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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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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2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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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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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각각 의자의 뒤편 양쪽에 나누어 섰고 유라만이 의자에 걸어 앉아 결국 삼각형의 아랫편 정점을 이루었고 세 사람 가운데의 복판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반드시 그가 작고하여 버린 탓도 아니겠지만 이 사진에 나타난 유라의 자태는 그 어디인지 넋을 잃은 듯한 허수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도 눈에 정기가 없다. 빌딩의 창이 열려 있듯 두 눈은 다만 기계적으로 무르게 열려 있을 뿐이지 생명의 광채가 엷다. 흐린 가을날 유리창으로 흘러드는 약한 광선같이도 애잔하고 하염없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부수수한 것은 평소의 그이 치장의 취미라고나 할까. 세 사람이 사진에 나타날 때 한복판의 위치가 불길하다 함은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이 말과 유라의 경우와를 합하여 생각할 때 나는 무서운 암합에 마음이 어두워짐을 깨닫는 동시에 이 사진을 박을 때에 유라와 아내는 그러한 흉신을 알고서인지 모르고서인지 의자에 앉으라거니 뒤에 서겠다거니 하고 한참 동안이나 귀여운 실내기를 쳤던 것을 생각하면 유라의 박명에 더한층 마음이 아프다. 그는 세 사람에 앞서 마치 세 사람의 악운을 휩쓸어 가지고 간 듯하다. 그가 그렇게 빨리 안 간다 하더라도 세 사람 사이의 평균한 안정은 결코 잃어지지 않았을 것을 ─ 그는 생명을 조금도 염려하고 사랑할 필요는 없을 것을 ─ 사진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감상까지 우러러 나와 유라의 짧은 생애가 한없이 애달고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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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가 작고할 무렵에 우리와는 생활상 사정으로 하여 지리적 거리가 멀었고 잠깐 동안 교섭이 끊였었다. 이른봄 어느 날 돌연히 유라의 부고를 받았을 때 일순 기가 막혔다. 기다란 전문의 조전을 치고 아내와 나는 연거푸 이틀 동안 여러 차례나 눈물을 쏟았다. 장지인 그의 고향에까지라도 가보아야 할 처지였고 그것도 일시 생각도 하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하여야 할 나보다 더 적적한 사람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나는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애정의 표물 ─ 다량의 눈물로써 그의 죽음을 조상하고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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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작고하기 두어 달 전 서울서 고향으로 내려가던 도중 원산에서 띄운 엽서가 내가 받은 마지막 편지가 된 것이었다. 생각컨대 그때에 벌써 그의 병은 어지간히 쇠약하였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병세에 관하여서는 일언반구의 보고도 없었다. 슬퍼야 할 편지가 늘 즐겁고 명랑하였다. 아내의 어리석은 오해로 말미암아 근 반년 동안이나 끊었던 우리와의 교섭이 다시 시작된 것은 그 전해 가을부터였다. 나는 그에게서 번번이 기다란 편지를 받고 오랫동안 가라앉았던 정서가 다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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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장서는 나에게는 한 기쁨이었다. 아내에게도 같은 정도의 애정을 나누어 어떤 때에는 동성애적 열정이 서면에 넘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내가 한 상자의 능금을 선물로 보냈을 때에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기쁨을 표현하여 왔다. 이곳까지 한번 다녀가겠다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기어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따라서 교섭이 부활된 후 한 번도 유라와 만나지 못하고 가버린 것이다. 병 때문에 괴롭기도 하였으련만 편지에는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 몇 해 간 가지가지의 수난에 둘러싸였던 그임으로 여러 가지 핍박한 심경에도 무던히 괴로웠으련만 편지는 끝까지 명랑하였다. 그가 이곳에 올 것을 믿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 대신에 참혹한 부고가 온 것이었다. 여러 장의 편지와 한 폭의 넥타이, 이것이 그가 나에게 남긴 유물(唯物)적 유물의 전부가 된 것이다. 그가 받은 수난의 한 토막을 기록하려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나 세상에는 부당한 수난 ─ 더구나 여자인 까닭으로 이유 없이 받는 당치않은 수난이 많은 것 같다. 자유의 행동에 공연히 비난과 구속을 받게 되고 그럼으로 마음의 자유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빛나야 할 모처럼의 생활을 가엾게 말살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는 듯하다. 