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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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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2
이익상
1
유산
 
 
2
경부선 아침 열차가 부평평야의 안개를 가슴으로 헤치고 영등포역에 닿을 때다. 경숙(敬淑) 이는 아직도 슬슬 구르는 차바퀴 소리를 들으면서 차창을 열고 윗몸이 차 밑으로 쏠릴 것같이 내놓고 플랫폼 위를 일일이 점검하려는 것같이 살폈다. 그러나 영등포 역까지쯤이야 맞아줌 직한 기호(基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3
그는 집을 떠날 때에 전보로 통지를 하였었다. 만일 그 전보를 받아보고도 맞아주지 않았다면, 경숙이 금번 경성 오는 것이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응당 맞으러 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만큼 실망도 컸다. 그의 안색은 비가 쏟아질 듯한 가을 하늘 빛같이 변하고 말았다.
 
4
‘본래부터 여자에게 달게 굴 줄이란 바늘끝만치도 모르는 그 사람이지만, 오늘 내가 경성을 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은가.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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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은 경숙이가 기호에게 아직도 호의를 가지고 양해하는 원망이 었지만, 생각이 생각을 팔수록 기호와 자기 사이에 불길한 광경이 생길 듯한 예감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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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는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다시피 한 지 반년이 못되어 다시금 올라오는 것도 물론 부끄러운 일이지만, 편지로서 그만큼 양해를 청하고, 또 일평생에 큰 관계를 가지게 할 이번 길인 것도 모르는 체하고, 기호가 한 발도 내놓지 않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었다. 자기의 진퇴유곡인 오늘 형편을 조그만치라도 이해하고 동정한다면, 전보로 맞아달라는 그만한 부탁을 이렇게 잘라먹을 리는 만무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의 섭섭한 생각은 다시 원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자기 자신이 몹시도 불쌍한 생각이 새로웠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한 형편에는 그래도 행여나 기호가 이곳까지 맞으러 와서 자기를 찾으러 이 차 칸, 저 차 칸으로 헤매고 다니지나 않는가 하여 차 안을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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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니 온 기호의 얼굴이 경숙의 눈에 뜨일 리가 만무하였다. 그는 실망만 잔뜩 안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몸을 던지듯 펄썩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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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경성 역에는 나와 있겠지. 용산까지나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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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을 돌이키고 그는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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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어느덧 노량진을 지나 한강철교로 들어섰다. 경숙이는 요란하게 구르는 차륜(車輪) 소리와 아울러 자기의 깊은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고동을 들었다. 밤이 새도록 놀지도 못하고 하편 구석에 단단히 뭉쳤던 태아도 이제야 서울에 당도하였다고 기뻐하는 것같이 힘 있게 배를 치받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경숙이는 이제야 비로소 이러다가 유산이나 되지 않을까 하던 근심을 놓았다. 그러나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노는 새로운 생명의 더욱 불쌍한 생각이 또 하나 불었다. 그는 치맛귀로 손을 넣어 아랫배를 슬그머니 누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새로 나올 생명은 그의 심장의 고동을 통하여 그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듣기만 하여도 몸서리가 날 저주를 받아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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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는 자기 몸에 이상한 기미가 생기고, 그 이상한 기미는 의심없는 잉태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는 이 새로운 존재를 몹시도 저주하였다. 물론 처녀로 잉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자기가 한번 저지른 일이니 그의 보복으로 몹쓸 운명 아래 그대로 엎드려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여자 사회에서 지금까지 쌓아놓은 지위가 이 생명 때문에 일조에 무너지고 말 것을 생각할 때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기호와 어울리어 지낼 때에는 결과가 여기까지 이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자로서 전문 정도의 학교를 마쳤다는 것이 조선 여자 사회에서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경숙이가 얼굴이 어여쁘고, 연단에 나서면 말을 잘하고 목청이 좋아서 음악을 잘하고, 또한 남성에 대한 교제가 능란하다는, 여자로서 가지기 어려운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하였다는 바람에 정신 차리지 못한 여러 남자들은 경숙에게 호기심을 두고 덤비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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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경숙이는 여왕처럼 여러 남자를 얼굴의 표정 하나로 울리기도 하였고, 웃기기도 하였다. 여러 남성은 노예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러한 여러 남성 가운데에서 정숙의 호기심을 끈 것이 기호였었다. 기호는 어디에 내놓든지 못생겼다는 말을 들을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빛이 희고 미목이 청수(淸秀)한 어여쁜 남자였다. 그러나 이렇다고 말할 만한 주의나 사상을 가진 남자는 아니었다. 다만 여자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한 남자였다.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의 명령이면 죽는 시늉이라도 부끄러움 없이 하던, 여자에게는 양같이 순한 남자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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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 경숙의 향락의 대상으로 충분한 유자격자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앞에 굴복하기 싫어하는 경숙이는 여름 석양의 모기떼처럼 덤비는 여러 남자 중에서 그저 잔재미 보려고 한 위안거리로 선택한 것이 이 기호였던 것이다. 기호와의 관계는 한 비밀에 부치고 사회적으로 한 번 행세하여보자고 한 것이 어느 동안에 고민의 씨를 자기의 몸에 부치고 말았다 고민의 . 씨가 여자의 몸에 뿌려진 것을 알게 된 기호는 원수를 갚으려고 고심하던 사람이 원수를 갚은 것 같이 경숙에게 폭군의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는 경숙이는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낙인을 친 것처럼 학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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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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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건방지게 사상운동이 다 무엇이람. 집에서 부모 봉양이나 하고, 자녀나 기르고, 남편이나 섬기면 그만이지. 무어니무어니 하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다 무엇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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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비웃었다. 말로는 가정생활을 권하면서도 그 주제에 정식으로 가정 살림을 시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입술의 장난이오,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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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봐요. 정식으로 결혼식이라도 하고 살림이라도 시작합시다그려. 누가 살림이 하기 싫대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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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는 틀어 오르는 비위를 억지로 누르고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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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할 사람이 다 제금있지요. 당신 같은 이에게 그런 형식이 무슨 소용이 있소? 결혼식이니. 무엇이니 하고 떠들어놓았다가 당신이‘나는 자유요.’ 하고 홱 뿌리치고 나가버리면, 그때에 다시 이혼식을 하여야 될 테니 쓸데없는 식을 두 번이나 지낼 게 무엇이오. 그러지 말고 그저 비밀히 지내다가 서로 보기 싫거든 그대로 헤어집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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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는 얼음보다 더 싸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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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뱃속에 든 것은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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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에 든 것? 그야 당신 마음대로 하시구려.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같은 아들도 낳았으니, 요셉 같은 아버지가 생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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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주 마지막 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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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은 기호의 너무나 무책임한 대답에 벌어졌던 입이 오므려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상대자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다가 머리를 앞으로 탁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은 가을 달같이 희푸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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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최후의 장면을 머리에 새기고 경숙이는 그날 밤에 바로 서울을 떴다. 