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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결혼한 춘추 공(春秋公)과 문희(文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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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왕 춘추공으로 말하면 신라 일대의 성군으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놀라운 어른이시고 그의 비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도 또한 김유신 장군의 누이로 아름답고 어질고 한 나라의 어머니 될 재덕을 겸비하신 이다. 이 두 분 사이에 생긴 현대식 결혼 로맨스. 그렇다. 자유연애에서 의엿한 결혼까지의 안타까움과 기쁨을 천 수백년 전 옛날에 그분들이 벌써 겪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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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공에게 아름다운 누이 두 분이 있었는데 맞누이는 보희(寶姬)로 아이적 이름은 아해(阿海)요, 끝에 누이는 문희로 어릴 때엔 아지(阿之)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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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 정초에 보희가 서악에 올라 소피를 보매 그 흰 줄기가 왼 서울에 가득 차는 꿈을 꾸고 하도 신기하여 문희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잠자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문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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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종작없는 동생의 말에 어이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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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옷고름을 풀고 보얀 가슴속 깊이 이 신기한 꿈을 받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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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은 뒤 한 열흘 지났으리라. 정월 대보름날 달이 낮같이 밝을 제 춘추 공과 유신 장군은 유신 공 집앞 마당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 동심 합력으로 계림 팔도를 통일한 이 임금과 신하는 젊으실 때부터 사이좋은 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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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날램이 뛰어난 두 장사의 발끝에 넘노는 공은 바람결보담도 더 가볍게 화살보담도 더 빠르게 중천에 높이 솟은 달이라도 맞힐 듯이 까마득히 떠오르다가 떨어졌다가 은방울같이 번쩍인다. 서로 겨누며 서로 어우러지는 사품에 유신 공은 춘추 공의 옷고름을 그릇 밟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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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공은 춘추 공에게 자기 집에 들어가서 터진 데를 잠깐 뀌어 매자고 청하였다. 사이 좋고 무간한 그분들이라 춘추 공은 서슴지 않고 안으로 따라 들어왔는데 유신 공은 처음엔 아해를 시켰으나 부끄럼 많고 조심성 깊은 그는 오라비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 대신 아직 어리고 쾌활한 아지가 멋모르고 “네.” 하고 나섰다. 윗통을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매 옷 입은 채로 뀌어 매게 되었으리라. 첫봄의 입김이 그윽하게 떠도는 방안에 젊은 공자와 아름다운 아지는 뜻밖에 너무 가깝게 대하게 되었다. 춘추 공의 숨길이 어지러운 것은 조금 전의 극렬한 공치기 때문만이랴. 바늘 든 흰 손가락이 가늘게 떨림도 술렁거리는 촛불 탓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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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불길에 타오르는 두 그림자는 갈피 잡을 수 없는 연기 모양으로 영창에 서렸는데 종용한 달빛만 눈이 부신 듯이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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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애띤 사랑은 나날이 자랐다. 가시덤불을 헤쳐 나오는 듯한 만나기에 졸이는 애, 정작 대하고 보면 서먹서먹하게 뛰놀기만 하는 가슴. 낭떠러지에 맺는 공단의 꿈결, 물 위에 뿌리는 단 꿀의 속살거림. 뒤로 기울어지며 앞으로 사라지는 그림자, 문풍지를 적시는 달착지근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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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의 입맛은 어느 틈에 젖혀지고 말았다. 이따금 구토질도 하고 머리를 매고 눕기도 하였으되 얼굴엔 병인과 달리 더욱 화기가 떠돌고 윤갈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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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가 축이 아니 난 제 얼굴을 우연히 맑은 시냇물에 비추어 본 뒤로는, 그의 얼굴도 보름 지난 달 모양으로 나날이 파리해 갔다. 몸의 병보담도 마음의 병을 앓기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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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경이 운 뒤에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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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는 숙인 고개를 들지도 않고 반가워 하는 기색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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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공도 이편의 두 손으로 움킨 저편의 두 손을 무료하게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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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위로하는 듯이 너글너글하게 웃어둔다. 이윽고 아모런 대꾸가 없으매, 공자는 아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가, 배꽃처럼 핼쓱해진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놀래었다. 자세히 보아 그 얼룽진 눈물 자최에 또 한번 속 깊이 놀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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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사랑을 만난 기쁨에 번쩍이던 얼굴도 갑자기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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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쓱하던 아지의 얼굴은 갑자기 당홍빛같이 붉어졌다. 처녀로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건만 뱃속에 움직이는 새 생명을 기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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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하고 춘추 공도 괴로운 숨을 내쉬었다. 천지를 뒤집을 젊은 영웅도 이 인생의 엄연한 사실 앞에는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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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공도 이 둘 사이의 비밀을 짐작 못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벗과 귀여운 누이의 아름다운 정을 굳이 막으려 들지 않았다. 