더구나 연애의 행동에 있어서의 이러한 부당한 수단의 희생은 심히 가엾은 것이다. 유라의 꼴이 한없이 측은하다. 나는 부당한 수난에 항의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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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의 학교 시대와 여점원 시대를 나는 모른다. 다만 잡지사에 기자로 있던 그의 마지막 시대를 알 뿐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용약 시대의 생활은 알 수 없다 ─ 고는 하여도 그의 그러한 생활의 일단을 흘깃 엿볼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게 된 첫번이 공교롭게도 바로 그의 그러한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어느 날 친히 다니는 서점에 앉아서 주인과 다니는 학교의 파업의 주모자로 끌려간 그의 여동생의 뒷일을 궁금히 여기고 있노라니 한 여자가 뛰어들어왔다. 흥분되고 황급한 양이었다. 여름옷이 고름이 떨어졌고 머리가 풀려서 흩어졌다. 눈이 새까맣고 코가 앙칼져 몹시도 인상적이었다. 그가 바로 소문의 유라였던 것이다. 서점 주인의 동생의 파업을 배후에서 지휘하고 조종하였다는 탓으로 여러 날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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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의 회화를 나는 옆에서 타인적 태도로 들을 뿐이었으나 그의 용모에서 오는 인상이 마음속에 몹시도 진하게 엉겼다. 물론 그 자리는 인사도 없이 그대로 헤어졌으나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원고를 청하러 왔다. 이때부터 사귐이 시작되었다. 원고를 청탁하고 나의 셋방에 자주 찾아왔다. 같이 거리에 차 마시러 가는 걸음도 잦았다. 이지적이었으나 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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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을 써 가지고 왔을 때에 나는 대강 수정한 후에 제목을 고쳐 주었다. 그 소설을 준 잡지의 원고 전부가 그 달에 압수를 당한 까닭에 그 소설이 즉시 세상에 나가지는 못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의 소원이 소설을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소설 교수의 임무가 나에게는 과한 과제였으나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은 그는 반드시 소설을 배우러만 온 것도 아닌 까닭이다. 실행은 못하였으나 더울 때에는 가까운 바다에 해수욕 가기를 자청도 하였고 가을이면 성북동의 포도원도 찾았다. 토키의 「파리의 지붕 밑」을 본 후에는 가끔 능치 못한 나의 기타를 졸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물론 그의 나와의 접촉면만을 볼 뿐이었지 나와 떨어져 있을 때의 그의 생활은 나의 알 바도 아니었다. 나와 만날 때에 나에게 보여 주는 두터운 우정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지금의 아내인 나의 약혼자가 시골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의 표정을 잘 살피지는 못하였으나 우리들이 결혼하였을 임시에 잠깐동안 그와 사이가 뜨게 지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시 사이는 여전하게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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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남의 생활을 엿보기에 어두운 나에게도 유라를 에워싸고 도는 몇 사람의 존재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그들에게 대한 유라의 애정의 정도는 헤아릴 수 없었다. 확실히 안정을 잃고 서성거리는 눈치는 보였다. 어느 날 유라는 나를 찾아왔을 때에 말이 났던 김에 잡지사 같은 편집실에 있는 한 사람의 동료의 호인적 성격을 찬양한 일이 있었다. 추운 겨울에 몸까지 불편하여 온 아내는 명절을 앞두고 잠깐 동안 고향에 가 있기로 하였다. 아내를 보내는 날 밤 유라는 잡지사의 그 동료를 정거장까지 데리고 나와 떠날 시간을 앞둔 차 속에서 황망히 나에게 소개하였다. 이가 유라의 그 후 생활에 비교적 중대한 뜻을 가지게 된 인물임은 물론 후에 알았다 ─ 동료의 호인적 성격을 찬양하는 외에 그에게 관한 더 자세한 것을 유라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고 성격을 찬양함이 반드시 사랑의 표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물론 두 사람에 관한 소문만은 가끔 나의 귀를 스쳤으나 세상에 소문같이 어리석고 겸연쩍은 것은 없는 줄을 잘 아는 나였다. 무엇보다도 또렷한 애정의 목표를 둔 사람으로서의 유라의 나를 대하는 태도에 선명한 것이 없었다. 물론 애정의 표식이 있다고 공연히 나를 미워하고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나를 대할 때의 태도는 적어도 사랑하는 이를 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이 사랑에 골몰할 때에는 적어도 일정한 기한 동안은 그 외의 사람에게서 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또 없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대한 태도의 설명을 나는 그의 마음의 안테나가 여러 갈래인 탓이라는 것보다도 그의 잔약한 마음의 탓으로 돌려보내고 싶다. 