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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사봉(戀師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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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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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사봉(戀師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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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한강 철교에 들어섰을 때가 정각 여덟시 오분 전이었으니까 틀림없는 정각인데 내려보니 학생들은 간데가 없다. 혹시 시계가 쉬지나 않았나 싶어 귀에다 대어보기도 했으나 째깍째깍 영락없이 잘 간다. 그래도 의심할 것은 시계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지금 대학생들이라 하지마는 명색이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을 하이킹 가자고 끌어내어놓고 단 한 녀석도 코빼기를 보이지 않는달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태수는 버스를 기다리는 자기 나이가 되었음직한 중년 사나이를 골라서 자기 시계와 맞추어도 보았으나 여덟시는 정녕코 여덟시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자기 눈을 또 의심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마흔여섯이라는 나이도 있었거니와 과거에는 중학교 교사를 십 년, 해방 후에는 대학의 생물학 교수로 반생을 훈육 사업에 바쳐오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아주 몸에 배어버린 교양이란 놈이 언제나 잘못은 남에게보다 자기한테 돌려버리는 버릇이 생기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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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는 한참이나 뒤지어서 학생 녀석들의 편지를 양복 뒷주머니에서 찾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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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라야 찻집 메모 쪽지에 필경 그 집 카운터에서 쓰는 연필을 빌려 적었으리라 싶은 간단한 하이킹에의 초청장이다. 아니 그것은 초청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명령서라고 하고 싶을 만큼 명색이 은사라는 사람한테 하는 편지치고는 소홀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녀석들이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생각이 난 김에 그 자리에서 찍찍 갈겨 보낸 것이거니 생각하면 그런 형식이 될 수도 있으리라 너그러이 생각할 만한 아량을 갖고 있는 태수이기도 하다. 그런 태수의 사람됨을 아는 데서, 아니 믿는 데서 그런 소홀한 편지도 씌어진 것이었지만 우연히 몇이 모였다가 선생님을 모시고 하이킹을 하기로 결의했으니 명 일요일 오전 여덟시 정각 노량진 종점까지 와주셨으면 한다는 끝에 ‘결의’한다는 세 학생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그런 쪽지다. 한 녀석은 사학과생이요, 하나는 국문과생, 하나는 대학원에 있는 작년 졸업생이다. 셋이 다 태수를 따르고 태수도 생물학 전공인 자기와는 부문이 다르면서도 진심으로 아끼는 학생들이다. 또 사제의 사이라기보다 “선생님 선생님” 하고는 중국집으로 끌고 가서는 가난한 학자의 등을 쳐먹는(어쩌다 저희들이 짜장면쯤 내는 수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리고 또 배갈잔이나 마시면 우리에게 가장 빈약한 생물학계로 본다면 선생님은 국보적인 존재인 것은 틀림없으나 유치원 아이들처럼 아침에 집을 나와서 저녁이면 기계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그 고리탑작지근한 생활이 저희들 비위에는 맞지 않는다느니, 선생님 몸에서는 늘 곰팡내가 나느니, 이것은 추키기보다도 깎는 편이 더 많은 그런 비판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왈패들이다. 그들이 곰팡내가 난다고 비난하는 것도 고학으로 대학을 나와서는 이내 교원 생활로 들어왔고 또 그의 전공이 생물학이라는 괴퍅한 학문이기도 한데다가 한창 활달한 젊은 패들로 본다면 시계추처럼 옆(여자를 이르는 말이다) 한번 돌아다볼 줄도 모르는 그의 성격이 옆에서 보기에도 숨막힐 지경인 모양이었다. 그래 술잔들이나 마시면 사모님(단산한 지도 이미 사오 년이나 되는 갓 쉰이 된 마나님인데)께 너무 충성스러우시다고 조롱도 하지마는 그들의 해석처럼 뭐 투철한 도학자적인 자기 구속을 하는 것도 실상은 아니었다. 오십이 가까워 머리에 이미 흰털(새치가 아닌)이 성깃성깃해졌건만 술은 물론 담배도 입에 대지 않는 것도 그의 도학자적인 자기 구속에서가 아니라 기실은 생리적인 데서 온 것이었다. 학생들 말마따나 유치원 아이들처럼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에 ㅡ 이렇게 기계적인 생활밖에 모르고 또 집에 가나 서재(서재랄 값에도 못 가는 칸반 방에)에 틀어박혀 밤은 늦고 아침은 이르게(그것도 잠 안 오는 병 때문에) 책만 보는 것도 그의 생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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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다음에 돌아가시면 십 억 여성을 대표해서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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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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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좋지. 고마운 뜻들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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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수 말에 한 학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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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저희들 남학생 일동은 선생님의 공죄비를 세우겠습니다. 한 남성으로 태어나서 우리 십 억 남성들의 위신을 손상함이 이를 데 없고 대한민국 남아의 기상을 꺾어 이십 억 인류의 조롱을 사게 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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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아, 그런 비석 세워줄 성의가 있거든 절세미인을 하나 소개해 주렴. 오십 노파하고도 연애를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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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농담을 할 수 있는 태수이기도 한 것을 보면 반드시 그가 도학자라서 열두 살에 얻은 열여섯 살의 아내만을 단산한 지 오 년이 넘도록 충실하게 지키는 것만은 아닌 성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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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때로는 학생 녀석들한테 끌려서 빈대떡 집에도 갔고, 한 번은(단 한 번뿐이었지만) 젊은 계집이 술을 파는 집에 끌려가서 술도 두 잔인가를 마시고서 계집의 반호장 저고리와 분홍 치마가 체격에 맞느니, 정말 귀엽게 보이기도 하는 조그만 발이었지만 계집의 버선발을 그야말로 외씨 같다고 하면서 쌍동 잘라 갖고 싶기나 한 것처럼 만져보고 한 일도 있는 것을 보고 이 교수, 반드시 늙진 않았느니라고 학생들도 신기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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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이 좋든 그르든 학생들한테 화제거리를 제공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대개 태수를 무슨 야릇한 기인(奇人) 취급을 했지만 마음으로 사랑하는 학생이 없지도 않았다. 