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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화가(畫家)의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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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9.18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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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畫家[화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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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15년 문학을 해야 반반한 작품 한 개 내놓지 못하고서 밤낮 투고(投稿)질이나 하기 아니면, 술 사주고 원고 실려달라고 조르는 딱한 등신을 일러 가로되‘만년 문학청년’이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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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문단만 그런 게 아니라 화단(畫壇)에도 역시 그런 한심한 부대(部隊)가 없지 않아서, 가령 나 같은 사람만 하더라도 그림을 그린 지어언 10년이로되 꿈 이외에는 전람회에 입선 한번 해본 적 없고 세계 인구 16억 중 어느 눈 찌그러진 친구 하난들 아무개는 화가니라고 제법 대접을 해주는 선인이 없으니 문단으로 치면 옴나위 못하고 ‘만년 문학청년’이라는 서자겠지만, 화단에서는 그렇듯 악취미의 별명이 없는 것만은 천행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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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화구(畫具)를 들쳐메고 야외 사생(寫生)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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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재주가 없대서 제작욕까지 없으란 법은 없다. 오히려 크게 왕성하다. 남이야 알아주거나 말거나 내가 그림을 팔아서 목구멍을 도모하자는 것도 아니요, 이름을 천추(千秋)에 끼치자는 것도 아니요 하니, 그저 그림이야 백년 그 모양이라도 그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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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막에서 촌처녀가 낮잠 자고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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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늘 그릴 주제다. 만일 그놈을 마침맞게 캐치하지 못하면 소요산(逍遙山)으로 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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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老僧)이 단풍 밑에서 이를 잡고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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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릴 작정이다. 그래서 동교(東郊)로 코스를 잡아 동두천역(東豆川驛)에서 내린 것이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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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막에서 촌처녀가 낮잠을 자는 풍경을 찾아내자니 들 가운데로 자연 들어가게 될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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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신경이 둔한 나라도 이렇게 들 가운데 서서 보니 미상불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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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목이 숙어 황금 물결이 친다고 하면 그건 엄살이고 눈으로 보기에도 적실히 푸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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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팔도를 감발하고 돌아다녀야 어느 귀퉁이에 내 논 한 뙈기 있을 턱이 없건만 들에 나와서 잘 여문 벼를 보느라면 이렇게 느긋하고 기쁘니, 그것도 나라는 인간이 사람이 좋은 탓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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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서풍을 받아 볏목은 무긋무긋 동으로 숙고 끝없이 퍼져나가면서는 잘 손질한 정원의 잔디밭같이 곱게 가조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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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다하는 곳에 암암한 원산(遠山)이 가로막고, 산을 넘어 창공이 넌지시 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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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이 구름 없이 맑아서 좋다는 건 거짓말이다. 오늘처럼 흰구름들이 군데군데 첨경(添景)을 저렇게 해놓아야만 다 멋이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구름 조각이 내 화필보다는 몇곱이나 명장(名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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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탄식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조화를 능가할 역심(逆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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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가운데 조그만씩한 밭두덩이 있고 고추가 눈이 반짝 뜨이게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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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보다 더 늙어 보이는 노구(老嫗)가 흰 치마폭에 붉은 고추를 따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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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저게 노구가 아니고 촌처녀 같으면 오죽이나 좋아! 새막에서 떠벌리고 낮잠이나 자는 계집애는 명함도 못 들이게 마침맞은 풍경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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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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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귀가 절벽이라 그냥 고추만 따 담는다. 옆으로 가서 소리를 꽥 지르니까야 가만히 돌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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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손녀딸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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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생판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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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딸? 우리 언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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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년이요…… 언년이는 왜 안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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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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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허리 아푼데 고추 따느니 언년이가 따면 좋잖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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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재돌잽이가 고추는 무슨 고추를 딴다구! 실없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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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시기를 긁고 돌아섰다. 