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상경반절기(上京半折記) ◈
카탈로그   본문  
1939
채만식
1
上京半折記[상경반절기]
 
 
2
정거장의 잡담이 우선 가량도 없었다.
 
3
신문에도 종종 나고, 들음들음이 들으면 차가 늘 만원이 되어서 누구든 서울까지 두 시간을 꼬바기 서서 갔었네, 어느 날인가는 오십 명이라더냐 칠십 명이라더냐가 표는 사고서도 차에 다 오르지를 못해서 역엣 사람들과 시비가 났었더라네 하여, 막연히 그저 그런가 보다고는 짐작을 했어도 설마 이대도록이야 대단한 줄은 딱이 몰랐었다.
 
4
백 명이라니, 훨씬 이백 명도 더 되면 더 되었지 못되질 않아 보인다. 하여간 이십 평은 실한 대합실 안이 꽉 들어차고서도 넘쳐서 개찰구의 목책 앞으로, 드나드는 정문 바깥으로 온통 빡빡하다.
 
5
철크덩철크덩, 차표 찍어내는 소리를 까아맣게 멀리 들으면서 맨 꽁무니에 가 섰었는데 순식간에 수십 명이 뒤로 와서 붙는다. 그러고도 연해 헐떡거리면서 달려드느니 차 탈 사람들이다.
 
6
전에야 개성역이 어디 평일이면서 이렇게까지 붐비는 법은 없었다. 송도로 와서 산 지 사오 년이로되 처음이다. 군대의 환송영이 있을 적 말고는, 작년 구월 그 무렵만 해도 이다지 심하진 않았던 성싶다.
 
7
망연히 서서 생각했다.
 
8
‘세상은 정녕코 바빠진 거다! 그도 오직 반 년지간에……’
 
 
9
반 년 만에 세상과 대면이다.
 
10
어제 오후, 일석(一石)의 전보를 받고서 불가불 올라가 주어야 할까 보다고 앉아서 그런 염량을 하다가 문득 비로소 깨우쳤던 것이지만 넌지시 반 년 만의 시방 서울 출입이던 것이다.
 
11
작년 구월이든가, 그때에 한 행보를 한 것이 이내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 눌러 가을을 보내고 삼동을 지나서 해가 바뀌고 다시 이제 봄소식이 들리고 하도록, 세 철에 걸쳐 꼼짝을 않다가 지금 오늘이 삼월이요 열 이틀이나 햇수로는 이 년에 옹근 여섯 달이다.
 
12
‘여섯 달!’
 
13
‘반 년!’
 
14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그러나마 바로 지척지간에서. 십 리만 걸어나오면, 두 시간이면 가고 두 시간이면 오고 하는 것을.
 
15
반드시 무슨 촌구석에만 처박혀 있자고 작정을 댔던 것도 아니요, 한갓 그저 우난 볼일도 없으면서 흥떵거리며 번다히 오르내리잘 며리가 없는 노릇이라 아무려나 그런 대로 들어앉아 있은 것이 어언간 반 년토록을 내내 두문불출로 지나왔던 모양이다.
 
16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언제라서 꼭이 볼일이 있어서만 서울을 다닌바도 아닌 것. 역시 전과 달라 마음이 어느덧 서울이라는 것을 갖다가 은근히 꺼려하고 내켜를 않고 했던 것이요, 그 탓이었을 것이다.
 
17
‘마음이 차차로 서울을 기피하고 그리하여 서울을 마침내 저버리게 되고!’
 
18
그렇기론들 지금 당해서야 하상 그리 지극한 미망일까마는, 무릇 이 조락한 생애로부터 또 한가지 하찮으나마 애착과 동경을 영영 잃는다는 것은 작히 슬픔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19
등 뒤에서 무어라고 볼먹은 소리가 들리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20
돌려다보니 중(中)스름한 영감 하나가 바로 내 뒤에 섰는 젊은 양복 친구의 앞을 비집고 들어오려다가 들키고는 지청구를 먹던 것이다.
 
21
“허! 거 젊은 양반이 온 표독두스럽다!”
 
22
무렴해서라도 암말도 못하고 슬슬 저리로 가버렸을 테지만 영감은 도리어 노염이 나가지고 전접스런 말조로 책을 잡잔다.
 
23
“경을 알아요? 경을?”
 
24
양복친구는 성이 더쳐서, 대고 이렇게 거듭 공박이고.
 
25
“경오고 무엇이고……”
 
26
“연성 그래두 잘했대!”
 
27
“게, 늙은 사람이 또 좀 잘못했기루서니!”
 
28
“늙었으면 남 위해 늙었나! 날 언제 업어줬어요?”
 
29
“게, 댁은 부모두 없소?”
 
30
“우리 부몬 그 따위루 얌체빠진 짓을 하구 다니질 안해요!”
 
31
“허! 흉악한 일이로군!”
 
