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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조기(成造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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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
이광수
정세권이 자신의 한옥을 건설해 준 것을 고마워하며 쓴 글
1
成造記[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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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紀一九三四年七月[서기일구삼사년칠월], 榮兒[영아]는 紅疫[홍역]을 치르고 나고, 廷蘭[정란]도 봄철에 紅疫[홍역]을 치르고 난 뒤로 잘 추서지 아니할 뿐더러 이웃집에 百日咳[백일해]를 앓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元山[원산] 海水浴場[해수욕장]에나 가서 한여름을 나리라 하고, 밤차로 떠날 양으로 짐을 끌어 내려 할 때에 어멈이 말썽을 부려서 元山行[원산행]을 中止[중지]하고, 그 이튿날 이왕 묶어 놓은 짐이요, 가까운 少林寺[소림사]로나 가자고 하여 彰義門外[창의문외]에 少林寺[소림사]로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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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緣[연]이 되어서 少林寺[소림사]에서 七月[칠월]·八月[팔월] 두 달을 留[유]하였다. 나는 英文學[영문학]과 라틴語[어]를 공부하는 餘暇[여가]에 이웃으로 돌아 다니다가 삼지동에 터 하나를 發見[발견]하였다. 감나무 박힌 一白五十四坪[일백오십사평]의 조그마한 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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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조각 땅이 내 눈에 든 까닭은, 땅이 비록 正南向[정남향]이 못되고 東東南[동동남]으로 傾斜[경사]하였으나, 앞에 洗劍亭[세검정] 개천의 흐름이 보일 뿐더러 물소리가 들리고, 北[북]으로는 北漢[북한]의 釋迦峯[석가봉]·文殊峯[문수봉]·觀音峯[관음봉]·普現峯[보현봉]·地藏峯[지장봉]이 보이고, 正面[정면]으로 白岳[백악]이 案山[안산]이 되고, 南[남]으로 仁王[인왕]의 背面[배면]이 靈鷲[영취]가 날개를 벌린 모양으로 雄壯[웅장]하고도 神秘[신비]한 모양으로 앉았고, 또 彰義門外[창의문외]에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水石[수석]이라고 할 백사슬의 瀑布[폭포]가 나를 向[향]하고 날아 드는 景[경]이 있음이었다. 그뿐더러 이 터에 서서 앞을 굽어 보면 彰義門[창의문]에서 오는 溪谷[계곡]이 가장 그 아름다운 全貌[전모]를 보이고, 彰義門[창의문]에서 오는 溪流[계류]와 내 집터가 있는 三池洞[삼지동]에서 가는 溪流[계류]가 洗劍亭[세검정]을 씻어 흐르는 本流[본류]에서 合[합]하는 세 개 어우름의 一點[일점]이 바로 내 집의 마당같이 되어서 이 同天[동천]의 모든 山[산]의 흐름과 물의 흐름이 이 一點[일점]에 會合[회합]하여 統一[통일]의 美[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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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萬天[박만천]이라는 請負者[청부자]에게 속아 不少[불소]한 돈을 떼우고 집터에서 바위가 나와서 基礎工事[기초공사]에 料外[요외]의 經費[경비]가 들었지마는, 朴萬天[박만천]에 對[대]하여서는 내가 前生[전생]에 무슨 빚으로 있는 것으로 치고 바위를 깨뜨리던 中[중]에는 샘 둘을 얻었다. 하나는 바로 大廳[대청] 뒤요, 또 하나는 舍廊[사랑] 모퉁이여서, 물이 비록 흔치는 못하나 맛이 달고 빛이 맑으며, 많이 먹어도 창하하지 아니하고 곧 吸收[흡수]됨을 發見[발견]하였으며, 또 우리 食口[식구]가 먹기에 넉넉함을 볼 때에 이 샘을 주신 땅에 感謝[감사]함을 드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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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工[기공]한 지 거의 百日[백일]에 우리는 담과 마당과 浴室[욕실]도 아직 끝나지 아니한 채로 새집으로 옮아 왔다. 塗褙[도배]는 끝이 났으나 琉璃[유리]와 遮陽[차양]은 이사 온 後[후]에야 되었고, 電燈[전등]도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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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을 지을 새 나는 날마다 아침이면 와서 해가 진 뒤에야 내려 갔다. 아직 감 열매가 푸르고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甚[심]한 더위에 數百名[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勞役[노역]함을 볼 때에 甚[심]히 罪悚[죄송]하고 感謝[감사]하였다. 그들은 비록 意識的[의식적]으로 나를 爲[위]하여서가 아니요 돈을 爲[위]하여서 勞役[노역]함이라 하지마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들의 無意識的[무의식적]인 이 勞役[노역]이 其實[기실]은 意識的[의식적]으로 함과 똑 같은 意味[의미]로 나를 爲[위]함인 것을 나는 믿는다. 