그 잔약한 마음이 실로 수난의 괴롬을 가져온 것이며 부당한 비극을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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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고향으로 내려간 후로는 유라가 나를 찾아옴이 확실히 더 잦았고 그의 심사도 저윽이 자유로운 듯하였다. 하루는 아랫목에 펴놓은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찬 몸을 녹이면서 무슨 이유 무슨 생각으로인지 그가 잡지사에 있게 된 후로의 몇 가지의 수난을 비교적 자세히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직접 그의 입에서 그의 생활을 듣기는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적지 않은 흥미와 동정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를 귀찮게 군 몇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도 유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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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같은 편집실의 젊은 동료이었다. 평소의 친절을 두터운 우정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하였던 것이 우정의 한계를 넘어 돌연히 사랑의 고백이 되었을 때 유라는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친절이 별안간 치장된 함정같이 생각되어서 유라는 황급히 신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태도와 눈치가 진하면 진할수록 쌀쌀하게 몸을 지녔다. 이것이 도리어 그의 부당한 반감을 사게 되어 마침내 절교까지에 이르렀다. A는 얼마 안되어 사를 물러가게 되었으나 그 후 유라는 일신에 관한 대중없는 중상과 소문을 자주 들을 때마다 그것이 A의 유언의 소치나 아닌가 하고 우울한 날이 많았다. 일면 팔 침을 맞았을 때의 남자의 게염과 천려를 슬퍼하고 민망히도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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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단 같은 지붕 밑 편집실을 나가 버린 사람이니 차차 교섭이 엷어짐을 따라 A와의 사이는 완전히 청산되어 버렸으나 그보다 더 추근추근 귀찮은 것은 B였다. B 역 A가 가버린 후의 편집실의 동료이었다. 일단 가정에 풍파를 겪은 중년의 신사요, 과거의 빛나던 투사인 그를 유라는 선배로 섬기는 마음으로 일상 경대하였다. 공경한다 함은 실상의 내용으로는 멀리함을 뜻하는 것 같다. 유라는 경대하던 선배를 경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동기는 물론 그 선배가 가져온 것이다. 선배는 사상적 지도를 칭탁하고 마침내 유라의 마음의 문까지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진 열쇠는 유라에게는 맞지 않았다. 감정의 문은 사상만으로는 열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눈으로부터 드는 것이니 유라의 눈을 정복하기 전에는 구슬보다 더 아름다운 지혜를 가지고 와도 할 일없는 것이다. 지도의‘호의’를 유라는 도리어 귀찮게 여기게 되었다. 달마다의 잡지에 B가 수필을 이름삼아 가지가지의 암시와 비유를 들어 구애의 도구를 삼는 것이 유라에게는 말할 수 없이 낯간지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익명으로 가끔 날아드는 기다란 편지였다. 그 속에서 B는 연연한 글자로 사랑을 하소연하였다. 드디어 유라를 직접 찾아오게까지 되었다. 이렇게까지 되면 유라도 굳은 태도로 냉정하게 몸을 지닐 수밖에는 없었다. 눈치까지 무시하고 둔감하게 구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선명하게 차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A와 똑같은 경우를 일으켰다. B의 소치인 듯한 가지가지의 중상과 소문이 유라의 신변에 빗발치듯 날았다. 소문 속의 인물의 한 사람이 C ─ 아내가 고향으로 내려갈 때 정거장 차 속에서 나에게 소개한 유라의 동료였다. 유라와 C와의 교우관계라고도 할 것이 시작된 것은 마침 유라와 B와의 옥신각신이 있은 전후였던 것이다. 사 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유라를 항상 막아주고 지켜 주는 사람이 C라는 것을 유라는 전에도 누차 나에게 전하여 주었던 듯하다. B와 C는 책상을 나란히 한 같은 방안의 동료인고로 B의 새암과 비난이 유라와 C와의 관계로 집중되고 과장되었음은 자연의 형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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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의 이야기는 이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귀에도 유라들의 소문은 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서도 자꾸 들렸다. 유라는 웬일인지 C와의 소문을 즐겨하지 않았다. 유라의 약한 성격이 여기에도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소문이란 게염스럽고 바람결같이 허황한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이니 사실이 소문 이상이든 이하이든 있는 대로의 것을 긍정하여 마음의 자유대로 말 달리는 것이 더 양심적이 아닌가. 사회는 이해관계가 엷을 때 개인의 연애생활까지 손찌검할 염치는 없는 것이다. 개인의 연애생활을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하여 비판함이 반드시 그 사람의 양심적 생활을 지도함은 안되는 것이다. 