더욱이 오늘 하이킹에 청한 세 학생은 그러한 태수를 놀리면서도 각별히 따르는 학생들이다. 술도 고래처럼 먹고 여학생들도 집적여 눈총도 맞고 꽹과리처럼 떠들어 미움도 받는 왈패들이다. 그렇다고 성적이 나쁜 축도 아니다. 고이얀 놈들처럼 굴기도 하나 역시 사랑스러운 학생들이었다 ㅡ 시아버지한테 물 떠들고 들어가는 새색시처럼 잔존하게만 일생을 살아온(그러다 보니 벌써 반백이 된) 생물학자 태수는 그들에게서 일생을 통하여 체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생리를 느끼는 것도 같았다. 아이들이 곡마단 구경을 하는 때와 같은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세 학생이 연명으로 하이킹에 같이 가기를 청해왔던 것이고 보니 늦더라도 안 올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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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이 지났다. 십분이 이십분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륙색에 농구화에 등산모까지 썼으니 시내로 들어갈 수도 없어 도리동에 사는 정 교수의 집에나 갈까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편지를 띄워놓기는 했지만 승낙을 들은 것도 아니고 하니까 미심쩍어 자기 집으로들 들르는지도 모른다 싶어 한 십분만 더 기다려보리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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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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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가 덜미를 쳐서 돌아다보니 뜻밖에도 선영이다. 보임의 말에 의하면 선영이는 닷새 후에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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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선영이가 어떻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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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가겠어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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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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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나와서 멍청히 섰기만 하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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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세요, 선생님.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다른 학생들은 다 안 오기로 됐어요. 그러니 저하구만이라도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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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말 선영이가 갈 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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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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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스커트에 흰 와이셔츠, 거기에 흰 털조끼 스웨터를 입은 행색이라든가 역시 농구화에 륙색까지 짊어진 품이 하이킹으로 나선 게 틀림이 없다. 그럼 보임이가 잘못 알았나? 이렇게 의심해 볼밖에는 없어 갈피를 못 차리고 있으려니까 종달새처럼 조잘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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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서 가세요! 조기서 여덟시 반에 수원 가는 버스가 떠나요. 자세한 건 가서 말씀드릴게요. 편지 제가 한 거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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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어이가 없어 태수가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으려니까 선영이는 안달을 하며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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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버스가 떠난대두 그라셔! 저 쉬 결혼하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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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의 지시대로 시흥에서 버스를 내린 것은 아홉시 반 가까워서다. 버스 안에서는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온지라 태수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채로이다. 꼭 여우에 홀리는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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륙색의 빵그란 품이 먹을 것도 충분한 모양인데 선영이는 가게에 들러 침시고 계란이고를 주섬주섬 사넣더니 한참 고개를 갸우뚱하고서 가게 추녀밑에 선 채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다. 그러더니 되돌아가서 수건과 비누를 한 장 사넣고서 신작로를 버리고 논둑길로 들어선다. 태수는 말없이 뒤를 따라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이킹 가노라는 것만 알았다 뿐이지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건지 노정도 모르고 있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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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는 태수가 나가는 S대학 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담당과인 생물학과를 마친 지가 며칠 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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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시계추처럼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이렇게 옆 가린 말처럼 학교와 가정을 왕래할 줄밖에 모르는 태수가 다 늙게 젊은 아이들이 가는 하이킹 같은 데 덜렁덜렁 따라나선 것도 기실은 선영이 때문이다. 선영이도 그의 집에 드나들던 학생들 중의 오직 하나인 여대생이었고 또 각별히 지내던 사이여서 졸업 후로도 뻔질나게 혼자 드나들던 선영이가 요 달포째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그날 아직 국문과에 재학중인 보임이한테 선영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지라 자기도 까닭모를 마음의 공허를 느끼고 기운이 없이 집에 돌아온 길이었다. 마침 이튿날은 일요일이어서 어쩌면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선영이가 결혼한다는 사실에 무관심할 수도 없으리라 싶어 그러지 않아도 어디 훨훨 쏘다니어 보았으면 궁리를 하고 있는 판인데 학생들의 하이킹 초청장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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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음의 공허를 학생들과의 하루의 환담으로 채워보리라고 쫄래쫄래 나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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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그 마음의 공허란 것부터가 어림없는 수작인 것이, 선영이와 그와는 사제의 사이였고 또 그는 늙었으나마 아내에 자식이 있는, 아니 그보다도 그 자신 오십을 바라보는 노경에 든 교수였고 선영이는 이제 스물여섯밖에 안 되는 제자라기보다 딸자식 같은 사이다. 