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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열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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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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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열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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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한 번 다녀가라는 말도 아니 듣고 나는 사릉에 박혀 있었다. 비를 기다려서 모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 핑계였으나 사실은 움쭉하기가 싫은 것이었다. 사릉이라고 특별히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없다. 있다면 자라나는 제비 새끼를 바라보는 것, 강아지와 병아리를 보는 것, 새 소리를 듣는 것쯤이었다. 논, 밭은 원체 땅이 좋지 못한 데다가 가물어서 빼빼 말라가는 곡식을 보기가 마음에 괴로왔고 이웃끼리 물싸움으로 으릉거리는 것, 남의 논에 대어 놓은 물을 훔치는 것, 물을 훔쳤대서 욕설을 퍼부으며 논두렁을 끊는것, 농촌의 유모어라기에는 너무 악착스러웠다. 「소서가 내일 모렌데」하는 것이 농민의 눈에 피를 세우고 염체를 불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 보지락만 왔으면」하고 모여만 앉으면 말하였으나 그 한 보지락이 좀체로 와 주지 아니하였다. 십여 일을 두고 거의 날마다 큰비가 올 듯이 판을 차려놓고는 부슬부슬 몇 방울 떨구다가는 걷어치우는 것이었다. 「하늘에 비가 없어서 못 줄 리도 없으련마는」사람들은 이런 소리도 하였다. 소서가 낼 모렌데 모는 반 밖에 안 났다. 보리는 흉년이요, 밭곡은 타고 모두 속상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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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두고 나는 서울을 가기로 하였다. 원체 약한 몸에다가 맹장을 뗀지가 한 달 밖에 안되는 망내딸 정화가 중학에 입학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다. 그도 오학년에서 검정 시험을 보고 들어가자는 것이다. 괜한 욕심이요 억지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로 정하였으니 하릴없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도리 밖에 없다. 내가 강하게 반대하면 이번 입학을 중지할 수도 있겠지마는 당자의 재주에 자신도 있거니와 한 해를 얻는다는 것이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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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에 발을 들여놓은 날은 훈훈한 바람이 불어서 동대문 밖이 온통 먼지였다. 길가 배추밭에 배추포기들이 검은 먼지를 뒤집어쓴 양이 내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 푹푹 패인 길로 자동차들이 덜컥덜컥하고 수없는 고개를 넘듯이, 달려서 먼지의 연막을 일으켰다. 여자들은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외면하고 걸었다. 넝마에 우 넝마가 다 된 전차가 터지도록 사람을 싣고 비틀거리며 달렸다. 동대문 같은 데는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W자형으로 열을 짓고 서고 그 새로는 책과 담배와 사탕을 파는 아이들이 외우고 다녔다. 모두 전에 없던 새 풍경이다. 나는 전차를 탈 생각을 버리고 걸어서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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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을 뗀 딸은 생각던 것보다는 건강한 것 같아서 대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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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제해도 울지마라. 육학년 다니면 고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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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그에게 예방하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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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녀 둘이서 먹을 점심을 싸 들고 날마다 딸을 데리고 시험장에를 갔다. 아비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을 다닌 일도 별로 없을뿐더러 최근 이삼년 간에는 매양 나는 집을 떠나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할 때가 드물었다. 마치 엄마의 새끼들이요 내게는 관계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비와 온 종일 날마다 같이 있는 것을 어린 딸은 이상하게도 알고 또 만족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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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오는 속에 우산을 쓰고 학교 마당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시험장에 들어간 자식을 염려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혹시 나와 아는 사람도 역시 나와 같은 일로 와서 서로 만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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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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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망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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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이런 문답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 친구라면 대게 망내가 중학에 갈 나이였다. 내나 그나 다 같이 지금 시험장에 들어가 앉았을 제 딸에 대하여 애정과 자랑을 느끼는 것이었다. 내 자식의 좋은 점을 적은 목록만을 어버이는 지니고 다니면서 세상 다른 계집애보다는 비길 수 없이 잘난 딸로 생각하고, 따라서 다른 집 딸들은 어찌 되든지 내 딸만은 꼭 입학이 되어야 하고 또 반드시 입학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딸은 아마 첫째나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첫째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성적의 자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제 딸에 대하여서 자신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조이는 불안이 있다. 천명에 가까운 이 딸들은 대개는 한 가지씩 자신을 가진 딸들이다. 게다가 이 학교에 대하여서 무슨 끄나불 ── 비록 거미줄만한 끄나불이라도 가진 아이들이다. 혹은 직원과 무슨 관계가 있다거나, 혹은 유력자의 소개나 청이 있다든가, 부형 자신이 명사라거나 혹은 돈으로 우겨댈 만한 재산이 있다거나, 또는 이 학교 출신의 딸이라거나, 이 모양으로 대개는 시험 성적 이외에도 무엇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는 아이들일 것이다. 