32
“해두들 너무 한단 말야!”
 
33
제마다 당연한 시비거리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옆에서 보맨, 젊은 친구가 분수 이상으로 매몰스럽게 구는 품이나, 주접을 피웠으면 피웠지, 아닌 트집까지 하려 드는 영감이나 둘이가 다같이 딱한 사람들이다.
 
34
또 그러나 결국은 이것이 모두가, 하나는 인정에 여유가 없고 박절만스런, 하나는 저만 좋자고 남의 사폐 몰라 주는, 일반으로 이 땅 백성들의 심히 그 자랑스럽지 못한 성습인 탓이거니 하면, 사소한 사실(事實)일망정 그의 배후에 있는 실재(實在)의 후광을 받아 훨씬 감정(感情)하는 가치(價値)가 확대가 되지 않질 못한다.
 
35
‘막된 근성!’
 
36
필경 이렇게 속으로 혀를 찼다.
 
37
그러고 나니, 연하여 주의는 제풀에 그런 데로만 끌린다. 새삼스런 노릇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아마도 기분의 소치리라. 부질없이 오늘 하루의 심정이, 마침내는 편안치 못하고 말 것만 같다.
 
38
웬 점잖스레 보이는 중년의 양복신사 하나가 열을 짓고 섰는 면면을 주욱 물색하여 지나가다가 내게서 셋을 건너간 앞엣사람 청년단 단복짜리와 알은체를 한다.
 
39
“서울 가우?”
 
40
“네에! …… 서울 출입하싱야?”
 
41
별반 친숙치는 못한 사인지, 이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하더니 이내
 
42
“경성 왕복 석 장만……”
 
43
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돈을 내맡긴다.
 
44
왜 아니, 벌컥 화가 치밀어오른다.
 
45
비단 이 양복신사 한 사람뿐인 게 아니라 내가 열에 붙어선 그새 십분 남짓한 동안만 해도 오륙 명은 더 되는 성부르다.
 
46
“나, 저어기……”
 
47
돌아서다가 말고 양복신사가 팔을 들어 한편 구석께를 가리키면서 청년단 단복짜리더러 이르던 것이다.
 
48
“……제서 기대리우우?”
 
49
비로소 아까의 그 상아빨주리 신사인 것까지 생각이 났다. 진작 차표를 팔기 전부터 매점 옆 벤치에 가 삼사 인이 모여앉고 혹은 서서 요즘 인삼판매권의 갈등 문제를 가지고 자못 한담이 늘어졌던 어슷비슷한 일행 가운데 한 사람, 몽둥이만한 상아빨주리를 문 것이 유독 눈에 뜨이더니 그가 바로 이 신사다.
 
50
먼저의 그 영감은 딱이 늙어서나 그런다고. 또는 대체가 무지한 사람들은 무지해서나 그런다고.
 
51
그러나 늙지도 않고 어엿하니 교양이며 지체도 있음직한, 그래서 가히 제로랄 이 신사는?
 
52
역시 별수가 없나보다.
 
53
남은 일찌감치 서둘러 이십 분 삼십 분씩 다리 아픈 걸 참아가며 곱다시 열을 뻗치고 서서 지리하게 기둘러. 제네는 그동안 편안히 앉아서 유유하게 한담이나 하고 놀아. 그러다간 넌지시 하나가 돈을 걷어 모아 가지고 출찰구 가까운 곳에 아는 사람을 찾아서 표를 부탁해. 매우 편리하고 수월해서 좋아. 그 대신 뒤엣사람들은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제가끔 그만한 가외의 수고를 부담해야 해.
 
54
저 한 사람만, 그리고 목전에만, 좋고 이(利) 되고 하면 선(善)이요, 이 다음이거나 남이야(아닐말로) 죽어도 고만, 아무래도 상관없어하는 그 막된 성습의 단적인 반영이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55
천 년 이천 년을 두고서, 전반적으로 반도 백성들의 살과 피와 뼛속 깊이까지 배어들어 생활화하고 정신화하고 마침내는 본능에까지 순화된 (진실로 淳化[순화]된!) 소위 종족 근성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56
물이 흐르듯 극히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활 행동 위에 가서 언제든지 그것이 유로가 되어 마지않는 것이다. 비판과 반성의 피안에서 실재(實在)는 안전히 군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항용, 상식적인 교양이나 시정(市井) 신사의 지체쯤으로 능히 그것을 인식하고 극복하고 하지를 못했음이, 한편 생각하면 오히려 지당한 말일 것이다.
 
57
전자에, 소설가로 유명한 이(李) ××씨가 ××개조론이라는 글을 쓴 것이 큰 물의가 생겨 죽일 놈 살릴 놈 아주 대단했더라고.
 
58
그 글을 대할 기회가 여지껏 없었으나 혹여 시방 여기서 내가 느끼고 있는 바와 같은 내용이었다고 하면 이씨는 매우 억울한 시비와 박해를 당한 것이라 할 것이다.
 