그 선영이가 결혼을 한다는데 머리가 허옇게 되어가는 노교수가 마음의 허전함을 느낀다니 뚱딴지같은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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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한편 돌이켜 생각해볼 때 태수의 그 마음의 허전이 반드시 침 뱉을, 침까지는 안 뱉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눈살을 찌푸려야 할 것도 아닌 사유가 전혀 없는 바도 아니기는 한 것이, 선영이는 태수한테 보통 사제간의 교습보다는 훨씬 더 친밀한 왕래가 있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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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음의 허전은 반드시 남녀 관계에 있어서의 그런 허전이라기보다도 딸 시집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의 공허와도 비슷했으니 선영이는 이삼 년간 제자라기보다도 기숙사에 가 있는 딸자식만큼이나 수시로 태수 집에 드나들며 그의 연구에 필요한 조사나 필역은 물론, 나무다 쌀이다 하는 안살림이며 세금이니 기부금이니 어떤 때는 반회 같은 데까지 대신 나가주는 일까지 해주어 온, 주변성없기로 이름있는 태수네 집에서는 없어서 안 될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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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견딜만은 하고(아무리 싼 돈이라지만 억대는 된다니까) 지체도 그만했으나 무슨 피혁회사 사장이라면서 곧이들리지 않을 정도로 인색한 아버지와 티격이 나서 더욱이 졸업을 하기까지의 반년간은 따로 하숙에 나와 있으면서 제집보다도 더 자주 드나든지라 정도 들 대로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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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환경에 놓여 있으면서도 삽살개 목에 달린 방울처럼 언제나 명랑한 아이였다. 그것도 양철방울처럼 달랑대기만 하는 명랑이 아니라 부어 만든 무쇠방울 같은 무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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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도 생물학과라는 여자와는 분위기가 뜬 방면의 학생으로는 빠지는 축도 아니어서 어디를 꼭 집어서 예쁘달 수는 없으나 또 그렇다고 어디가 밉상이라고 집어내기도 힘든 그런 얼굴이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따로이 예쁜 줄을 모르겠어도 서양화를 보듯 멀찌감치 좀 떼어놓고 보면 얼굴 전체가 탁 균형이 잡히어 실로 귀염성있는 얼굴이다. 어떤 편이냐면 좀 까무잡잡한 살빛이어서 그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도리어 그 까무잡잡한 살빛으로 선영이가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몰랐다. 제풀에 놀란 토끼눈처럼 크기도 하려니와 유난스럽게도 맑게 보이는 것은 확실히 이 까무잡잡한 살빛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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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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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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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 소리 사뭇 못 고치는군. 삼천만 동포가 다 ‘네 ㅡ’ 하구 하는데 유독 선영이만 어째서 ‘내’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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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내 ㅡ’가 더 좋아요. ‘네’ 하면 어쩐지 헤식구 김빠진 것 같구요. 도깨비 대답처럼 후렴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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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영인 도깨빌 다 봤나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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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태수의 아내 윤씨(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아기니 윤씨라고 불러둘밖에)가 옆에서 탓하면 선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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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 댁에두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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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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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끔찍해라. 우리집에 도깨비가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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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이 아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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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깔깔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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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저런 망할것 좀 봐. 우리 선영인 다 좋은데 입이 하나 나빠서 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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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야요. 왜 선생님이 아직두 저렇게 젊으신데 머리두 좀 얌전히 빗으시구 분은 안 바르시더라도 크림이나마 좀 바르시구, 글쎄, 입술엔 뭘 칠할꼬. 좀 단장을 하셔야지, 늘 도깨비처럼 하구 계시니 도깨비랄밖에 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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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망칙들 해라. 이꼴에다 분이나 더덕더덕 발라나 보지? 그러면 정말 도깨비 같지. 내 걱정을랑 말구 우리 선영이나 분 좀 발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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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분 안 발라도 이쁘거든요. 젊으니까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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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영이었다. 