오늘 재수가 아무래도 불길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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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한테 골탕을 먹고 새막에서 촌처녀가 낮잠 자는 풍경을 찾다가 못찾고 했으니 인제는 할 수 없이 소요산으로 들어가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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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버리고 마을을 찾아드니 역시 가을경이다. 내일 모레로 추석을 앞두고 촌집 울 밖에 섰는 대추나무에 올망졸망 대추가 볼이 붉었다. 감도 반씩만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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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의 고추는 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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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소요산으로 들어가면 단풍도 붉으리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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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란 만물이 모두 붉기만 하니 그것도 조화는 조화다. 붉은빛과는 상극진 독일 같은 데서는 대체 가을철을 어떻게 취체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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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한들 가을을 국외로 축방(逐放)시키지는 못할 것, 아마 물감으로 유명하다니까 나찌당원을 풀어내어 온 천지를 갈색으로 염색해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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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대음(大飮)했고 아침에 해장을 못한 판이라 길 옆 주막의 막걸리 맛이 또한 이만저만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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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서 소요산 어귀까지 오리길, 주막에서 발을 멈추기 세 집, 한집에서석 잔씩이니 3 3 은 9 아홉 잔, 이만하면 배도 부르거니와 취흥도 제법 도도해서 화심(畫心)( ? )은 더욱 불탄다. 언제고 절절히 느끼는 것이지만 한잔 얼큰한 주흥을 그대로 화심에다가 옮겨놓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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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맑은 시내를 끼고 깊은 골을 한 굽이 두 굽이 돌아들어가니 미상불 나같은 속한(俗漢)도 산중의 별다른 맛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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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아직 반만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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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반만 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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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는 맑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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읊은 시조는 아마 요때쯤 여기 와서 보고 얻은 상(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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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옆에서 물큰하니 코로 스며드는 잡초의 향내가 그놈 또한 가을이 아니고는 없을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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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다고 들어왔던 유산객들이 패패 내려온다. 그러고 보니 네시가 거진 되었을 성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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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시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저물면 절에 가서 하룻밤 지내도 좋다. 혹시 호랑이가 나오면 채필(彩筆)을 들어 고녀석을 가죽을 더얼쑹덜쑹하게 칠해 주는 것도 흥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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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좋다. 단풍 밑에서 노승이 이를 잡는 풍경을 그리지 않고는 죽어도 이 산에서 내려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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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취담이 아니라 우리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비장한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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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호랑이는 말고 사자나 공룡이라도 나올 테거든 나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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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굽이를 돌아들었는지 솨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내리 쏟치는 폭포가 보이고 그 밑으로 두렷한 백사장이 있고 그 언저리로는 층암(層巖)이 둘려 있고 다시 반만 붉은 단풍이 우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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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아 ! ) 백사장에는 포터블을 걸어놓고 폭포를 우러러보면서 노리마끼를 먹고 있는 양장짜리의 두 아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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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미술가의 눈과 머리란 이런 때에 예민한 거라 나는 반 초의 여유도 없이 그 옆으로 가까이 가서 화가(畫架)를 버팅겨 세우고 캔버스를 올려놓고 하는 등속의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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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 분 후에는 벌써 제작이 시작되었다. 시각으로 들어오는 단풍, 층암, 폭포, 포터블과 두 아가씨는 물론이거니와 폭포의 우렁찬 음향과 연연한 포터블 소리까지도 화면에다가 집어넣자는 게 내 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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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될 수만 있다면 지금 도연(陶然)히 취한 내 주흥까지도 아무데고 좋으니 집어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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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들은 내가 저희를 모델로 사생을 시작하니까 처음에는 두릿두릿하고그 다음에는 무어라고 소곤소곤하고 돌려다보고 웃고 하더니 이내 모른 체 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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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를 않는 것이 다행이기는 하나 또 무어라고 말을 부쳐주었으면 좋기도 하겠다. 웬만하면 포터블에서 울려나오는 탱고에 맞추어 스텝을 한바탕 비벼도 해롭잖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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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어떻게 해서 이걸 인연삼아 연애라도 한번 하게 되었으면 나의 반생 소원하던 바이니 금상첨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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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적은 잡념이 생겨서 처음 대작을 만들겠다는 기세는 비거석양풍(飛去夕陽風)하고, 화필이 포터블에 맞추어 캔버스 위에서 탱고를 추고 있으니 이런 질색할 노릇이라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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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두 아가씨가 한꺼번에 일어서더니 천연덕스럽게 내 앞으로 걸어온다. 하나는 밉게 생긴 뚱뚱보, 하나는 호리호리한 이쁜이다. 