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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나는 이 논(論)이 우리 현금 문단을 토대로 삼은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영국 문단 이나 일본 문단 그것을 말함이 아니요 우리 조선 문단을 표준하여 말하는 것을 미리 말하여 둔다. 나는 항상 ‘우리 문단’이라 문단, 문단 하면서도 문단이란 의의가 머리에 분명히 떠오르지 않는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가지고 부르는 듯싶다. 어느 비판가의 말과 같이 문단이란 문예작품을 매매하는 시장이오 상인화한 문예상인들이 모여드는 장소라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 같으면 조선에서 문단이란 것을 말할 여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시장화한 문단은 아직 없다. 조선에서 글을 팔아서 빵을 먹는 작가가 몇 사람이냐? 한 사람이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조선 문단인의 ‘프라우드’로 여기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에 아직 문단이라 칭할 만한 것이 성립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조선 예술은 상품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한편에는 세계적 시장에라도 내보낼 만한 상품화한 작품을 내어놓을 작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요 또 한편으로 자국(自國)에서 자라나는 문예품을 수용할 경제력과 감상력이 일반사회에 없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여하튼 이러한 문단이라도 형성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소위 사계(斯界)에 헌신한 제인(諸人)에게는 불명예가 되는 동시에 또한 명예가 될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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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확실히 되지도 못한 문단이 비기리도의 실(失)을 사면(四面)에서 던지는 모양이다. 이 비훼리도(誹毁詈倒)의 중심 문제는 말하자면 문예작품에 중심 사상이 없다는 것이다. 즉 ─ 있지도 않은 ‘부르주아 문학’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대하라는 주문 같은 것은 이러한 종류의 하나이다. 그리고 친절히 무슨 주의 무슨 사상을 표현한 것이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방면까지 교시(敎示)한다. 비평하는 것만으로도 대(大)한 친절한 일이다. 게다가 교시(敎示)까지는 너무나 과분한 친절이다. 이러한 추상적 교시(敎示)가 그래도 작가 그 사람에게 (작가가 있는지 없는지 의문) 하등의 공효(功效)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작품을 읽는 일반 감상가에게는 확실히 어떠한 충동을 줄 것을 사실인가 한다. 작가가 있든지 없든지 작품이 나오든지 아니 나오든지 문단이란 형성이 되었든지 못되었든지 미리, 단단히 비훼리도(誹毁詈倒)하여 보는 것도 장래를 위하야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기리도에 구니(拘泥)하는 작가가 생길까를 두려워한다. 그러한 작가는 아니 나오는 것이 우리 문단을 위하야 경하(慶賀)하여야 할 터이므로 다만 그러한 비훼리도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산중(山中)이나 해중(海中)에 있는 사람이 돌연히 나와서 여러 사람이 열망하는 그것과 빈틈없이 들어맞는 작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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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미리부터 숙망(熟望)하는 사상문예(思想文藝)란 무엇일까?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문예작품 가운데에 무엇보다도 사상적 요소와 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고 선명한 것을 가리킴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상(思想)의 작품 가운데 들어 있는 문예(文藝)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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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상문예란 말이 문예의 본질로 보아 당연히 성립될는지 그 말 부(否)는 한 의문이다. 이것은 그 의의가 너무나 막연한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사상 없는 문예가 어디 있을까 하는 말이다. 이 사상(思想)이란 말을 광범한 의미로 해석하면 어느 문예에든지 사상이 없을 리가 없다. 단적으로 나타난 작중 모든 인물의 특별한 인생관이나 또는 작중 인물을 통하여 작자(作者)가 보인 자신의 인생관 같은 것이 없을 리가 없다. 적어도 이러한 인생관 같은 것이 없다 하면 그것은 문예작품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작품 가운데에 넣고 셀 것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아주 썩 광범하게 극단으로 생각하면 작자가 다만 여실하게 어떠한 인생이나 사상(事相)을 묘사하였을 뿐이라 하여도 그 여실히 묘사하여야 한다는 것과 하겠다는 그것만도 어떠한 의미에서는 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물론 사상 없는 문예품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품에 대한 작자(作者)의 주관 여하를 물론하고 거기에 집주(集注)한 정신 여하로 그 작품의 사상을 삼을 수 있고 이것을 어떠한 일부 사상으로 간주하려면 간주할 수도 있다. 그 사상의 객관적 가치로 어떠한 경우에는 제 이의적(二義的) 문제가 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나는 중대한 인생의 당위 문제 사상 문제 같은 것이 제 이의적(二義的)이 되면서도 그 작품은 어떠한 때에는 훌륭한 사상이 있는 문예품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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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관찰하고 보면 이 사상문제는 한 막연한 추상적 문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문예에 사상이 있는 작품과 사상이 없는 작품을 구별하려면 먼저 이 사상이란 것을 어느 정도까지 제한하여 그 경계선을 분명히 한 뒤에라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 같은 혼돈을 다시 되풀이하게 될 뿐인 까닭이다. 적어도 문예작품에 나타난 기분이나 개인의 개성이나 또는 인생관 같은 것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의미로 보면 인생관이나 독특한 개성 같은 것을 어떠한 다른 특수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만일 이것을 이러한 무차별하고 광범한 의의로 해석하면 어떠한 착오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분은 어디까지든지 부분이요 전체는 어디까지든지 전체이다 . 인생관, 개성 같은 것은 사상의 부분이다. 