그래서 태수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태수 아내도 며칠만 선영이가 안 보여도 우리 선영이가 웬일이냐고 마치 자기 딸자식이나 기다리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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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영이와는 그런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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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는 졸업을 하고도 전처럼(어떤 때는 전보다도 더 잦게) 곧잘 놀러왔고 와서는 그의 아내를 “도깨비 마나님” 하고 놀려대면서 걷어붙이고는 집안을 치워주고 아내를 떠밀치고 빨래도 볼각볼각 주물러 널기도 하고 막내동이 창호 녀석을 데리고 나가서는 옷도 사입히고 신발도 사신기고 했다. 그래 한번 태수의 아내가 말끝에 수양딸을 삼자고 한 일이 있었거니와 그때의 선영이는 고개를 짤래짤래 흔들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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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혼한 담이면 몰라도 지금은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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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을 해야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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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두 않구 어머닐 정했다가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됐다간 큰일 아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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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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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선영이가 웬일인지 요 한 달장간 통 보이지를 않는다. 태수는 속으로는 몹시 궁금도 했지마는 어쩐지 늙은 아내 앞에서 나이 어린(아니 젊은) 선영이의 말을 하는 것이 어쩐지 안된 일 같아서 궁금한 채 달포를 지냈는데 선영이와 곧잘 붙어다니는 국문과 백보임이가 어제 선영이가 약혼을 했다는 일이며 혼인날이 앞으로 닷새밖에 남지 않았느니라는 말을 넌지시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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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영이가 무슨 경황에 하이킹 같은 데 줄렁줄렁 따라나섰을까. 아니 따라나섰다기보다 그런 거짓 편지까지 써서 자기를 이렇게 끌어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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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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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잘됐느니라 우선 숨을 돌려쉬는 심정보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걱정이 앞서는 것을 보아도 태수가 선영이의 결혼을 듣고 마음 어지러워해하는 그 심정이 짐작도 되거니와 사실 그들의 사이는 어디까지나 노교수와 젊은 여대생과의 사이였고 또 딸처럼, 아버지처럼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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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 씨가 창립한 녹동사원을 지나서 호암사의 옛 절터를 더듬고 금주동천이라 일컫는 골짜기를 타고 건공중에 매어달린 듯싶은 보섭바위를 까마득히 치어다보이는 오르막에 접어들기까지도 그 잘도 재잘거리던 선영이답지도 않게 오늘은 일체 입을 봉하고 날이 봄처럼 따스하니, 숨이 차니 그런 정도의 말을 했을 뿐으로 보섭바위에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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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섭바위에 오르니 멀리 시흥 평야가 청전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들 너머로 사방 공사를 해서 마치 줄진 말의 잔등처럼 보이는 산부리가 연달았고 그 위에 물빛 그대로의 파아란 하늘이 높을 대로 드높다. 마침 소학교의 운동회날이어서 만국기를 늘인 운동장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의 합창 소리가 가쁜 줄도 모르고 기어닿을 뿐 배코치듯 깎아버린 산에서는 새소리 한마디 들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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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구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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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듯한 선영의 말소리에 그쪽을 보니 여름처럼 구름이 용을 쓴다. 흡사 폭포확속의 물이 용 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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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같아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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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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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으니까(못한 게지만) 선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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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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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재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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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뭐 같달까. 흡사 구름 같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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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타분한 서재에만 들어앉으셨던 죄야요! 한편의 시도 한 권의 소설도 읽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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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못 나오게 몰아만 주고는 이렇다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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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는 그 틈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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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영이, 결혼날이 며칠 안 남았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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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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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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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사람은 등산두 못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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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바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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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얼굴 손질이나 하구 면사포만 쓰면 됐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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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남의 말 하듯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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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쓸데없는 걱정 마시구 오늘 하루를 즐기세요. 