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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일비곡공원(東京日比谷公園) 남(南)쪽 뒷문을 나와서 큰길을 하나 넘으면 남좌구간정(南佐久間町)으로 뚫린 길이 있다. 이 길을 조금 가면 오른편 뒷길에 문화(文化) 아파 ─ 트먼트의 큼직하고 샛득한 삼층 건물이 보인다. 이 아파 ─ 트는 아래층이 통 털어 자동차 수선소와 택시 ─ 차고(車庫)로 되어 있는 까닭에 그 앞길을 지나는 사람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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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요란스런 자동차 수선하는 소리에 으레이 한번씩은 바라보고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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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말시험(學期末試驗)도 무사히 끝난 삼월제삼일(三月第三日) 수(日[일])에 성수(性秀) 와 연주(蓮珠) 연순(蓮順)의 세 사람은 일비곡(日比谷)으로 놀러 왔다가 우연히 이 길을 지나가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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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마루노우찌가 가까우니까 싸라리 맨들을 위해서 지어 놓았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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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같으면 아주 조용하겠네. 들어가 봅시다. 안성맞춤격으로 빈방이 있을지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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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두 사람의 동의(同意)도 얻지 않고 제 혼자 앞서서 아파─ 트로 들어갔다. 두 사람들도 마지못하여 연순(蓮順)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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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 ─ 트 감독인 듯한 노파는 세 사람을 아래위로 한번 훑어보더니 무척 애교 있는 말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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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들은 학생입니다. 매우 조용해 보이기로 공부하기에 좋을 듯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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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은 대소 합하여 삼십 개요 삼층은 스물다섯이어요. 그리고 옥상(屋上)은 바람도 쏘이고 할 정원(庭園)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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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하며 세 사람을 인도하여 고루고루 구경을 시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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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삼층 남편으로 있는 오(五)호실과 팔호실 두 방을 열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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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전망(展望)도 좋구 공기 통내도 좋구 햇볕도 잘 들구 아주 죄다 좋구먼요. 당장 옮겨 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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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무척 이 아파 ─ 트가 맘에 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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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와 연주(蓮珠)도 맘에는 들어 보이나 연순(蓮順)이처럼 좋아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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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벌써 옮겨 올 작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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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 ─ 트에는 불량한 사람은 들이지 않습니다. 아가씨 혼자시더라도 내가 할머니처럼 감독을 하니까 조금도 염려 없습니다. ‘베드’도 싱글 더블 맘에 드시는 대로 몇 개든지 드릴테니……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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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성수(性秀)를 바라보며 의미 있게 웃었다. 이 아파 ─ 트는 양식(洋式)인 까닭에 침대(寢臺)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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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오호실은 삼십 원, 팔호실은 삼십오 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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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학생의 신분으로는 좀 과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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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일요일에 세 사람은 함께 이 문화(文化) 아파 ─ 트로 기어이 옮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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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대구(大邱)에서도 이름 있는 부호(富豪)의 외아들이요 연주(蓮珠)와 연순(蓮順)은 형제간으로 남형제(男兄弟) 없는 귀여운 딸들로서 성수(性秀)의 집보다 못하지 않은 부자(富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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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두고 염려할 처지가 아니었고 쓸데없이 친구들이 찾아와서 공부에 방해되는 것도 귀찮고 하여 이렇게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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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일대학정경과(日大學政經科) 연순(蓮順)은 여자미술전문(女子美術專門) 양화과(洋畵科) 연주(蓮珠)는 성수(性秀)의 아내로 피아노 개인교수(個人敎授)나 받으며 성수(性秀)의 시중이나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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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五)호실은 싱글ㆍ베드 두 개를 맞놓고 연주(蓮珠)와 연순(蓮順)이가 차지하고 팔(八)호실은 더블─베드를 한 개 갖다놓고 성수(性秀) 혼자서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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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상은 연주(蓮珠)는 성수(性秀)의 방에 가 있는 편이 많았으므로 오(五)호실은 연순(蓮順)이 혼자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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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가 요즘 감기로 앓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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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게 받는 조롱이었으나 연주(蓮珠)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성격이 부드럽고 기가 약하며 따라서 몸도 버들가지처럼 가늘고 말하자면 연약하고 맘씨 좋은 아가씨였다. 그러므로 사나이처럼 뻣뻣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무엇이던지 맘에 있는 대로 막 털어놓고 떠들어 대면서도 지극이 마음만은 유순하여 그림을 배우는 사람 같지 않게 명랑한‘오뎀바’타입의 연순(蓮順)이에게 대하여서 연주(蓮珠)는 형이면서도 아 ─ 무 위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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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씨도 어서 시집을 보내야겠구나. 처녀는 나이를 먹으면 못 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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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도 웃으며 자기 아내의 편을 드는 척하고 연순(蓮順)이를 도로 놀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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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아저씨도 말 마오. 이 아파 ─ 트에 옮길 때는 공부 많이 하려는 것이 목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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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더 말을 계속 못 하고 얼굴만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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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않아요? 밤낮 그저 언니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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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일제히 얼굴이 붉어지며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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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연애결혼은 아니었으나 성수(性秀)와 연주(蓮珠)의 사이는 연애결혼 이상으로 사랑의 도가 높았고 연순(蓮順)이도 이 부부들로 인하여 한 번도 맘 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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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조선 사람으로는 맛보기 드문 행복스런 학생생활이었고 또 사랑 많고 즐거운 부부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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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연주(蓮珠)가 자기에게보다 성수(性秀)에게만 혼이 팔려 있으므로 자연히 혼자 있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 아파 ─ 트로 옮겨온 후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한 차례씩 히비야 공원을 다녀오는 버릇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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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 된 후는 더욱 열심히 산보를 하게 되어 하루라도 빠지면 그날 밤은 몹시 침울해지게까지 된 연순(蓮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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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매일 일비곡(日比谷)에 무슨 재미로 빠지지 않고 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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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연주(蓮珠)를 보고 성수(性秀)는 이러한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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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이었으나 형된 연주(蓮珠)는 갑자기 염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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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잘못 속으면 어떻게 해요. 