통 국에 넣어 먹는 검고 큰 보통 놈이 아닙니다. 소위 ‘기름멸치’라 하여 희기가 백어 같고 작기가 송아지 같은 좀 첨단적 기분을 띤 아주 가련한 멸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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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고등한 어른이 잡수시는 것으로 우리네가 먹으면 입 부르틀 염려가 있다는 양반멸치입니다. 그래 그 고등한 어른들의 입을 괴이려 이 가련한 것들이 밤과 낮으로 잡히어 차로, 배로 혹은 육지를 넘어가고 혹은 바다를 건너간다 합니다. 잡는 법은 대개 ‘끌 그물식’으로 20여명씩 한패가 되어 해변을 후려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경한 것도 역시 이 법이었는데 수십명이 옹기종기 모여 그물을 끌어들이는 것이 보기에 퍽 씩씩합니다. 그리고 끌어들일 때에 연하여 주고받고 하는 농지거리가 듣기에 매우 구수합니다.
 
92
누구든지 그곳에 한참 서서 그들의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떠드는 것을 들으면 첫째 그들 사이에 욕담 섞인 농지거리가 별로 끝날 새 없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욕담’과 ‘그물끌기’가 유기적 관계를 가져, 나눌래야 나누기 어렵다는 기괴한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20명이면 20명, 30명이면 30명 그 중에 싸이어 일 아니 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그 중에 싸이어 욕 아니 하는 사람이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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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하면 의례히 그물을 끈다’는 정리까지는 몰라도 ‘그물을 끌면 의례히 욕을 한다’는 정리는 훌륭히 성립될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일을 잘하는 동시에 욕을 잘하고 농을 잘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모두가 다 욕을 잘하되 그 중에도 草之英[초지영] 같이 뛰어나게 잘하는 초특선수는 曳網臺[예망대]밑에 앉아 들어오는 그물 줄을 거두고 있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남달리 외모가 똑똑하고 기골이 장대한 것을 보면 욕도 풍채와 기골에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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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를 비롯하여 20여명의 입과 귀 사이로 연해 오색 화살같이 욕이 오고, 욕이 가는데 ‘이놈’‘저놈’ 같은 것은 예사 쓰는 점잖은 말이요, 실로 기기괴괴한 難形難測[난형난측]의 별별 욕이 다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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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한 것, 오묘한 것, 궁상스러운 것, 구수한 것, 아기자기한 것, 잔인한 것, 또 혹 인후한 것 아 ── 어떻게 다 형용을 합니까? 들어보셔야 할지요.” 그러나 일찌기 마루 아래서 세수해 보신 일이 없고 쌀이 나무에 열리는지, 풀에 떨어지는지를 잘 분간치 못하시는 다복한 팔자로 自朝至夕禮儀凡節[자조지석예의범절]만 지키시는 신사숙녀는 꿈에라도 이런데 가보실 생각을 내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예 없으면 그 범절 모름에 놀라 혹 기절하실까를 염려하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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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별로 기절하는 일도 없이 여전히 유들대며 태연히 욕을 주고 태연히 욕을 받고 합니다. 그리고 욕을 하거나 욕을 먹은 뒤에는 의례히 간줄기가 떨어져라고 일제히 너털웃음을 웃읍니다. 그리고는 그 웃는 동안에 예망대를 돌리고 그물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가령 처음에 어떤 친구 하나가 옆의 사람을 보고 “개 같은 놈”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이 소리가 끝나자 일동이 허허 웃고 그 웃는 동안에 예망대가 벌컥 소리를 내고 한바퀴를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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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놈”소리를 들었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있읍니까? 그래 그 욕먹은 친구가 이번에는 대꾸로 “저런 강아지 같은 놈 봐라” 하고 먼저 욕한 친구를 노려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또 일동이 하하 합니다. 아 하하 하는 동안에 어느덧 그물이 한두 발 끌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98
팔자좋은 친구들 같으면 힘이 든다든지 피곤하였을 때 커피나 위스키를 권커니 자커니 하였을 것이 아닙니까? 그들인들 들어 보았겠어요. 그저 죄없는 욕, 돈 안드는 미담을 그런 것 대신으로 권커니 받거니 하여 괴로움을 잊고 피곤을 잊고 크고 작은 시름마저 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잊는 그 덕으로 항상 새 희망을 얻고, 얻는 새 힘과 희망으로 날마다 櫓[노]를 젓고 그물을 당기는 것 같습니다.
 
99
우리가 보는 동안에만도 그들은 無難千百語[무난천백어]의 욕을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백어를 주고 받는 동안에 그물이 두번 바다에 드나들고 그물이 두번 바다에 드나드는 동안에 그들의 옷이 되고 밥이 될 근 백원의 기름 멸치가 잡혔던 것입니다.
 
 
100
어부들의 욕타령
 
 
101
그들의 허물없는 농을 듣고 ‘고얀손’들이라 꾸짖는 쾨쾨한 道學先生[도학선생]이 계시다면 제 밥 먹고(혹 남의 밥 먹고) 제 소리하는 것이라 우리의 상관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고기잡는 그들과 또한 그들과 같은 이들이 마침내 올 세상의 주인이요, 그들의 힘과 수고로움이 현재를 지지하고 장래를 운전할 것을 믿는 우리도 그들에게 불후의 안위와 생기를 주는 농담의 효과를 무시할 길이 없읍니다.
 