유라는 새암과 억지 많은 세상에 대하여 조금도 그의 사생활을 겸양하고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하물며 나에게까지 대하여서랴. 유라는 나에게 대하여서도 C와의 관계를 얼버무리고 간간이 희생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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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었다 ─ 어느 날 저녁 다따가 영화구경 가기를 청하였을 때 유라는 선뜻 승낙은 하였으나 그 어디인지 걱정의 표정이 보였다. 그러나 물론 약속한 시간에 어김없이 오기는 왔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같이 상설관까지 갔다. 거기에서 나는 의외에도 혼자 앉아 있는 C를 발견하였다. 유라도 C를 돌연히 발견한 듯한 표정을 가졌던지 안 가졌던지 까지는 살피지 못하였으나 세 사람의 사이는 확실히 한참 동안 어색하였다. 생각컨대 나의 청을 들었을 때의 유라의 걱정스럽던 표정은 C와의 약속을 생각한 결과인 듯하였다. 그러나 먼저 C와 약속을 한 것이라면 나의 청을 시원히 차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거리를 건너가 약속한 C를 목적지에서 거북스럽게 만나는 것보다는 도리어 나의 약속을 거절하고 시원히 처음부터 와 같이 C 가서 몇 시간을 즐기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나에게 겸손하여 도리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말살할 필요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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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러한 경우의 유라의 심증을 이해할 수 없다. 이때뿐이 아니었다. 수시로 거리를 거닐 때나 차점을 찾을 때는 별것으로 하고 무용발표회를 구경갔을 때나 작가들의 원고전람회인지를 보러 갔을 때에도 일껏 같이 가기는 하였으나 유라의 태도에는 서먹서먹하고 거북스러운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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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밤늦도록 거리를 거닐다가 백화점에 들렀다. 유라의 권고도 있었고 하여 넥타이를 살려는 것이었다. 수효뿐이지 변변한 넥타이는 하나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가 골라 드리지요 하고 유라는 넓은 넥타이의 폭포속에서 손쉽게 하나를 골라냈다. 검은 빛깔에 붉은 줄이 은은히 섞인 사치하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몸에 조화되고 취미에 맞는 넥타이였다. 맬수록 몸에 어울리고 마음에 들었다. 카페에서는 안목 높은 여급이‘썩’이라는 형용사를 써서 기품 있는 색조를 칭찬하였다.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나는 그 훌륭함을 다시 깨닫고 아울러 유라의 미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세련된 안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유라의 세련된 취미의 일부분을 빌어 내 몸을 치장한 셈이었다. 유라와 같이 거리를 거닐 때의 경우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유라는 거리에서 나의 몸을 치장하는 넥타이의 역할을 한 셈이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유라로서는 몸치장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그의 생활을 살리는 것이 정당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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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한 소문을 극도로 싫어한 탓이었다면 하필 C와의 소문만을 특히 경계할 필요가 있었던가. 유라와 나와의 동행을 거리에서 자주 목격한 신문사 여기자가 그것을 글거리로 유라를 조롱하였다는 사실을 유라는 나에게 거북하였다는 기색도 없이 도리어 그를 톡톡하게 반박하여 주었다고 하면서 웃음을 머금고 뒤슬뒤슬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유라가 내게 와서 저녁 고기를 도마 위에 난도질할 때 나의 동무가 찾아왔다. 소문이 나려면 그때와 같이 공교로운 기회는 없었으나 유라 자신은 그것을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았으나 무슨 까닭인지를 알 수 없다. 유라는 본말을 거꾸로 하고 줄기와 가지를 분간하지 못하였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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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와의 탄로를 걱정하면 할수록 일은 더 틀어지고 생각지 않은 곳으로 야단스럽게 빗나가 버렸다. B의 과장된 새암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이 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한 폭의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유라를 심중에 두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D였다. 운동의 전선에서 완전히 탈락한 후 하는 일 없이 거리로 돌아다니며 기적적으로 살아가는 사나이였다. 거리의 소문을 전하고 가십을 만드는 것이 일이라면 일일까. 과거의 동무들은 그를 이용하려고 하는 외에는 대게 위험시하고 멀리하였다. 