사상은 이러한 여러 요소를 종합하고 의지로 결정한 조직적 의욕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생관은 사상의 부분이 되는 동시에 또는 어떠한 종류의 사상을 조직하는 동기가 되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일시의 기분으로만 좌우하는 행동을 사상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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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시의 말상초경(末相梢經)의 감각에만 하소한 작품을 어찌 사상이 있는 문예라고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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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예는 사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과 문예에는 사상이 있기도 하다는 말은 같은 듯하나 기실(其實)은 그 가운데에 큰 경정(逕程)이 있는 말이다. 이것은 즉 규범 문제와 현실 문제의 차이다. 우리가 문학사적으로 모든 작품을 고찰할 때는 소위 재래 문호(文豪)들의 불후작(不朽作)이란 것에도 전혀 사상이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특수한 시대나 특별한 환경을 둔 까닭이다. 이렇게 특수 사정을 가진 나라의 문예에 있어서는 그 시대나 환경을 따라 자연히 그러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태서(泰西) 문학에 있어서도 남구(南歐)의 문학과 북구(北歐)의 문학의 그것과는 대단히 다르게 되는 것인가 한다. 또는 같은 환경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작자 자신의 문예에 대한 태도 여하로 말미암아 사상이 있는 문예와 없는 문예와의 구별이 생기는 것인 듯하다. 즉 예술지상파(藝術至上波)의 예술에 있어서는 작중에 나타나는 사상이란 것은 물론 제 이의적(二義的)이 될 것이요 인생파(人生派) 예술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에게 주는 바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 제 일의적(一義的)이 될 것이다. 말하면 사상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하나 얻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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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잡한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어떠한 범주에 집어 넣어 보려고 생각하는 것이 문예에서도 그러한 독단을 한다 할 것 같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통일적 결론 하에 문예란 것은 이러이러 하여야 된다는 규범을 내어놓기는 좀 어려운 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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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예술이란 것은 많은 경우에 무엇보다도 주관적 요소가 많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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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예의 본연성(本然性)에 대한 모독독(冒瀆讀)이라고 상아탑(象牙塔) 속에서 크게 부르짖는 참으로 문예가가 있을는지 알 수 없으나 장래 할 조선문단은 무엇보다도 사상 있는 문예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또 나와야만 할 것이다. 물론 사상 그 물건은 영위성이 없다. 그것은 그 환경이나 시대나 그보다도 한걸음 나아가서 이상(理想)으로 삼은 현실을 동경하고 의지적으로 숙구(熟求)하는 심리이므로 그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동시에 의지적으로 숙구(熟求)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심리의 동경(憧憬)이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때에는 그 사상이란 자멸(自滅)하여가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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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상이란 영위성이 없다. 가령 사회주의 사상을 취급한 문예적 작품이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던 시대나 사회에 있어서는 일반이 희구(希求) 감격하는 바가 되었을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실행된 사회에 있어서는 그렇게 감격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지상(藝術至上)을 부르짖는 사람이나 인간성을 주창(主唱)하는 예술에 있어서는 영구성이 없는 사상을 제 일의적(一義的)으로 한 사상 문예라는 것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예술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는 몰상식한 사람도 많이 있는 시대이라 나는 얼마큼 인간성과 예술의 영원성을 신봉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자신도 인간성과 예술의 영원성을 얼마큼은 인정한다. 이것은 모순된 심리이나 나는 문예에 있어서 모든 기교나 표현 문제보다도 그 시대의 정신이나 또는 시대고민을 상징한 예술이 아니면 참으로 그 시대인(時代人)의 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소위 예술의 영원성이란 것을 부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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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영원히 남아 있는 예술을 모두 다 생명의 예술이라고 ─ 이것은 한 추상론에 가까우나 불공평한 사회조직이나 혹은 어떠한 패반(覇絆)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천만(千萬) 시대나 백천(百千)의 사회를 막론하고 보통(普通)한 인간의 희구(希求)로 참 인간성의 발로(發露)로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공통한 인간성의 발로는 자유분방한 것을 동경하는 의욕이 될 것이다. 사상이란 여기에서 발족(發足)한다. 그러므로 작중에 나타나는 인생관이나 개성이 분명히 살아있는 이상에는 인생관이나 개성을 만들어낸 시대나 환경을 곁에다 젖혀놓고 그 작품의 가치를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우수한 문예는 어느 곳이든지 사상적으로 사람을 끌 힘이 있고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오인(吾人)에게 단단히 쥐어 주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특수한 지위에 있는 조선에서 나오는 작품은 특별한 희구(喜求)와 동경을 가지고 조선인의 손에서 된 작품은 애란(愛蘭)의 그것이나 파란(波蘭)의 그것 같이 또는 로서아(露西亞)의 그것 같이 우리에게 힘을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나는 문예에 대한 ‘한 아이러니’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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