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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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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4
백신애
1
춘맹
 
 
2
구정초(舊正初)라고 동무따라 놀러 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니 몸이 피로하여 몇 날간 누워 있었다. 외따로 들 가운데 지은 집인지라, 창을 열면 ‘피크닉’ 와서 ‘캠프’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느낌이 있다. 창 밖이 들이요, 못(池)이요, 산(山)들이다.
 
3
베개에 시달린 머리가 몹시 무거워 몸을 일으켜 창턱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더니 동리 소녀(小女)들이 설 치장하고 난 툇물인 듯한 온갖 물 색 옷을 입고, 나방머리 땋아 붙이고 둘씩 셋씩 들 가운데 점경(點景)을 이루었다.
 
4
“벌써 나물 캐는 아이들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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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속삭였듯이 문득 눈앞에 내 어리던 때 생각이 터져 올랐다.
 
6
나는 어릴 때 몹시 나물이 캐 보고 싶었다. 밥도 먹지 않고 할머니를 졸라대는 것도 생각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두 번 밖에 나물 캘 기회가 없었으니 애석하다. 그 한번은 내가 여덟 살 되던 해 이때쯤 되어서 이다. 이웃집 아이들이 대문 밖에서 가만히 하는 손짓에 몸을 숨기여 미리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였던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줄달음질을 하여 대문 밖을 나오다가 그만 어머니에게 들켜 매를 맞고 실컷 울고 난 그 이튿날
 
7
“그렇게 가고 싶거든 오늘부터 글 배우지 말고 나물이나 캐고 정주일 부엌일이나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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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꾸지람 반 허락을 얻어 동무를 따라 들로 나가게 되었다.
 
9
그때 그 들판은 별나게도 넓어 보이고 하늘 또한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보리밭에는 종달새들이 풀풀 날아다니고, 들바람은 정답게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리저리 걸어갈 제, 내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에 깨어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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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비야, 범나비야 화게 칭칭 둘러보니 무슨 꽃이 피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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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제비, 초록제비, 임금왕터 물어다가 수영 땅에 집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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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들 가운데 뛰놀 때 동무들은 나물이나 캐려고 애를 썼으나 나는 그 아름다운 하늘이 닿아 있는 듯한 앞산(山)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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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은 제각기 많이 아는 척 하느라고 지붕 위에서 대나무 장대로 찌르면 하늘이 뚫어진다는 둥, 앞산(山) 위에 올라가 정말 하늘을 만져보았다는 둥 야단이었으나 나는 어느 때 선생(先生)님이 공부(工夫)를 많이 하면 하늘 일과 땅 속 일을 다 ─ 알 수 있다고 하던 말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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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어이 하늘 위에 올라가보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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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속삭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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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머슴에게 사닥다리 지워가지고 앞산(山)에 가서 하늘 위에 머리만 올려서, 뭐가 있는가 볼란다. 영 올라가면 하늘이 물렁물렁해서 꺼지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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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도 말을 했더니 동무들은 귀를 기울여 잠자코 나를 쳐다보았다. 부러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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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가슴은 오 ─ 직 그 푸르고 맑은 아름다운 하늘만이 그리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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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도 나물을 캐려고 한 포기를 찾아 달려가면 벌써 다른 동무들은 먼저 납작 캐버림으로 나는 이마에 땀만 흘릴 뿐이었다. 나중에는 하는 수없이 동무들이 캐지 않고 버리는 것만 캤다. 그러므로 내 바구니 속에는 벌레 먹고, 야윈 불쌍한 나물뿐이었고, 동무들의 바구니 속에는 살찌고 부드러운 복스러운 나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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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가까워 시냇가에 모여 와서 나물을 정하게 씻어, 깨끗한 물 위에 놓고 손 씻고 얼굴 씻고 양치하고 두 손 마주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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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두님요, 영두님도 내 나물은 저 산(山)모대기만치 불게 해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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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빌며 절한 후 나물을 조금씩 물 위에 띄워 보내며 나물제(祭)를 지내는 그 즐거움이여!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줄 몰라 손가락만 씹으며 울듯이 서 있으면 동무들이 대신 제(祭)를 지내주던 그 고마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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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번은 무사히 나물을 캐어 시냇가에서 재미스러운 제(祭)놀이를 하려고 남들보다 늦어질까 빨리 버선을 벗으려니 낯모를 한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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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는 기생인가보다. 보선 신고 나물 캐러 갔다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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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나는 얼른 좌우를 돌아보니 아무도 버선을 신지 않았었다.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기생이란 말이 분하기도 하여 참을 수 없어 그 귀한 나의 불쌍한 나물과 바구니, 호미, 버선 한 짝까지 그대로 내버린 채 해울음 쳐 울며 집으로 돌아오고 말던 그 철없던 일이여! 내 눈에 지금 다시 그때 그 눈물 고이려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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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 바라보고 놀라 뛰어 나오신 할머니 뜰 가운데서 얼싸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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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에 문둥이가 너 잡으러 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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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고 다시 가지 말라고 달래시던 그 할머니, 지금은 북망산하(北邙山下)에 백골(白骨)이 되어 누워 계시니 아마 그 무덤 위에 지금 냉이나 풀 한 포기쯤 몰래 움터 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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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숨짓고 어린 때 내 모양에서 고개를 돌려 창턱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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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물 캐러 가볼까. 오늘이 세 번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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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중얼거리며 들 가운데 나서니 소녀(小女)들은 그 옛날 내가 부르던 나비 노래, 제비 노래 대신 ‘아! 봄이로구나. 봄’하고 유행가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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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저 하늘 위에 가 보고 싶지 않느냐. 나는 가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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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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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하늘 위에 어떻게 가요.”
 
35
하고 소녀(小女)들은 나를 실없게 보기 미안한줄 까지 알 뿐 아니라 장난으로 들릴 줄 까지 알고 있다. 지금은 소녀(小女)들까지 철이 들었구나.
 
36
내 나이 벌써 삼십(三十)이 다 되었으나 내 마음 홀로 저 소녀(小女)들보다 아주 많이 더 철없고저! 그 옛날 내 어리던 그때 그리워라. 양지 바른 방죽 위에 나를 바구니 곁에 놓고 턱 고이고 앉았더니 건넌 언덕 위에 수양버들 가지 사이에 꿈같이 아련한 유록빛이 어려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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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바람 불어 내 낯을 정답게 치고
 
38
여기저기 종달새 소리
 
39
석양에 길을 잃고서 외로이 갈제
 
40
아! 어릴 그때 보인다.”
 
41
나는 그리운 옛 노래 부르며 건넌 언덕으로 걸어갔더니 소녀(小女)들도 따라왔다. 버들가지 하나 휘여잡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직 겨울모양 그대로 말라 있는데, 멀리 보인 내 눈에 어린 록색(綠色)이 어렸던가 아마 버들가지 속으로 찾아들려는 것 같다. 들어온 이 봄빛인가!
 
42
이 가지 저 가지 잡아보려는 발길에 (小女)소녀들과 긴 나의 치맛자락 감기는지라.
 
43
“내 얼굴 잠깐 돌려놓고 어여쁜 아가씨의 고운 얼굴 바꾸어다가 이 모양을 한 폭 그림 그리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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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아무리 속삭여 보았으나 어느 아가씨 고운 얼굴과 바꾸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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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1937. 4).
【원문】춘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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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맹 [제목]
 
  백신애(白信愛)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7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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