59
약점과 단처를 고치고자 하는 도창에 대하여 들고 일어나서 돌을 던진다는 것이 당시의 정세상 일종의 정열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기와 과장벽이 다분히 가미되었었음을 상상키 어렵지 않은데 그 객기와 과장벽이 실상은 중대한 병폐의 하나요, 따라서‘개조해야 할’항목일지니 겸하여 딱한 딜레마가 아니었을 수 없는 것이다.
 
 
60
그러고저러고 어째서 이렇게 부지를 못하게 짜증이 나는지를 알 수가 없다.
 
61
요새로 바싹 불면증이 더 도져 연일 잠을 잘 자지 못했고 더욱이 간밤에는 한눈도 붙여보지 못한 채 누워서 밝힌 터라, 신경이야 많이 까스라와졌겠지만 그렇기로니 무슨 그다지 뼈아플 까닭은 있으며, 어제 오늘 비로소 눈 거슬린 꼴이라고. 신경인들 또한 어제 오늘 비롯한 병이라고.
 
62
분명코 오랫동안 자극없이 한적하던 칩거생활로부터 별안간 이 소란하고도 정갈치 못한 분위기 속엘 들어온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63
아무튼 이대로 더 심해 가다가는 죄없이 일을 저지르고야 말지 싶다. 시방이라도 누구 톱톱한 상대나 있던지 하여 한바탕 실컷 좀 몰아 대주고 구박을 주고 했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으니.
 
64
그러나 그도 실상은 마음뿐이지, 공연한 기염이다. 그러한 경우를 당해 놓으면, 첫마디부터 흥분을 해가지고 침착을 잃는다. 자연 말을 함부로 하고서 되잡혀서는 뒷감당을 못한다. 결과는 망신만 번연하다.
 
65
이번 걸음일랑 차라리 작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만 같지 못할까 보다.
 
66
집에는 아내가 있다. 언제고 화풀이를 잘 받아준다. 아내면은 경우와 조리가 빠져도 위격으로 해넘길 수가 있어서 더욱 좋다.
 
67
마침 트집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68
나는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겠다는데 저는 어제 아침에도 부중엘 들어갔더니 여럿이들 입었더라면서 우겨서 스프링을 입혀 보냈다. 정거장에 와서 본즉 스프링을 입은 사람이라곤 설렁하니 나 하나뿐이다.
 
69
추워서 도로 왔다고, 그리고 무얼 다 아는 체를 하더니 생으로 촌 쟁퉁이 구실을 시키느냐고 얼마든지 잡도리를 하는 것이다.
 
70
또 있다.
 
71
사립문 밖으로 배웅을 나와서는 신칙을 한단 소리가
 
72
“짜증내지 마시우!”
 
73
하더니 요망스럽게 올바로 적중이 되지를 않았느냔 말이다.
 
74
제딴에는 한참 내 신경상태를 두고 가늠하는 속이 있어서 걱정을 하던 것이요, 조심하란 뜻은 뜻이었을 테나(지금이야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그 소리가 매정스러웠던 것만 같다.
 
75
‘어디 보자!’
 
76
재료를 만족히 추어놓고는 이렇게 우선 벼르기만 해도 한결 속이 풀리는 성하다.
 
 
77
겨우겨우 죄다 빠져나가고서 촌 농군으로 생긴 한 사람이 앞에 남더니 다시 또 조그마한 사건이 빚어진다.
 
78
일원짜리 두 장을 들이밀고
 
79
“남대문 한 장이요!”
 
80
하기가 무섭게 홱 도로 튕겨져 나오면서 볼 부은 머퉁이다.
 
81
“잔동 오부소!”
 
82
흔히 대할 수 있는 하급관원의 괘씸한 버르장머리다.
 
83
대체, 원수가 아닌 바에야 어쩌면 그다지도 사람이 남 볼썽사납게 굴더란 말이지.
 
84
양복때기나 걸치고서
 
85
“게이죠오 이찌마이.”
 
86
하는 자리는 가사 십원짜리를 내더라도 잔돈이 없으면 고이 없다고 하지, 어디가 그렇도록이 불손한 법은 없다.
 
87
가슴이 물큰 치밀고 돈을 탁 채어서 내라도 차표를 사주자는 판인데 친구는 잠깐 어리뚱하더니 횡나케 매점께로 뛰어간다.
 
88
‘못난 것!’
 
89
젊은 놈의 혈기겠다, 어째 그
 
90
“잔동 오부소!”
 
91
하고 퇴박을 하거들랑 되짚어 칵 밀쳐주면서
 
92
“우수린 고만둬!”
 
93
이렇게 마주 쏘아붙이지를 못하는고.
 