아직 철닥서니가 없는 어린애가 아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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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없어. 저렇게 철없어 보여도 이지(理智)가 발달된 사람이라 일시적 감정에 도취되거나 남의 유혹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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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정(感情)이 예민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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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일은 내가 슬쩍 뒤를 밟아가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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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연주(蓮珠)와 의논한 후 그 이튿날 연순(蓮順)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 교복을 벗어버리고 짤막한 원피 ─ 스에 ‘게다’를 딸딸 끌며 산보나가는 뒤를 밟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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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바른길로 일비곡(日比谷)으로 들어갔다. 성수(性秀)도 멀찍하니 떨어져 따라 들어갔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더니 어린아이같이 껑충껑충 뛰더니 어린이 운동장 안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성수(性秀)도 뒤를 따라 쑥 들어가려하다가 문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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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쓴 패를 보고 멈츳 하고 섰다. 하는 수 없이 그물로 싼 담장에 가 붙어서서 운동장 안을 살펴보았다. 연순(蓮順)이는 많은 어린이들과 한데 뭉쳐서 미끄럼 타느라고 법석을 하고 있었다. 즐겁게 마치 어린아이같이 짧은 원피 ─ 스 아래로 즈로 ─ 스 입은 궁둥이가 미끄럼 타느라고 층계를 올라갈 때마다 아래 선 사람에게 환히 보이는 줄도 모르고 미끄럼 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윽이 바라보고 섰던 성수(性秀)는 천진스럽게 놀고 있는 연순(蓮順)의 얼굴에서 가슴에서 수없는 꽃봉오리를 띄운 물결같이 넘쳐흐르는 형용 못할 매력에 온 몸이 으쓱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몰래 뒤를 따라온 것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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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궁둥이를 아래로 하고 미끄럼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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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타면 저 ─ 아래 떨어질 때 다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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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도 함께 거꾸로 앉아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성수(性秀)는 그 모양이 어떻게 철없이 보이는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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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어버렸다. 웃는 소리에 아이들은 일제히 떠들던 입을 꽉 다물고 훌쩍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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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성수(性秀)를 보고 ‘게다’를 손에 집어든 채 운동장 밖으로 달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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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웬일이여요. 나는 심심하니까 날마다 여기 와서 이렇게 놀지. 참 재미있다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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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그제야 손에 든 ‘게다’를 신으며 운동장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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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고 성수(性秀)에게 따라 섰다. 성수(性秀)는 바른말을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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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돌아갈까? 누가 먼저 가나 달음박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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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다시 ‘게다’를 벗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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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없어요. 자 ─ 뒷문까지 달음박질한다고 ─ 요 ─ 이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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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서서 달려가는 연순(蓮順)의 전신은 탄력 있는 고무공과 같았다. 성수(性秀)는 일부러 천천히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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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 거북 거거북이 아무리 쫓은들 내 걸음은 못 따를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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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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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도 두 다리에 스피 ─ 드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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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도 갑자기 스피 ─ 드를 내며 단발(斷髮)한 짧은 머리카락이 뒤로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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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성수(性秀)를 돌아보려다가 누구에게 몹시 부딪치며 옆으로 고꾸라지려했다. 부딪힌 사람은 이편으로 걸어오려던 젊은 신사(紳士)였다. 연순(蓮順)의 달려오는 김에 신사(紳士)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뻔 한 것을 간신히‘스틱’으로 꽂으며 몸의 중심(中心)을 잡아 섰다. 연순(蓮順)이는 놀라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여 가쁜 숨결에 뛰노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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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이며 얼굴이 붉어진 연순(蓮順)에게 신사(紳士)는 미소(微笑)를 띄우고 친절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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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도 미안한 듯이 신사(紳士)에게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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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염려 없습니다. 아가씨께 도로히 미안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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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紳士)는‘스틱’을 한 편에 걸고 모자를 벗어낼 수도 있거니와 이렇게 귀엽게 생긴 소녀(少女)와 말을 하게 되는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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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 순간 웬일인지 연순(蓮順)의 시선(視線)은 소녀(少女)의 얼굴 위로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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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은 처음 보는 소녀(少女)의 얼굴을 무례하게 자꾸 바라보는 것이 미안하기는 하나 두 눈은 소녀(少女)의 얼굴에 가 딱 들어붙고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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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고 또 다시 보고 해도 도무지 판정해 낼 수 없는 수수께끼를 싼 그 소녀(少女)의 얼굴에 무럭무럭 호기심이 쳐 받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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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호 저이가 그만 돌아가는구먼. 