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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어떤 부가(富家)의 안방. 의롱(衣籠), 금침, 적의(適意)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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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李氏) : 의관의 자 동경 유학생 영준(永俊)의 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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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丙俊) : 의관의 차자(次子)(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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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崔氏) : 인가(隣家) 백림 유학생의 부인(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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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파 : 순옥 간선차(看善次)로 옴(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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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방. 양등(洋燈). 이씨․최씨, 양인이 침선(針線)하고 순옥은 곁에서 수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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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거기도 동경 모양으로 배타고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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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거기는 배타는 데는 없대요. 앞 정거장에서 차를 타면 발에 흙 아니 묻히고 죽 간다는데요.
20
이씨 에그마니나! 이만 오천 리라니! 철도가 길기는 긴 게외다. 누가 다 그 철도를 놓았는고?
21
최씨 장춘이 어딘지 장춘까지는 일본 차 타고, 거기서부터는 아라사 차 타고, 그 다음에는 덕국 차 타고 간다는데, 여기서 떠나면 한 보름 가나 봅데다.
22
이씨 차 타고 보름이나 가면 하늘 붙은 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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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옥 에그, 형님! 지리도 못 배우셨나봐! 땅덩이가 둥그렇지 넓적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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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참 우리도 학교에나 , 좀 다녔으면! 집에 오면 늘 무식하다고 그러면서 공부를 하라고 하지마는, 글쎄 이제 어떻게 공부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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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참 그래요. 저도 밤낮 편지로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지마는 어느 틈에 공부를 하겠습니까. 또 설혹 틈이 있다면 가르쳐주는 선생이 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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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너무 무식하다, 무식하다 하니깐 집에 들어 와도 만나기가 무서워요. 서울이랑 일본이랑 다니면서 공부하던 눈에 무슨 잘못하는 것이나 없을까 하고 그저 잠시도 맘놓을 때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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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래도 백 선생께서는 우리보다는 좀 성미가 부드러우시고 다정하신가 봅데다마는 우리는 너무 성미가 급해서 조금이라도 맘에 틀리는 일이 있으면 눈을 부릅뜨고 “에구, 저것도 사람인가”하니깐 차라리 이렇게 멀리 떠나 있는 것이 속이 편해요.(하고 눈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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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호호…… 눈에 무엇이 들어가서 그럽네다. 울기야, 팔자가 그런 것을 울면 무엇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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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참 시집살이가 고추 당추보다 더 맵다더니 정말 못할 것은 시집살입데다. 시집 온 지가 벌써 4, 5년이 되어도 정든 사람이 하나이나 있어야지요. 그저 친정에만 가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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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래도 백림 계신 어른이 계신데,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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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이구, 백림이 어디게요. 10년만에 오겠는지 20년만에 오겠는지. 그 동안에 좋은 세월 다 가고…… 아까 그 중매 할미 모양으로 노파가 된 뒤에 오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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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왜 그래요. 집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마음이 끌려서 그렇게 오래 있나요. 저 유영식 씨 부인도 남편 돌아오라고 백일기도를 하더니 지난달에 돌아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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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래 형님도 백일기도를 시작하셨습니까? 동경 계신 어른께서 어서 돌아 오시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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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순 백일기도를 벌써 절반이나 하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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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순옥더러) 여보, 누이님은 어서 백 서방님 만나게 하여 달라고 백일기도나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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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옥 (몸을 핑 돌리며) 형님은 당신께서 기도를 하시니까. 내 오빠한테 “형님께서 오빠 돌아오시라고 백일기도를 하나이다. 어서 바삐 돌아 오소서”하고 편지하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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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응, 순옥 씨 그러시오. 내일 편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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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들어오며) 이 방에서 왜 백일기도 소리가 이렇게 나나. 옳지, 남편 멀리 보낸 양반들이 모여 앉아서 남편 돌아오라는 기도토론을 하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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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닙니다. 이순옥 씨가 어서 백 서방님 보게 하여 달라고 백일기도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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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백 서방님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볼 터인데. 백일이 차겠기에. 29일 기도나 하지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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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그럼. 아까 다 말씀을 하였는데. 참 신랑이야 준수하시지. 동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내년에는 일본에 보낸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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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일본이라 하면 모두 다 진저리가 나나 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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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진저리가 왜 안 나겠소. 가서는 4,5년이 되도록 집에 올 줄도 모르고, 혹 하기방학에 돌아오면 좀 집에 있을까 하면,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밤낮 사방으로 돌아다니기만 하고. 작년에 백림 가노라고 들렀을 적에 집에 이틀밖에 아니 잤답니다. 그도 하루는 사랑에서…….