나는 오금이 저리는 중에도 이렇게 관상을 하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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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고 항의를 할는지, 당할 때 당할값에 나는 남자의 무거운 침착과 제작중에 골몰한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 짐짓 모른 체하고 그대로 화필만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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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이는 내 왼편으로 뚱뚱보는 내 바른편으로 갈라서더니 아무 말도 없이 캔버스를 넘겨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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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미술가에게 무언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시 분명하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얼굴이 확확 치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해서 죽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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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선생님 그림두 퍽 잘 그리시네! 다 그리시거든 그걸 저 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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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이가 이렇게 아양을 떨려니, 그럴 때면 이것 원 무어라고 대답을 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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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면서 온 전신이 스멀스멀한 판인데, 내 참 기가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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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두 빌어먹게두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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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편에서 뚱뚱보가 이렇게 씹어 배앝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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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꼭 자기 얼굴 생긴 것처럼 그림두 그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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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러랴고 일루의 희망을 부친 것도 허사요, 왼편에서 이쁜이가 내 얼굴 못생긴 꼬락서니까지 얼러서 욕을 하지 않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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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무색한 편이라 큼직한 쥐구멍이 없음을 나는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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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참! 얼굴두 어찌면 글쎄 제래! 머리뿌렁구가 콧구멍으루 나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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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면서 빚인 메줏덩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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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물러터진 토마토 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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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판에 넘어진 황소눈이라께 아마 저런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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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면 코루 물이 들어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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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곰이라면 웃기나 하면서 놀려먹지. 이건 시침 뚜욱 따고 서서 주거니받거니 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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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니 계집애들 데리고 싸움을 하나? 치고받고 일장 격투를 하나! 절에 간 색시라더니 계집애들 틈에 끼인 사내란 문문하기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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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리지 마시우. 생기기는 아무렇게나 생겼어두 맘은 좋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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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꼼짝 못하고 서서 대끼기만 할 일이 아니라고 마음을 돌려먹고 왼편의 이쁜이한테 항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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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생긴 줄 아는 건 그래두 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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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그리구 연애두 하자구 하면 할 줄 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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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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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신 나하구 연애나 한번 합시다? 나는 당신이 이뻐 죽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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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나는 당신이 보기 싫여 죽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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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이는 종시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고서 포터블 있는 데로 걸어간다. 뚱뚱보도 그 뒤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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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시우 이뿐이! 달리 좀 생각허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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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둘의 등 뒤에다가 소리를 외쳤다. 농이 아니라 정말로 그 이쁜이를 놓치기가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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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기 이뻐하면 코묻은 밥 먹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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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테리야를 데리구 왔으면, 저 사람 소원을 풀어주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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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은 저희끼리 이런 소리를 지껄이면서, 포터블을 접어 들고 돌아갈 채비를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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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있고, 층암이 있고, 폭포가 쏟아지고, 그 밑에 텅 빈 백사장이 있고, 이런 그림 한 장이 내가 거처하는 방에 새로 걸렸다. 이것이「연애미수전말」이라는 내 걸작 중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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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동아일보] 1937. 9. 18, 21, 22>
【원문】어떤 화가(畫家)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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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화가의 하루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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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