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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言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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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9
채만식
1
言 約[언약]
 
 
2
덕쇠는 어머니가 두드리다시피 해서 깨우는 바람에 겨우 일어나 앉아 쥐어뜯듯이 눈을 비빈다.
 
3
“조깨(조금) 더 잡시다…… 아즉 초저녁일 틴디 멀 그러넌그라우!”
 
4
그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두덜거린다. 마당에 편 밀짚방석에서 저녁 숟갈을 놓던 길로 쓰러져 이내 잔 가늠은 않고 워낙 잠이 고단하니까 떼를 쓰는 것이다.
 
5
“야, 야 초저녁이 다 무엇이냐! 저 달 좀 보아라. 밤이 벌써 이식히였구만…… 어서 정신 채려갖구 논에 좀 나가 보아라. 늬 아부지 지대리겄다.”
 
6
어머니는 그래도 타이르듯이 재촉을 한다.
 
7
덕쇠는 할 수 없이 괴춤을 추고 일어나
 
8
“체기! 울 어매(우리 어머니)는 꼭 울 아빠(우리 아버지) 생각만 허구 있당개!”
 
9
하고 두덜거리면서 싸리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간다. 어머니는 그 뒤꼭지에 대고 욕을 퍼붓는다.
 
10
“저런 망헐 놈의 자식! 그럼 너는 스무 살이나 처먹은 놈의 자식이 늙은 애비만 밤새두룩 논코에 가 앉었으라구 허구 너는 초저녁부터 잠만 쳐잤으면 좋겄냐!”
 
11
덕쇠는 그러나 들은 체도 아니하고 가뜩이나 두터운 입술만 뛰하니 내민 채 싸리문 밖으로 나섰다.
 
12
달이 동그랗게 머리 위로 솟았고 촉촉한 밤이 제법 서늘했다.
 
13
이슬 내린 논의 벼잎에서는 이슬방울이 반짝인다. 집집에서 모깃불을 질러 매캐한 보릿겨 냄새가 코로 스민다. 모기떼 소리가 귀 옆에서 멀리 들린다.
 
14
덕쇠는 싸리문 밖에 서서 곰방대에 담배를 붙이다가 저편으로 점례가 절굿대를 들고 찰래찰래 오는 것을 보았다. 아까 저녁때 빌려간 절굿대를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15
덕쇠는 못보고 담배를 붙이는 체하고 있다가 점례가 옆에까지 바싹 왔을 때
 
16
“누구냐?”
 
17
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18
“아이머니 깜짝이야!”
 
19
점례는 자스라이 놀라 소리를 치며 물러서다가 이내 암상이 나서
 
20
“저런 망헐 년의 자식 남 깜짝 놀래라구! 썩을 년의 자식! 육시헐 년의 자식!”
 
21
하고 소답스럽게 욕을 한다.
 
22
“이년의 가시내를 가리쟁이를 짝 찢어놀라. 네 이년의 가시내! 누구더러 그런……”
 
23
하고 덕쇠는 그 육중하게 생긴 코를 벌씸거리면서 점례를 붙들려고 와락 덤볐다.
 
24
그러나 점례는 들었던 절굿대만 쾅 내던지고 미꾸라지같이 살짝 빠져 싸리문께로 달아나면서
 
25
“아나 옜다.”
 
26
하고 놀려댄다.
 
27
그러고는 날 잡아라는 듯이 싸리문 기둥을 안고 서서 해족해족 웃는다.
 
28
덕쇠는 쫓아가 붙잡아서 혼을 내주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또 논에 더디 간다고 야단을 할까 봐서 그래
 
29
“네 이년의 가시내 내일 보자.”
 
30
하고 돌아섰다.
 
31
“네까짓 것 한나 안 무섭단다.”
 
32
점례는 덕쇠의 등 뒤에다 대고 골을 올려준다.
 
33
“인제 보아 이년의 가시내야…… 내일 내가 붙잡어서 그놈의 욕 잘하는 주둥이를 안 찢어놓나……”
 
34
“피, 아나 옜다…… 나 같으면 시방 쫓아와서 붙잡겄구만.”
 
35
이 말에 덕쇠는 홱 돌아서서 점례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바라보다가 그는 더 자세히 보려고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점례의 앞으로 다가선다.
 
36
점례는 달빛에 희게 떠오르는 얼굴을 되들고 왼눈을 갠소롬히 감으면서 덕쇠의 얼굴을 마주본다.
 
37
덕쇠는 한참만에 고개를 혼자 갸웃거리고 돌아섰다.
 
 
38
이튿날 저녁때.
 
39
덕쇠가 논에서 돌아오느라니까 정생원이라고 동리의 일 서두리꾼이 웃말로 가는 갈림길에서 술이 얼큰히 취해가지고는 비틀거리며 삐어져나왔다. 게다가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40
이 바쁜 때 저렇게 차리고 어디를 가서 또 저렇게 취했나 싶어 덕쇠는
 
41
“어디 갔다 오시우?”
 