50
노파 저런 변이 있나! 그렇게 멀리 가면서 한 열흘 동안 좀 마누라님의 원을 풀어 줄 것이지. 워낙 사나이란 무정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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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참 사나이란 무정해요. 우리가 그만큼 보고 싶으면 당신네도 좀 생각이나 나련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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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생각이 무슨 생각이오. 공부에만 미쳐서 다른 생각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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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아, 왜 생각을 할꼬. 도처에 기생첩이 넙너른하였는데 왜 생각을 할꼬. 우리 영감장이두 첩 버린 지가 이제 겨우 3년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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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암. 아주 악한 놈 아닌 담에야 아주 잊지야 않지. 또 당신네 남편네야 다 좋은 공부하러들 다니는 인데 설마 어떠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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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까짓거, 한 20년 있다가 다시 찾으면,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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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참 당신네들은 다 불쌍하외다. 꽃 같은 청춘에 생과부 노릇을 할라니 여북이나 섧겠소. 인생의 낙은 젊은 부처(夫妻)가 원앙새 모양으로 쌍쌍이 노는 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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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러니 저 우리 누이님도 또 유학생한테 시집가면 어떡한단 말인가. 나 같으면 싫다구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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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그렇고 말고! 여보 순옥씨, 어머니께 가서 싫다, 유학생은 싫다고 그럽시오. 또 우리와 같이 속 썩이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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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왜 백 서방님이야 아주 다정한 온순한 사람이니까 이런 (순옥의 등을 두드리며) 꽃 같은 새아씨를 잠시인들 잊을 수가 있나. (하고 말을 낮추어) 저 재령 김덕천(金德川)의 아들 ─ 일본 가 있는 그 김덕천의 아들이 기처를 하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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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은 경악하여 바느질을 그치고 노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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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아무 죄도 없는 것을 부모의 명령, 아니 복종한다는 죄로 동년 여름에 이혼을 하였대. 그래서 그 새색시가 울면서 친정에 쫓겨갔더니, 그 새색시의 어머니가 분이 나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김덕천네 집에 와서 사흘이나 왕왕 처울면서 내 딸 왜 죽였는가고 야료를 하였답데다. 저런 변괴가 어디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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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나 같으면 죽고 말지, 왜 친정에를 돌아가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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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그렇지 않아. 참 새색시도 우물에 빠질라는 것을 누가 붙들어서 살아났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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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니, 부모에게 불순은 하였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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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남들의 하는 말이, 3년이나 남편이 일본 가서 아니 오니까 어서 데려다 달라고 좀 하였던가 봅데다. 그게 왜 안 그러겠소. 남편 하나 믿고 시집살이하는데 시집 온 지 한 달만에 일본 가서는 3년이나 아니 돌아오니, 데려다 달라곤들 왜 아니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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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아무려나 머리를 풀고 서로 만난 아내를 어떻게 버리노, 인정에 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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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일본 가서 일녀(日女)를 얻은 게지. 글 잘하고 말 잘하는 일녀한테 홀리면 우리 따위 무식쟁이야 생각이나 할랍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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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무언. 바느질. 노파는 순옥의 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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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웃고 뛰어들어오며) 아주머니, 나 조끼 하여 주셔요. 평생 형님 옷만 하시것다. 형님이 조선옷이야 입기나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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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그저 고오운 조끼를 해줍시오. 해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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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하여 드리고 말고요 . 도련님 아니하여 드리면 누구를 하여 드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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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정말 해주셔요? 참 좋구나, 아아, (춤을 추면서) 오는 토요일날 원족회에 입게 하여 주셔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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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그럽지요. 그런데 조끼는 왜 갑자기 하라고 그러십니까?(하고 웃으며 병준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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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유심한 듯이 뒷짐을 지고) 그러면 나도 아주머님께 좋은(‘조’자를 길게) 것을 드리지요. 참 좋은 것을 드리지요. (일동의 시선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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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역시 바늘을 세우고 보면서) 무슨 좋은 것을 주시겠소? 