그들의 勞役[노역]에 對[대]하여 나는 빚을 진 것을 自覺[자각]함이 正當[정당]한 줄을 나는 믿는다. 내가 그들에게서 勞役[노역]의 供養[공양]을 받을 만한 무슨 功德[공덕]이 있지 아니하다면 나는 後日[후일]에 이 恩惠[은혜]를 갚을 만한 功德[공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아니 될 줄을 나는 믿는다. 사람이 意識的[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몇 가지나 되는가. 우리는 善業[선업]이나 惡業[악업]을 意識[의식] 못하고 짓는 일이 많으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意識[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 因[인]을 짓고 報[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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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특]히 내가 이 집을 짓는 데 感謝[감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분이 한 분 계시니, 그는 獎產社[장산사]로 鄭世權氏[정세권씨]시다. 도무지 世上[세상]을 모르는 내가 請負業者[청부업자]에게 속는다, 歲月[세월]은 가도 집은 아니 된다 하는 것을 내 아내에게서 들으시고 그는 自進[자진]하여 내 집 役事[역사]를 맡으셨다. 그는 建陽社主[건양사주]로 多年[다년] 家屋建築[가옥건축]에 經驗[경험]을 가진 專門家[전문가]요, 또 手下[수하]에 老鍊[노련]한 匠色[장색]을 많이 둔 이라, 그에게 役事[역사]를 一任[일임]한 뒤에는 나는 모든 시름을 놓고 每日[매일] 役事[역사]를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設計[설계]의 一部[일부]와 物役所需[물역소수]도 그 選擇[선택]을 專[전]혀 그에게 一任[일임]하였다. 내 집이 이만큼 된 데는 鄭世權氏[정세권씨]의 功勞[공로]가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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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氏[씨]의 所有[소유]인 嘉會洞[가회동] 家屋[가옥]을 傳貰[전세]로 빌려서 三[삼], 四個月[사개월] 살았지마는, 氏[씨]가 어떠한 이인 줄을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土木[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衣服[의복]도 다 朝鮮產[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싹 깎고 좀 검고 뚱뚱한 嶺南[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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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朝鮮[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極[극]히 깊어서 朝鮮物產[조선물산] 獎勵[장려]를 몸소 實行[실행]할 뿐더러 獎產社[장산사]라는 朝鮮物產[조선물산]을 販賣[판매]하는 商店[상점]을 탑골公園[공원] 뒤에 두고 朝鮮產[조선산]의 衣服次[의복차]를 獎勵[장려]하고, 《實生活[실생활]》이라는 雜誌[잡지]를 發行[발행]하여 朝鮮物產[조선물산] 獎勵[장려]를 宣傳[선전]하는 이인 줄을 알았다. 또 그는 普通[보통] 집 장사로 請負業[청부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朝鮮式[조선식] 家屋[가옥]의 改良[개량]을 爲[위]하여 恒常[항상] 硏究[연구]하여 利益[이익]보다도 이 點[점]에 더 힘을 쓰는 稀罕[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雙窓[쌍창]은 用字[용자]보다 完字[완자]가 좋다는 것이나, 덧문은 在來[재래]의 배밀이 紙窓[지창]보다 用字[용자] 琉璃窓[유리창]이 合理[합리]라는 것이나, 머름보다도 合[합]중방이 實[실]으로나 淸潔[청결]로나 合理[합리]라는 것이나, 其他[기타] 設計[설계]·便所[변소]·마루·土役材料等[토역재료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鄭氏[정씨]의 改良[개량]한 點[점]이 實[실]로 적지 아니하다. 미닫이 밑에 굳은 木材[목재]를 붙이는 것도 아마 氏[씨]의 創意[창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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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通[보통] 집 장수의 집이 겉치레만 하고 눈에 안띄는 곳을 날리는 것은 公然[공연]한 秘密[비밀]이지마는, 내가 몸소 들어 본 經驗[경험]으로 보건댄, 鄭氏[정씨]가 지은 집은 材木[재목]·蓋瓦[개와]는 勿論[물론]이어니와, 塗褙[도배]·장판까지도 꼭 제 집과 같이 세 벌 네 벌로 하고, 土役[토역]·石築[석축]도 完全[완전]을 期[기]하여 表裏[표리]가 다 진실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의 참되고 誠實[성실]한 人格[인격]의 反映[반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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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리는 