42
하고 인사삼아 물어보았다.
 
43
“어? 덕쇠 응 덕쇠.”
 
44
정생원은 말도 걸음처럼 비틀거린다.
 
45
“어디 갔다가 이렇게 취허시었어라우?”
 
46
“응? 나? 응……사주(四柱) 사주 갖다 주구 술 대접받었다…… 하하 우리 덕쇠두 혼인을 정하면 내가 사주를 갖다 주지, 하하하하하.”
 
47
“누가 또 장개를 가간디라우?”
 
48
“장가? 장개가 아니라 시집이다 시집.”
 
49
“누구라우?”
 
50
“점례가……”
 
51
점례가? 벌써 시집을 가라우?”
 
52
“벌써라니? 나이 열여섯 살인데……”
 
53
덕쇠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54
그는 지금까지 점례라면 한 동리에서 사는 계집아이요 말괄량이요 서로 욕질을 하는 그래서 서로 미워하는 그런 계집아이라고밖에는 더 생각한 일이 없었다.
 
55
그랬는데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갑자기 뜨끔하며 이어 웬일인지 마음이 섭섭해지는 것이다.
 
56
“어데루 간대라우?”
 
57
잠시 말없이 걸어가다가 덕쇠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58
“웃말 오남이라구 있지?”
 
59
정생원은 대답 대신 도리어 묻는다.
 
60
“얘.”
 
61
“그 사람이여 바루 그 사람……”
 
62
“그 사람이 어떻게”
 
63
덕쇠는 심정이 상했다.
 
64
오남이라고 나이 서른 살도 더 넘은 털보요 아주 술망나니다.
 
65
“어떻게라니?”
 
66
하고 정생원은 덕쇠의 그런 속도 모르고 신랑 될 사람을 추어넘긴다.
 
67
“나이는 좀 칭이 지지만, 아 글씨 야, 그 사람은 그새 머슴을 살어서 돈을 이백 원이나 뫼았(모았)단다. 그래서 백 원은 점례집으로 납채루 보내구 백 원 갖구 장가간단다. 너두 어서어서 돈을 뫼아갖구 장개 안갈내? 하하하하.”
 
68
덕쇠는 어젯밤에 달빛에 희게 떠오르던 점례의 얼굴을 다시 생각하면서 고개를 수그리고 길을 걸었다.
 
69
그날 덕쇠가 전에 없이 저녁밥을 입맛 없게 먹고 앉았노라니까 점례가 또 절굿대를 빌리러 왔다.
 
70
덕쇠는 모르는 체하고 슬그머니 일어서서 싸리문 밖에 나와 점례를 기다렸다.
 
71
점례는 안에서 덕쇠어머니와 종알거리다가 덕쇠가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나오듯이 나왔다.
 
72
“네 이년의 가시내 너 어젯저녁에 무어랬냐?”
 
73
덕쇠는 길을 가로막으면서 그러나 소리를 죽여서 이렇게 엄포를 했다.
 
74
“내가 허기는 무어래?”
 
75
점례도 짐짓 뾰롱해서, 그러나 왼눈을 갠소롬히 뜨고 덕쇠를 유심히 바라본다. 둘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덕쇠가 불쑥
 
76
“너 시집간담서?”
 
77
하고 지천을 하듯 묻는다.
 
78
점례는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대답이 없다.
 
79
또 잠시 말이 없다가
 
80
“왜 이 가시내야, 그런 털보 녀석한티루 시집을 가? 내한티루 오지……”
 
81
하는 덕쇠의 말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점례는 아직도 말이 없다.
 
82
덕쇠는 점례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83
“너 시집가지 마러라.”
 
84
점례는 치맛고름만 만지고 있다가 한참만에
 
85
“그레두 어떻게? …… 돈이랑 받었다는데.”
 
86
하고 볼메인 소리로 두런거리나 힘은 없다.
 
87
“돈 도루 내주지…… 사주두 도루 찾어오구……”
 
88
“돈 벌써 절반이나 쓴걸!”
 
89
이번에는 덕쇠가 말없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90
“너 그럼 시집갈래?”
 
91
하고 묻는다.
 
92
“나 갔다 도루 오께.”
 
93
점례는 고개를 갸웃이 쳐들고 웃는다.
 
94
“참말?”
 
95
“응.”
 
96
“꼭?”
 
97
“응, 꼭……”
 
98
“그러면 일 년만 갔다가 오너라 응.”
 
99
“응, 꼭 오깨……그 대신 장가가지 말구 기댈려야지?”
 
100
“응, 나 장가 안 가구 꼭 기댈리께.”
 
101
둘이는 서로 치어다보고 즐겁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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