94
조옴이나 퀄퀄해서 좋으며 그 잔망하게 생긴 철망 안의 여드름쟁이가 코허리에 걸린 안경이 경풍해 떨어질 만큼 가슴이 사뭇 뜨끔 않았으리. 두말 못하고 차표와 우수리를 내주지 않았으리.
 
95
물러나서서 짐짓 하는 양을 보느라니 마코 한 곽을 사서 쥐고 허둥지둥 달려든다.
 
96
노상 유순하게 생긴 인물도 아니다. 눈방울이 부리부리 몽리깨나 있고 힘꼴이나 써보인다. 저희 동네서는 제법 우락부락한다는 축인 게다.
 
97
보나 안 보나 인제 저희끼리 만나서는 두고두고
 
98
“하, 그 식을! 그 식을, 냅다 한바탕 메에꼰자 줄 영으루 하는데 마침 차가 오겠지!”
 
99
이렇게 장담을 하면서 분해할 것이다.
 
100
아니나다를까, 저희 동네까지 갈 것도 없이 이내 그 당장이다.
 
101
“잔돈이유! 남대문 한 장이유!”
 
102
처음번보다도 더 비굴하게 사정하듯이 차표를 얻어가지고 돌아서더니 단박 눈쌀은 꼬옷꼿 입술이 뚜우 나오면서 연신 혼자서 두덜두덜 게두덜거리는 것이다.
 
103
“망할 식 같으니라고! 우라 주리땔 앵길 식 같으니라고! 끅지쌔끼 같으니라고!”
 
104
오죽하면 서울서 뺨맞고 과천 와서 눈 흘긴다는 속담까지 생길 지경이었을까마는 애당초에 뺨을 맞지 않도록 잔돈 마련을 해가지고 있게끔 둔하지나 말든지, 기위 뺨맞은 것을 억울해할 바엔 선 자리에서 그 값을 뽑든지 하는 게 아닐까. 설마, 정거장의 버릇 사나운 계원 하나 혼땜을 좀 시켰기로서니 목이야 달아날까.
 
105
이 한가지만 미루어보아도 소처럼 그저 부려먹기나 할 감이지 아무짝에도 달리는 소용이 닿지 않는 백성들일까 보다.
 
106
세상은 적실코 알아보게 바빠졌다. 세상이 변하여 일이 많아진 때문인 것이다.
 
107
세상의 변화는 그러나 질적(質的)인 변화다. 이 질(質)의 변화가 양(量)의 변화를 일으켜 그 결과로 일이 많아지고 따라서 세상은 그만큼 바빠진 것이다.
 
108
이 땅 백성들도 바빠지기는 바빠졌다. 일이 많아진 덕분에 그들도 한몫을 보는 것이다. 조그마한 개성역이 반년지간에 이만큼이나 잡답해진것이 바로 그 표적이다. 이 농군도 그 축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109
바빠진 결과 자연 수입이 늘 것이다. 는 수입으로 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들은 생활이 넉넉해졌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자못 수준이 높았으리라.
 
110
그러나 그들의 변화는 단지 그뿐이다. 차 타는 사람이 붇고 다니는 범위가 넓어지고 생활수준이 약간 높았고, 이것뿐이다. 양적(量的) 표면적(表面的) 변화일 따름이다.
 
111
질적(質的)으로 변한(向上한) 흔적은 전혀 없다. 여전한 그 근성의 백성들이다.
 
 
112
어떻게 하자는 작정을 못한 채 아무려나 개찰을 기다리는 열 끝에 가서 다시 붙어섰다.
 
113
골치가 지끈지끈 현훈증이 나고 금방 쓰러질 듯 휘휘 몸이 휘둘린다. 인제는 생리마저가 ‘현대적인 것’에 견디어낼 기력이 빠져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전에는 아무리 신경이 피로했더라도 몸을 지탱할 수 없이까지 기운이 부친 적은 없었다.
 
114
이윽고 손에 펀치를 쥔 역수가 한 사람 개찰구 편의 문 앞으로 들어서더니 뜻밖에도 일반을 향하여 모자를 벗고 깍듯이 일읍
 
115
“미나사마, 오마찌도오사마데시다. 구다리게이죠유끼데 아리마쓰.”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읍니다. 경성행 하행열차입니다.)
 
116
이렇게 개찰을 통고하는 것이다.
 
117
제도의 친절함도 친절함이려니와 역수 그 사람의 태도하며 말씨가 어떻게도 공손하고 상냥한지 가슴속이 그만 뿌듯해 오르면서 안두가 뜨거웠다.
 
118
한 이십 남짓했을까말까, 배어린 사람이다. 먼저의 출찰계원에 비하여 어쩌면 저다지도 사람이 얌전한지 가서 등을 뚝뚜욱 두드려 주고 싶게 정답고 사랑스럽다. 고마왔다.
 
119
이 너절한 백성들이건만 저리도 친절하고 공손히 굴다니 참으로 고마와 못하겠다.
 