또 그 잘 그린 그림인가 보외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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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좋은 게야요. 어디 알아 맞춥시오. 그저 아주머님께 제일 좋은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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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순옥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며) 내가 도적놈이야. 제가 남의 조끼에서 연필을 훔치고는…… 야이 야이, 백 서방 마누라, 야이 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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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으하 으하 하하하. 백 서방만 보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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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내 알아 맞추리다. 음 곽 곽선생 주역선생…… 옳지, 알았소이다. 일본서 온 편지외다그려. (이씨의 어깨를 툭 치며) 일본 계신 그리운 어른께서 편지가 왔구료. 에그 부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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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야하, 보았나 보구나. 아니야 아니야. 편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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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4년째 내게야 왜 편지 한 장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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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한 번도 없어요. 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편지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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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병준의 팔을 당기며) 어디 내어 놓으시오. 자, 이게 편지가 아니고 무엇이고? 자, “이영옥(李永玉) 보시오.” ‘동경 영준’이라고 쓰지 아니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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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웃음을 참지 못하고 편지를 받으며) 이게 웬일이야요! (하고 바느질 그릇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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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넣긴 왜 넣어요. 어디 여기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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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봅시다. (이의 팔을 잡아채며)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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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이따가는 왜? 자, 어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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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서서 만족해 웃으며) 아주머님, 이제는 조끼 하여 주셔야 합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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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보이시구료. 피차에 같은 처지에 그만큼 보여 달라는 것을 탁 보여 주시구료, 시원하게.
103
최씨 제가 안 보이구 배기나. (하고 억지로 빼앗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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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글쎄, 그렇겠지. 자, 어서 내요. 내 읽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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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피봉을 떼고 편지를 끄집어낸다. 온 머리와 시선이 그 편지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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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편지를 들고) 이때 날이 점점 추워 가는데 양당 모시고 몸이 이어 평안하시니이까. 이곳은 편안히 지내오니 염려 말으시옵소서. 그대와 나와 서로 만난 지 이미 5년이라. 그때에 그대는 17세요, 나는 14세라 ─ 자, 나 토론은 또 왜 나오노 ─ 나는 14세라. 그때에 나는 아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혼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나니, 내가 그대와 부부가 됨은 내 자유의사로 한 것이 아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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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나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편지에는 모르는 소리만 쓰기를 좋아 하것다 ─ 자유의사로 한 것이 아니요, 전혀 부모의 강제 ─ 강제, 강제 ─ 강제로 한 것이니, 이 행위는 실로 법률상에 아무 효력이 없는 것 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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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응 하고 입맛을 다시며 돌아앉는다) 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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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라. 지금 문명한 세상에는 강제로 혼인시키는 법이 없나니 우리의 혼인행위는 당연히 무효하게 될 것이라. 이는 내가 그대를 미워하여 그럼이 아니라 실로 법률이 이러함이니, 이로부터 그대는 나를 지아비로 알지 말라. 나도 그대를 아내로 알지 아니 할 터이니, 이로부터 서로 자유의 몸이 되어 그대는 그대 갈 데로 갈지어다 나는 . ─ 아, 이게 무슨 편지야요!(하고 중도에 편지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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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바느질하던 옷 위로 푹 쓰러지며 소리를 내어 운다) 아아, 내가 이 옷을 누를 위하여 하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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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나가면서) 저런 악착한 일이 어디 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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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여보 순옥 씨, 이게 무슨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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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형님이 미쳤구나. 공부가 무슨 공부인고. (하고 편지를 들고 뛰어 나간다)
120
이씨 (고개를 번쩍 들며) 여보, 이게 무슨 일요? 세상에 이런 일도 있소?
