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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새벽 삶고 찌는 , 듯하던 더위도 인제야 잠깐 물러갔다. 질식한 듯 싶던 바람이 갑자기 생기를 얻은 것이 슬슬 들자, 그 축축하고 눅눅한 입김에 흔들리어 새하얀 달빛이 흩어졌다. 그 흰 가루는 마치 눈보라 모양으로 입때껏 부글부글 괴어 오르던 땀을 싸늘하게 식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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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헐떡이는 것같이, 훨씬 열린 경화의 방 미닫이는 아직도 닫히지 않았다. 병일이와 단둘이 자는 꼴을, 어둠으로 가리우노라고 전등불은 꺼두었건만 그 대신 속 없는 달빛이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다. 연옥색 망사모기장으로 걸어 놓으매 밝고 흰 광선은 푸르게 변하여, 햇발에 비친 바닷속도 이러할 듯. 그렇다면 젊은 사내와 계집의 손길, 발길에 채이고 밀리어, 여기 불룩불룩, 저기 꾸김꾸김한 모시 겹이불은 굼실거리는 물결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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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개와 요, 이불을 내버리고 맨 방바닥에 굴러와서 자던 병일은 선선한 기운에 잠이 깨었다. 어젯밤 명월관에서 삐루에다가 위스키를 많이 타 먹은 탓으로 눈 뜰 겨를도 없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그는 자리끼를 거진 다 말리고 보니, 화류 문갑 위에 얹힌 자개박이 체경이 번들번들하며, 그 옆에 놓인 유리 항아리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금붕어가 역력히 보였다. 이 밝은 빛의 원인을 알아차리자, 그는 미닫이 편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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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화 송이처럼 멍울멍울한 구름 위에 반 남아 이즈러진 달이 마조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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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도 오른팔과 왼편 다리로 귀찮은 듯이 이불을 걷어 제치고, 벼개에서 미끄러진 머리를 벼개에 처박은 채 곤하게 잔다. 그 벌거벗은 가슴, 다리, 팔은 달 그림자로 말미암아 은물에 적셔 놓은 듯. 거기 어른어른하게 수놓은 모기장은 마치 인어 몸에 붙은 파래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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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랑하고도 몽롱한 빛 물결 위로 한껏 정화되고 미화되어 떠오른 제 사랑을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병일은 문득 처음 경화를 만나던 광경을 눈앞에 그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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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또한 달 밝은 저녁이었다. 석왕사 솔밭,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석후 산보를 하던 길에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여자 하나를 보았다. 묵화를 친 듯이 길길이 누운 소나무 그림자 위로 그 여자의 기름한 그림자는 헤엄을 치는 듯이 움직이었다 . 유달리 숱 많은 푸수수한 머리 밑으로 갸름하고도 동그스럼한 흰 윤곽은 대개 짐작하자마자, 그는 기막히게 어여쁜 무엇을 본 듯싶었다. 그의 발길은 그 여자의 그림자를 밟았다. 병일의 타는 듯한 시선에 들어온 경화의 인상은 놀랄 만치 아름다웠다. 하느적하느적 자기 옆을 지나칠 제 소르르 코 안으로 기어드는 냄새도 이 세상의 향기가 아니었다. 사르락사르락 그윽한 소리와 함께 조금 긴 듯한 치마가 잔잔한 물결을 치던 구김살까지 시방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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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에 올라와서 얼굴 바탕과 이목구비의 생긴 양을 뽀이에게 그리다시피 일러 듣기어 경화를 불러온 것만 보아도, 그 때의 인상이 얼마나 분명한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한 번 열린 사람의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만석꾼의 외동아들로 물 퍼붓듯…… 끼얹는 금전의 힘은 쉽사리 경화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으로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고보니 인제 와서는 그다지 못 견딜 지경은 아니러니, 오늘밤이야말로 그 때의 기억이 새로워지며 그 자는 얼굴이 열 곱절 백 곱절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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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까지 휩싸서 너울너울 뒤로 넘긴 독특한 머리 쪽짐, 별로 굴곡 없이 보드랍게 나려온 뺨의 선이 양양히 뼈 언저리에 와서 도두룩하게 불러지며 동그스름하게 굽어들어 타원형으로 미끄러져서 이룩된 귀염성 있는 아래턱, 방싯 웃으려는 연꽃 봉오리 같은 입…… 병일은 제 사랑의 가지가지 미점을 눈으로 맛보기에 거의 넋을 잃었다. 생각하면 경화를 처음 보고 얼마나 애를 태웠던고. 마음을 졸였던고. 달빛이 지은 신기루와 같이 문득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진 애닯은 그 그림자를 얼마나 그리었던고. 다시 한번 맞아보자고 갖은 궁리가 머리를 설레었건만, 가을 하늘에 높이 달린 별과 같이 부여잡을 모책이 없고, 따나릴 도리가 나서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하냐. 그 별은 자기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지가 오래가 아니냐. 도리어 이 편의 마음이 뜨아하건만 저 편이 더욱더욱 달라붙는 형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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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란 제발 싫어요. 물동이를 이고 김을 매어도 병일 씨(나으리라고 부르기가 거북한 듯이 또는 정답지 못한 듯이 경화는 병일을 항상 이렇게 불렀다.)와 같이 한다면 난 고된 줄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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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비슷, 농담 비슷, 또는 남의 흉내 비슷, 이런 말을 늘어놓다가 부끄러운 듯이 병일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기도 하였다. 다시 고개를 들 때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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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말을 해도 어째 거짓말 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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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숨도 여러 번 짓지 않았느냐. 