120
너절한 백성들…… 과연 얼마나 너절한가를 볼 것이다.
 
121
개찰의 통고를 듣자마자 저마다 일제히 와아 하고 열과 개찰구 앞으로 몰려든다. 물밀듯 몰려든다.
 
122
두 줄이었던 열이 네 줄인지 다섯 여섯 줄인지 또 어느 게 정통인지 어느게 서족(庶足)인지 통 분간을 할 수가 없다.
 
123
연방들 중동치기를 한다. 당연한 노릇인 양 미안하다거나 조금 비껴 달란 소리 한마딘들 하는 법 없이 툭툭 치고 밀치고 하면서 남이 짓고 섰는 앞을 비벼 뚫고 들어온다.
 
124
중동치기는 오히려 그러나 선량한 편이다.
 
125
개찰구의 목책 앞으로부터 대합실 안의 일부분에까지 승객의 거진 전부랄 만큼 숱한 한패의 군중이 꽉 들어차 가지고는 그들이 연방 앞장치기를 한다. 그 통에 짜장 열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한다. 펀치질은 바쁘게 하는 것이나 풀려나가느니 객꾼들이다. 처음부터 고즈너기 열을 짓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릴없이 맨 꼴찌 차례를 하게 되는 판이다.
 
126
난잡하다거나 무질서하다는 형용쯤으로는 안될 말이요, 완연 수라장이다.
 
127
혹시 시간이라도 촉박하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차가 오재도 아직 십 분이 남았고 와서는 십오 분을 정거하니 도합 이십오 분이다. 이십오 분이면, 그리고 점잖스런 백성들이면 이백 명은 고사하고 이천 명이라도 풀려나가기에 족한 시간이다.
 
128
죽자쿠나 납뛰며 난장판을 이루잘 까닭이 없는 것이다. 너절하지 않고서 훌륭한 백성들일진댄 이 모양으로 침착하지도 못하고 질서도 안 지켜주고 하는 법이 없다.
 
129
이렇듯이 너절한 백성들인 바엔 문득 생각하자매 그와 같은 젊은 개찰계원의 친절하고 공손한 대접이란 도무지 그들한테는 당치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성싶다.
 
130
가령 시방 혼잡을 정리하기 위하여 계원이 누가 나서서
 
131
“여러분! 차례로 늘어서십시요! 이럭허시면 더 더딥니다! 자아, 저 뒤로 가 섰다가 차례로 들어오십시요! 자아……”
 
132
이렇게 좋은 말로 말만 순순히 타이른댔자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를 못할 것이다.
 
133
반대로(늘 보는 바와 같이) 잔뜩 버티고 지켜서서 성난 얼굴을 해가지고는
 
134
“저리 가! 고랏! 안됏! 저어 뒤루 가!”
 
135
하고 소리를 꿱꿱 눈망울을 부라리면서 일변 떠다밀친다 붙잡아낸다 한다치면 하여커나 정리가 되곤 하기는 하는 것이다.
 
136
도저히 그 젊은 개찰계원의 깍듯이 모자를 벗고 읍을 공손히 하고 나서
 
137
“여러분, 너무 기대리셨읍니다! 지금부터 경성행 차표를
 
138
끊어드리겠읍니다.”
 
139
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태도가(혹시 나 같은 센티멘탈리스트에게 순간의 감격은 주었을는지 몰라도) 전혀 이 박절한 군중한테는 어색하기 다시 없는 풍경일 따름이다.
 
140
역시 돈 거스름을 시킨대서
 
141
“잔동 오부소!”
 
142
하고 시퍼렇게 타박을 주며 차표를 거절하는 박대야말로 차라리 제격이었던 것이다.
 
143
참으로 호통과 박대, 이것만이 그들에게는 약일까 보다. 체질에 맞나보다.
 
144
“체질? 옳아! 체질!”
 
145
과연 체질인 것이다.
 
146
무릇 이땅 백성들이란 천 년 이천 년을 진실로 호통과 박대와 그리고 몽둥이와 이 세 가지 것 밑에서만 살아온 종족이다. 머리 위에 쓴 하늘과 발로 디딘 땅과 비바람과 추위와 흉년과 이러한 자연현상의 하나와도 진배없이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가 따랐었다.
 
147
하늘과 땅과 비바람과 추위와 흉년과의 자연현상에 순응하기 위하여 집을 세우고 옷을 입고 개울을 파고 방축을 쌓고 하듯이, 그들은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의 위협으로부터 저라는 것을 도모하기 위하여 마음과 행동을 거기에 순응하도록 포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48
홍두깨로 치는데 담 안 넘을 놈 없고 사흘 굶고서 ××질 않을 놈 없고 하다는 속담은 속담 이상의 깊은 의의를 머금는다.
 