그의 갈 곳은 역시 자기의 친가가 있는 F항밖에 없었다. 참으로 남자의 무책임한 행동이 이와 같으리라고는 평일에는 상상도 못하였던 바이다. 다만 아무리 못생긴 남자라도 건방진 생각으로 여자를 압박하고 연민하려는 것을 알았다. 여자를 소유물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는 한편에, 그래도 약하다 생각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신의만은 어느 정도까지 가지고 여자의 일에는 책임을 지자는 마음이 있는 줄로 막연히 생각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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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생각은 어리석은 처녀의 꿈나라 동경에 지나지 못하였다. 자기의 눈이 어두워서, 또는 향락을 탐하려는 천박한 생각에서 빚어 나온 인과응보이지만, 생리적으로 심신에 변조가 생긴 경숙이는 한갓 남성을 원망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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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더러운 자식의 씨를 나의 귀한 뱃속에 넣어둘 것이 무엇이냐. 타태(墮胎)다. 타태만 하면 그만이다. 아직 조그마한 핏덩이 때문에 일평생을 희생을 할 것이 무엇인가? 그도 이 사회에서 용서한다면 모르되, 애비 없는 자식을 기르고 고통을 견딜 것이 무엇인가? 조그마한 고깃덩이 하나를 위하여 생명 있는 커다란 생명의 행복을 그대로 장사 지낼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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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고, 경숙이는 F항으로 돌아간 것이다. 소문 없이 돌아온 경숙이는 F 항에서 개업한 평일에 알던 산과 의사를 찾아갔다. 악조증(惡阻症)으로 그는 피골이 서로 붙어서 북망산에 구르는 촉루를 연상케 하였다. 초췌한 얼굴로 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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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본래 폐가 약한 데다가 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저 같은 폐질(肺疾)로 순산할 수 있겠습니까? 요새같이 부대끼다가는 암만해도 오래 못 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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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연(隱然)한 가운데에 인공 유산이라도 해서 모체를 구해달라는 뜻을 보였다. 의사는 자세히 진찰한 뒤에 청진기를 책상 위에 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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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이 좀 약하신 듯합니다만, 폐에는 그렇게 현저한 고장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초산 때는 흔히 그런 공포를 가지는 임부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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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해산을 하다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 죽겠어요. 물한 모금만 먹어도 그대로 넘어오고야 마니, 이대로 가다가는 꼭 죽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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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는 또다시 인공으로 타태를 해달라는 뜻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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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조증이 심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얼마 동안만 참으시지요……. 참, 언제 결혼하셨던가요? 저는 도무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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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새삼스러운 수작에 경숙의 희푸른 얼굴에는 새로운 피 기운이 돌았다. 그는 표정을 고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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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이에요. 여자같이 불행한 것은 없다고 보아요.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만 할까요? 정말 죽겠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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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는 딴전을 써서 결혼 문제를 피하려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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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추근추근한 의사는 경숙의 말끝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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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결혼을 하면 고통을 더 당한다나요. 결혼을 하시면 이런 사람에게 술잔이나 먹여야 하는 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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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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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은 차마 자기의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약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뱃속에 든 것을 어떻게 처치해주십시오 하는 말을 아무리 해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병든 사람처럼 얼마 동안은 위석(委席)하여 누웠었다. 집안 누구에게든지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토파하지 못하고 두어 달을 지났다. 이 두어 달 동안이 고민의 연쇄였었다. 그는 정신상으로 고민을 하였다. 육체상으로도 정신에 지지 않을 만큼 고민을 맛보았다. 온갖 향락을 제 마음대로 해보고, 아무러한 흔적도 없이 뱃속 편히 지내는 남자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만일 서로 진실치 못한 동기에서 다만 향락을 위하여 서로 몸을 섞고, 그 벌로 이와 같은 고민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면, 기호와 자기가 한가지로 같은 정도의 것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러한 책임 관념이 없는 남자는 그대로 두고, 잔약(孱弱)한 여자에게만 이러한 벌을 씌운다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었다. 참으로 저주함 직한 운명의 장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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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는 얼마쯤 지내는 동안에 몸의 고통은 조금씩 덜어졌다. 밥도 차차 먹히기 시작했다. 얼굴에서도 화색이 점점 돌았다. 촉루 같은 몸에는 살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생명의 심장의 고동을 듣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약동조차 들었다. 새로운 생명이 나의 몸 안에서 자라난다. 저 저주받은 생명이 그래도 무럭무럭 자라난다. 고요한 밤 외로운 베개 위에서 생명의 움직이는 소리를 남몰래 들을 제, 그는 그 생명을 저주한 일이 후회가 났다. 이렇게 자라나는 생명을 없애자고 의사의 집 문을 두드린 일이 부끄러웠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자기의 염통의 피가 구를 때마다 그의 잔인한 생각을 비웃는 것같이 들렸다.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탄생의 환락을 맛보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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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이 생명을 위하여, 이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 내 몸의 연장을 위하여 나의 몸을 희생하자. 사회적 조그마한 진리가 다 무엇이냐. 남 부끄러운 것이 다 무엇이냐. 명예가 다 무엇이냐. 이 생명을 살리자! 오, 지금까지 이 어미의 생각이 글렀다. 너를 저주한 죄를 용서해라. 네가 장성한 뒤라도 너의 존재를 저주하여 없애자 하던 그 박정한 어미라도 버리지 말라. 이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오, 나의 잘못도 아니오, 이 세상에서 우리 같은 존재를 장사하려는 이 사회의 인습의 잘못이오, 제도의 잘못이다. 이 인습과 다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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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은 이렇게 부르짖고 사랑이 넘치는 부드러운 손으로 배 안의 존재를 어루만졌었다 경숙이는 . 자기 혼자 어떻게든지 이 생명을 위하여 남모를 먼 곳으로 갈까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신랄한 사회와 싸워질는지 그것이 한 의문으로 있었다. 그는 생각다 못하여 서울 기호에게, 새로운 생명의 아버지에게 이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아비로서의 책임을 다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하였었다. 한 번 하여도 답장이 없었고, 두 번 하여도 역시 답장이 없었다. 네 번째에야 비로소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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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의 내용이 경숙의 예상한 것과 달랐다. 좌우간 장차 나올 생명에 대하여서는 아비로서는 모든 책임을 지려니와, 경숙의 생각 여하에 따라 남편으로서도 책임을 다할 터이니, 지금까지 생각하던 건방진 생각은 다 버리고 서울로 올라오면 모든 일은 어떻게든지 다 잘 처리할 것이라 하였고, 끝에는 너무 고민을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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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생각! 경숙이는 큰 모욕이나 당한 것같이 또다시 심술이 났다. 그러나 뱃속에서 생명의 심장의 울음이 들릴 때에, 그는 편지를 놓고 베개 위에 몸을 던졌다. 가자! 서울로 가자! 절망하듯, 기뻐하듯 경숙이는 이렇게 부르짖은 지 며칠 뒤에 경성 기호에게 맞아달라는 전보를 치고 F항을 떠났던 것이었다.
 