이 달 내로 아버지 돈을 얼마쯤 끌어내면, 두말 없이 때어 들일 수가 있지 않느냐 ── 이런 생각을 하는 병일의 입술에는 쉴 사이 없이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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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 다가 누우며 미친 듯한 포옹도 하고 싶었으나 곤한 잠을 깨우는 것도 애처로워서 그만두었다. 그 대신 어슴푸레한 그늘이 어룽진 이 세상 것 아닌 아름다운 살덩어리를 거짓이나 아닌가 의심하는 듯이 손으로 그 뺨을 더듬고 그 턱을 만지고 그 젖가슴을 쓰담았다. 손바닥의 매끄럽고 포근포근한 촉감으로 말미암아 병일의 심신은 실실이 풀리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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깬 이의 손길이 자는 이의 팔뚝을 스칠 판이었다. 살 아닌 명주 헌겊 같은 것이 만치었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고 머리를 번쩍 들어보니, 과연 거기는 길이 네 치 가량이나 되는 명주 헌겊으로 휘휘 감아둔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헐모나 상처를 매어둔 것이어니 하였으나 명주로 싼 것이 야릇하여서 끌러보려고 하였건만 매인 고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호기심이 부쩍 나서 몸을 일으켜 전등을 켰다. 지금까지 희미하게 졸 듯하던 방안은 살기를 띤 듯한 명랑한 불빛으로 부시게 밝아졌다. 자세히 본즉 맨 것이 아니요 가는 실로 정성되이 감춰 놓은 것이었다. 만져도 보고 눌러도 보았건만 상처나 헐모는 아닌 듯, 병일은 의심이 와락 났다. 무슨 큰 비밀의 봉지를 열려는 것처럼 일단 정성을 다 모아 살살 뜯어 보려다가 잘 뜯겨지지 않으매 손가락을 감친 어름에 넣어서 힘껏 잡아채었다. 실밥은 쉽사리 터졌으되, 그 서슬에 경화가 잠을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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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는 한 손으로 그 곳을 훔켜 쥐며 놀랜 듯이 벌떡 일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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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이도 마주 일어 앉으며 다짜고짜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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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잠깐 생각을 돌리는 듯하더니 경화의 얼굴은 살짝 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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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모가 어데 어떻게 났누? 어데 좀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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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몸을 틀며 매우 난처한 듯이 눈썹을 찡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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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보이려고 드는 것이 더욱 수상하다. 병일은 기어이 보자고 덤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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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동안 승강을 하다가 아니 보이고는 못 배길 줄 알아챈 계집의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눈썹은 꼿꼿해졌다. 무슨 매서운 결심을 하는 듯이 아랫입술을 꼭 물자, 마츰내 손을 떼었다. 그 시원하고 거슴츠레한 눈은 핏발이 서며 반들반들 번쩍인다. 여러 겹 싼 헌겊을 다 펴고 본즉, 그것은 헐모도 아니요 상처도 아니었다. 뽀얀 살 위에 먹실로 ‘백년랑군 김상렬’이라고 뚜렷이 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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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납덩이 같은 침묵이 계속된 뒤에 경화는 먼저 이런 말을 붙이며, 댁대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방 밖의 달빛과 어우러지며 옥가루같이 부서진다. 손바닥으로 뺨을 괴고 방 위에 머리를 부딪힌 사람처럼 얼없이 앉아 있던 병일은 머쓱머쓱히 아모 대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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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잘난 것을 보고 왜 이리 정신이 빠졌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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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은 무슨 기쁜 일이나 생긴 듯이 역시 생글생글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으로 놈의 뺨을 튀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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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앝는 듯이 한 마디 하고 놈은 앳된 이맛살을 억지로 찌푸렸다. 귀공자답게 뭉실뭉실하게 살찐 얼굴에 벌컥 피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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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 못 할 소리가 없네. 왜 내가 요악한 년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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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때껏 나하고 정이니 사랑이니 하던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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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에 년은 농치던 말씨를 고치며 진국으로 대어들다가, 문득 또 한번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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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우스꽝스러운 일도 많다. 팔뚝에 새긴 것을 보고야 거짓인 줄 황연대각(晃然大覺)을 했구료. 어릴 때 쑥스러운 작난도 이런 때에는 매우 유용한 걸……. 워낙 사랑이란 팔뚝에 새겨야 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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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다섯 살 때 이웃에 사는 탓으로 동무 삼아 놀다가 팔에 먹실을 넣은 것이 그대로 백년랑군이나 되었으면 이 노릇은 아니할걸. 늙어 죽을 때나 다시 만날는지 육 년 동안에 코빼기나 얼씬해야지. 생시는 구만두고 꿈에라도 보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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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에까지 새긴 남편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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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정이 있어야 나는 정이 있다구, 생각할 건덕지가 있어야 생각이라도 해 보지. 