木手[목수]·泥匠[이장]·塗褙匠[도배장]·琉璃匠[유리장]·遮陽匠[차양장]을 다 經驗[경험]하였거니와, 대개 다 眞實[진실]한 사람들이어서 役事[역사] 監督[감독]에 잔소리 할 것이 없는 것을 볼 때에 나는 더욱 鄭氏[정씨]의 人格[인격]을 尊敬[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朴萬天[박만천] 같은 이름 높을 挾雜輩[협잡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가 이 집 役事[역사]에 써 본 다른 사람들에게 비겨 볼 때에 鄭氏[정씨]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다 딴 種類[종류] 사람인 것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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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氏[정씨]에게 오는 匠色[장색]들의 風紀[풍기]도 많이 改良[개량]이 되어서, 일하는 동안 술 먹으러 다니는 것이라든지, 주인더러 술값을 달라, 賞給[상급]을 달라 하는 것이라든지, 비록 日工[일공]으로 할 境遇[경우]에라도 都合[도합] 때보다 懈怠[해태]한다든지 하는 弊風[폐풍]이 거의 없었다. 다 믿음성이 있었다. 朝鮮民族[조선민족]의 모든 部門[부문]에 있어서다 이만큼만 改良[개량]되면 民族的能率[민족적능률]이 무섭게 增進[증진] 되리라고 여러 번 나는 느꼈다. 한 사람의 人格[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이것도 내 집 成造[성조]에서 얻은 큰 所得中[소득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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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내 집을 짓기에 功[공]이 많은 이는 金書房[김서방]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本來[본래] 朴萬天[박만천]의 앞으로 온 사람이지마는, 朴[박]이 달아난 뒤에 이내 내 집 일을 보았다. 힘이 내 집터 일에 모이는 사람들 중에 第一[제일]이요, 눈설미도 第一[제일]이었다. 그가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도 어느 일군의 三倍[삼배]나 하고,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이나 집어 던지는 데는 力學[역학]을 잘 이용할 만한 머리가 있었다. 힘이 많으면 마음이 純[순]하기가 쉬운 法[법]이언마는, 그는 힘이 세인 것과 같이 재주도 많았다. 그는 광과 뒷간을 제 손으로 짓고 土役[토역]도 웬만한 泥匠[이장]이에 지지 않고, 石築[석축]도 잘 쌓고, 무엇을 궁리해 내기를 좋아하였다. 술과 담배는 먹지마는 참되어 미더운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全羅北道[전라북도] 任實[임실] 사람으로, 그의 先親[선친]은 自動車[자동차] 線路[선로]를 가지고 四十三間[사십삼간]이나 되는 집을 쓰고 살았다 하며, 近年[근년]에 致敗[치패]하여 自己[자기]도 農場[농장]도 하여 보고 電氣會社[전기회사]의 人夫[인부]도 되어 보았다고 하며, 昨年[작년]에 重病[중병]을 앓고 난 뒤로 근력이 半[반]이나 줄었노라고 한다. 今年[금년]에 二十三歲[이십삼세]다. 그는 내 집 役事[역사]가 끝나기까지 木手[목수]·泥匠[이장]·石手[석수]·人夫監督等[인부감독등], 거의 萬能[만능] 일군으로 휘뚜루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다 처음 보고 하는 일이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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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저를 爲[위]해서 婚處[혼처]를 求[구]하였는데 원채 집을 하나 얻어야 婚姻[혼인]을 하겠다고 하셔요. 그런데 一白二十圓[일백이십원]이면 三間[삼간] 傳貰[전세]집을 하나 얻을 수가 있대요. 늙으신 어머니 계실 집 걱정이나 아니하게 되면 저는 恨[한]이 없겠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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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말을 하였다. 그는 十八歲[십팔세]부터 五年間[오년간]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하였건마는 純實[순실]한 天性[천성]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의 마음에는 柔然[유연]한 魂[혼]이 있었다. 그의 母親[모친]은 寡婦[과부]된 뒤에 다른 寡婦[과부]들과 協力[협력]하여 절 하나를 짓고 佛敎[불교]를 믿는다고 한다. 그 母親[모친]의 宗敎的精神[종교적정신]은 얼른 보기에 頑强[완강]한 듯, 그에게 柔軟[유연]한 慈悲心[자비심]의 씨를 심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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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鄭世權氏[정세권씨]는 이 사람을 알아 보리라 하고 金書房[김서방]을 紹介[소개]하였다. 사람은 類[류]로서 相從[상종]하는 것이라, 善人[선인]은 善人[선인]끼리, 惡人[악인]은 惡人[악인]끼리 모이는 法[법]이다. 