47
경숙이는 기호가 경성 역까지야 아니 나왔으랴 하는 일루(一縷)의 소망을 가지고 경성 역에 내렸다. 물결같이 밀려 나오는 여러 사람 중에서 기호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기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같이 많던 사람의 그림자가 플랫폼에 거의 없어질 때까지 사면을 둘러보았으나, 역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까 본 역부(驛夫) 몇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이리저리 왕래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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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없는 다리로 무거운 몸을 겨우 받쳐가며 정차장 밖으로 나왔다. 출구 앞에서 기다리지나 않을까 하고 또 살폈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동차가 늘어선 사이를 빠져서 정차장 일이등 대합실로 들어갔다. 별안간 집을 뛰쳐나온 몸으로 여관을 찾아가기도 좀 안된 생각이 났고, 그렇다고 아는 다른 친구 찾기도 너무나 염의(廉意)가 없었다. 그는 실상 서울을 이렇게 가면 기호가 유숙할 만한 처소쯤이야 준비해놓았으리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믿은 것이 도리어 어리석은 일이었다. 시간 관계로 나오는 것이 좀 늦어진 것이나 아닐까 하는 기다리는 마음과 만일 영영 아니 보이면 어떻게 해볼까, 갈 곳을 작정하려는 마음이 경숙을 잠깐 동안 대합실 한 쿠션 위에다 앉혀놓았다.
 