괴망(怪妄)스러운 녀석 같으니, 무슨 할 작난이 없어서 남의 팔을 버려 놓고 여태 남을 시달리기만 맨들어. 연전에도 어떤 손님한테 시달려서 죽을 고비를 치렀는데 곁에 있으면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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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에나 새겼기에 저런 악담이나 듣지, 나 같은 놈은 안 보는 날이면 이렁성거릴 거리도 없으렷다. 흥,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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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가장자리가 조금 풀린 것을 보면, 이 비비 꼬는 변명으로 놈의 의심은 얼마쯤 풀어진 듯. 년은 어이없다는 듯이 놈의 얼굴을 물끄러미 흘겨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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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렇다 뿐야. 미쳤던가, 안 보는 사내를 입길에라도 올리게. 여북해야 기생이란 일원 삼십 전 짜리 사랑이란 말까지 있을라구. 한 시간 놀음차 주면 한 시간 놀고, 두 시간 놀음차 주면 두 시간 놀고, 헤어지면 잊어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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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고 연봉오리 같은 입술이 왼편으로 조금 삐뚤어지며 싸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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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니 안방이니 하는 것부터 미친 개수작이지. 더구나 나 같은 기생년에겐 개밥에 도토리야. 안 보는 날이면 이렁성거리지도 않는다? 암 그렇구 말구, 그렇구 말구, 그야 말할 것도 없지……기생! 기생! 이 원수년의 기생이란 탈! 이 탈만 쓰고 보면 오장육부까지 변해지는 줄 아나 봐. 마음에 없는 아양을 피우고, 마음에 없는 웃음을 웃고, 마음에 없는 사랑 타령을 늘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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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 말을 제가 되받는 사이에 경화는 점점 흥분해 간다. 광대뼈 언저리가 돈짝만치 피를 발라 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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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으로 뭉친 이 몸짓, 이 눈짓, 이 입아가리! 이따금 참 소리를 한다 한들 누가 알아먹을까? 뼈와 살로 빚어낸 참된 정도, 뜨거운 사랑도 한번 내 몸을 거쳐 나오기만 하면 단박에 거짓이 되고 말겠다. 나도 언제나, 나도 언제나 미운 사람을 밉다 하고. 고운 사람을 곱다 하고……알뜰한 애인과 단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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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마자 갑자기 목이 메이며, 무엇을 노리는 듯이 홉뜬 눈으로부터 한 방울 큼직한 눈물이 뚝 떨어져 꽃잎에 구르는 이슬 모양으로 뺨을 스쳐서 나려진다. 그럴 겨를도 없이 이불에 그대로 엎어져서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다운 울음이 아니었다. 총알을 맞은 꿩이 최후의 비명을 지르는 듯이 찢는 듯한 소리가 이따금 일어나고, 어깨와 허리가 사나운 물결을 칠뿐이었다. 그는 목으로 울지 않고 왼몸으로 울었던 것이다. 그의 넋의 마디마디가 울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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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의 어린 마음은 풀릴 대로 풀리었다. 모든 사내에게는 다 거짓이로되, 자기에게만 ── 오직 자기에게만 참마음을 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먹실로 썼든지 새겼든지 상관이 무엇이랴. 쓸데없이 그것을 보자고 졸라서 저렇게 울리는구나, 하매 애연한 생각조차 일어났다. 그는 우는 이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려고 애를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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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는 왜 울어? 네 마음을 내가 안다. 하로바삐 기생 노릇을 그만두고 단둘이 살면 그뿐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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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달래는 판에 무엇이 슬픈지 제 눈에도 눈물이 굄을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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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분 가량 지나갔으리라. 경화는 울음을 뚝 그치고 벌떡 일어났다. 모기장을 걷어치고 서랍 속에서 채칼을 끄집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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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말로 한번 뇌이면서 커다란 재떨이를 밖으로 들고 나간다. 비워 가지고 들어온 재떨이를 앞에 놓고 그 위에 신문지를 깔고 또 그 위에 양지 편지지를 깔았다. 뽀얀 팔뚝을 그 위에 세우자, 한 손으로 칼을 들어 먹실로 뜬 언저리에 대었다. 눈이 호동그래진 병일은 말리려고 서둘렀으나 때는 늦었다. 삭둑 하는 그윽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은 벌써 살밑으로 들어갔다. 선지피가 삽시간에 팔뚝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흰 종이 위에 핏줄기가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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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같은 팔뚝을 병일의 코앞에 쑥 내어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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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경화는 또 한번 싸늘하게 웃었다.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앉았던 병일은 몸서리를 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앉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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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어찌 보면 강명화(康明花)의 사실을 적은 줄로 아실 것이다. 그 사실에 힌트를 받기도 하였고, 골자에 유사한 점도 있지마는, 그것은 지엽에 그칠 따름이요 온전히 작자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품인 것을 언명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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