표면으로는 그 역시 ‘지도’를 핑계삼아 유라의 신변을 그림자와도 같이 항상 굼실굼실 싸고돌았다. B와도 물론 과거의 동무는 동무였으나 혼자 마음속으로는 유라를 둘러싼 사랑의 적수인 까닭에 유라에게 대한 B의 책동을 은근히 질시하며 그것을 기회로 B를 함정에 빠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한 사람의 동지가 나타났으니 E였다. 당시 합법운동의 최고간부의 한사람인 E를 D는 얼마간 존경한다면 존경하는 터였고 B도 일단 탈락한 몸이라 그에게 대하여 떳떳이 고개를 쳐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E가 돌연히 얼기설기 얼크러진 사건의 그물 속으로 불쑥 뛰어들어 오게 된 것은 아직 C의 자태가 표면에 선명히 드러나기 전 B와 유라의 관계만이 뚜렷할 때였다. 잘 지도하면 쓸만하다고 생각한 것이, 즉 다시 말하면 유라를‘지도’하겠다는 것이 E의 용감한 간섭의 첫째 이유였고, 둘째 목적은‘타락된’B의 행동을 따갑게 책망하여 그의 길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유라와 나에게서 B와의 관계의 일절을 들은 후 대책을 강구하고 전술을 세우려고 E와 D는 나의 방에서도 자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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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라를 막으려는 그들에게 단칸의 셋방을 때때로 제공하기를 아낄 필요는 없었다. 어떤 때에는 유라까지 합쳐 네 사람이 좁은 방안에서 만나게 되는 수도 있다. 배짱이 서고 기회가 익은 하루아침, D는 드디어 잡지사로 달려가 과거의 교우관계와 모든 의리 일절을 신짝같이 집어던지고 한 사람의 벌거벗은 영웅으로서 B 앞에 늠름히 나타났다. B의 허물을 꼬집어내고 행동을 탄로하여 대경실색한 B를 사정없이 우겨댔다. 세밀히 조사된 재료의 무기로 빈틈없이 난도질한 것이다. 옆에는 유라도 있었을 터, 편집실 안은 별안간의 폭풍우에 발끈 뒤집혔다. B와 D는 마침내 폭력을 가지고 서로 어울려 의자가 날고 주먹이 부딪쳐 편집실은 일장의 수라장이 되었다. 때를 살펴 E가 뛰어갔다. B는 의외의 곳에서 뛰어드는 불의의 공격에 허전허전 힘을 잃고 완전히 넘어진 셈이었다. 소문은 거리에 쫙 날리고 B의 얼굴에는 옳든 긇든 한목에의 진흙이 끼얹어졌다. 사회적으로 와싹 부셔 버리려던 E의 소망은 어느 정도까지 공을 이루었고 속 사랑의 적수를 쳐버린 D의 심중도 어지간히 유쾌하였다. B는 다음날부터 사를 쉬었다. 그의 진퇴문제까지 논의되었다. 물론 D들에 대한 그의 미움은 컸고, 한편 유라에게 대한 술책도 어금니를 더욱 날카롭게 하였다. 유라도 사건의 중심인물인 만큼 그 스스로 출근을 부끄러워하여 겸양하는 날이 많았으나 주간의 두터운 호의로 하여 그의 퇴사는 극력 만류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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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유라와 E들의 사이는 확실히 더 가까워는 갔다. 그것이 애초부터의 의 소망이었으나 E 단독으로, 혹은 같이들 만나는 날도 많았다. E가 유라를‘지도’하려 하는 본의의 흑백은 하늘만이 아는 노릇이다. 한편 유라에게 대한 B의 공격은 더한층 날카로워지고 적극적이었다. 그의 전면공격은 유라의 C와의 관계의 탄로로 집중되었다. 이것이 유라의 아픈 곳이었다. 드디어 사건은 사건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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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와 C와의 숨은 생활이 폭로되었음은 물론이어니와 C에게 관한 자세한 속사정까지 겉에 드러나게 되었다. D 자신 가끔 유라의 숙소를 살피고는 C와의 생활을 추측하여 말하게 되고 E는 E로서 또한 여러 가지 들리는 말을 재료 삼아 유라의 생활을 유심히도 캐내고 감시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있어 유라에게 약간이라도 걸림이 있는 F G H …… 여러 인물의 호기심과 책동으로 말미암아 C의 가장 아픈 상처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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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에게는 수학시대의 그를 도와까지 준 조강지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를 버리고 유라를‘잡을 수 없는’것이다. 유라와 남편의 관계를 안 C의 아내는 남편을 책하는 위에‘뜻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그 사실을 적발하고 비판과 후원을 빌게 된 것이었다. 있는 대로의 사실은 죄다 땅에 팍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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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여기까지 이르면 수습할 도리도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의 곡절은 다만 이것만으로는 모를 노릇이나 나도 이것을 들음에 이르러서 겨우 유라의 C에 대한 지금까지의 소극적 태도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원인의 전부인지 아닌지는 알 바 없지만 ─ 그러면 그렇다고 도리어 용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살릴 용기도 없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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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있은 후의 인심이란 종잇장 같이 엷은 것이다. D는 쌀쌀하게 유라를 비웃었다. E도 손을 번긴 듯이 표변하여 B를 치던 공격의 화살을 사정없이 유라에게로 돌렸다. 모든 허물과‘도덕적’비난이 한갓 유라에게로만 돌아갔다. 사회의 도덕이란 값싸고 평범한 상식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지만 E도 결국 한 사람의 범상한 사나이에 지나지 못하였다. 