102
실로 그들을 웃기기는 농담의 그들에 대한 효과를 논할진대 如干人蔘[여간인삼] 조각, 녹용 부스러기의 類[류]가 아닐 것입니다. 여하간 한 생을 고기잡이로 늙는 친구가 저 중에도 있을 것이 아니에요, 한데 그들의 혹 노젓는 팔이 매지근할 때, 혹 줄 당기는 어깨가 뻐근할 때 그들은 “얘이놈” 해줄 친구를 기다릴 것입니다.
 
103
그리고 “얘이놈” 소리를 듣고 같이 웃을 快[쾌]한 웃음을 기다릴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몸을 씻는 조수와 해풍의 덕, 그리고 마음을 위로하는 농담의 덕으로 조상에게서 받은 두 주먹을 유일한 밑천삼아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고, 이웃을 기르고 그리고 자기를 기르는 것입니다. 농담의 덕이 또한 크지 않습니까.
 
104
그러기에 나는 그들에게 孔孟[공맹]의 教釋迦法[교석가법], 耶蘇[야소]의 도가 없었어도 그들은 역시 저렇게 튼튼하게 저렇게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모든 농담을 몰수해 보십시요. 사흘이 못되어서 속병들이 나고, 얼굴이 핼쓱해지고 팔다리가 매지근하여저서 온 해안에 愁雲[수운]이 가득할 것입니다.
 
105
어느덧 날도 가고 황혼이 되엿읍니다. 일 없는 신세나 때는 찾아야겠기에 저녁밥을 지어 먹었읍니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나니 역시 할 것이 있읍니까? 그래 심심파적으로 또 멸치잡는 구경을 갔던 것입니다. 오늘은 멸치가 꽤 들어왔다 하여 물결이 자못 높고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도 불을 켜들고 여전히 후리질을 하던 것입니다.
 
106
위안제도 너무 쓰면 싫증이 나는지 그렇게도 마구 쏟아놓은 농지거리도 이제는 그만두고 그대신 일동이 노래를 부릅니다. 예망대를 빙빙 돌리며 돌아 가는 보조에 맞춰 파도 소리를 장단으로 일동이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라는 것이 대강
 
 
107
“어떤 사람 팔자 좋아”
108
“에 ── 야 좋 ── 고”
109
“高臺廣室[고대광실] 높이 살고”
110
“에 ── 야 좋 ── 고”
111
“우린 팔자 사나워서”
112
“에 ── 야 좋 ── 고”
113
……………
114
“에 ── 야 좋 ── 고”
 
115
와 같은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 “고대광실……” 등 멕이는 사람의 독창하는 멕임 가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힘이다. 맹모의 삼천지교는 지식에도, 기술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교육에는 노예를 만드는 교육도 약소민족을 동화시키려는 마취적 교육도 포함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화라는 것은 반드시 진리와 이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교육과 교화가 절대로 병진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16
교화 ── 교육 ── 그것은 위대한 힘을 가진 術師[술사]인 것이다. 곡마단의 개, 말, 원숭이, 코끼리 등은 어떤 특종 기술에 한하여서는 훈련받지 못한 인간의 기술보다 월등한 것이다. 소인의 교육은 荀子[순자]가 ‘勸學篇[권학편]’에서
 
 
117
소인의 학문이란 귀로 받아 두었다가 입으로 내놓는다. 귀와 입과의 거리가 겨우 네치뿐인데 어찌 일곱자의 체구로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118
(小人之學也[소인지학야] 入乎耳出[입호이출] 乎口口耳之間則四寸耳曷以美七尺之軀哉云云[호구구이지간즉사촌이갈이미칠척지구재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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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만한 효과를 가질 것이요, 대인의 교육은 밀톤이 정의하되
 
 
120
교육이란 평시나 전시에 있어 공사만단의 임무를 정당하게 또 교묘하게 그리고 관대하고, 엄격한 교육 연장안이였었는데 그것은 세력자 측의 반대로 ── 즉 교양으로 인한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임금의 손실을 볼 수 없다는 견지에서 ── 그 안이 매장된 것은 오래 전 일이 아니거니와 영국의 노동자 교육은 빅토리아 여왕을 위시하여 지배 계급의 호의로 된 ‘메카니즘 인스리튜트’와 ‘무츄얼 임프룹먼트 소사이어틱’ 등의 명칭으로 불리워진 계몽기관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후 19세기 중엽에 순 노동자의 자치적 경영인 쎄필드 국민대학의 창설이 효과의 자극을 주어 노동대학 설립의 기운은 점차 만연되었다.
 
 
121
그것이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을 성장시키는 기인이 되고 그 확실성을 붙여준 것이다. 또 그것이 지금에는 일불몰이 대영국을 지배하고 있는 노동당의 동력이 된 것이다.
 
122
다만 교육이 있을 뿐으로 교화력이 없는 조선인이여! 우리들의 앞길은 우리들의 자력으로만 개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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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관동팔경답파기(關東八景踏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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