49
십 분이 지나도 기호는 보이지 않았다. 이십 분이 지나도 또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기호의 집으로 . 바로 찾아갈까? 아니다. 홀몸도 아니오, 이와 같이 무거운 몸으로 천여 리 먼 길을 오는 사람을 오든 말든 모르는 체하는 그 사람을 찾아가면 무엇을 하랴. 만일 냉대나 하면 그 집안 여러식구 앞에서 얼굴에 불을 붙이고 돌아서야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찾지 않는 편이 낫지나 않을까. 그러면 어디로 갈까? 아! 무정한 남자! 저주하는 마음이 다시 새로워졌다.
 
50
경숙이는 한 시간 이상이나 궁리를 하다가 쿠션에서 몸을 힘없이 일으켰다. 아무리 부드러운 자리지만, 그는 바늘방석에나 앉은 것처럼 불안을 느낀 까닭이다. 기차가 떠날 때마다 사람이 바뀌어 들었으나, 오는 사람마다 자기의 얼굴을 유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서 늘 머리를 숙인 채로 앉았던 까닭인지, 머리를 들자 그는 현기증이 났다. 곧 몸이 쓰러질 듯하였다. 그는 정신을 차려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가누어가며 정거장 광장을 향하고 나섰다. 나서기는 나섰으나 아직도 어디로 갈는지 그 방향을 확실히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리로 몸을 운전하며, 머리로는 갈 곳을 생각하던 중이었다.
 
