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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까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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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0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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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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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보내는 글발, 순정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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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잘도 끊어지는 기타의 높은 E선을 새로 갈고 멜스의 「빠아카로올」을 익혀 갈 때 한 소절 한 소절에 열정이 담겨지고 E선은 간장을 녹일듯한 애끊는 멜로디를 지어 갑니다. 나는 그 멜로디 속에 아름다운 뱃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고요한 정경을 그리고 그대의 환영을 그려 보곤 하오. 그러나 이상스런 것은 가장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그대의 얼굴이 깜박 잊혀져 아무리 애써도 생각나지 않은 때가 있는 것이요. 애쓰면 애쓸수록, 마치 익히지 못한 곡조와도 같이 얼굴의 모습은 조각조각 부서져 마음속에 이지러져 버려 ─ 문득 눈망울이 똑똑히 솟아오르나 코 맵시는 물에 풀린 그림같이 흐려지고 턱의 윤곽이 분명히 생각날 때에는 입의 표정이 종시 떠오르지 않는구료. 코, 입, 눈, 이마, 턱, 귓불 ─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은 한 군데 모여 똑똑히 조화되는 법 없이 장장이 날아 떨어진 꽃판과도 같이 제 각각 흩어져 심술궂게도 나의 마음을 조롱합니다. 흩어진 조각을 모아 기어코 아름다운 꿈의 탑을 쌓아 보려고 안타깝게 애쓰나 이렇게 시작된 날은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빠아카로올」의 곡조와도 같이 끝끝내 헛일예요. 어여쁜 님이여! 심술궂은 얼굴이여! 나는 짜증을 내며 악기를 던지고 창 기슭을 기어드는 우거진 겨우살이를 바라보거나 뜰에 나가 화초 사이를 거닐거나 하면서 톡톡히 복수할 도리를 생각하지요. 요번에 만날 때에는 한시라도 그대를 내 곁에서 떠나게 하나 보지. 하루면 스물네 시간, 회화할 때나 책을 읽을 때나 풀밭에 앉아 생각에 잠길 때나 내 눈은 다만 그대의 얼굴을 위하여 생긴 것인 듯이 그대의 얼굴에서 잠시라도 시선을 옮기나 보지. 한 점 한 줄의 윤곽을 끌로 마음 벽에 새겨놓거든. 그것이 유일의 복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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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의 꽃이 한창 아름다울 제는 여름도 아마 거의 끝나나 보오. 올에는 그리운 바다에도 산에도 못 가고 무더운 거리에서 결국 한 여름을 다 지나게 되었구려. 화단에는 조개껍질이 없으니 바다소리를 들을 바 없고 뜰 가운데 사시나무 없으니 산속의 숨결은 느낄 수 없으나 다만 그대를 생각함으로써 나는 시절시절을 결코 무료하게는 지내지 않는 것은 그대를 그리워함으로써의 모든 안타까운 심정이지 시절의 괴롬쯤이 나에게 무엇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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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을. 가까워 오는 가을! 아름답게 빛나면서도 안타깝게 뼈를 찌르는 가을 새어드는 가을과 . 함께 그대를 그리워하는 회포가 얼마나 나의 간장을 찌를까를 나는 겁내는 것이요. 물드는 나뭇잎도 요란한 벌레소리도 그대의 자태가 내 곁에 없고야 무슨 값있는 것이겠소. 나는 그대를 생각지 않고 자연을 그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벌레소리 그친 찬 새벽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채 나는 필연코 울 것이요. 자칫하다가는 어린애같이 엉엉 울 것이요. 이 큰 어린아이를 달래줄 어머니는 세상에 없을 법하오. 사랑은 만족을 모르는 바다 속과도 같다 할까. 가령 나는 진달래꽃을 잘강잘강 씹듯이 그대를 먹어 버린다고 하여도 오히려 차지 못할 것이며 사랑은 안타깝고 아름답고 슬픈 것 ─ 아름다우니까 슬픈 것 ─ 슬프리만치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그 아름다운 정을 못 잊어서지요. 사랑 앞에 목숨이란 다 무엇 하자는 것일까. 희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격이 일찍이 사랑의 감동을 넘은 때가 있었던가. 나는 사랑 때문이라면 이 몸이 타서 금시에 재가 되어 버린다 하여도 겁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원하고자 하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태우소서. 깨트리소서. 와싹 부숴버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것일까. 흩어지는 불꽃 같이도 사라지는 곡조 같이도 아름다울 것은 미의 특권 그대의 특권같이 세상에서 장한 것이 있겠소. 그 특권의 종 됨이 내게는 도리어 영광인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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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에 수백 마디인들 족하겠소. 수천 줄인들 많다 하겠소. 고금의 시인의 노래를 다 모아 보아야 그대를 표현하고 내 회포를 아뢰기에는 오히려 부족한 것을 어찌 하겠소. 나는 다만 잠자코 그대를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소. 생각하고 그리고 꿈꾸고 ─ 이것이 나의 지금의 단 하나의 사랑의 길인 것이요. 이 뜨거운 생각의 숨결은 모르는 결에 허공을 날아가 스스로 그대의 가슴을 덥히고 불붙이리라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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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도 나는 촛불을 돋우고 한결같이 님을 생각하려 하오. 초가 진하면 다른 가락을 켜고 마저 진하면 창을 열고 달빛을 받지요. 그대를 생각할 때만은 나는 끈기있게 책상 앞에 몇 시간이든지 잠자코 앉을 수 있는 재주를 가졌지요. 아무것도 하는 법 없이 천치같이 돌부처같이 말 한마디 없이 똑같은 모양으로 언제까지든지 앉았을 수 있어요. 나는 언제부터 이 놀라운 재주를 배웠는지도 모르오. 가난은 하나 세상에서 따를 사람 없을 이 놀라운 재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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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품이 오늘밤에는 벌레소리도 어지간히는 요란할 것 같으오. 가슴속이 한층 어지러워는 질 것이나 그러나 그대를 향하여 뻗치는 생각의 열정은 공중을 달아나는 외줄의 쇠줄과도 같이 곧고 강하고 줄기찰 것이요. 생각에 지쳐 자리에 쓰러지면 부드러운 달빛이 온통 내 전신을 적셔줄 것이니 부디 님이여 , 달빛을 타고 이 밤에 내 꿈속에 숨어 드소서. 그대의 날개가 자유롭게 들어오도록 나는 벽마다의 창을 모두 활짝 열어 젖히리다. 뜰 앞에는 장미포기가 흔하니 가시에 주의하시오. 꿈속에서 붉은 피를 본다면 내 얼마나 놀라서 기급을 하고 눈을 뜰 것을 생각해보시오.
 
9
답장은 길고 두툼하게. 우표를 두 장 석 장 붙이도록 ─ 우표를 한 장만 달랑 붙이는 사랑의 편지란 세상의 웃음거리일 것이요. 다음 편지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오. 편지 속에는 쌀 것이 없으니 또 이 눈물을 싸리다. 아무 이유도 없는 다만 아름다운 내 이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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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1936. 10
【원문】사랑하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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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하는 까닭에 [제목]
 
  이효석(李孝石) [저자]
 
  여성(女性) [출처]
 
  1936년 [발표]
 
  서한문(書翰文) [분류]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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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