그 追逐[추축]하는 類[류]를 보아서 그의 善惡[선악]을 分辨[분변]할 수 있다고 함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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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우리 집 役事[역사]에 일을 많이 한 사람 中[중]에 鄭書房[정서방]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門[문]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집터 開土[개토]를 할 때부터 내 집 일을 하였다. 그는 보기 弱[약]하게 생겼다. 마르고 뼈도 가늘고, 나이는 四十[사십]을 많이 넘지 아니한 모양이지마는, 一生[일생]에 무거운 짐을 지기에 어깨가 굽고 눈알이 쑥 나왔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 지지 아니하게 힘드는 일을 잘하였고, 또 주추방아 다질 때에는 소리를 먹였다. 그렇게 청도 좋지 못하고 또 덕담도 넉넉지는 못하나 모인 사람들 中[중]에는 고작이었다. 혹 안 오는 날은 앞 개천에서 빨래 방망이질을 하는 것을 보니, 어느 큰집 행랑살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보통학교 四年[사년]까지 다닌 아들을 일자리를 못 얻어 주어서 걱정이었다. 그의 열 네 살 먹은 딸은 뉘집 아이 보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月給[월급]은 없고 먹고 얻어 입기만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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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나 먹고 입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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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는 滿足[만족]한 듯이 내민 눈알을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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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書房[정서방]은 붉은 무늬 있는 보자기 조각에 싼 양재기 「벤또」 그릇을 둔 채로 웬 일인지 다시는 오지 아니하였다. 아마 主人[주인]집 김장 무씻기에 바쁜 것이나 아닌가. 그렇지 아니하면 날이 차니까 그 쿨룩거리던 기침이 더한 것인가. 아침이 되면 그의 모양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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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우리 집 役事[역사]에 일하던 사람 중에 特色[특색] 있는 이는 石手[석수] 朴先達[박선달], 木手[목수] 金先生[김선생], 毛軍[모군] 덕선이·정국이·노 서방, 또 통칠장이 노 서방 ── 이러한 이들이었다. 石手[석수] 朴先達[박선달]은 영감님이라고도 하고 朴[박]영감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今年[금년]에 還甲[환갑]을 지낸 이다. 키가 크고, 누구나 젊은 사람을 보면 言必稱[언필칭] 이놈이요, 막걸리를 좋아하고, 떠들기와 욕지거리를 좋아하고, 뽐내고, 그러나 뒤가 무르고, 늙었지마는 아직도 기운이 장사여서 항상 젊은이들의 無氣力[무기력]한 것을 痛駡[통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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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젊었을 적에는」 하는 것은 어떤 老人[노인]이든지 다 하는 말이지마는, 朴[박]영감은 정말 힘이 壯士[장사]여서, 只今[지금] 宮井洞[궁정동]에 있는 다리의 돌 欄干[난간]을 혼자서 지고 자하문을 넘었고, 少林寺[소림사]의 돌부처님을 三圓[삼원]에 都合[도합]으로 맡아서 十四里[십사리]밖에서 혼자 지고 온 것은 事實[사실]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承認[승인]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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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목도? 여섯 목도로 그것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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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朴先達[박선달]은 돌을 깨뜨리다 말고 허리를 펴면서 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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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朴先達[박선달]은 自稱[자칭]하는 거와 같이 一流[일류] 木手[목수]는 아니었다. 그는 성미가 겁겁하고 우락부락하나 뒷심이 없는 거와 같이 못 쓸 바윗돌을 깨뜨려 내는 데는 相當[상당]하지마는, 재주를 부리거나 조심해서 할 일은 맡길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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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年前[년전]에 少林寺[소림사] 築臺[축대]를 都合[도합]으로 맡아서 쌓은 일이 있는데, 役事[역사]를 막 마치고 工錢[공전]을 막 들고 나오려고 할 때에 우르르 하고 그 石築[석축]이 무너져 버렸다는, 이 동네에서는 相當[상당]한 有名[유명]한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다. 