제 성적에 자신을 가진 아이들은 이 학교가 공정한 채점을 하기를 비는 반면에, 성적보다도 다른 힘을 믿는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은 학교가 고집불통이 아니요, 좀 변통성이 있기를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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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자식 낙제하는 법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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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근년에 자주 들리는 말이 된 것은 불행한 일이어니와 따는 꼽아보면 그런 것도 같았다. 부자의 저능아 하나를 넣기 때문에 가난한 우량아 하나가 울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많으리라고 나는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더러 있더라도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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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날인가 한다. 내 옆에 어떤 중학생 하나가 비를 맞고 앉아 있었다. 그의 깃에 단 표를 보면 사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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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가 시험을 치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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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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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가 시험을 치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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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학생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가 고학생으로서 남의 집에 가정교사를 하고 밥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계집아이가 꼭 합격이 되어야만 할 사정인 것을 느졌다. 만일 그 애가 낙제를 해도 그 애 집에서 이 가여운 중학생을 두어 줄까. 성적 발표가 있던 날 나는 또 그 학생을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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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붙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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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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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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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는 싱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돈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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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는 비를 맞고 우두커니 앉았노라니 어떤 실업계통 학교의 모표를 붙인 소년 하나가 내 옆에 와 쭈그리고 않는다. 나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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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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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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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누이 동생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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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았으면 고만일 텐데 이 소년은 내가 묻지도 않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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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시험을 치르죠, 아무러문 들어가겠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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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빈정대는 낯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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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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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이 소년의 말과 태도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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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유력한 청이 있거나 돈을 많이 내어야 들어가죠. 제 동생같이 시굴서 혼자 올라와 가지고 어떻게 들어가요? 오만원만 내면 누구나 들어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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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년은 제가 다 아는 일처럼 단정적으로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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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생각해서 쓰나? 간혹 그런 부정한 일을 하는 학교도 있겠지만 다 그럴 리야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 못쓰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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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그 소년을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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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소년은 내 말을 믿으려 아니하고 더욱더욱 제 생각이 옳은 것을 입증하려고 제가 아는 전례를 두셋 들고 나서, 총괄적 결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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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에 공도로 되는 것이 하나나 있어요? 모두 협잡이지요, 야미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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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나는 이 소년에게 이러한 선입견을 넣어 준 어른들과 우리들과 우리의 사회 상태를 원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만일 소년들이 많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 민족이 어떻게 될까. 어찌하면 이 소년의 마음에서 이런 무서운 편견을 빼어내일 수가 있을까. 