51
그가 머리를 숙이고 맥이 풀어진 채로 전차 정류장의 안전지대 위로 올라 가려고 차도를 건널 즈음이다. 자동차의 사이렌 소리가 바로 귀밑에서 폭발이 되고, 사면에서 여러 사람의 외마디소리가 들리며, 경숙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등 밑에서“아이구!”하고 신음하였다.
 
52
순사가 왔다. 땅에 거꾸러진 경숙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53
“신여성이 자동차에 치었다! 안되었는걸!”
 
54
이러한 군중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에 남기고, 기절한 경숙이를 담은 자동차는 S병원으로 달려갔다.
 
 
55
경숙이는 혼수상태로 반나절을 지났다. 그의 베드 곁에는 수술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부가 서 있었다. 의사는 경숙의 선을 들어 맥을 짚고 있었다. 간호부는 붕대로 칭칭 동여맨 경숙의 얼굴 가까이 귀를 대고 가늘게 하는 잠꼬대 소리를 들었다. 무어라 웅웅거리고 신음하지만, 자세히 분간하여 들을 수가 없었다.
 
56
“깨어난 모양이나, 매우 중태인걸! 대체 이 여자의 집이나 알아야 할 터인데…….”
 
57
하고, 의사는 잡았던 경숙의 손을 가만히 베드 위에 놓는다.
 
58
“정신을 더 좀 차리거든 물어보지요.”
 
59
하고, 간호부는 환자의 얼굴에서 귀를 떼었다. 의사는 청진기를 수술복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60
얼마 후에 경숙의 집에서는 긴 한숨이 신음하는 소리와 어울려 나왔다. 그리고 붕대 감은 사이로 영기(靈氣)빠진 눈이 반쯤 떠졌다. 간호부는 가까이 들어서서
 
61
“정신 좀 차리셨어요”
 
62
하고, 조심스러이 다정한 소리로 묻는다.
 
63
“여기가 어디에요?”
 
64
실보다도 더 가는 말이 핏기 없는 경숙의 입술을 흘렀다.
 
65
“여기는 S병원이에요. 어디 몹시 아픈 데나 없어요?”
 
66
간호부는 경숙의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경숙이는
 
67
“아이구구!”
 
68
힘없이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자기가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았다는 것같이 눈을 껌벅이며, 턱을 앞으로 당겨 머리를 조금 끄덕였다.
 
69
“댁에 통지를 해드려야지요.”
 
70
경숙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눈을 스르륵 감는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71
“댁이 어디세요?”
 
72
간호부는 친절히 묻는다.
 
73
“…….”
 
74
간호부는 물 주전자의 귀를 입에 넣어주며 환자의 입술을 축인다.
 
75
“댁이 어디세요? 가족에게 통지를 해주어야 하지요.”
 
76
“저는 집도 터도 없는 가련한 사람이에요. 아무에게도 통지할 곳이 없는 이예요…….”
 
77
경숙의 눈에서는 새로 눈물이 배어 나왔다.
 
78
“그럴 리가 있나요? 말씀을 하시지오.”
 
79
“…….”
 
80
“당신은 홀몸도 아닌 모양인데, 댁에 통지를 해야 되잖겠어요”?
 
81
간호부는 환자의 손을 어루만진다.
 
82
경숙이는 정신이 날 때부터 뱃속의 새 생명이 세상 바람도 쏘여보지 못하고 그대로 장사나 지내지 않았나 하여 마음이 아픈 터이다.
 
83
“어떻게 되었어요?”
 
84
하고, 경숙이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배로 가져갔다.
 
85
“아직도 알 수 없어요. 대단히 놀란 모양이니까 퍽 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86
“괜찮을까요?”
 
87
“글쎄요…….”
 
88
간호부의 시원치 않은 대답에 경숙이는 절망을 느꼈다.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는 새로이 복통을 느꼈다. 아랫배가 뻑적지근하였다.
 
89
‘아! 유산!’
 