122
이씨 이게 무슨 일이오? 천하에 이럴 법이야 있겠소. 이런 법도 있소?
123
최씨 아마 잠시 잘못 생각하시고 그러셨겠지요. 얼마 지나면 다시 잘못된 줄을 알겠습지요. 또 아버님께서도 좋도록 하여 주시겠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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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아니야요. 아버님이니 어떡하십니까. 평생에 나를 보고는 다정하게 말 한마디하여 준 적 없고 늘 눈을 흘겨보았습니다. 혹 성이 나면, 네 집에 가거라, 보기 싫다, 하고 잡아먹고 싶어하였습지요. 지난 여름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나와는 말 한마디 아니하고, 내 방에라고는 발길도 아니 들여놓았답니다. 그런 것을 오늘까지 혼자 참아 오노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쓰렸겠습니까. 죽고 싶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언마는 시부모님의 정에 끌려서 여태껏 참아 왔어요. 남들 같으면 설운 때에 친정 어머니한테나 가서 시원히 진정이나 하련마는, 나는 어머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그래도 행여나 마음이 돌아설까 돌아설까 하고 기다렸더니, 이제는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려. (하고 흑흑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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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제가 네 살적에 제 동생을 낳으시고 오래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답니다. 그 후에도 사나운 계모님 손에 길려 나다가 시집이나 가면 좀 낙을 보고 살까 하고 어린 생각에도 하루 바삐 시집가기를 기다렸더니, 정작 시집 온 뒤에는 친정에 있을 적보다도 어떻게 괴로운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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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저런, 참! 세상이 무정해요. 저 예수 믿는 마누라가 세상은 죄악에 찬 지옥이라 하더니, 정말입데다.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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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나는 남편을 제 몸보다 더 중히 여겨서 밤잠을 못 자면서 옷을 지어드리고 반찬 한 가지라도 맛나게 하려 하고, 혹 남편의 몸이 좀 달더라도 무서운 마음이 생겨서 울안에 돌아가서 북두칠성께 기도를 몇 백 번이나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에서 평생 몸이 약하여 겨울에는 사흘 건너 앓지요. 앓을 때마다 나는 치마 고름도 아니 끄르고 밤을 새웠습니다그려. 그렇건만 그 보응이 이렇습니다그려. (하고 최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목을 놓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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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다시 편지를 보더니) 아무리 해도 형님께서 정신이 빠지셨군. 아주머님 걱정 맙시오. 제가 내일 길다랗게 편지를 하겠습니다. 형님도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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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아무려나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하회를 기다리십시오. 경(輕)하게 무슨 일을 하시지 말고.
131
이씨 글쎄, 정답게 말 한 마디야 왜 못 해주겠소. 말에 밑천 드오? 그렇건 만 5년 동안을 다정한 말 한마디 아니하여 주다가 이게 무슨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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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이후에 잘 살 날이 있을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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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잘 살 날? 땅속에 들어가면 평안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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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아니오. 이제 살기를 어떻게 삽니까? (하고 웃으며) 이제는 형님과도 이 세상에서는 다 만났습니다. 형님께서나 잘 살으십시오. 그러고 나물하러 갈 때에는 제 무덤이나 와 보아주십시오. (바느질하던 옷을 다시 보더니 접어서 함롱(函籠)에 넣더니, 수식과 패물을 집어내어 두 손에 들고 망연히 섰더니 문득 눈을 부릅뜨고) 어머니, 어머니, 이 바늘통이 어머님의 것이외다. 어머니, 어머니, 저것, 저것, 저기 어머님께서 오시노나. 어머니, 어머니!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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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순, 병은 놀라서 이를 붙든다)
137
최씨 여보, 영옥 씨, 정신 차리시오.
138
이씨 저기 저 문 밖에 어머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손을 혀기십니다. 네, 네, 곧 가오리다. 가서 어머니 젖을 먹겠습니다.