149
호통을 하고 몽둥이로 치고 짐승인 양 박대를 하는 그 앞에서니 거짓말을 안하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비겁하고 의심 많고 음험해야만 화를 면하는 것이다. 시기하고 아첨해야만 겨우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어느 해가에 남과 명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저 한 사람과 오늘 당장만 편하고무사하면 그만이요 안심인 것이다. 승하는 놈을 꺾고 없애야 저한테 유리하겠으니 달리 강한 놈에게 빌붙어야 하고 그것이 사대사상의 근원인 것이다.
 
150
천 년 이천 년을 그들은 이렇게만 맘씨를 가지며 행동을 하며 살아 내려온 것이다. 오는 동안 그러한 맘씨와 행동은 살과 피와 뼛속 깊이까지 스며들어 가지고 오늘날 보는 바 소위 종족근성을 이루어놓도록 마침내 본능으로 순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151
신라(新羅) 전성시절 그 무렵까지만 했어도 매우 고정하고 명랑하고 정서적이고 관대하고 의리있고 용맹하고 하던 것이 이 지경으로 갖추갖추 박절스런 백성이 되고 만 죄의 열 깐의 일곱 깐은 진실로 그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가 끼친 허물인 것이다.
 
152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세상에도 드물게 불행한 백성일 것이다.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의 위협 밑에서 항상 떨며 살아온 과거가 그러하거니와 이미 그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에 적응한 체질이 생기기까지 했다는 것은 더우기나 불행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153
그리하여 아뭏든지 체질은 체질인 것이다.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에 알맞은 체질.
 
154
그러나 이 불행한 백성들에게 그것이 체질에 맞는다 하여 다시금 호통과 박대 등을 가지고 임한다는 것은 인정도 물론 인정이지만 내력과 형편이 그러할진댄 효과도 또한 참된 효과는 거두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까의 그 촌 농군이 임시 아쉰 대로는 순종을 하는 듯 꿈쩍도 못하고 얼른 잔돈을 바꾸어 오기는 오고서도 속으로는 오히려 불복이요 앙심을 먹던 사실로 미루어보아서 말이다.
 
155
그러니 그렇다고서 순리로 달래고 정답게 굴었자 남의 친절이나 점잖은 대접은 받아들일 신경이 죄다 말라붙고 말았고.
 
156
대체 이 백성들은 그렇다면 무얼 가지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157
‘쯧!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보내란 푼수로, 그야 미나미상이 훠얼씬 다 요량이 있겠지!’
 
158
이런 엉뚱한 생각에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159
보니, 나 혼자다. 널따란 대합실 안에는 다음의 북행차를 기다림인지 몇 사람 오다가다 하나씩 한가로이 벤치에 가 걸터앉았을 뿐 그 야단스럽던 군중은 어느덧 말끔 풀려나가고서 텅하니 비어 있다.
 
160
그리고는 비로소 눈에 뜨이느니 시멘바닥 위에 가서 일면 무수히 얼룩져 있는 침 자욱이다.
 
161
오늘 따라 비위가 왈칵 거슬리면서 속이 뒤집힌다.
 
162
생리학자의 말을 들으면 조선 사람은 짜고 매운 것을 많이 먹어서 남달리 타액이 더 나온다고 한다. 그렇든 저렇든 생리적인 일종의 분비현상일지니 그야 억지로 막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석구석에 타기가 놓여 있지를 않느냔 말이다.
 
163
나오는 타액이 죄가 아니다. 타기가 놓인 곳까지 찾아가기가 힘이 드는 노릇도 아니다. 한 것을 이러한 조그마한 일에조차 주의와 정성을 쓰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164
다른 것과 달라서 추하고 불쾌한 줄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저기 포옴으로 나간 여러 사람들 가운데 아무나 한 사람, 신사며 젊은이는 그만두고라도 영감이건 촌맹이건 여인네건 되는 대로 하나르 데려다가 이 풍습을 보여 주면서 소감이 어떠하냐고 물어볼 것이다. 서슴지않고 그는 더럽다면서 상을 찡그릴지니.
 
165
함부로 아무데나 침과 가래를 뱉는 것도 그런 것까지도 호통과 박대와 몽둥이와가 시킨 허물이라고 감히 우길 담보를 가진 장정은 없을 것이다.
 
 
166
차표를 어떡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손에 쥔 채 그대로, 마악 정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촌사람 하나가 턱까지 숨이 차서 뛰어든다.
 
167
“차 타러 오우?”
 
168
앞을 가로막으면서 묻는데, 저는 저대로
 
169
“차 안직 안 떠났으니까?”
 
170
하고 묻는다.
 
171
“아직 넉넉허우…… 서울 가우?”
 
172
“내애! 아뇨, 참! 저어……”
 
173
넉넉하다는 데도 급해만 하면서. 두루마기 앞섶을 헤치고 쪼끼단추 구멍에다가 비끄러맨 돈주머니를 찾지 못해 쩔쩔 맬라, 개찰구와 출찰구를 연방 번갈아 볼라, 그런 중에도 말대답을 할라, 또 그런 중에도 웬 수상스런 양복쟁이가 나서가지고 수작을 붙이는가 싶어 경계를 할라, 보기에도 민망할 만큼 서두는 것이다.
 
