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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화(戱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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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10
계용묵
1
희화(戱畵)
 
 
2
낮비 소리보다는 밤비 소리가 더욱 가슴에 마친다.
 
3
-정력적으로 쭈룩쭈룩 그렇게 세차게나 퍼부었으면 오히려 나을 것이, 오기도 싫은 것을 보슬보슬 끊임도 없이 속삭이는 가랑비 소리- 그것은 마치 사람의 눈을 피하여 조심조심 걸어오는 사신(死神)의 발자국 소리나처럼 정암의 귀에는 들린다.
 
4
날마다 살이 깎여만 내릴 줄 아는 팔뚝을 들여다는 보면서도 그래도 마뜩해 죽기야 하리? 하던 그 굳센 신념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던 것이, 며칠째의 의사의 진찰 태도에 그만 정암은 그렇게도 굳세던 마음이 일조에 꺾이고 죽음의 공포 속에 자꾸만 오력이 재려든다. 더욱이 오늘 아침의 진찰에 와서는 청진기를 가슴에 대기가 바쁘게 머리를 흔들며 실색을 하던 그 의사의 태도는 그것이 벌써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르지 않는 것이다. 별안간 가슴이 덜컥 하고 내려앉으며 정신이 아찔하여진다. 그때부터 정암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와는 인젠 손톱만한 인연도 없는 듯이 자기의 죽음을 시바삐 재촉하는 듯하고 또 찬미하여 마지않는 것만 같다. 그러면서 무엇이나 그윽히 그리고, 고요하게 들려오는 음향이면 그것은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는 그 무슨 신의 호령이나처럼 그의 귀에는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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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것은 피치 못할 철칙이로되, 이제 그 불가제항의 죽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찾아와 시간을 앞에 놓고 자기의 운명을 노리고 있거니 하니 이리도 짧은 사람의 일생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6
독자(獨自)의 예술을 개척하여(그는 그렇게 알음) 주위의 벗들을 뭇누르고 호올로 문단에 뚜렷한 지위를 얻기까지의 그 정력의 소비, 분투와 노력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쌓아온 그 노력의 헛됨이 지극히 아깝다. 지금 죽는다 해도 이미 얻은 그 문단적 지위는 움직일 수 없이 뚜렷은 할 것이나, 정암은 그것만으로 개운히 마음에 만족하지 못한다. 백만 대중을 위하여 자기의 경지를 개척할 예술적 소재가 복안에 많은 것을 이렇다 세상에 발휘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지닌 채 자취도 없이 자기와 같이 영원히 썩어지고 말 것임이 길이 미련에 남는다. 다만 몇 해 동안이라도 그 소재의 예술화를 보기까지 죽음에서 생의 여유를 얻는다면 하고 때로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나 다음 순간, 그 의사의 실색하던 태도가 뒤미처 떠오를 땐 그러한 생각조차 그것은 너무나한 억지임을 그 즉석에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해도 자기는 한 주일이 멀다. 그 안으로 기어이 죽고 말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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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죽음과 같이 영원히 잊고 말, 잊기 어려운 그 예술- 그 예술도 자기에겐 없을 것을 미루어볼 때 정암은 좀더 예술 속에 깊이 사라지고 싶은 알뜰한 충동에 못 이긴다. 여생이 이제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더 계속될는지는 모르나, 다만 몇 시간 동안이라도 깨끗하게 더러운 생활을 예술화시키므로 사람으로서의 보람있는 최후를 마치고 싶다. 그러니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 양심에 걸리던 자기 자신의 비행이 저리게도 가슴에 마친다. 그 가운데서도 더욱이 참을 수 없는 그 한 가지 - 그것은 자기의 문단적 지위를 높이어 준 예술적 창작의 동기가 되었던 비인위적 행위 그것이다.
 
8
사람으로서의 차마 하지 못할 행위를 범하고도 오늘까지 비밀히 감추어 두었던 것은 지위를 보존하므로 거기에 따라 예술 가치도 앞으로 더욱 높이 자는 데 있었던 것이나, 자기와 같이 예술의 소재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진대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바로 가짐으로 나머지의 여생이나 깨끗이 예술화하여 보다 더한 한낱 완전한 인간으로 예술 그 물건이 되어 죽고 싶다.
 