엎드러진 것이 부끄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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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少女)는 코 ─ 트만 열심히 바라보며 다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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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도 그제야 시선(視線)을 돌려 코 ─ 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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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언니 당신 이름을 어떻게 부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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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少女)는 다정스럽게 다가앉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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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일부러 연자(蓮字) 하나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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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그제야 그 소녀(少女)의 얼굴의 수수께끼를 하나 풀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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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앙키 ─ 로구먼 아니 혼혈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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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도 티끌 없는 빛깔, 아주 쪽 ─ 선 코, 넓은 이마, 움쓱 들어간 큼직한 눈, 긴 속눈썹, 틀림없는 양키 ─ 다. 그러나 칠(漆)같이 검은 머리 산포도 알같이 새까맣고 광채나는 두 눈동자는 틀림없는 동양(東洋)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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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이렇게 단언을 내리었다. 그러나 로 ─ 라에게 대(對)한 호기심과 의혹은 그대로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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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른이냐 정말 소녀(少女)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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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 내린 것이나 드레스의 스타일이나 사척반(四尺半)이 될락말락한 작고 가늘은 몸집 천진스러운 두 눈동자 정녕코 열 다섯도 채 못된 소녀(少女)이다. 그러나 그 반면 희고도 툇끼는 없으면서도 소녀(少女)다운 탄력없는 팔과 뺨, 연순(蓮順)이 자기 손보다 더 말라 여윈 손등 아 ─ 무리 잘 보아도 스물다섯이나 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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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그 신사(紳士)의 말을 물어볼 것도 잊고 이 로 ─ 라에게만 정신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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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로 ─ 라는 연순(蓮順)의 의혹을 알아차린 것 같이 얼굴을 획 돌려 가만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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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미전학생(美專學生)답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문득 연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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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어려 보이는 로 ─ 라의 표정 모나 ─ 리자의 미(美)와 신비(神秘)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숨긴 로 ─ 라 그 점잖은 신사(紳士) 이 두 인물(人物)은 형용할 수 없는 미묘(微妙)한 ?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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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그럼 같이 온 어른에게 허가를 받고 오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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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이 기회(機會)에 신사(紳士)의 말을 물어보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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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눈을 둥글하며 휘휘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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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까 저 나무 아래서 당신과 같이 서 있던 이 말이야요. 오빠가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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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이상하여 이렇게 겨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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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저 백일홍(百日紅) 아래서 말이지? 난 모르는 신사(紳士)야. 그러한 오빠가 있으면 오죽 좋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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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사(紳士)를 알지 못한다는 말에 연순(蓮順)은 조금 실망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신사(紳士) 까닭에 로 ─ 라에게 자기의 의혹되는 바를 물어보지 않고 참아오던 것이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무럭무럭 호기심(好奇心)이 치밀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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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로 ─ 라 대체 당신 나이가 얼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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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은 짓궂게 로 ─ 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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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재미있다는 듯이 연순(蓮順)의 팔에 매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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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은 서슴지 않고 말해 버렸다. 남의 나이를 묻는 것이 실례인 것도 또 더구나 자기 딴엔 어린 소녀(少女)인 체 하는 것을 대담하게 스물다섯이라고 함에는 여간 실례가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하면 노하고 실례라고 욕하면 먹을 셈치고 이렇게 넘겨 짚은 것이었다. 의외에도 로 ─ 라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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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오 ─ 감사해라. 정말요? 정말 스물다섯으로 보여요. 아이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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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기쁘다는 듯이 연순(蓮順)의 두 눈을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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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보아도 아니 보면 볼수록 나이 먹어 뵈는 로 ─ 라 그러나 그 두 눈동자는 보면 볼수록 천진스럽고 어여쁘고 맑은 로 ─ 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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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은 로 ─ 라의 좋아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 모양은 나이 많은 사람을 적게 먹어 보인다고 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를 어른 같다고 하면 철없이 기뻐 뛰는 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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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은 조롱같이 한번 똑 떨어뜨려 보았다. 로 ─ 라는 연순(蓮順)의 기대(期待)한 바와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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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생일이 섣달인 까닭에 만 열다섯은 아니어요. 선물을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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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스물다섯이라고 우겨대주지 않음을 도로히 실망이나 하듯 고개를 내려 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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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일까…… 아니다. 거짓말이다. 앙큼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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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은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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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 내가 꼭 바른말을 한다면 로 ─ 라는 꼭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보여요. 몸덩어리는 작지만 꼭 어린아이를 낳은 여자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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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뻗치는 김에 연순(蓮順)은 어디까지든지 로 ─ 라의 정체(正體)를 판정하고야 말리라는 호기심에 이렇게 심한 말까지 쑥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로 ─ 라는 얼굴이 파래진 채 조금도 노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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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느님 맹세하세요. 