실로 무시무시한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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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이 발표되던 날 나는 한 시각이라도 일찍 결과가 알고 싶어서 발표한다고 예고한 시간보다 서너 시간이나 전에 학교에를 갔더니 나보다도 먼저 온 부모와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일찍 오기로니 발표되기 전에 알 리는 없건마는 발표하는 담벼락 가까이 와 있어도 좀 더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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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늘에는 풍운이 대단하였다.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바람에 불려서 남산에서 인왕산 쪽으로 달리고 가끔 구름 조각이 항렬에서 떨어진 자 모양으로 우리 머리위에서 헤매었다. 성랑 위에 선 나무들이 솩솩 소리를 내이며 몸을 굽혔다 폈다 하였다. 비가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홱홱 뿌려지기도 하였다. 우산을 펴 들면 내 몸까지 달고 달아나려 하였다. 까치들이 방향을 잡을 힘을 잃고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면서 바람결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문득 나무잎 하나가 펄럭펄럭 바람에 불려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눈에 뜨였다. 그것은 유난히 내 눈을 끌었다. 나뭇잎으로서는 너무 보드랍고 또 심히 미약하나마 그 동작에는 저항하는 약간의 힘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동안 바람에 떠놀던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싶은 힘은 마침내 그것을 큰 나무 무성한 잎사귀들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성공하였다. 그것은 흰 나비 한 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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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학부형들과 아이들이 불었다. 지난 나흘 동안에 낯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나도 그가 누군지 모르고 그도 내가 누군지 모르지마는 서로 낯은 익어서 눈익혀 보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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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중에는 자가용차를 타고 온가 싶은 이도 있고 출근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린가 싶은 피곤한 얼굴도 있었다. 학교는 나왔으나 아직 시집도 안가고 취직도 아니한 듯한 여자며 맨머리에 가방을 든 대학생도 있었다. 가정교사인 그 중학생, 세상 이면을 모두 악으로 해석하는 그 소년도 왔다. 이 학교 재학생들도 번뜻번뜻 보였다. 제복을 입고 운동화를 끌고 그들은 마치 천상 선녀인 것같이 보였다. 발표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에 얼마나 이 땀 배고 꾸깃꾸깃한 제복이 부러울까.
 
44
시간이 가까우니 마당이 뿌듯하게 사람들이 모였다. 일분 앞을 내다볼 힘이 없는 그들은 명부가 나와 붙기까지는 제가, 또는 제 딸이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일분 후에 흐를 낙제의 슬픈 눈물을 품은 채 열 세 살, 열 네 살 된 계집애들은 강동강동 뛰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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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사람들은 「발표다」하고 밀렸다. 누가 헛소문을 내는 것도 아니요 피차의 기다리는 마음이 착각, 환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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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이야 무론 붙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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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런 쓸데 없는 소리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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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육백 여명은 울고 돌아갈 운명이니 기막힌 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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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들도 하였다. 저마다 제 딸은 이 육백 명 속에는 들지 아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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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여섯시도 지났다. 사람들은 연해 팔뚝 시계를 보았다. 금방 보고서는 또 보는 것이었다. 시계가 가는 동안에 합격자 명부에 적혔던 제 딸의 이름이 스러지지나 아니할까 하고 조바심하는 것 같았다. 어서 나와 붙어야 비로소 굳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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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장의 연필이 아이들 이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다. 한 명만 더, 한명만 더 하고 끌어올리자니 정원이 넘고 이 이름을 엘까 저 이름을 엘가 하니 가여웠다. 그러나 마침내 교장의 연필은 몇 아이의 이름자 위로 검은 줄을 그으며 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 아이들은 지금 그 어버이와 함께 조바심을 하면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상한 운명의 재결을 기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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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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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사람이 와이샤쓰 바람으로 커단 두루마리를 들고 나왔다. 인제는 발표다. 뻘건 벽돌 담벼락에 그 두루마리가 붙으며 풀린다. 一[일], 二[이], 三[삼]번은 없다. 四[사], 五[오]가 있고 八[팔]이 있고, 이 모양으로 번호가 나붙는다. 없는 번호가 넷에 셋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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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용하다. 아무 소리도 없다. 이 동안에 바람이 불었는지, 구름이 날았는지, 또는 빗방울이 떨어졌는지 나는 기억이 없다. 아마 이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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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루마리가 풀려서 돌라붙는대로 웃음과 울음이 번을 갈아서 벌어지는 것이다. 혹시나 잘못 본 것이나 아닌가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보고 몇 걸음 사람을 헤치고 다가들어가서 또 다시 본다.