9
그 비인위적인 무서운 범죄로 우정(友情)을 써서 문단적 지위를 얻게 되던 사실, 그것을 정암은 시바삐 밝힘으로 완전한 죄 없는 사람이 되어 죽고 싶은 알뜰한 충동에 자못 이길 수 없다.
 
 
10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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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은 아내를 부른다. 그리고 급히 천양을 좀 청해 달라 이른다. 그리고는, 얼마 동안을 무슨 사념엔지 다시 고요히 잠겼던 정암은 천양의 기침 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힘없는 눈을 번쩍 뜨고 지극히 반가움에 못 이기는 태도로 천양의 팔목을 덤썩 더듬어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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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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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손으로 정암의 빼빼 마른 팔목을 천양도 마주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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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젠 죽는 사람이야, 군과 이렇게 손목을 잡구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도 이것이 필시 마지막일까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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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리를 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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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나는 죽는 사람이지. 군의 그런 인사말도 지금 내 탈에는 너무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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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런 소린 말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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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죽지. 죽고 말고……. 내가 죽으면 군! 세상은 나더러 무어라고 할 것인가? 군은 비평가이니만치 응당 나에게 대한 문단의 여론을 좀더 정확히 짐작할 테지?”
 
19
“군의 지위야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영원히 살고 있을 텐데……. 군의 우정이야 우리 문단에서뿐 아니라, 외국의 어느 문단에 가져다 놓더라도 손색이 없을 불후의 걸작으로 이미 세평이 높잖은가. 그것만으로도 군의 지위는 영원히 살고 있을 것이라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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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정암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 천양의 입으로 우정의 찬사를 받을 때 정암은 양심상 참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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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 군은 이 나라는 존재를 무엇으로 알고 있었나? 바루 말하여주게,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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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무로서의 둘도 없는 벗으로 알지. 군과의 교의는 세상이 우정을 믿듯이 나는 군을 믿으니까, 안 그래? 정암! 군도 나를 믿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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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의 눈물이 다시는 소생할 여망이 없는 데서 자기와의 우정에 참을 수 없이 흘리는 그러한 눈물인 줄만 아는 천양은 이를 데 없이 안타까운 마음에 다정히 손목을 흔들어 묻는다. 그러나, 정암은 여전히 눈물로써 대답을 받을 뿐,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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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 돼, 군은 그맛 탈을 중히 알고 마음을 약하게 먹으니까 그게 탈이거든. 나는 군의 탈이 전에보다 분명히 떨리고 있는 줄로 아는데 무슨 근심이야 글쎄 근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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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게 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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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던 정암은 마침내 무엇을 결심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이빨에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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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니! 무엇을 말야?”
 
28
“나는 군에게 죄를 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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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무슨 말이야 대체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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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까지 그것을 속여 왔으니까 군도 모르지, 용서하게.”
 
31
“아 이 사람!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자세히 모르겠네만, 설혹 무슨 잘못이 있대서 군과 나 사이에 죄라구까지 이름을 붙일 무엇이 있겠나 걱정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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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용서하여 줄 텐가? 천양! 나는 군과의 정의가 그만큼 두터우므로 해서 죽으면서 까지는 군을 속이지는 못하고 밝히고 가려는 거야. 나의「우정」은 그게 모델을 두고 썼든 소설이거든…….”
 