젊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하고 놀려 먹으면 朴先達[박선달]은 苦笑[고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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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님, 정말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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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누가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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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어, 그랬어. 빨리만 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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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自服[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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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先達[박선달] 自身[자신]의 말에 의지하면, 그는 朝鮮八道[조선팔도]를 무른 메주 밟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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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평양]·江西[강서]·三和[삼화]·龍岡[용강]·蔚珍[울진]·三陟[삼척]·平海[평해]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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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遊[회유]의 地[지]를 내려 섬기는 것을 들으면 그 고을 이름들의 順序[순서]가 어지간히 맞는 것을 보아 다 다녀 본 것은 事實[사실]인 듯하고, 또 砲兵隊[포병대]에서 밥 세 그릇 먹고 힘 그중 많이 쓰기로 下士[하사]까지 올라 가서 열 여섯 명이 못끌어 올리는 大砲[대포]를 혼자서 끌어 올렸고 ── 이러한 말도 다 事實[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朴先達[박선달]은 큰 悲哀[비애]가 있다. 그것은 一生[일생]에 十數次[십수차] 마누라를 얻었지마는 그 마누라들이 모두 다 사흘 만이면 달아났다는 것이다. 지금도 毋論[무론] 홀아비로 단간 오막살이에서, 自己[자기] 말에 의지하면, 册曆[책력] 보아가면서 손수 밥을 끓여 자시고, 일이나 없는 날이면 막걸리로 끼니를 에워서, 어떤 때에는 사흘 만이나 나흘 만에 밥을 지어 자시는 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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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처가속이 있어요, 자식이 있어요? 돈도 구찮고 집도 다 구찮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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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니와, 그는 과연 방 웃목에 쌀가마가 놓인 동안은 일을 가려고 애를 쓰지도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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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얼굴이 못났읍니까, 기운이 남만 못합니까? 전주 통량에 인모탕건 받쳐 쓰고 한번 나설 테니 보시럅시오. 천하 계집의 눈이 다 내게로 모였지요. 그렇지마는 하룻밤만 지나면 달아난단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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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는 정말 悲愴[비창]한 表情[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生理的[생리적] 缺陷[결함]이 있었다. 그는 어떤 돈 많고 얼굴 잘난 尙宮[상궁]의 눈에 들어서 一夕[일석]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尙宮[상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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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허울이 아깝구나.