90
이 생각이 벼락같이 번득일 때에 눈앞이 아주 캄캄하였다. 이와 같이 기화(奇禍) 만난 것을 기호에게 통지를 하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무정한 남자에게 통지를 하는 것이 다 무엇이냐. 이 S병원에서 이 잔약한 두 생명이 영영 끊어져도 알려줄 것이 무엇이냐. 알려준다는 것은 구원을 애걸함이다. 아서라. 죽으면 그대로 죽자. 이번 일이 생긴 것이 모두 그 남자 때문이다.
 
91
그러나 유산, 세상에 고상한 운명의 장난도 많다. 사회적으로 살아볼까 하고 새로운 생명이 이 몸에 붙을 때에 어떻게 고민을 하였더냐. 어떻게 몹시도 저주를 하였더냐. 인과의 씨! 조그마한 핏덩이 하나를 이 몸에서 떼내면 영원한 행복이 올 것같이 그것을 떼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았느냐. 이것이 생김으로 인하여 남성의 노예가 될까 두려워하여 의사의 문을 두들기고, 혀 고부라진 소리로 애걸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 핏덩이는 영영 떨어지지 않았다.
 
92
그러나 다시 사람으로서, 어머니로서 뱃속의 새로운 생명에 애착을 느끼게 되지 않았는가. 전날의 저주한 죄를 몇 번이나 남몰래 어린 생명에 애걸하지 않았는가. 이 생명을 위하여 명예도, 지위도, 개성도 모두 버리자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러한 결심이 뭉치고 뭉치어 다시 박정한 남자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오늘에 이 생명이 받은 기화가 웬일이냐. 그는 저주할 때는 떼려도 뗄 수 없다가, 그의 행복을 위하여 어머니로 사랑을 바치려 하는 오늘에 와서는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사람의 운명이 얼마나 심술궂으면 이렇게 장난을 칠까. 다시 앞이 캄캄하였다.
 
93
“여보세요, 뱃속의 아이를 살려주세요. 선생님을 좀 오시게 하세요, 네?……?”
 
94
경숙이는 미친 듯 부르짖었다.
 
95
“너무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가만히 계세요. 아직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미리 걱정하실 것 없어요, 네……”
 
96
간호부는 위로한다.
 
97
“아니에요. 아니에요. 배가 아파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나는요, 날마다 마음으로 어린것이 뱃속에서 움직이는 것 때문에 살아왔어요. 네 어떻게든지 살도록 해주세요.”
 
98
경숙의 배는 틀어 올랐다 . 피가 옷에 젖는 것을 느꼈다. 경숙은 다시 혼수 상태를 계속하였다.
 
 
99
운명은 어디까지든지 사람을 웃었다. 어디까지든지 조롱하였다.
 
100
경숙이가 S병원에 떠메여 들어온 지 이틀 만에 여러 의사의 정성껏 치료한 것도 아무런 효험이 없이, 필경은 유산이 되고 말았다. 며칠 동안 사선을 방황하면서도 기호에게는 통지하지 않았다. 간호부나 의사는 경숙이가 정신을 차릴 때마다 그의 주소와 성명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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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숙이는 묻는 말의 대답을 역시 눈물로써 다시 할뿐이었다. 묻는 이도 필경은 그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도리어 나게 된 까닭이었다. 경찰에서도 조사가 왔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위독하다 하여 후일로 조사를 미루게 하였다. 이 환자는 병원에서도 한 의문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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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한 뒤에 출혈이 심하여 경숙의 생명도 일시에는 위독하였으나, 어찌어찌하여 중태를 면하고 베드 위에 띵띵 부은 채로 반듯이 드러누웠었다. 누가 보든지 이 환자가 그렇게 어여쁘던 경숙으로 여기지는 않을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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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의 뱃속에서 무한한 저주를 받다가 겨우 축복을 받아 그 어머니의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고 원기도 복돋우던 태아는 유리병 속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표본을 보는 사람으로 이 태아가 어떠한 경로를 밟아 유리병 속에까지 들어온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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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설》, 1929년 12월
【원문】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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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상(李益相) [저자]
 
  # 신소설(잡지) [출처]
 
  192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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