174
“……저어 거시키, 난 저어, 수, 수색 가요! 우리 딸아이가 저어……”
 
175
“그렇거들랑, 이 차표 가지구 가우.”
 
176
“내애? 차표요?”
 
177
코앞에다가 내미는 차표를 받으려고는 않고 얼굴과 번갈아 보기만 한다.
 
178
“서울 가는 차표니, 난 소용없으니깐 노형 준다는 거야!”
 
179
“전 서울 안 가요! 수색꺼정 가요!”
 
180
“서울 차표니깐 수색은 가구두 남아요! …… 그래두 싫여?”
 
181
“글쎄요! ……”
 
182
겨우 차표를 받아가지고 무엇 못 만질 것이나 만지는 듯이 조심해 들여다보다가, 그 포즈 그 표정인 채 묻는 것이다.
 
183
“……이게 서울 차표니까?”
 
184
“그렇단밖으!”
 
185
“갠찮으니까?”
 
186
“괜찮지, 그럼?”
 
187
“내애! …… 못쓰잖으니까?”
 
188
“쓴대는데두!”
 
189
“아니, 저어, 날짜가 지낸 거믄…… 괜히 못쓸 걸 샀다가……”
 
190
“뭣이?”
 
191
버럭 것지르면서 차표를 채뜨려 뺏었다.
 
192
“……누가 판댔어? …… 못쓰는 걸 절 줬을까 바서?”
 
193
몰아대면서 그새 벌써 박박 잡아 찢은 차표 조각을, 뻐언하고 섰는 친구의 앞에다가 홱 내뿌려 버리고는, 포우치로 나섰다.
 
194
“도야지 같은, 어디서!”
 
195
이렇게 씹어뱉는 그 끝에, 제풀에 목안에서
 
196
“카악……”
 
197
할 때까지도 몰랐다가, 뒤미처
 
198
“펫!”
 
199
하면서야 움칫 놀랐다. 침은 그러면서, 보기 좋게 시멘 바닥에 가 또박 떨어지고.
 
200
남의 안목이 아니었으면 펄씬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201
사뭇 몸부림이 날 듯 건사할 수 없는 짜증에, 포우치의 기둥에다가 등을 의지하고 서서, 오래도록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202
얼마만인지, 풀기 없이 역앞 광장을 걸어나오면서 생각했다.
 
203
비단, 함부로 아무데나 침을 뱉는 버릇만이 실상은 아닌 것이다. 역시 내게도 여지껏 지지리 혼자서 비웃고 탓하고 빈척하고 하던 모든 그 향기롭지 못한 습성 또한 아까의 그 영감이나 양복신사나 촌농군이나 들과 다름이 없이 살과 피와 뼛속 깊이까지 하나의 순화된 본능으로서 뿌리박혀 있음이 사실이겠고 겸해서 그것이 부득불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엊그제 비로소 내지나 지나로부터 이주를 한 것이 아니요, 천 년 이천년(적어도 몇백 년을) 토박이로 살아온 이 땅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의 자손일지며 자연 그 피가 내 속에도 흐르고 있을지니 말이다.
 
204
그러나마 내가 진작부터 그와 같은 근성을 자각하고서 적극적으로 그의 극복에 노력을 한 적도 없고, 또 노력을 했은들 거룩한 현인이 아니요 한낱 범부 된 이상, 상당한 위력과 유혹성을 가지는 그 습성을 하루 아침 깨끗이 씻어버리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지니 말이다.
 
205
방금 그 촌사람을 대하던 교만하고도 보풀스런 거조는 무릇 어디로부터 우러나는 행동이던가.
 
206
먼저의 그 영감이랄지 양복신사랄지 촌농군이랄지 또는 개찰구 앞에서 난장판을 이루던 군중이랄지 이들의 일동일정을 깡그리 쓸어넣고서 모두가 그 향기롭지 못한 근성으로만 보아버리던 나의 인식태도가 과연 공명정대한 마음의 반영이었던고, 더우기 그것을 비웃고 탓하고 빈척하고 하던 맘씨가 과연 순수하고 관대한 태도이었던고.
 
207
비뚤어지고 박절하고 독선적이고 했던 것이 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8
그러하되 그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성격상의 결함이더냐 하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성격상의 결함에도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조종은 역시 허심탄회, 사물을 정당하게 관찰하고 인식하고 비판하고 하지를 못하는, 그야말로 유명한 종족적 편성, 이것인 것이다.
 
209
만일 내 과거를 모조리 토키로 촬영 ․ 녹음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지금 스크린 위에다가 영사를 한다고 하면 장면장면 허다한 그 습성과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대목이 없을 것이다. 편벽되고 불순하고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그리고 나만 우선만 좋자고 남이나 뒷일은 상관치 않고 등 가지각색의.
 