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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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돈 얼마를 주면서 朴先達[박선달]의 등을 두드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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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런 복통을 할 노릇이 있읍니까. 내 인제 閻羅大王[염라대왕]을 만나면, 아 놈아, 이 오랄질 놈아, 白晝[백주]에 사람을 요모양으로 만들어 낸단 말이냐, 하고 바지를 벗고 내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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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는 정말 고의를 벗었다. 十四[십사], 五歲[오세]의 小兒[소아]를 聯想[연상]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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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徹天之恨[철천지한]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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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朴先達[박선달]의 얼굴 筋肉[근육]은 모두 痙攣[경련]을 일으켰다. 朴先達[박선달]의 一生[일생]은 魯迅[노신]의 阿鬼[아귀]와 비슷한 點[점]이 있어서, 人生[인생]의 한 標本[표본]으로 썩 재미 있는 人物[인물]이다. 만일 그의 今生[금생]을 決定[결정]하는 因[인]이 되는 前生[전생]의 業[업]이 무엇인 것과 今生[금생]의 그의 業[업]과 願[원]이 어떠한 來生[내생]을 가져 올 것을 안다하면 더욱 재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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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木手[김목수]라는 사람은 키가 훌쩍 크고 카이제르 수염을 뻗치고 恒常[항상] 제 자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依[의]하건댄, 그는 본래 넉넉하고 文筆[문필] 있는 집 子孫[자손]으로, 일찍 學校敎師[학교교사] 노릇도 하였다 하며 漢詩[한시]도 짓느라고 하였다. 木手[목수]를 배운 지는 四年[사년] 밖에 아니 되지마는 長安[장안]에 어떠한 一流木手[일류목수]라도 自己[자기] 以上[이상] 잘하는 이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漢詩[한시]와 마찬가지로, 木手[목수]도 그리 잘하는 木手[목수]는 아니었고, 鄭世權氏[정세권씨]의 評[평]에 의지하건댄, 한 三年[삼년] 큰 데서 치워나면 곧잘 하리라고, 只今[지금]도 日工[일공] 一圓五十錢[일원오십전]짜리 木手[목수]는 된다고 한다. 그는 部下[부하] 둘을 데리고 와서 自己[자기]는 먹통만 들고, 깎기나 미는 일은 다 部下[부하]에게 시키고 自己[자기]는 술 먹으러 돌아 다니거나 風月[풍월]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하면, 都片手[도편수]란 이러한 것이요, 이렇게 無爲[무위]하는 동안에 大經綸[대경륜]을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마치 自己[자기]가 數百名[수백명] 木手[목수]를 指揮[지휘]하는 景福宮[경복궁] 都片手[도편수]나 되는 것같이 自處[자처]하는 모양이 그의 眉宇[미우]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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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手[목수]는 燒酒[소주]를 먹고, 泥匠[이장]이는 막걸리를 먹고, 塗褙匠[도배장]이는 藥酒[약주]가 아니면 아니 먹으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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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夫[인부]들은 日工[일공]으로 할 때에는 하루에 스무 짐을 지고, 품방으로 할 때에는 四十餘[사십여] 짐을 지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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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선이라는 사람은 얼굴이 동탕하고 몸이 건장하고 말을 잘하였다. 그는 工錢[공전]을 높이고 짐을 적게 지는 運動[운동]을 하는 데는 人夫[인부]들 中[중]에 指導者[지도자]요 煽動者[선동자]였었다. 그는 同盟罷業[동맹파업]이라는 手段[수단]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德[덕]보다도 知[지]가 勝[승]한 ( ) 의 사람이었다. 