저 보셔요. 중대가리같은 산들이며 송두리째 묵어자빠진 들판에 저 보섭조개 같은 집들하며… 보섭바위가 추경을 하나 보지요? 구름장을 척척 갈아넘기구, 왜 흥미없으세요? 그럼 일나셔요. 오늘은 길이 여간 바쁘잖거든요. 저기 뵈는 호암사를 구경하구, 약사암을 지나서 연주암, 자화암, 의상사 절터, 이렇게 거쳐서 연주대를 올라가야거든요. 연주대서 노량진까지만도 연만하신 선생님한텐 반나절 길이 담뿍 되니까 세시까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주대까지 대어 가야 해요. 그렇잖으면 산속에서 자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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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태수는 기가 탁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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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대라면 관악산 상상봉이다. 이쪽으로 오르지는 않았겠지만 벌써 삼십여 년 전 중학 때에 한 번 오른 기억이 있어 봄에는 그렇지도 않던 산이 오르려 들자니까 자벌레처럼 몸이 나자빠지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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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는 선영을 따라서 걸었다. 하이킹이 아니라 사뭇 강행군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쫓아가도 가다 보면 선영이가 기다리는 것이다. 쫓아갈 만하면 선영이는 또 발자국을 떼었고 쫓아가다 보면 또 어느새 뒤처져 버린다. 그러니 호암사에 갔대야 구경은커녕 절 댓돌 끝에 주저앉아서 맥을 쓸 수가 없다. 겨우 숨을 돌리어 중에게 절 역사를 몇 마디 묻고 있는데 벌써 선영이는 저만큼 나가서 재촉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또 따라설밖에 없었고 선머슴 녀석처럼 바람이 일게 달아나노니 자가품이 일 지경이다. 말도 못하게 으르딱딱대어 말도 붙여볼 재간이 없고 자칫하면 산에서 자야만 될 판이라서 따라가기는 해야겠는데 그러자니 곡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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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산속에 들었으니 일은 당해논 일이다. 그래도 선영이는 일부러처럼 (꼭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뒤도 안 돌아다보고 다그치는 것이다. 약수암에 가서도 관악산 중에서는 명물이라는 바위틈의 약물을 한 쪽박 받아 먹은 것밖에 없다. 그러고는 다시 재우쳐서 내친 걸음으로 연주암까지 재치자니 이건 하이킹이 아니라 눈방울이 내쏟는 고역이랄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선영이에게 자기가 이미 인생의 내림길을 걷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가 않다는 야릇한 고집에서 꾹 참고서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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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어 가지, 선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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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라기보다는 사뭇 까울진 석벽을 치어다보며 이렇게 애원하듯 선영이를 쳐다보던 태수는 짐짓 까닭모를 슬픔에 휘갑이 되어 눈 속이 다 뜨끈해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고는 곧 태수는 자기 눈에서 나온 그 애원이 남겨놓은 슬픈 여음을 들은 것 같아서 입만 열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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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석굴 속에서 주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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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간수 같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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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은 뭐. 여기 어디선 노량진으로 빠지는 길이 없을라구? 연주봉까지 꼭 올라가야 맛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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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 돼요. 가잔 데까진 가야죠. 이 봉만 넘으셔요. 그럼 연주암이니까요. 지금 벌써 한시가 넘었으니까, 이러다간 연주대 올라가면 해 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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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암에 다다르니 한시 반은 지나 두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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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를 바짝 움켜쥐고 잡아나꾸듯 해도 안 되니까 선영이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태수 뒤에서 몰아쳐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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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만 보이지 않았지 채찍 소리는 태수의 귓전을 간단없이 울린다. 버스에서 내린 후로 세시가 지나도록 참을 들였다는 게 연주암에서의 반시간쯤 되는 점심시간뿐이었고 두어 번 다리는 쉬었댔자, 쉬인 맛보다도 일어나기가 더 고역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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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좀 쉬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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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 쉴 테면 좀 쉬든지, 앉았다 일어서기만 힘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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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떡해요? 선생님, 저하구 이 후미진 산속에서 륙색을 베고 바위 밑에서 주무시겠어요? 싫으시죠? 그러니까 고되시더라도 가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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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지금부터의 노정이 얼마나 되는 겐고?”
 
