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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어머니가 두드리다시피 해서 깨우는 바람에 겨우 일어나 앉아 쥐어뜯듯이 눈을 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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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깨(조금) 더 잡시다…… 아즉 초저녁일 틴디 멀 그러넌그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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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두덜거린다. 마당에 편 밀짚방석에서 저녁 숟갈을 놓던 길로 쓰러져 이내 잔 가늠은 않고 워낙 잠이 고단하니까 떼를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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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초저녁이 다 무엇이냐! 저 달 좀 보아라. 밤이 벌써 이식히였구만…… 어서 정신 채려갖구 논에 좀 나가 보아라. 늬 아부지 지대리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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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기! 울 어매(우리 어머니)는 꼭 울 아빠(우리 아버지) 생각만 허구 있당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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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두덜거리면서 싸리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간다. 어머니는 그 뒤꼭지에 대고 욕을 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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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망헐 놈의 자식! 그럼 너는 스무 살이나 처먹은 놈의 자식이 늙은 애비만 밤새두룩 논코에 가 앉었으라구 허구 너는 초저녁부터 잠만 쳐잤으면 좋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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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그러나 들은 체도 아니하고 가뜩이나 두터운 입술만 뛰하니 내민 채 싸리문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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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동그랗게 머리 위로 솟았고 촉촉한 밤이 제법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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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내린 논의 벼잎에서는 이슬방울이 반짝인다. 집집에서 모깃불을 질러 매캐한 보릿겨 냄새가 코로 스민다. 모기떼 소리가 귀 옆에서 멀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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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싸리문 밖에 서서 곰방대에 담배를 붙이다가 저편으로 점례가 절굿대를 들고 찰래찰래 오는 것을 보았다. 아까 저녁때 빌려간 절굿대를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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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못보고 담배를 붙이는 체하고 있다가 점례가 옆에까지 바싹 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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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자스라이 놀라 소리를 치며 물러서다가 이내 암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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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망헐 년의 자식 남 깜짝 놀래라구! 썩을 년의 자식! 육시헐 년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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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의 가시내를 가리쟁이를 짝 찢어놀라. 네 이년의 가시내! 누구더러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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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덕쇠는 그 육중하게 생긴 코를 벌씸거리면서 점례를 붙들려고 와락 덤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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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례는 들었던 절굿대만 쾅 내던지고 미꾸라지같이 살짝 빠져 싸리문께로 달아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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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날 잡아라는 듯이 싸리문 기둥을 안고 서서 해족해족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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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쫓아가 붙잡아서 혼을 내주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또 논에 더디 간다고 야단을 할까 봐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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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덕쇠의 등 뒤에다 대고 골을 올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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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보아 이년의 가시내야…… 내일 내가 붙잡어서 그놈의 욕 잘하는 주둥이를 안 찢어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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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아나 옜다…… 나 같으면 시방 쫓아와서 붙잡겄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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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덕쇠는 홱 돌아서서 점례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바라보다가 그는 더 자세히 보려고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점례의 앞으로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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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달빛에 희게 떠오르는 얼굴을 되들고 왼눈을 갠소롬히 감으면서 덕쇠의 얼굴을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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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한참만에 고개를 혼자 갸웃거리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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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가 논에서 돌아오느라니까 정생원이라고 동리의 일 서두리꾼이 웃말로 가는 갈림길에서 술이 얼큰히 취해가지고는 비틀거리며 삐어져나왔다. 게다가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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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쁜 때 저렇게 차리고 어디를 가서 또 저렇게 취했나 싶어 덕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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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 응……사주(四柱) 사주 갖다 주구 술 대접받었다…… 하하 우리 덕쇠두 혼인을 정하면 내가 사주를 갖다 주지,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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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 장개가 아니라 시집이다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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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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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까지 점례라면 한 동리에서 사는 계집아이요 말괄량이요 서로 욕질을 하는 그래서 서로 미워하는 그런 계집아이라고밖에는 더 생각한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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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갑자기 뜨끔하며 이어 웬일인지 마음이 섭섭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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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없이 걸어가다가 덕쇠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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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이라고 나이 서른 살도 더 넘은 털보요 아주 술망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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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정생원은 덕쇠의 그런 속도 모르고 신랑 될 사람을 추어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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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좀 칭이 지지만, 아 글씨 야, 그 사람은 그새 머슴을 살어서 돈을 이백 원이나 뫼았(모았)단다. 그래서 백 원은 점례집으로 납채루 보내구 백 원 갖구 장가간단다. 너두 어서어서 돈을 뫼아갖구 장개 안갈내?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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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어젯밤에 달빛에 희게 떠오르던 점례의 얼굴을 다시 생각하면서 고개를 수그리고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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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덕쇠가 전에 없이 저녁밥을 입맛 없게 먹고 앉았노라니까 점례가 또 절굿대를 빌리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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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모르는 체하고 슬그머니 일어서서 싸리문 밖에 나와 점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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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안에서 덕쇠어머니와 종알거리다가 덕쇠가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나오듯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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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년의 가시내 너 어젯저녁에 무어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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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쇠는 길을 가로막으면서 그러나 소리를 죽여서 이렇게 엄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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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도 짐짓 뾰롱해서, 그러나 왼눈을 갠소롬히 뜨고 덕쇠를 유심히 바라본다. 둘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덕쇠가 불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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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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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가시내야, 그런 털보 녀석한티루 시집을 가? 내한티루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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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덕쇠의 말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점례는 아직도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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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치맛고름만 만지고 있다가 한참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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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두 어떻게? …… 돈이랑 받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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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볼메인 소리로 두런거리나 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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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도루 내주지…… 사주두 도루 찾어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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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덕쇠가 말없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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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꼭 오깨……그 대신 장가가지 말구 기댈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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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 장가 안 가구 꼭 기댈리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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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는 서로 치어다보고 즐겁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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