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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것과 낡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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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1.26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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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과 낡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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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여행 단상(短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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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두 번째의 만주 여행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은 대단하게 말해보고 싶은 의욕에 가득해진 것은 웬 까닭일까. 지식은 요설을 막기 때문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는 슬퍼할 일이 아니리라. 지금부터 나는 더욱더욱 만주를 익히고 친해져 이로써 점점 침묵하리라. 쉴새없이 떠벌리는 것보다 단지 인식하는 것만이 커다란 즐거움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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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는 하나 인식한다는 것이, 반드시는, 놀라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때그때 변하는 대륙의 풍경에 눈을 크게 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정직히 말해, 이 일년 동안의 발전의 대단함에서 나는 놀라움을 맛보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빠른 변화는 거의 그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건설하는 힘의 강인함을 통절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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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커다란 발걸음을 알기 위해 나는 저 광야 구석구석을 걸을 필요는 없다. 몇 개의 도시, 가령 신경(장춘, 만주제국의 수도 ─ 역주)이나 하얼빈이나 봉천을 보면 족하다. 거기서의 내 관찰이 틀리리라 믿지 않는다. 참으로 신경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발전하는 만주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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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터를 다져 포장하고, 거기에 어느새 근대 건축이 들어선다. 굉장한 행정 건물이 솟고 회사, 상회 회관이 나란히 솟고 그라운드만큼 넓은 거리에는 수목이 아름답게 로터리를 장식하고 가로를 달린 끝에는 형편없이 큰 스튜디오가 뽑아졌다. 이 새로운 거리를 걷는 사람은 모두 발랄하며 여기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은 당당하고도 훌륭한 체재를 갖추었으며 연감에 수록된 작품은 다채롭고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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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면 느닷없이 거기에 떠올랐다 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 위대한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오로지 새로움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새로움. 건물의 벽은 아직도 번쩍번쩍하며 가로는 매끈매끈하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창조의 자랑스러움과 훈기에 타오르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멋진 모양과 규모의 도시에 이제부터 전통을 피워 올리고자 하고 있다. 젊은 힘에 커다란 사업이 맡겨져 있다. 모든 것이 젊다. 새롭기 때문에 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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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다는 것은 애처로운 것이긴 하나, 크게 말해 괜찮은 것이다. 젊음이야 말로 참으로 대담할 수 있고, 또 사물을 창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치졸함이나 조잡함 따위는 벌써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면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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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가 이 젊음에 경탄한 것과는 다른 한편 낡은 것을 찾아다니는 것은 저절로 별개의 문제다 .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오히려 신경의 옛 거리를 좋아한다. 인력거나 마차를 타고 낡은 대마로(大馬路)를 달리는 것이 만주에 왔다는 느낌이 들어 즐겁다. 저 이르는 데마다 단청으로 채색된 그늘진 거리, 끊임없이 이상하게 울리는 음향, 하루 내내 어수선하게 되돌아오는 저 독창적 분위기 쪽이 훨씬 마음에 든다. 대동대가(大同大家)의 인상은 서울에도 동경(東京)에도 또는 어느 도시에도 쉽사리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있는 이런 종류의 모방을 발견함이란 미를 찾는 사람에겐 무의미하기 짝없는 것이다. 대마로는 물론이고, 대동가에 영향됨이 없이 특색을 지키고 그 독자적인 쪽으로 늘려 가야 할 터이다. 모든 만주의 창조는 단지 외계의 것의 이식에 끝내지 말고 그 옛것을 살리는 선상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의 양식에 따라 만든 굉장한 정부청사의 지붕에 동양의 기와와 선(線)을 사용한 것(정부청사의 천수각(天守閣) 같은 일본식 지붕을 가리킴인 듯 ─ 역주)은 탁월한 수법이다. 단지 민망한 것은 지붕만이 아니라 전체의 의장에 어째서 한층 대담하게 만주의 향기를 고려하지 못했는가, 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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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선로를 걷다가 나는 체성모(지명 ─ 역주)에 있는 역 근처에서 아름다운 건물을 발견했다. 그 전면적인 적색과 청색의 배합은 어디에도 없는 멋진 것이었다. 