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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죽화(石竹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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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4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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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죽화(石竹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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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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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 사년 동안에 흰 석죽화(石竹花)가 네 번이나 큰 임무를 맡아 있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러나 내가 네 번이나 본 그 사실이 다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전후를 종합해 보면 사실로도 그런 비극이 있을 듯도 하나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공상에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떠한 경우에서 네 번이나 석죽화를 본 것을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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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내가 기차를 타려고 베를린(伯林) 어느 정거장 플랫폼에 섰을 적이었다. 그 때는 이번 전쟁이 시작된 지 이삼 주일밖에 아니 되었다. 모든 군인을 가득히 실은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고 동(動)하기를 시작하였다. 아즉도 늙은 부모 어린 아이 사랑하는 안해를 이별하고 만리 전역(戰域)에 나가는 사람을 보내는 여자들이 남아 있다. 낙담하고 있는 이, 단념하고 있는 이,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는 이, 훌쩍훌쩍 울고 있는 이, 다 같은 설움으로 그 형상은 형형색색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슬픔에 아모 관계도 없는 사람까지라도 심장이 찢어질 듯하다. 왜? 각 개인이라도 혹은 고독한 자라도 인류라는 크고 큰 묶음에 묶여 있는 것과 또는 인류의 슬픔은 자기의 슬픔과 같이 혹독한 것이 명확히 노출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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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도 더욱 내 눈에 뜨인 것은 점점 희미해 보이는 기차를 바라보고 흰 석죽화 꽃뭉치를 들고 흔들고 있는 소녀이다. 그 꽃은 곱고도 탐스럽고도 눈빛같이 희다. 스위스(瑞西) 엔가딘의 옛집 아름다운 창 앞에서 많이 피어 있는 것을 본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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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가 왼손에다 약혼한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 그 소녀는 약혼한 남자를 전장에 보내는 것 같다. 그는 울지도 아니하고 다만 보이지도 아니하는 기차 간 자리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장부의 간장을 녹일만한 고운 자태를 가져 있다―나는 그 용태를 유한(幽閑)한 미색이라고 하고 싶다. 금발은 비단같이 해쓱한 얼골에 조그마한 타원형으로 가볍게 싸고 있다. 아즉도 신산(辛酸)한 세고(世苦)에 물들지 아니한 순결한 점이 있다. 이번 전쟁이 그이에게 얼마나 두려웠으며 또 얼마나 무서웠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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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만 그 소녀를 잊어버렸더니 그 후 일년 만에 꼭 같은 석죽화가 또 다시 그를 생각나게 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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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때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게 되었다. 내가 타고 있는 차실에 사관 하나가 타고 있다. 그이도 차 탄 지가 그처럼 오래는 되지 아니한 것 같다. 아즉도 치우지 못한 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발뺌을 하는 것 같이 나를 보고 빙긋 웃고 짐을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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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위문원(慰問員)이야요. 내가 또 전쟁에 나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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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의 우수(右手)에 결혼반지가 번쩍거린다. 아마 오랫동안 사랑하고 잊지 못하던 사람과 결혼하려고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가 또다시 전쟁에 나가는 것 같다. 푸른 종이로 싼 소포 한 개를 꺼낸다. 그 위에 한 뭉치 아름다운 흰 석죽화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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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보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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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마 저 사관이 그 소녀와 이번에 결혼한 것 같다. 저 석죽화가 필연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혹은 저 양인(兩人)이 맨 처음에 엔가딘이라고 하는 곳에서 이 꽃이 값 많은 담요와 같이 만발한 창 밑에서 만난 것이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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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슴을 울렁거리며 보고 있는데 그 사관은 석죽화에다 키스(接吻)를 하고 손수건에다 곱게 싼 뒤에 그 보(褓)를 그르니 그 속에 책 한 권과 편지 한 장이 들어 있다. 그 사관은 나를 꺼리는 듯이 치어다보며 편지를 가슴속에 감추었다. 나는 알았다! 저 사관이 저 혼자 있을 적에 그 편지를 혼자 읽으려고 한 것이다. 사랑하는 안해가 최후로 적어 준 단말(甘言)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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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아니 되어 나는 하차하였다. 그 이튿날 벌써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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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년의 광음은 날아갔다. 내가 붉은 해와 흰 눈이 아름다운 아리사 낙원을 소요하게 되었다. 