긴급한 일이 많을 운동객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한 여자의 사생활에 간섭하여야 할 필요와 여가가 있었는가. 사소한 거리 일에까지 계급적 양심이 발동함은 너무도 값싸고 한가한 짓이다. 몰락한 동지를 책망할 목적으로라면 B의 사건을 끝으로 손을 떼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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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의 사건이 생기자 유라에게 대한 표변과 공격은 천박하고 추한 짓이 아닐까. 많은 사람을 이끌고 나가야만 할 아량과 염량이 어디 있는가. 유라를 건져준 값으로 유라의 순결한 웃음을 얻자는 것이 배짱이었다면 그도 결국 한 사람의 범부에 지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한 때의 후원자요, 동지이던 사람들을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잃어버린 유라는 고독한 위에 수많은 적수까지 만들어 놓고 외로운 군사로 쓸쓸히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실은 맵고 차다. 번민과 괴롬 속에서 유라의 병세는 날로 무거워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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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을 한으로 하고 생활의 방편을 따라 우리는 유라와 지리적으로 피차 떨져 있게 된 까닭에 그 후의 곡절과 C와의 관계의 처리는 나의 모르는 바이나 날로 자심한 비난과 욕설에 묻혀 피를 뱉는 괴롬에 건강을 극도로 상하였을 것은 짐작되는 일이다. 편협스런 산골에 묻혀 있는 나에게까지 그 후 가끔 유라의 일신에 관한 무서운 풍설이 오히려 흘러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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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사면초가 속에서 유라가 얼마나 외롭게 지내는지는 오랫동안의 적조를 깨트리고 편지조차 없던 우리에게 별안간 첫 편지를 띄우고 이어서 번번이 기다란 편지를 주게 된 그 한 사실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편지는 한결같이 명랑은 하나 그 어디인지 애수가 흐르고 때로는 울적한 심사조차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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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약한 힘에 한마디의 항의도 못하고 무서운 수난 속에서 아까운 목숨을 한 치 두 치 깎아 간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갈 때 차 속에서 띄운 한 장의 엽서와도 같이 얇게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부고는 실로 청천의 벽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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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가 없는 이제 무엇을 더 말하랴. 공교롭게도 한동안 그의 옆에 서서 단기간의 그의 생활을 객관하게 된 것이 나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참혹한 최후를 알게 된 것은 확실히 나의 불행인 것이다. 생각하면 필요 이상의 호기심과 주책없는 게염으로 말미암아 잔약한 한 사람의 생존에 무서운 수난의 십자가를 메이는 일이 많은 듯하다. 뒷말이 아무리 장황하여도 한번 당한 수난을 물릴 수는 없는 것이나 한마디 유라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생전의 그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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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간생활에 엄격한 꼭 한 가지의 비판이라는 것은 없는 이상 소문을 무시하고 여론을 멸시하여 실속 있는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는 살림이 더 뜻 있지 않았을까. 어줍지않은 여론의 총아가 되고 착한 시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생활의 악마가 되었더면 유라의 살림은 한층 빛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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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권고는 쓸데없는 나의 역설이고 할일없는 감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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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 1934. 12.
【원문】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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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중앙(中央) [출처]
 
  1934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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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