210
또 이 앞으로 내가 일 년을 더 산다면 일 년치를, 오 년이나 십 년을 더 산다면 오 년치 십 년치를, 즉 살대로 다 살고서 마지막 임종을 하는 그날까지치를 또한 여실히 촬영 ․ 녹음했다가 다시 그것을 스크린에 영사를 해본다고 하면 역시 거기서도 과거와 다름이 없이 장면마다 그 습성과 행위가 여전히 나타나지 않질 못할 것이다.
 
211
이것이 나의 의지와 탄식을 초월하고 무시하는 피의 운명인 것이다.
 
212
‘혹! ……’
 
213
그렇다. 혹이다. 이마에 가서 커다랗게 돋힌 혹이다.
 
214
보기 숭어운 혹, 남부끄러운 혹이다. 그렇건만 떼어버릴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혹이다.
 
215
기왕 나온 길이라 저자에 들러서 담배와 수면제를 각각 많이씩 사가지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216
용수산 서편 기슭으로 쉬엄쉬엄 고개를 올라 마루턱에 당도하자, 마침 남향한 움패기가 맑은 햇볕이 드리워 하도 좋아 보였다. 바람끝도 아늑하고 잔디도 푹신하고.
 
217
퍼근히 가서 주저앉는 발부리 앞으로 할미꽃이 한 송이 거진 반이나 벌어졌다.
 
218
‘벌써 봄이라고!’
 
219
무심코 손을 뻗혀서 끊어쥐려고 하는데 방긋하니 젖혀지는 자주빛 입술 속에서는 노오란 꽃술이 저도 깨꾸우하면서 내다본다. 얼른 도로 놓아준다.
 
220
절대의 단순이다. 이것이 생명의 가장 아름다움이리라. 그에게는 피의 탄식도 혹의 혐오도 수면제의 필요도 다 없는 것이다. 영원한 평화와 즐거움이 있을 뿐인 것이다. 완전한 무심, 즉 절대의 단순이 주는 행복인 것이다.
 
221
등 뒤의 솔푸덩에서 솨 바람이 인다. 골짜구니를 지나 건너편 산등성이의 칙칙한 솔숲에도 바람이 조용히 흔들린다. 솔숲 너머로는 말갛게 갠 하늘이 크막하니 아치를 숙이고 있고.
 
222
모두가 실하고 건강만 한 느낌이다. 그들 자연은 병드는 법도, 쇠하는 법도, 늙어 바스러지는 법도 없다.
 
223
‘나처럼! 옳아, 나처럼……’
 
224
나처럼 이렇게 병들고 쇠하고 바스러지고 할 줄을 자연은 모른다.
 
225
과연 나에게는 병과 쇠한 건강과 기력 없는 마음이 남았을 따름이다. 생활과 생명이 탄력이 있고 즐겁던 것은 이미 오랜 옛날이다.
 
226
‘그리고서도 부질없이! ……’
 
227
생각하니 참, 부질없기란 다시 없는 노릇이다.
 
228
내가 대체 피를 탄식해서 무얼 하자는 것인고.
 
229
젊고 건강하고, 마음 건전하고 그리고 기개는 팔팔스럽고, 두루 이렇다면야 가다가는 그런 것도 일편의 관심거리가 될는지 모른다. 참으로 나에게 만일 그러한 젊음과 건강한 기력과 그리고 발랄한 기개가 있기만 있다면 모든 기성관념을 죄다 버리고서 새로이 가장 옳고 가장 아름다운 생명을 발견하려, 아무런 주저도 유예도 없이 나는 뛰쳐 일어설 것이다. 피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230
그러나……
 
231
나는 병들었다. 웬만한 분잡에도 이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기력은 쇠했다.
 
232
나이는 사십도 채 못되었으면서 환갑이 지난 만큼이나 생리는 바스러졌다. 마음은 또 생리보다도 더 늙어서 한 칠십 살고 난 노인과 진배없다.
 
233
완전한 노후(老朽)요 폐물이요 패잔이다.
 
234
피를 탄식하다니 퍽도 부질없는 소리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젊은이의 것은 젊은이에게, 다 각각 돌려보낼 것이다.
 
235
햇볕이 따스한 게 어쩌면 한잠 올 것도 같다. 이대로 여기서라도 조금 자기만 했으면 머리도 몸도 다같이 가벼워지련만.
 
236
오늘 여태까지가 안팎으로 모두 다 쇠약한 신경의 과민한 착각이었으면 싶어진다.
 
237
잠이 또 달아나버린다. 아다린은 있어도 물이 없다.
【원문】상경반절기(上京半折記)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28
- 전체 순위 : 169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227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만보 노인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상경반절기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3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상경반절기(上京半折記)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