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없다가 있을 수도 없고 있다가 없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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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로 쓰인 一[일], 二[이], 三[삼], 四[사], 五[오], 六[육], 七[칠], 八[팔], 九[구], 一○[십]이 모두 생명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 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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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一[이공일], 三○一[삼공일], 다 지나 내 딸의 번호인 五[오]자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五五九[오오구], 五六九[오육구], 내 딸의 번호는 五七九[오칠구]다. 五八○[오팔공]이 먼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곧 외면하여버렸다. 찾다가 五七九[오칠구]가 없는 것보다는 숫제 안 보는 것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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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붙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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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는 재학생이 내게 보고해 주고 정화라는 내 딸을 껴안아 주었다. 정회의 오빠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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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었다.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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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와 내 어린 딸이 선 땅에서 사오인의 기뻐하는 패를 이루었다. 그제야 눈을 들어보니 과연 五七九[오칠구]가 五七八[오칠팔]과 五八○[오팔공] 사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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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기쁨은 옆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중단되었다. 어깨 달린 세루 스커어트를 입은 계집애가 제 오빠인상싶은 남자의 붙드는 손을 뿌리치고 몸부림하고 울며 무엇에 부딪쳤는지 코피를 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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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도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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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달래는 소리도 그 어린 뉘 집 딸의 몸부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 두루마리에 그 애 번호 하나를 넣어 주기 전에는 그 애의 가슴 아픈 슬픔을 하리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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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도 무정도 하다. 어쩌면 요 애 하나를 더 안 넣어 주었을까. 하나쯤 더 넣기로 큰일 나리? 그러나 「요애 하나만」이 육백 여명이니 어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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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모인 것은 웃던 애들뿐이었다. 이백 여든 몇 아이와 그들의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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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서 슬퍼하는 자를 돌아볼 새는 없이 세상은 예정대로 진행하였다. 그들은 목청껏 애국가를 부르고 저마다 나는 인제는 이 학교 학생이라고 우쭐하였다. 부모들은 내 딸이야 떨어질 리가 있나, 하고 제 딸은 떨어진 계집애들과는 씨가 다른 것같이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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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 여명 떨어진 아이들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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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교장은 울음이 북받쳐서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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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었다는데 왜 우리 아들딸들이 마음대로 입학을 못하오? 전에는 일본의 죄어니와 지금은 뉘 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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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외치는 소리가 교장의 목메인 성의를 증명하였다. 나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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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시험에서 이러한 광경이 벌어지는 동안에 덕수궁에는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리고 좌우익의 정치가들은 바쁘게 머리와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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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입학 수속을 끝낸 나는 서울에는 더 흥미는 없고 일도 없었다.
 
74
전차를 타자는 것은 망계여서 나는 자앗골서 성동역까지를 내리 걸었다. 만일 택시를 탔다면 육백원을 달랄것이요 투정을 해야 오백원에 갔을 것이다. 길가에는 부인네와 아이들이 소위 양담배, 양사탕 가게를 수없이 벌여놓고 있었다. 상점 유리창에는 「日本製鉛筆 一打百圓[일본제연필일타백원]」이니, 「中國製[중국제]성냥 十個七十圓[십개칠십원]」이니 하는 절지가 붙어 있었다. 담배도, 사탕도, 아이 연필도, 땅성냥도 외국서 들여다가 먹는 우리 신세는 한숨지을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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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역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은 돈 넣은 주머니를 손으로 꼭 누르고 있었다. 돈 여기 있소, 하는 것이다. 누구는 사만원을 잃고 누구는 무엇을 잃었다고 약은 듯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잃을 것이 없으니 안심이었다.
 
76
사릉에 돌아오니 개울에는 물이 소리를 내고 흐르고 벼들이 까무스름하게 자랐다. 박군은 모를 다 내어 놓았고 소도 인제는 한가하였다. 강아지는 가무스름한 털이 야드르르하게 나서 몸빛이 변하였다. 제비 새끼는 벌써 나와서 날아돌아다니고는 잘 때에만 들어와 잤다. 토마토가 열리고 오이는 늙었다. 옥수수가 피었다. 논에 물들이 닿아서 개구리와 맹꽁이 소리가 무척 늘었다. 문재의 꿩은 여전히 꿩꿩 울고 백로도 여전히 집 앞으로 지났다.
 
77
서울이 무엇으로 시골보다 나은고 하는 것은 예전부터 가진 생각이지마는 나도 이번 우연히 내가 무엇으로 새짐승보다 나은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나, 강아지나, 제비와 비겨서는 나는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식과 색의 본능으로 말하면 그들과 나와 다른 것이 없고, 부처 될 성품도 그들이나 내나 마찬가지다.
【원문】서울 열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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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