그러한 고풍스런 미야말로 대륙이 돌보고 키워내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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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이등차 속에서 그날 제일 기품 있는 사람이란 아마도 차를 팔기 위해 걷고 있는 늙은 만주인 보이이리라. 중처럼 깎은 머리, 길쯤한 얼굴의 그가 잘난 척하지도 않고 극히 자연스럽게 가벼운 미소를 띠우고 은근하고도 조용히 차내를 걸으면 느긋한 손님들의 무릎은 아취가 있게 마련이다. 몇 번이고 차내를 왕래했지만 그 침착한 자세와 미소를 깨뜨리거나 흐트리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뒤면 그윽한 차 향기와 같이 그 기품이 고상하게 떠도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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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에는 잘난 사람, 세상을 호령하는 인사들도 많겠지만 결국은 이 늙은 보이만큼 품격을 드러낸 인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학문이나 교양으로써 키우는 품격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갖춘 품격이리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본래 몸에 밴 미는 그 자체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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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홀에서 친구가 소개해준 스마트한 양복을 입은 청년은 “엔이라 부릅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라고 은근히 인사를 했다. 썩 분명한 일본말이었다 무심코 조선말로 . 답례하여 두서너 마디 하는 사이에 나는 내 말을 알아들을 이치가 없는 중국 청년임에 생각이 미치자 낭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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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거리를 걸으면서 댄스하기라든가 홀의 장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정신차려 경청했지만 나는 이 청년보다는 앞에서 말한 늙은 보이 쪽에서 만주의 좋은 것, 낡은 것의 좋은 것을 길어 올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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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이라 할 때 기억 속에 선명히 인상지워진 것은 역시 보다 많이 오래된 것 같은, 지저분할만치나 그늘진 길거리나 공원의 둥근 다리나 오래된 연못 등이다. 하얼빈의 돌을 깐 포도라든가 단단한 벤치나 사원의 둥근 지붕이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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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일색으로 무엇이든 부셔 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왕의 것은 그것을 사랑하고 입김을 불어넣어 생생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단한 의지로 망치게 하지 않고 이어가기, 오히려 이런 방향에서야말로 새로운 것을 조화해야 할 터이다. 마차의 저 풍경은 언제든지 근사한 것이며 처녀들의 독자적인 의상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함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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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친지 두 사람이 뒤따라 하얼빈에 왔다. 한 사람은 음악을, 또한 사람은 무용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 다 동경(東京)으로 가느냐를 두고 새삼 기회를 엿보고 있던 판국. 결국 하얼빈을 택한 것이다. 전통의 오래됨이 두 사람을 이끌었으리라. 성악을 수업해서 미국에 가고자 하는 젊은이도 발레로 입신하고자 하는 젊은이도 함께 전통의 순수함에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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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하얼빈은 어느 곳보다 풍요로움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음악은 분명 이 거리의 커다란 윤택함의 하나다. 어디서든지 풍성하게 흐른다. 식당에서도 홀에서도 클럽에서도 레코드의 복제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밴드에서 신선한 음악이 생생히 흘러 나온다. 요트 클럽의 갑판 정자에는 오후 여섯 시면 정해 놓고 교향악의 연주가 있지만 무슨 대단한 사치가 아니다.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수런수런하게 떠들며 음악에는 주의를 돌리지 않는데도 차이코프스키의 애상적인 선율이 유감없이 이어진다. 이것이 유럽적인 것인가. 또는 어느 곳의 것인가. 그런 따위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땅에 깊이 뿌리내려 살아 있는 것은 지키고 키우는 것, 이는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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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레프스키가 만주에서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의 바이올린도 만주인의 켜는 호궁(胡弓)의 기법 앞에서는 면목없다고 말한 모양인데, 이를 단지 익살 이상의 것으로 푸는 것도 지장이 없으리라. 하얼빈의 음악을 사랑함은 물론이지만 ‘만주’는 이런 호궁조차 더욱 소중히 해야 할 터이다. 이것은 진짜로 ‘만주’를 키우는 근거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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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新[신]しさと古[고]さ」 만주일일신문 1940년 11월 26일~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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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옮김
【원문】새로운 것과 낡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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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1940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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