수용된 독일 군인과 독일서 보낸 환자와 병신들이 이곳에 모이어 일종 처량한 광경을 나타내었다. 하롯날 밖에 내가 그 근처로 산보할 적에 매화점(賣花店)에서 흰 엔가딘 석죽화를 한 병 꽂아 둔 것을 보았다. 별안간 내 머리 속에서는 두 번이나 이 꽃을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정경에서 본 것이 생각난다. 그래서 곧 들어가서 그 꽃을 사려고 하였다. 그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관과 소녀에게 대한 존경에서 나온 마음이다. 그러나 누가 두 사람 사이에 관계가 깊다고 말을 하였나? 다만 나의 공상이 무엇을 자아내는 듯! 나는 나의 다감질(多感質)을 스스로 웃고 산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내가 호텔 방에 들어오니 그 꽃이 생각이 난다. 만일 그 꽃이 이 방에 있으면 지금까지 없던 따뜻한 정취와 상쾌한 기운을 돋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점심을 마치자 곧 그 꽃을 사려고 나왔다. 그 꽃은 벌써 다 팔리고 없었다……. 한 젊은 독일 부인이 다 사 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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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내가 호텔 정원 양지 짝에 앉아 있으려니까 바로 내 옆 벽 안방에서 가만가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 일일이 하는 말이 들린다. 부드럽고 약한 남자의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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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지?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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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가 산란한 까닭인가 가는(細)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기운 하나 없어 잘 들리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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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 곁에 있은 뒤로 겨우 본심이 돌아왔어요. 지금까지는 정말 어쩔 줄 몰랐지요. 인제 우리에게는 아마 전쟁이 다 끝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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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그렇지. 그러나 그만치 안된 일이 또 있지! 이 큰 불행 중에 행복스럽다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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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그만큼 하셨으면 장하지 않습니까? 비싼 값으로 우리 둘이 또 만나게 된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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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듯 사랑의 속살거림을 듣기 싫었다. 급히 지나가면서 얼른 보니 한 젊은 부인이 담요 덮은 교자에 누워 있는 남자의 머리를 제 가슴에다 누르고 있다. 그들의 얼골은 조금도 볼 수가 없었다. 부인은 몸을 굽혀 남자의 머리에 키스를 하고 있다. 남자의 무릎 위에 한 뭉치 흰 석죽화가 놓인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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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들으니 그이들은 독일인의 부처(夫妻)인데 그 부인은 남편 되는 수용사관(收容士官)을 간호하려고 오늘 아츰에 도착하였다 한다. 그 사관은 폐에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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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날 밤에 취리히로 오라는 급한 전보를 받아서 곧 아니 떠날 수 없었다. 그 후에 이 두 사람을 또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젊은 부인이 그 때 정든 사람에게 흰 석죽화를 흔들며 못내 이별을 아껴(惜[석])하던 소녀인가? 그 환자가 석죽화를 가슴에 감추었던 사관인가? 다만 그 부인이 흰 엔가딘 석죽화를 그 남편의 무릎 위에 놓은 것은 확실하다. 나는 나의 근친이나 되는 것처럼 몹시 애석한 마음이 든다―그리고 호텔 주인이 저 독일 사관은 나을 가망이 없다고 하는 말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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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취리히에 유련(留連)하게 되었다. 가을이 돌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개인 하늘이 가을 기운을 띤 시월이 돌아왔다. 하로 저녁에는 호수에 일엽편주를 띄우고 오락가락 소창(消暢)하였다. 창파에 잠겼다 떴다 하는 꽃을 보았다. 한 뭉치 큰 꽃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을! 그 꽃은 끔찍이 아름다운 엔가딘 석죽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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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사와 같이 석양에 비치는 푸른 물결 위에 가무러져 간다. 고별하는 것 같이 묵묵히 나는 가오 하는 것 같이―처량한 생각이 가슴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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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젊은 부인이 빠져 죽은 것 같다. 혹시 그 사관이 마츰내 살지를 못하고 죽어 버리니 그 부인도 더 살기를 원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하면 거기 사랑이 있다! 애인을 잃고는 혼자 살지 못할 사랑이 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쓰고(辛)도 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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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 모든 일이 연상에서 나온 상상이 과연 바로 맞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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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후에 신문을 보니 호숫가에 이름도 모르는 젊은 부인의 시체가 밀렸는데 두어 송이 눈빛 같은 석죽화를 한 손에 불끈 쥐고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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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부터 내가 이 꽃을 볼 때마다 어떤 운명이 ― 그것은 나의 상상이 지어낸 것인지는 모르나 ― 생각 아니 날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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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1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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