또 人夫[인부]들에게 發論[발론]하여 갈보집에서 한바탕 먹고 노는 추념도 설도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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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선이라는 사람과 좋은 對照[대조]가 되는 이는 노서방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기서 三十里[삼십리]나 되는 農村[농촌]에서 農閑期[농한기]를 利用[이용]하여 솥을 지고 와서 집턱에서 한둔을 하면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벌이가 있는 것만 다행히 여겨서 아무 말도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덕선이의 感化[감화]를 받아서 그의 앞잡이의 任務[임무]를 하였다. 덕선이는 自己[자기]가 主人[주인]에게 致疑[치의]받는 줄을 깨달은 때부터는 主人[주인]이 듣기 싫어할 말을 노 서방을 시켜서 하게 하였다. 노 서방은 덕선이만한 약음이 없기 때문에 勇氣[용기] 있는 鬪士[투사]가 되어서 一個月[일개월]이 넘을 때쯤 하여서는 가장 말썽 부리는 사람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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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라는 사람이 키가 크고 허리가 굽은 사람으로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는 滿洲[만주]로 放浪[방랑]하여 치치할에서도 千餘里[천여리]나 黑龍江[흑룡강]쪽으로 들어 가 본 사람이라고 하며, 本業[본업]은 「이다바」라고 한다. 日本人[일본인] 料理[요리]집에 가면 每朔[매삭] 五十圓[오십원]을 받는다고 하여, 人夫[인부]들은 그에게 特別[특별]히 欽羡[흠선]하는 빛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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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池書房[지서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낯빛이 검고 몸이 壯大[장대]하나 柔和[유화]한 빛이 있었다. 자랑은 其他[기타] 씨름판에서 여러번 판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百日[백일]이나 힘을 써서 내 집을 이룬 것이다. 내 집은 이 여러 사람들의 땀으로 이뤄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住所[주소]와 氏名[씨명]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니 裟婆[사파]에 逗遛[두류]하는 동안 이러이러한 일로 만났다는 것으로도 넉넉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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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여러 힘이 모여서 열 두 간 半[반]이라는 내 弘智山莊[홍지산장]이 되었다. 열 두 간이라면 조그마한 집이언마는 나와 같이 德[덕]과 福[복]이 다박한 사람에게는 이 집도 過分[과분]하다는 惶悚[황송]한 感[감]이 없지 아니하다. 만일 나만 能[능]히 큰 닦음이 있을진댄 이 조그마한 집에도 朝鮮[조선]의 모든 賢人[현인]을 다 모을 수 있을 뿐더러 世界[세계]의 모든 聖賢[성현]과, 널리 말하면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의 諸佛菩薩[제불보살]과 天人阿修羅[천인아수라]를 다 모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四十三歲[사십삼세]다. 하루로 말하면 午正[오정]이 훨씬 넘은 때다. 이제사 비로소 正道[정도]에 눈이 떴으니 늦다고 하겠지마는, 이제부터라도 不退轉[불퇴전]의 바퀴를 굴리고자 나는 이 집을 지을 때에 오직 感謝[감사]하고 오직 敬虔[경건]하는 마음으로써 하였다. 내 집을 爲[위]하여 짐을 지고 나무를 깎는 이들의 無意識中[무의식중]에 하는 付託[부탁] ── 내게 福[복]을 주오. 나를 苦海[고해]에서 건져 주오 ── 하는 付託[부탁]을 分明[분명]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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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집에서 새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참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어언 一生[일생]을 虛送[허송]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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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벽에 일어난다. 이번 집은 높아서 지금까지 살던 어느 집에서보다도 하늘이 많이 보인다.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던 星座[성좌]들도 보인다. 나는 새벽의 별들이 어젯밤 자기 前[전]에 볼 때보다 位置[위치]를 바꿈을 본다. 밤새에 잃어진 天地[천지]의 일의 자취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北辰[북신]만이 變[변]함이 없이 그자리에 있는 것을 본다. 動中[동중]의 靜[정], 變中[변중]의 恒[항], 多中[다중]의 一[일]이 宇宙[우주]의 神秘[신비]한 統一[통일]과 法[법]을 느낀다. 