107
“인제부터 한 육십리? 그렇게는 못 되겠군. 오십리? 아니, 그렇게두 안 될 거야요. 여기서 연주대가 십리 좀 남짓하니까. 세시 반까지만 대어 가면 어둡기 전엔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겝니다. 어서 좀 재우치세요. 두시 반이니까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요.”
 
108
“산길은 ㅡ 더구나 인제부터는 저 무서운 오르막인데 십리가 넘는다는 길을 한 시간에 어떻게 간담. 평지에서도 한 시간은 걸리는 것 아닌가?”
 
109
“말이 십리지, 저 보이는 산잔등이니깐요 ㅡ 괴테는 나이 칠십에 열일곱살 먹은 처녀와 연애두 했다는데 그래, 선생님은 아직 오십두 못 되시구서 그까짓 산을 하나 못 올라가신대요?”
 
110
이렇게 마구 몰아세우던 선영이도 길인지 뭔지도 분간할 수 없는 까울진 석벽을 타고 올라간 지 불과 이삼십분에 아주 폭 까부라지고 만다. 입으로는 점심 먹은 게 말째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뿐만이 아닌 것이, 땀을 비오듯 쏟고 드높은 다리가 사뭇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육안에도 보이는 것이었다.
 
111
길을 잘못 든 탓도 있었다. 선영이는 작년에도 와본 일이 있어서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늘이 보이지도 않는 정글 그대로의 깊은 숲속이었고 말이 길이지 중들이나 등산객들이 어쩌다 한 번씩 다니는 터라 채 자국도 나지 않았다. 찬찬히 보면 길만은 구별할 수도 있더니 사뭇 바위 위로만 길이 나왔으니 자국이 날 리는 없다. 그래서 한 시간이면 상상봉까지 올라가리라했던 것이 예정 시간인 세시 반에 쳐다보아야 봉우리는 고사하고 방향조차도 분간할 수가 없다.
 
112
거기에다 몸을 솟구느라고 잡은 솔가지가 찍 찢어지면서 선영이가 여남은 자 푼수나 되게 비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더니만 진땀만 쭉 빼고 입술이 바짝 마른다. 태수는 그만 겁이 버쩍 든다.
 
113
“어때, 선영이?”
 
114
“괜찮아요.”
 
115
“좀 기대구 눕지?”
 
116
“아녀요. 물이나 좀 먹었으면…”
 
117
‘오네, 못 오네’ 했어도 한 시간이나 산등을 타고 올라왔으니 물이 있을 턱이 없다. 두 륙색을 뒤지니 사과가 한 개 있어 그것을 짜먹듯이 해서 입술을 축이고는 잠시 바위에 등을 대고 눈을 감는다. 머리를 짚어보니 의외로 열이 많다.
 
118
“어디 눈 좀 떠봐, 선영이.”
 
119
예상한 대로 눈 속이 아주 붉다. 숨소리도 월등 가빠지는 것 같다. 손을 가만히 만져보니 사뭇 불덩어리다. 소화제는 다행히 준비한 것이 선영이 륙색에 있어서 물도 없이 콩가루 먹듯 혀끝으로 찍어 삼키게 했다. 간을 졸이기 무려 반시간, 그때 선영은 먹은 것을 말끔 토하고서야 정신을 좀 차렸다. 좀더 쉬라 해도,
 
120
“인제 괜찮아요. 뭐 선생님 같은 노인인 줄 아세요? 전 아직 젊으니까요.”
 
121
버릇없이 또 한번 이렇게 꼬집고는 톡톡 털고 일어난다.
 
122
그들은 또 오르기 시작했다.
 
 
123
5
 
124
“도깨비한테 홀려 다니는 사람의 눈이 똑 선생님 눈 같을 거예요. 그러시지? 꼭 뭣에 홀린 것 같으시지?”
 
125
“글쎄… 제정신도 있어야 같은지 아닌지 알지.”
 
126
“호호호호.”
 
127
솔새처럼 웃고 나서,
 
128
“그러실 줄 알아요. 선생님은 혹 제가 갑자기 사증이 나서 매친 줄 아실거야. 혼인 날을 닷새밖에 남기지 않은 계집애가 약혼한 남자하구 하이킹을 했대두 요새 신문엔 이단짜리 기사 가치가 있을 건데 아무리 사제지간이라고는 해도 딴 남자하구, 더구나 산속 절에 가서 잔 줄을 안다면 어떨까요? 저 아까두 자꾸 웃었잖아요? 그래 웃었답니다. 그 사람 ― 저하구 결혼할 사람 말여요. 그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필시 놀라서 나가자빠질게다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나겠죠.”
 
129
“선영이, 먼저 내 오관을 도로 내어주어야지 나도 선영이 이야기를 알아듣고 이해하구 하잖나? 난 모두가 수수께끼 같아서 정말 뭣에 홀리어 혼백이 빠져나간 것 같거든.”
 