33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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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사실에 천양은 뉭큼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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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내가 용서를 청한 것이 아닌가?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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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은 마치 의식을 잃은 사람 모양으로 멍하니 정암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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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한다더니 응?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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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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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 응? 천양! 죽으면서까지 나는 그런 사실을 속일 수가 없었네. 차마 속일 수가, 군을 속일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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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은 힘없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벽으로 돌린다. 정암의 우정을 오늘까지 혀끝에 침을 틔어 가며 칭찬을 하여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어 놓은 그 소설의 모델이 이제 자기의 아내와의 간통에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천양은 너무도 자신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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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십 년 전 군이 북선 방면으로 순회 강연을 떠났을 때 나는 군에게 죄를 지었네. 그것이 잘못인 줄은 물론 잘 알면서도 그때 내 마음을 나는 나도 억제할 수가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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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그런 사실을 내 귀에 고하지 말구 그대로 안고 가지를 왜 못하나? 내 아내를 더럽혀 준 것이 동기가 되어 그것을 모델로 짜여진 작품을 내 입으로 칭찬을 하여 예술적 가치를 높이어 준 것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이 아플 것을 군은 짐작하지 못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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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나를 나라는 일개 완전한 인간으로 내 몸을 세우므로 예술 속에 깨끗이 죽기 위하여 고백을 한 것이야. 내가 그것을 지금껏 숨기어 온 것은 애 인격을 보존하기 위하자는 데 있었으나 내가 죽으면 나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주 영원히 없어질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때에는 인격을 보존할 필요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란 말야. 그래서 나는 나라는 인간을, 다시 말하면 죄 없는 깨끗한 인간으로 인격을 세우고 죽기 위하여 죄를 고백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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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면 정암의 그 고백은 자기에기 모욕을 주기 위한 농락도 같은 것이 천양은 분하다.
 
45
“너는 도무지 나를 농락하는 데 불과하구나. 자기의 인격만을 위하여 남의 인격을 이렇게두 비웃어 놓는 법이 천하에 어디 있단 말이냐? 나도 너를 농락하려면 농락할 만한 사실이 없는 것이 아니야. 내가 내 붓끝으로 칭찬을 하여 걸작으로 만들어 놓은 소위 그「우정」은 전연 내 붓끝이 만들어 놓은 명작이었고 내 마음이 허하는 그러한 명작은 너무도 아니었던 게야. 우리는 그때 우리의 정치사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의 그룹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내세우고 추켜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지. 그래야 사회적으로 권위도 얻게 될 것이요, 그러므로 가난한 우리가 밥도 먹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칭찬을 했던 게지. 이러한 예가 그때의 문단에 있어 한 통폐이었던 것은 군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테다. 이제 말하거니와 군의「우정」도 그 한 좋은 예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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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생이 구만 리 같은 천양으로서는 차마 못 할 소리를 한다는 듯이 정암은 끔쩍 놀라고 겨우 뜨이는 눈이 동글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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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천양! 그게 무슨 소린가? 군은 아직도 여생을 살아갈 앞날이 많이 남았는데 군 자신의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한다면 뉘가 군의 붓끝을 신용할 것인가, 안 그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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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날에 있어서의 벗의 지위를 지극히 염려해 마지못하는듯한 일종 애연에 가까운 낯갗으로까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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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양은 이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흥분해 거리지는 침을 힘주어 몰아삼키며,
 
50
“반듯한 말이, 그때부터 군의 지위는 문단적으로 섰고, 그리하여 밥 문제도 어느 정도까지 해결이 되었던 것을 군도 빤히 알고 있는 사실일 테지. 그리고, 군은「우정」을 내세우고 어깨를 우쭐거리고 다녔지. 나는 그것을 보고 얼마나 늘 웃어 왔는지 모르네. 그러면서, 세상이란 일개 비평가의 붓 끝에 이렇게두 속나 하고 세상을 좇아서 다시 한 번 웃으며…….”
 
51
“아니 군! 군은 아직 살아갈 여생이 여생이……”
 
52
되풀면서 괴로운 표정 속에 정암은 뒷말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53
침묵이 흐른다. 영원히 침묵을 지키려는 정암의 가쁜 숨소리와 같이…….
 
54
그러하여, 침묵이 계속되는 고요한 방안에는 전등불만이 혼자 밝아서 현실(現實)의 역사(歷史)를 지키고, 창 밖의 어둠 속엔 가랑비 소리가 여전히 보슬보슬 정암의 최후를 재촉하고…….
 
55
(壬申[임신] 6月[월])
 
 
56
〔발표지〕《문장》(1940. 10.)
57
〔수록단행본〕*『백치 아다다』(대조사, 1946)
【원문】희화(戱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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