139
최씨 병준 씨, 나가서 아버님 들어오시랍시오.
140
이씨 놓으시오, 놓으시오. 멀리, 멀리, 사람들 없는 데 어머님 따라 갈랍니다. 놓으시오.
141
최씨 나를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자,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네, 영옥 씨.
142
이씨 아니 아니 네가 ! ! 누구냐. 네가 누구관대 어머니 따라 가는 나를 붙드느냐. 이놈 놓아라. 아니 놓으면 물어뜯겠다. 놓아! 놓아!
143
순옥 형님, 형님, 정신 차립시오. 내외다, 순옥이외다, 형님, 형님.
144
이씨 (순옥의 목을 쓸어안으며) 아아, 우리 순옥 씨, 우리 누이님. 아니 이제는 누이가 아니지요. 어머니, 어머니, 나 이 노리개 차고 분 바르고 어머님께 갑니다. 네, 네, 지금 갑니다. 놓아라, 놓아.
146
김의관 이게 무슨 변이냐. 왜 병준이 너는 그 편지를 갖다가 보였느냐. 얘 며늘아, 정신 차려. 여봐 내로다.
147
모 얘 며늘아, 이게 무슨 일이냐. 정신 차려라, 내로다. 얘 며늘아.
148
이씨 하하하하. 이게 다 무엇들이야. 너 웬 아이들이냐? 무엇하러 왔니? 나를 잡아먹으려고? 내 이 고기를 뜯어먹고 피를 빨아먹으려고? 에크, 무서워라! 어머니, 날 데리고 가시오!
149
김의관 자, 우선 방안에 들여다 누이고 좀 정신을 안정시켜야겠구나. 며늘아, 자 들어가자.
150
모 그게 무슨 자식이 고런 철없는 생각이 나서 집안에 이런 괴변이 생기게 한단 말인고.
151
병준 형님 오라고 전보 놓읍세다. 공부고 무엇이고.
153
이씨 (몸을 불불 떨며) 나는 가요. 이 노리개 차고 분 바르고 일본 동경으로 가요. 자, 간다. 뛰 푸푸푸푸. 잘은 간다. 동경 왔구나. 저기 영준씨가 있구나. 좋다, 어떤 일녀를 끼고 술만 먹노나. 여보 영준 씨, 영준 씨! 나를 잘 죽여 주었쇠다. 나는 갑니다. 멀리 멀리로 갑니다. 여보 여보, 왜 나를 버리오? 여보, 영준 씨!
154
김의관 마음에 맺혀 오던 것이 오늘 그 편지를 보고 그만 정신이 혼란하였구나.
155
모 그동안 어린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소. 참 생각하면 저 영준이 놈을 때려죽이고 각을 찢어 주어야지. (하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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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거, 누군고. 어! 누가 우리 영준 씨를 때린다고 그러노. 어! 어디 해 보자. 나하고 해보자. 영준 씨가 머리만 달아도 내가 밤을 새우고 칠성기도를 하였다. (갑자기 몸을 흔들며 소리를 높여) 간다, 간다, 놓아라. 어머니, 영준 씨, 나는 갑니다. 멀리고 갑니다. (하더니 피를 푹 토하고 쓰러진다 . 여러 사람은 안아 들어다가 뉘었다. 몸이 경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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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관 얘 병준아, 가서 공의원 급히 오시래라. 그러고 순옥아, 가서 냉수 떠오너라. 여보 부인, 이 수족을 좀 주무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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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여보 영옥 씨, 정신 차리시오. 여보. (하고 냉수를 얼굴에 뿌리며 가슴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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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우는 소리로) 얘 며늘아, 정신 차려라. 내가 있는데 걱정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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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관 얘 며늘아, 얘, 정신 못 차리느냐. 아뿔싸, 입술이 까매지노나. 얘 누구 얼른 또 의원한테 가서 급히 오라고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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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뛰어들어오며) 의원 옵니다. 아주머님, 아주머님, 내 내일 가서 형님 데려 오리다. 일어나십시오. 아주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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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전집》제20권(삼중당,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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