130
“호호호, 그러실 거야.”
 
131
온종일 그들이 걸어온 숲속보다는 월등 밝은 달밤이다. 노송 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연주암은 그림처럼 고요하다. 아따금 필시 졸고 있는 듯싶은 중의 불공 소리가 들려올 뿐, 축생은 기르지 않는 절간이지라 그야말로 물 속 같다.
 
132
“그러실 거야. 선생님보다도 ─ 저 자신이 그런걸요, 뭐. 꼭 뭣에 홀린 것만 같아요.”
 
133
선영이는 조그만 돌을 주워 목탁이나 되는 듯 마주 또닥이며 말을 잇는다.
 
134
선생님야 목석 같은 어른이시니까 선생님 자신에게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었을 게구 또 제가 어떤 생각으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도 모르셨겠지만… 내, 그러시죠?”
 
135
“모를 소린데, 도시가.”
 
136
“글쎄, 그러실 거야요.”
 
137
선영은 혀끝에 붙은 티나 톡 뱉듯 하고서,
 
138
“아시거나 모르시거나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구요… 전 요 반년 동안 ─ 졸업을 전후해서 여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선생님은 혹 깜찍한 아이라고 속으로 무섭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만 졸업 임시부터 선생님을 두고서 제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무슨 큰 죄악이나 저지르는 것같이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보통 남녀 관계에 있어서와는 아주 다른 ─ 글쎄, 뭐랄까, 좀더 순수한, 좀 과장해서 말씀드린다면 신성하다고도 할 수 있을 그런 숭고한 애정이란 것은 저 자신도 믿고, 또 선생님도 믿어주실 줄 압니다. 이런 감정도 결국은 사랑이란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어쩐지 선생님께 대한 저의 순수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남녀 관계에 흔히 쓰는 사랑이란 그따위 말로 표현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이런 감정은 저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겝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구요. 하지만 선생님만은 저의 이 심정을 이해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내, 선생님, 어떠십니까?”
 
139
“잘 이해해.”
 
140
오랜 생각 끝에 태수는 이렇게 또 덧붙였다.
 
141
“이해고 말고보다 선영이가 말한 그 감정을 선영이는 선영이 자신의 감정이었다구 그랬지만 내게 말을 시킨다면 그것이 바루 나의 감정이었으니까.”
 
142
“그러셨습니까?”
 
143
선영은 해죽이 웃어보이더니 무슨 말을 할듯 할듯 하다가 입을 꼭 다물어 버리고 만다. 태수도 어쩐지 가슴이 뻐근한 게 아무 말도 나오지를 않는다. 자기가 과거 삼 년간 선영이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할 때부터 입에 뱅뱅 도는 것을 삼키고 해오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선영이의 말마따나 그 신성한 감정에 자기 아내가 혹 무슨 추한 칠이나 하지 않을까 해서 은근히 겁을 내어오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144
“선생님은 기억에도 없으시겠지만, 언젠가 한번 사모님께서 절보구 수양 딸이 되어 달라고 하신 일이 있으셨어요. 기억하십니까?”
 
145
“기억하지!”
 
146
“그걸 기억하신다면 제가 그때 뭐라구 말씀드렸던지두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전 정말 지금까지의 선생님에 대한 저의 감정이 혹여 탈선이나 하지 않을까 여간 겁을 집어먹지 않았어요. 선생님께도 그런 감정이 있으셨다니까 더 말씀드릴 필요두 없겠습니다만, 전 정말 처음엔 선생님께 대해 오직 존경으로 선생님 댁에를 드나들었어요. 그러던 것이 사모님께서 너무 선생님의 학자생활을 내조해주시지 못하는 것을 뵙는 안타까움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동정으로 변했고 그 동정이 또 이번에는 어떻게든지 도와드려야겠다는 센티멘틀로 변하면서부터… 글쎄요, 그게 아마 사모님이 제게 수양딸이 되어달라고 그러시던 그 전후부터인가 합니다. 이러한 감정이 한번 일기 시작한 후부터로는 전 마치 화약을 들고 불 옆을 지나는 것 같은 조심으로 선생님 댁엘 드나들었습니다. 이 고민 끝에 전 약혼을 했어요. 제가 왜 그렇게 갑자기 선생님께 아무런 의논 한마디도 없이 약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 감정의 경과는 선생님도 잘 아실 줄 압니다.”
 
147
“나도 선영이가 그렇게 되기를 무척 무서워하면서도 빌었었지. 그 극진한 마음으로 손모아 빌면서도 그것을 또 두려워했던 마음 ─ 그것은 선영이만은 잘 알아줄 게야.”
 