나는 이때에 空中[공중]을 向[향]하여 敬虔[경건]하게 절하지 아니할 수 없고, 이 宇宙[우주]의 한 멤버가 되어 이 神秘[신비]와 崇嚴[숭엄]을 느끼는 힘을 타고 난 것을 感謝[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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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 틈으로 솟는 물 ── 그것은 지난밤 동안에 그득히 고였다 ──에 양치하고, 세수하고, 燭[촉]불을 켜 놓고 모든 聖人[성인]의 名號[명호]를 부르고, 聖人[성인]의 글을 읽는다. 이때에 나는 모든 罪業[죄업]을 벗어나서 聖人[성인]과 하나가 되고 宇宙[우주]와 하나가 됨을 느낀다. 나는 내 肉體[육체]의 制限[제한]과 五欲[오욕]·六識[육식]의 制限[제한]을 벗어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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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동안 글을 읽고 瞑想[명상]을 하고 나면 東天[동천]이 환해진다. 나는 한 손에 비를 들고 쓰레질을 하면서 東便[동편]을 바라본다. 白岳[백악]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우리 집에서 보면 바로 해와 달이 뜨는 곳이며, 한여름이면 백사슬 瀑布[폭포] 위에서 해가 뜨고, 立冬[입동]을 지난 只今[지금]에는 바로 白岳[백악]의 꼭대기에서 뜬다. 달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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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岳[백악]으로 아침 해가 올려 쏘려 할 때에는 釋迦峯[석가봉]에 먼저 黃金色[황금색] 빛이 비추인다. 그리고는 文殊[문수]·觀音[관음]·普賢[보현]에 비추이고, 다음에는 仁王山[인왕산]의 등인 靈鷲[영취]의 뺨에 비추인다. 그런 뒤에는 紅輪[홍륜]이 내 집을 向[향]하고 떠오른다. 煤煙[매연]도 塵埃[진애]도 없는 淸淨[청정]한 空中[공중]에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은 果然[과연] 光明[광명]이요, 莊嚴[장엄]이요, 美觀[미관]이요, 偉觀[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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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岳[백악]에 해가 오르면 溪谷[계곡]에는 뽀얗게 안개가 낀다. 그 안개가 日光[일광]을 받아서 자주 帳幕[장막]으로 變[변]한다. 해가 오를수록 더욱 짙어져서 閭閻[여염]의 집들이 아니 보이고, 오직 流[류]의 굽이만이 안개가 稀薄[희박]한 틈을 타서 紫金色[자금색]으로, 黃金色[황금색]으로 번쩍거린다. 그러다가 해가 얼마 올라 온 뒤에야 그 안개가 瞬息間[순식간]에 걷히고 사람들의 가난한 집들과 사람들의 살려는 勞力[노력]에 노닥노닥 完膚[완부]가 없이된 自然[자연]이 赤裸裸[적나라]한 本體[본체]를 露出[노출]한다. 採石場[채석장]에서 구들장을 실은 마차들이 바퀴 소리를 덜거덕거리면서 물 문길로 나가고, 石手[석수]들은 연장 구럭을 메고, 지겟군들은 지게를 메고, 자갈 깨뜨리는 婦女[부녀]들은 마치를 들고 골짝골짝에서 나와서 採石場[채석장]으로, 南大門[남대문] 市場[시장]으로들 간다. 人生[인생]은 勞役[노역]의 日課[일과]를 始作[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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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는 하늘과 별이 豊富[풍부]한 모양으로 日光[일광]과 月光[월광]이 豊富[풍부]하다. 白岳[백악]에서 해가 올라 仁王山[인왕산]을 넘어 西山[서산]의 海水觀音[해수관음] 뒷峯[봉]을 넘을 때까지 내 집에 든다. 그래서 환하다. 낮에는 불을 때지 아니하여도 방이 덥다. 나는 日光[일광]의 供養[공양]을 받는 것이다. 西山[서산]의 初生[초생]달에서부터 下弦[하현]달까지 내 집의 窓[창]과 뜰에 비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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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과 별과 日光[일광]과 月光[월광]과 山色[산색]과 水聲[수성]을 많이 가진 것을 기뻐한다. 階下[계하]에 十株[십주]쯤 되는 감나무가 있어서 꽃과 잎과 그늘과 붉은 열매를 준다. 이렇고도 서울에서는 五里[오리] 밖에 아니 되는 距離[거리]다. 두 우물에서 솟는 맑고 단 물을 마시고, 塵埃[진애]에 더럽혀지지 아니한 깨끗한 空氣[공기]를 呼吸[호흡]하는 것도, 三十餘年[삼십여년] 紅塵生活[홍진생활]을 하던 나에게는 큰 福[복]이다. 하물며 볕 잘드는 조용한 방이 聖賢[성현]과 詩人[시인]·學者[학자]의 册[책]도 읽을 만큼은 있어서 讀書[독서]와 瞑想[명상]과 修養[수양]의 機會[기회]를 얻었음에랴. 어린것들도 無故[무고]하고 우리 夫妻[부처]와 집에서 우리를 爲[위]하여 勞役[노역]하는 이들 다 平安[평안]하니 더욱 多幸[다행]한 일이다. 分[분]에 넘치는 福[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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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三六年一月[일구삼육년일월] 《三千里[삼천리]》 八卷[팔권] 第一號[제일호] 所載[소재])
【원문】성조기(成造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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