차라리 두 사람의 앞길을 축수하였는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문희가 벌써 홑몸이 아닌 다음에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니 오라비로 적지 않은 번민이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누이가 자칫하면 일생을 그르칠 것을 생각하매 그의 가슴은 끓어올랐으리라. 더구나 하로바삐 귀정을 내어야 될 춘추 공이 주삣쭈삣하는데 불같이 성을 내고 말았다. 그는 마츰내 무섭고도 엄청난 결심을 하였다. 문희를 태워 죽이든지 춘추 공의 어엿한 안해를 맨들든지 두 가지 중에 한 길을 취하기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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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공은 문희를 불렀다. 언제든지 쾌활하고 빛나던 누이의 얼굴이 볼상없이 파리해지고, 어린애(오라비의 눈엔 누이란 언제든지 어린애다)답지 않게 근심 가득한 눈찌에 터지는 듯한 속엔 한층 더 심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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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왕께 고하지도 않고 태기가 있다니 그런 법이 어데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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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공은 불쌍한 정이 가슴에 뻐근할수록 뇌까리는 소리는 더욱 추상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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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것은 그대로 둘 수가 없다. 태워 없애고 말 것이니 그런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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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의 눈앞엔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꺼졌다. 혼자 속을 썩임도 못 견딜 노릇이어든, 평일에 귀여워해 주던 오라버니의 뜻까지 저버린 것을 생각하매 죽어도 오히려 죄가 남을 듯싶었다. 조그마한 가슴에 이런 죄를 넣어두고 구차히 사느니보담 차라리 한 번 죽음이 얼마나 단출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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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는 도리어 죽으란 말에 기뻐하였다. 왼 세상을 다 주어도 바뀌지 않을 사랑이 한번 순리로 성사가 아닐 때엔 죽음이란 새깃보담도 더 가벼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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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간(角干)이란 놀라운 벼슬까지 지낸 점잖은 집안에 생긴 이 풍파는 눈 한 번 깜짝일 사이에 왼 서울에 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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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가엾어라, 젊을 때 한때의 작난이란 값비싼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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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 건너 두입 건너 이 이야기는 마츰내 신라 일국에 쫙 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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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츰 당시의 임금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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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공의 집마당에는 섶이 산같이 쌓이었다. 이 날의 희생인 아지는 그 위에 높이 올라앉았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사느니보담 차라리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지는 것이 마음 가뜬한 노릇이리라. 문희는 울지도 않았다. 섶을 집어삼키는 불길이 이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태워 주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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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섬 밑에는 불이 붙었다. 기둥 같은 검은 연기가 먼저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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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하시던 선덕여왕이 불시에 떠오르던 심상치 아니한 연기를 보시고 좌우를 둘러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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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제 누이를 태우는 연기인가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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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비 없이 아이를 밴 죄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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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가까이 모시고 있던 춘추 공은 얼굴빛이 그야말로 사상이 되었다. 총명하신 왕은 진작 모든 것을 알아채셨다. 춘추 공을 바라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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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위로구나, 왜 주저주저하고 있느냐? 얼른 가서 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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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공은 말씀을 듣잡고 허둥지둥 말을 달려 뛰어가서 붙는 불을 잡고 하마 불 혓바닥으로 들어갈 뻔하던 문희를 건져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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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로 남의 눈을 기이던 두 사랑의 짝은 의엿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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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공이 태종대왕이 되시자 문희는 문명황후가 되시고 아들 7형제가 모두 잘나고 임금과 각한이 되어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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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배부른 신식 신부를 볼 적마다 필자는 신라의 이 옛 로맨스를 생각하고 맘으로 그들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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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9. 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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