148
“잘 압니다. 그러고 보면 인제 지난 이야기 더 여쭐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인젠 남은 건 오늘 아침부터의 일뿐이겠지요. 선생님은 오늘의 저의 태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149
“글쎄, 어떻게 보았다구 대답해야 좋을꼬?”
 
150
사실 태수는 막연히 짐작은 되는 것 같으면서도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한 번쯤 자기 심정을 털어놓고 싶었을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나, 이렇게 깊은 산속 절간에서 자도록 꾸민 선영이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1
그 말에 선영은 약혼을 한 후 얼마나 괴로웠다는 것을 설명하고서,
 
152
“적어도 이 괴로움을 풀어줄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첫째로는 선생님이 절 사랑하신다기보다도 저란 한 젊은 여성으로 해서 한풀 꺾인 내리막의 청춘을 즐기셨다고 생각할 때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떠남으로 해서 선생님의 받으시는 그 마음의 공허가 너무 크지 않게 해야 한다는 선생님께 대한 의무감이 하나였었구, 또 하나는 제 자신에게 대한 의무감이었어요 제가 일생을 통해서 !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선생님이시란 것을 안 이상 그 사람에 대한 저의 의무를 다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의무가 뭣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 의무란 지금과 같은 이런 고백으로써 끝날 수도 있을 게구 손을 한 번 잡는 것으로 다할 수도 있을 겝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키스까지, 아니 그보다도 더한 것이 바쳐져야만 저의 이 감정의 의무가 다해질 수도 있을 겝니다. 제가 그 최대의 의무가 이루어질 수 있을 ― 말씀하자면 오늘 밤과 같은 기회를 저 자신이 만드는 데서만 저의 의무는 다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전 오늘 이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래서 전 ―”
 
153
여기까지 선영이가 말했을 때 태수는 옆구리나 가슴 그 어느 가장 민감한 자리에 무서운 통증을 일으킨 사람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을 아주 못견디어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선영이의 손을 덥석 잡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어 말했던 것이다.
 
154
“그만, 선영이! 그만하고 일어나요. 날이 좀 차지나 봐. 어서!
 
 
155
6
 
156
“저 좀 보셔요. 꼭 깊은 산이 그대로 그림 같지 않습니까. 둘레 산들의 부드러운 선하며 안개! 안개란 게 저토록이나 아름다운 줄을 전 난생 처음 보았어요. 아저씨 ─”
 
157
하다가 방울처럼 웃어댄다.
 
158
“저 좀 봐. 아저씬 오늘 새벽으로 해소됐죠? 그렇죠, 선생님?”
 
159
“성명서도 안 내고서?”
 
160
사나이도 걸차게 웃어젖힌다 ─ 이튿날 아침 조반 전에 연주봉에 오른 태수와 선영이었다.
 
161
“참 아름답군. 저 안개 호수도 아름답지만 선영이와 나와의 사이도 아름다웠어. 선영이도 잘 싸워 이겼지만 나도 꼬박 싸웠어. 스승과 제자와의 아름다운 덕을 깨침이 없이 선영이는 선영이의 의무를 다했고 나도 십억 여성으로 하여금 송덕비를 세워줄 좋은 재료를 또 하나 장만한 셈이고… 더없이 유쾌해! 선영이가 밤새도록 잠을 못 자는 걸 볼 때 난 ─”
 
162
“거짓말! 제가 언제 잠을 못 잤어요! 못 주무시긴 선생님이 못 주무시데요!”
 
163
“잤다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안담!”
 
164
둘은 마주 웃었다.
 
165
“어쨌든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 ─ 인제 그이를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이도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절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거야요! 내? 그런 말을 않는게 좋다구요? 되려 오해할 위험성이 있다구요? 천만에요! 선생님, 안심하셔요. 만일에 그이가 이 아름다운 얘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 그이를 사랑할 수 없을 겝니다! 내. 선생님, 그건 제게다 맡겨주셔요!
 
166
둘은 연주대에서 천천히 내림길로 접어들었다. 선영이는 서너 발 내려서면서 속삭이듯 태수의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었다.
 
167
“선생님, 태종대왕의 두 아드님이 세종대왕께 양위하신 것을 슬퍼해서, 이 봉에서 왕실을 바라보았대서 연주봉이 되었다지요? 하지만 선생님과 저와만은 오늘부터 이봉을 스승을 그리는 연사봉이라구 부르신다구요. 내, 선생님.”
 
 
168
〈「민성」43호, 1950년 2월〉
【원문】연사봉(戀師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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