정말로 그렇게 보이나요? 나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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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 나도 맹세해요. 꼭 열다섯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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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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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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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로 ─ 라의 맹세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너구나 심하게 실례를 하였나 하고 후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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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로 ─ 라는 어느 나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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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은 그 말이 또 이상스러웠다. 스페인 사람이 아무리 동양적(東洋的)이라 해도 머리털이 저렇게 검고 두 눈동자가 저렇게 검고 아름다울 수야 ……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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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마라. 엄마는 일본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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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머니 당신은 아주 맘이 나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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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그대로 로 ─ 라를 버리고 혼자 달음박질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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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언니 아저씨 나는 지금 참 천하에 제일 가는 괴물을 구경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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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아파 ─ 트 팔(八)호실로 들어서며 이렇게 외쳤다. 가지런히 앉아 빙수(氷水)를 마시고 있던 성수(性秀)와 연주(蓮珠)는 일제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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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성수(性秀)의 빙수(氷水) 그릇을 빼앗아 마시며 자랑같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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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로 ─ 라의 이야기를 다 ─ 하여 듣게 했다. 성수(性秀)와 연주(蓮株)도 호기심이 바싹 일어났는지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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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셋이 함께 가자구. 나가는 길에 어디 가서 시네마도 구경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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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토요일(土曜日)이면 으레‘시네마’구경을 가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이 날은 로 ─ 라도 구경할 겸 그대로 셋이서 공원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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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蓮株)는 어서 바삐 로 ─ 라가 보구싶어 공원 안에 들어 사방을 휘휘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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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신음악당(新音樂堂) 앞 숲 속을 지나다가 로 ─ 라를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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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아까와 한 모양으로 고개를 숙인 채 벤치에 걸터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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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자기 형에게 로 ─ 라 구경을 시키게 된 것이 기뻐 크게 불렀다. 힐금 돌아보는 로 ─ 라는 입을 삐죽 하여 보이고는 뽀루퉁한 얼굴로 싹 돌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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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공연히 아주 귀여운 아가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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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첫눈에 로 ─ 라에게 호의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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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이란 말이 옳구려. 머리는 염색을 한 모양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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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아까 로 ─ 라에게 너무 심하게 군 것이 미안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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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 용서하구려. 장난이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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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당신은 맘씨가 좋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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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금방 울 듯이 입술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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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 이제는 정답게 동무되자구. 다시는 그러지 않을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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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상, 아가씨, 보세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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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와 연주(蓮株)도 허리를 구부리고 로 ─ 라를 들여다 보며 달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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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호 이제부터는 나를 놀리면 안되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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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그 크고 검은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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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 말구 로 ─ 라 참 예쁜 아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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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일부러 로 ─ 라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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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당신보구 아저씨랄까요? 당신에게는 언니라 그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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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 라는 성수(性秀)와 연주(蓮株)에게 매어달리며 가느다란 소프라노로 곱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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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좋아 오늘 나는 아저씨 하나 언니 둘이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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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인제 완전히 모나 ─ 리자의 성이 풀리신 모양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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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순(蓮順)이는 로 ─ 라의 팔을 끼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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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이 어디서요. 어디 가서 놀다 오겠다구 허락받고 오시면 ‘시네마’ 에 데리고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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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性秀)는 로 ─ 라를 아주 어린 소녀(少女)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연주(蓮株) 역시 그러한 표정이었으나 연순(蓮順)이만은 그 형들의 안광(眼光)이 흐린 것이 우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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